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45화 (145/173)

<7권에서 계속>

7권

<후폭풍>

칼콘, 하즈무포카의 하수인들, 지훈과 마법사.

결과적으로 복도에 세 일행에 차례로 서 있게 됐다.

수상한 움직임 하나에 바로 총성이 울릴 일촉즉발.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Kasutaja uuesti silm ring. (다시 보는군. 반지 사용자.)”

체구가 3.5M는 되어 보일법한 거인이 연신 이를 드러내며 짙은 공격성을 내비쳤다.

“Jah tore meelde iiveldus. (그래, 구역질 나게 반갑다.)”

지훈 역시 장비 없이 거인에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았던 과거가 떠올라 이를 꽉 깨물었다.

“지훈, 이 녀석들 누구야!? 반지를 알고 있어!”

칼콘이 혼란스럽다는 듯 물었다. 처음 만나는 상대가 본인과 반지를 알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보야 둘째 치더라도 칼콘은 강한 상대와는 싸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잘 벼려진 감이 ‘이 둘은 위험하다.’ 라고 외치고 있으리라.

“하즈무포카의 하수인. 적이다.”

전투 회피를 기대하는 칼콘의 기대를 부응해 줄 순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싸워야 하는 상대였고, 무너뜨려야 할 상대임에는 분명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마.’

등에 메고 있던 AS VAL을 어깨에 걸었다. BSS 소총을 쓰는 데 굉장히 방해됐지만 상관없었다.

현재 AS VAL에 들어있는 탄환은 VGC(C등급 관통탄)다. 9mm 짜리 일반탄을 쐈던 과거와는 달리,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폭발성이 있는 BSS 소총으로 저지한 뒤, 아스발로 마무리한다. 마법은 탄환의 저항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사용하면 되겠군.’

마음을 다잡고는 언제든지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게 온몸을 긴장시켰다. 보통은 이 상태로 기다렸다가 상대방이 입을 열자마자 발포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See on teie ring teile. Kuulsin erinevas tempos näeb erinevalt eelkäija, hagun värske. (네가 이번 반지 사용자인가. 선임자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고 들었는데, 신선하군. 게다가 사용자가 둘이라,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군.)”

솔깃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아쵸프무자가 어느 정도 정보를 제공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거니와 그 신뢰도가 낮았다.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Eelkäija? (선임자라?)”

“See on õige. Achophumjah'th mänguasi. Me nimetame neid ring kasutajad. (아쵸프무자의 장난감. 우리는 그들을 ‘반지 사용자’라고 부른다.)”

인섹토이드가 머리에 달린 더듬이를 움직였다.

“See on kolmas asi, mida vaadata seda. (너와 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 아주 흥미로운 행보를 보이더군.)”

세 번째라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거인은 저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구면이지만, 앞에 있는 인섹토이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Jama fupck. (개소리 집어치워.)"

“Kui kanalisatsiooni Venemaa, kui Maal ja nüüd. Kahjuks oleme viivitada muutunud varemed. (러시아 하수도에서 한 번, 지구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안타깝게도 유적은 우리가 한발 늦어버렸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러시아 하수도에서 하즈무포카의 하수인과 만났다고?

그 의문이 든 순간 잊혀졌던 기억들 속에서 차원 여행자가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 감히 미천한 존재인 제가 위대하신 분의 이름을 입에 얹자면… 하즈무포카님의 하수인들이었습니다. 점프잼을 원하시는 것 같았나이다. 저는 거기에 저항하다 부상당했습니다.

분명 차원 여행자는 저렇게 말했다.

당시에는 워낙 정보가 주어져 있지 않았기에 신경 쓰지 않은 말이었지만, 지금 들어보니 엄청나게 섬뜩했다.

‘만약 러시아 하수도에서 저 녀석들과 만났다면?’

죽었다.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했다.

차원 여행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비틀어버릴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존재. 게다가 공간을 왜곡이라는 전이계 이능 역시 저항이 아무리 높아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의 일격이다.

그런 존재가 부상당한 상태였다.

툭 치면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았던 빈사.

다행히 운이 좋아 차원 여행자를 포획하는 데 성공했지만, 만약 부상당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지금과는 퍽 다른 이야기가 진행됐을 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쵸프무자의 계약에는 항상 ‘하즈무포카’의 하수인에 대한 얘기가 분명 한 번씩은 스쳐 지나갔다.

“Achophumjha See on üsna vähe ilmunud hellitada. Keskmine tööstaaž ütleb meile, kui mitu korda ma surin es. (아쵸프무자가 널 어지간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보통 선임자들은 우리한테 몇 번이나 죽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넌 아니었지.)”

저들의 말대로 아쵸프무자가 지훈을 편애한 걸까?

아니면 단순 지훈의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 걸까?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일이 굉장히 진행된 지금에서야 마주쳤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머지않아 전투가 벌어질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BSS소총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온몸을 긴장시켰으나, 인섹토이드는 픽 웃고 말았다.

“Ja jälle see angetji surra. Rosy roosa täitematerjaliks. (그리고 이번에도 죽지 않겠지. 천운이야.)”

인섹토이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전이계 이능을 사용했다.

- 전이계 사용 감지.

“엎드려!”

전이계 이능에는 왜곡 역시 포함되어 있었기에, 지훈은 일단 몸을 낮춰 회피 동작부터 취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공간이 뒤틀어지는 소리는 나지 않고 인섹토이드와 거인의 모습만 서서히 흐려질 뿐이었다.

“Ärge arvake, ring kasutajad. Pärast kogumist, ma kindlasti minna Venemaale tõmmata oma juukseid.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반지 사용자. 수집이 끝나면 난 반드시 네 머리를 뽑으러 갈 것이다.)”

거인이 짙은 살기를 드러내며 거친 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지않아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공간 도약?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하즈무포카의 하수인이 사라지자 칼콘이 주저앉았다.

“쟤, 쟤네 뭐야? 나 저런 녀석들은 처음 봐.”

BSS 경비들을 양 떼마냥 도축하던 멧돼지는 어디 가고, 가련한 소녀 같아 보였다.

“아쵸프무자의 적이자, 나의 적이다.”

“혹시 반지에 관련된 녀석들이야?”

고개를 끄덕여 대답해줬다.

“여기서 나가야 해. 저 녀석들 위험해 보였다고!”

도망. 본디 싸움이라는 건 기다리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말도 있듯, 상대가 강할 때는 몸을 웅크려 적의를 보이지 않거나 회피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저번과 달리 지훈에게는 장비가 있었고, AMP도 있었으며, 새로운 이능까지 생겼다.

‘이번에는 절대 지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물론, 당장은 민우를 구하는 게 급선무지만 말이다.

☆ ☆ ☆

민우는 초조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실험에 어울려 주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는가 싶더니 주거동 깊숙이 옮겨졌다.

웅성웅성…

연구원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 수 없는지,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어 보였기에, 옆에 있던 한국인 연구원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한국인 연구원은 싸늘하게 잠시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몇 번 더 물었지만 대답하질 않았다.

“씨발, 내 말 안 들려!? 지금 무슨 일 일어났냐고!”

폭발해서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 있던 연구원들의 시선이 전부 민우에게 몰렸다. 같은 사람이었으나, 현재 민우는 실험체였기에 연구원들 사이에서 공포가 흘렀다.

정신 감응, 마인드 링크.

정신계 이능으로 보통 텔레파시 같은 걸 의미했지만, 능력이 강해지면 상대방을 조종할 수 있는 무서운 이능이었다.

연구원들의 눈에 공포와 적의가 묻어났다.

‘개새끼들, 사람 쳐다보는 눈이 무슨…’

결국, 연구원 하나가 경비를 불렀으나 늙은 연구원이 손만 들어 제지했다. 이 연구실의 총 책임자이자, 민우를 연구하던 안드레이였다.

“불안한가 보죠?”

한국인 연구원이 비꼬듯이 물었다.

“사이렌이 미친년처럼 울어대는 데 안 불안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말하는 거 하고는.”

“그래서, 씨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

“왜요, 나보고 창녀라면서요?”

전혀 알려줄 것 같지 않은 태도였기에 포기했다.

대신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여자의 코에 이마를 들이받았다.

뻑!

“아아악! 악! 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민우의 얼굴에 피가 잔뜩 튀었다.

“아프냐? 아프겠지, 씨발년아. 그래. 내가 창녀한테 뭘 묻겠냐. 좆이나 까 잡숴, 갈보 새끼야.”

이후 민우는 무릎을 꿇은 여자의 얼굴에 무릎을 한 번 더 꽂아 넣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뼈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Get down! (엎드려!)”

경비들이 소총을 겨누고 투항을 요구했다.

민우는 경비들에게 양 손바닥을 보여 줘 싸울 의지가 없다는 걸 보여주고는, 그대로 엎드렸다.

바닥에 얼굴을 착 붙인 체, 본인이 작살내 놓은 여자를 보자 민우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쎔통이다, 씨발년. 그냥 내 이능으로 보고 말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민우의 눈에 혼돈이 가득 찼다.

‘잠깐만… 내가 저 여자를 때렸다고?’

때렸다. 머리로 여자의 코를 들이받았음은 물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비명만 지르는 여자의 얼굴에 무릎까지 꽂았다.

‘나,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난….’

본디 민우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음은 물론 피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헌팅을 하며 어느 정도 전투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몬스터 내지는 강도가 전부였다.

절대 비무장한 사람이나 일반인은 건드리질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냥 참거나, 욕 몇 번 한 게 다였지 절대 때리거나 상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갑작스러운 이능 개화로 인한 신체의 변화와 함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폭력성으로 나타난 경우였지만, 민우 본인은 알 수 없었다.

정신없는 사이 경비가 민우를 기둥에 묶어버렸다.

민우는 몸이 속박된 채로 생각을 정리한 뒤, 한숨과 함께 모두 털어버리고는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밖을 보자….’

아직은 이능을 발동하는 법은 몰랐다.

그저 마음속으로 ‘보고 싶다’라고 강렬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밖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푹!

뇌가 뒤집히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끄, 끄아아아아아악!”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세상이 빙빙 도는 것같이 아픈 와중에, 커다란 폭음이 들렸고… 터져 버린 문 뒤로 익숙한 가시 방패가 보였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칼콘…?’

지훈 일행이었다.

“민우 어딨어, 이 개 좆같은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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