<생존 그리고 보상.>
그 시각.
하즈무포카의 하수인들은 연구 3동 깊숙이 있는 메인프레임 앞에 서 있었다. 거인은 지루한지 벽에다 주먹질을 하고 있었고, 인섹토이드는 쉴 새 없이 더듬이를 움직였다.
“Kui lõpuks? Niipea kui võimalik. (언제 끝나? 빨리해.)”
“Peaaegu üle. (거의 다 끝났어.)”
쾅!
연구소 외벽이 거인의 입을 삼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인의 주먹이 외벽을 뚫어버린 것이었지만, 워낙 상식 밖의 일이라 벽이 주먹을 삼킨 것처럼 보였다.
“See jutt on juba viies! (그 얘기만 벌써 5번째다!)”
“Vajadus täpse analüüsi ja kokkuvõtte informatsiooni. Ma ei saa sinna midagi parata. (정확성을 위해 분석과 요약이 필요해. 이번 정보는 중요한 거라고 얘기했잖아.)”
거인의 분노가 거친 날숨에 묻어나왔다.
“Ärge vinguma georiji, kui sa teaksid, mida missioon on esimene ahnus? (어린애처럼 칭얼거리지 마, 네 욕심보다 임무가 먼저라는 걸 알 텐데?)”
“Kasutajad suutsid tappa vaid eopeoteodo ring häireid. (방해만 없었어도 반지 사용자를 죽일 수 있었다.)”
인섹토이드가 쉬익쉬익 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죽일 수 있다는 말에 웃음을 터트린 거였다.
“Kas tuleb ülestõusnud surra, miks sa ei klameruad surma? (죽어봐야 어차피 되살아 날 텐데, 왜 그렇게 죽음에 집착하지? 어차피 저 녀석이 그분과 함께 있는 이상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거늘.)”
“Arvud, et võita olen liiga. (그 패배가 너무나도 수치스럽다.)”
“veidi. (기다려 봐.)”
인섹토이드는 더듬이를 만지작거렸다. 꼭 TV 안테나를 만지작거리는 것 같아 보였다.
어느 순간 잘 움직이던 더듬이가 움찔거렸다.
“Kus see on? (어디 있어?)”
“Ma minema. Tõenäoliselt ei ole isegi välja poiss lõpetada missiooni. (나가고 있네. 아마 녀석들도 임무를 끝낸 모양인가 봐.)”
거인이 그 말을 듣자마자 달릴 준비를 했다.
“Seal oleks kokku nii Achophumjah go, ma hakkan nagu alandust? (가서 만나봐야 아쵸프무자님과 같이 있을 텐데, 이번에도 창피를 당하고 싶은 거야?)"
아쵸프무자라는 말에 거인이 망설이다 결국 포기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Iteotdamyeon ainult jumaluse mulle…. (내게 더 강한 신격만 있었어도… 그딴 녀석 따위….)”
거인의 중얼거림에 인섹토이드의 머리가 획 돌아갔다.
곤충 인간이라는 종족 특성상 표정 변화는 전혀 없었지만, 더듬이가 위협스럽게 움직이는 게 꼭 화가 난 것 같았다.
“Pühaduseteotust! Miks me mõtleme üks selline pool mangeon on selline suurepärane kingitus! (신성 모독이다! 어찌 우리 같은 반쪽짜리가 완벽한 존재께 그런 망언을 한단 말인가!)”
인섹토이드는 말을 내뱉고도 화가 풀리질 않았는지, 여전히 더듬이를 날카롭게 움직였다. 그러자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그 뜻이 모두 전해지기 시작했다.
- 아무리 지금 적으로 있다 한들, 우리가 모시는 그분과 아쵸프무자님은 같은 신격을 지니신 분이다! 너는 어찌 창조주 같은 분들께 반기를 들려 하는가!
이에 거인 역시 입으로 말하지 않고 생각으로 대신했다.
인섹토이드가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 닥쳐, 너 같이 종 전체가 의식을 공유하게 만들어진 녀석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열망이다. 게다가 네 녀석은 이미 포미시드에 한해 신격을 가지고 있지 않더냐?
- 내가 신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분들을 감싼다고 생각하나? 오산이다. 애초에 우리 같은 만들어진 반쪽짜리 신이 위대한 분들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저 응당 믿고 따라야 함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쿵, 쿵, 쿵, 쿵.
훅!
거인이 쏜살같이 달려 주먹을 휘둘렀지만, 인섹토이드 바로 앞에서 멈췄다.
“Ma karvade eemaldamiseks kehast maksa olnud enam vastukaja. (더 지껄였다간 네 몸에서 머리를 떼어내 주지. 반신은 몇 번이나 떼어내면 죽을지 궁금하네.)”
결국 인섹토이드도 포기했는지, 고개를 돌려 메인프레임에 집중했다. 거인은 씩씩거리며 분을 삭였지만, 돌발행동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아무리 반감이 있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본인이 제일 잘 알기 때문이었다.
☆ ☆ ☆
주거동을 지나, 경비동.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시야에 거대한 존재에게 저항도 못 하고 일방적으로 터져 죽은 시체들이 가득했다. 드문드문 거대한 개미 떼들이 보이긴 했지만, 해로워 보이진 않았기에 무시했다.
“이게 전부 다 그 녀석들 둘이서 한 걸까?”
칼콘이 방패를 질질 끌며 물었다.
맞는 말이었으나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이 아니던가.
녀석들은 이 화망을 뚫고도 아무런 상처 하나 없었다.
장비가 생긴 지금 맞붙어도 이길 수 있을지 불투명해졌다. 자존심에 커다란 흠이 남는 걸 느꼈지만 이를 꽉 물고 참았다.
‘지금은 물러서지만, 언젠가는 내 손으로 꼭 죽여주마.’
어느 정도 걸으니 커다랗게 박살난 출입구가 보였다.
차량 출입 및 외부 공격에 대비해 딱 봐도 매우 견고하게 만든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그저 거대한 탄환에 관통된 고철 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문 앞에 서서 아쵸프무자를 불렀다.
“네 말대로 자료를 가져왔다!”
폐허가 된 도시에 외로운 메아리만 홀로 울리길 잠시.
“어서 와.”
화상으로 일그러진 왼쪽 얼굴.
그을음 냄새가 나는 목소리.
아쵸프무자였다.
그녀는 마치 격벽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양, 아주 자연스럽게 걸어서 나타났다.
처음 봤다면 놀랐을 광경이었지만, 거듭된 기행에 이미 지훈의 머릿속엔 짜증밖에 남질 않았다.
“피차 기분 좋은 사이 아닌데, 같잖은 인사 치워.”
방사능과 마법 오염이 가득 찬 일본 개척지에 들어가서, 연구 자료를 가져와라.
말이 쉽지, 판타지로 따지면 싸움 좀 한다는 용병한테 ‘산에 사는 용이 공주를 납치해 갔으니 구해와라.’ 하는 꼴이었다.
지훈이 그나마 이중 삼중으로 조심하는 성격에, 실력은 물론 운까지 겸비한 인물이니 살아남을 수 있었지 다른 사람이면 백에 오십은 죽었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데려온 용병 5명 모두 죽지 않았던가.
“뭐 그렇다면야. 인사는 생략할게. 가져온 물건은 그거?”
아쵸프무자는 눈만 움직여 흉측한 머리를 쳐다봤다.
고개만 까닥여 긍정했다.
“이 안에 뇌가 들어있다. 알아서 뽑아가라.”
툭 던지자 데굴데굴 굴러 아쵸프무자 발치까지 다가갔다.
“Gravity toetus. (역중력.)”
아쵸프무자는 마법을 이용해 머리를 잡더니 훑어봤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네. 수고했어. D pookimise töökos. (차원 접붙이기, 공방.)”
영창이 끝나자 가까운 벽에 푸르스름한 원이 나타났다.
하수구에서 보상을 받을 때 들어갔던 포탈과 똑같이 생겼지만, 내용을 보니 목적지는 다른 것 같았다.
아쵸프무자는 손에 든 머리를 공방 안으로 밀었다. 그러자 마치 중력을 무시하곤 아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물건 전달이 끝났기에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왜 안 꺼지고 계속 있는 거야.’
아쵸프무자가 사라지지 않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꿈뻑, 꿈뻑, 꿈뻑.
눈만 깜빡이길 세 번.
결국 아쵸프무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받고 싶은 거 없어? 없으면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사라지고.”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이 있었다.
- 그 반지를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보상을 원해?
- 일 해주고 뭔가 받지 않으면 허전해서 말이지.
저번 임무는 거래였기에 칼콘에게 의수를 달아주는 것으로 끝났었지만, 본디 지훈은 의뢰 대가로 보상을 요구했다.
그 ‘보상’이라는 게 뭐가 나올지, 동료에게도 줄지 불투명했기에 ‘보상 없는 일’ 이라고 말했지만 분명 아쵸프무자는 그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줬었다.
‘뭘 받지?’
필요한 물건은 산더미처럼 많았으나, 갑자기 생각하라고 하니 떠오르는 물건이 없었다.
“언제나 말했듯, 시간이 많지 않아. 빨리 선택해.”
이에 칼콘이 슬쩍 끼어들었다.
“나도 괜찮아?”
아쵸프무자는 괜찮다고 답했다. 같이 고생한 만큼 동료는 모두 챙겨주려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방패가 필요해. 이 녀석은 이미 걸레짝이 됐거든.”
칼콘은 제 형태를 잃어버린 가시 방패를 가리켰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훌륭한 가시 벽이었거늘, 지금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꼭 거인이 씹다 뱉은 껌 같았다.
아쵸프무자는 칼콘의 능력치를 훑고는 방패를 하나 소환해 칼콘에게 건네줬다.
“오크들이 크고 우람한 물건을 좋아하던가? 이거 어때.”
말과 달리 건네준 건 물건은 팔목에 끼는 작은 방패였다. 이에 칼콘은 사탕 대신 브로콜리를 받은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장난감이잖아….”
“따라 해 봐, Ma vannun Protector(수호자의 맹세)”
칼콘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자, 조그맣던 방패에서 순식간에 새하얀 금속들이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꼭 튀어나왔다기보단, 마치 빛이 뿜어져 나온 것 같기도 했다.
크기는 칼콘의 몸을 완벽히 가릴 수 있음은 물론, 그 옆에 20cm는 됨직한 커다란 여유 공간까지 있었다.
“두 번째 사도가 썼던 물건이야.”
아쵸프무자는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그리운 표정을 지었지만, 칼콘은 그저 신이 나서 헤죽헤죽 웃기만 했다.
다음 차례는 지훈이었다.
“마법에 관련된 물건이 필요하다.”
생각을 정리한 결과, 현재 제일 필요한 물건은 마력 제어 아티펙트였다.
새로 얻은 이능인 마력 부여와 주문 주입. 강력한 이능임에는 분명했지만, 아직은 그 적용 범위가 애매했다.
전문 분야가 나왔기 때문일까?
아쵸프무자가 씩 웃으며 물건을 하나 건넸다. 목걸이였다.
“뭐지?”
“설명하기엔 시간이 부족해. 그리고 내가 직접 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고.”
불친절한 태도는 이미 익숙해졌기에 그러려니 했다.
아쵸프무자는 다음으로 민우를 쳐다봤다.
“얘는 종족이 변했네?”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돌아오는 대답 없이 흥미롭다는 표정만 짓는 아쵸프무자였다.
“아직 변이 초기… 근데 폭주 때문에 변이 속도가 빨라진지라 몸이 못 따라가고 있네. 얘 이대로 두면 죽어.”
죽을 거라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쵸프무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에 물약 한 병과 작은 펜던트를 소환했다.
“약은 일어나는 대로 먹이고, 펜던트는 항상 몸에 가지고 있으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툭 하면 폭주해서 주변 사람들이 고생할 거야.”
폭주라는 말에 얼마 전에 봤던 일그러진 환상이 떠올랐다.
끔찍한 일에 어느 정도 저항력이 있음에도, 그 일그러진 분홍빛 세상에는 전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지.”
보상이 끝나자 아쵸프무자는 작게 속삭였다.
“그럼 1,128시간(약 48일) 뒤에 봐. 그리고 이건 일을 잘해준 것에 대한 추가 보상이야. Täpsustada üleminek (지정 전이).”
아쵸프무자의 실루엣이 서서히 녹아내림과 동시에, 일행의 몸 역시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