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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의 반지-144화 (14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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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콘이 눈을 뜬 건 지훈이 장비를 챙겼을 무렵이었다.

“어…….?”

눈을 껌뻑거려 의식을 확인한 뒤, 칼콘은 제 몸이 거미 고치처럼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으으윽 - 찌직!

힘을 주자 간단하게 찢어졌다.

지훈 조차 이능을 쓰고 나서야 찢은 구속구이거늘, 칼콘에게 있어선 그저 거치적거리는 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칼콘의 왼손과 왼발은 아쵸프무자가 달아 준 특제 B등급 아티펙트였다.

‘진짜와 다를 바 없는 가짜’였기에 보사 스캔 과정에서도 밝혀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어디지?”

칼콘은 머리를 긁적거렸으나 이내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경험상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편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단 탈출부터 할까.’

적이 강하다면 투항하면 그만이었고, 적이 약하다면 짓밟으면 됐다.

‘그 전에……. 오줌 마렵다.’

칼콘은 바지를 내려 보관실 구석에 볼일을 본 뒤, 그 위에 달려있는 카메라를 손으로 부숴버렸다.

“내 우람한 물건을 훔쳐보다니! 죄가 무거워!”

뚜둑, 뚜둑.

목, 손, 허리, 골반, 허벅지, 무릎, 발목, 발.

순서대로 모조리 힘을 풀고는 날개 뼈를 이용해 어깨를 몇 바퀴 빙빙 돌렸다.

‘밖에 나가서 지훈부터 찾아볼까.’

준비 운동이 끝나자마자 왼팔을 휘둘렀다.

목표는 문이었다.

찌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문을 뚫고 나갔다. 이후 거미줄 뚫는 것 마냥 직직 찢어 구멍을 만들어 탈출했다.

에에에에에에엥 - !

보관실 안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사이렌이 들려왔다.

그게 꼭 신호라도 되는 듯, 여유롭던 칼콘의 얼굴이 싹 굳어지며 잘 훈련된 군인으로서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지훈과 함께하며 순한 말투를 자주 보여서 그렇지 그는 본디 사람을 잡아 죽이던 인간 사냥꾼이자 카즈가쉬 클랜의 잘 벼려진 군인이었다.

친구가 사라지고 혼자가 되자 그 모습이 얼핏 드러났다.

쿵, 턱, 쿵, 턱.

성난 걸음걸이가 지나갈 때마다, 특히 왼발이 꽂힐 때마다 바닥에 5mm짜리 발자국이 찍혔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분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였다.

사건이 터지고 시간이 조금 지난 까닭일까?

연구동 안은 조용했다.

단지 칼콘이 지훈을 찾기 위해 열은 보관실 안에 있던 리자드맨들만 혼비백산하며 뛰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디 있지? 지훈은 체취가 독특해서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가만히 서서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났다. 하지만 지훈은 아니었다.

기계 냄새가 섞였지만, 분명 인간이 내뿜는 냄새.

홱!

칼콘의 고개가 사냥감을 찾은 맹수처럼 돌아갔다.

쿵, 턱, 쿵, 턱!

방향은 연구 2동의 깊숙한 곳, 창고 방향이었다.

어느 정도 걸어가고 있자니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어였다.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뜻은 알 수 있었다.

“위험하다. 실험체 탈출. 그림자를 부르는 게?”

“쉐도우 스쿼드 호출. 이미 오는 중.”

“현재 우리 임무는 장비를 태우는 게 전부?”

“탈주한 실험체 제거 필요.”

“알겠음.”

칼콘은 숨죽인 채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본인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이 분명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저 녀석들을 죽여야 해.’

칼콘은 조용히 기대있던 벽을 손으로 두드렸다.

톡, 토톡, 톡, 토톡.

임플란트를 끼고 있던 까닭일까?

사이렌에 끼어 듣기 힘든 작은 소리가 분명했음에도 대화를 나누던 소리가 뚝 끊겼다.

칼콘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전장을 누벼온 감으로, 경비들이 경계자세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경계 사격 위치는 정확하게 인간 기준 복부나 흉부.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경계사격에 벌집이 될 게 분명했기에 마치 네발짐승처럼 몸을 웅크렸다.

발 바로 앞에 손을 갖다 대고, 엉덩이는 들어 언제든지 튀어나갈 수 있게끔 준비했다. 거대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양잇과 맹수의 자세였으나, 어차피 상관없다.

본디 전장에서는 누가 더 멋지냐보다는 누가 더 효율적으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3초, 2초, 1초. 가자.’

들이마셨던 숨을 폭발적으로 내뿜으며 몸을 튕겼다.

경비들과의 거리는 약 1M.

타타타타타탕!

가속 이능이 없는 칼콘이었기에, 경비의 사격이 더 빨랐다. 하지만 몸을 낮추고 있던 터라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터더더덕!

칼콘은 네발로 빠르게 기어가, 몸을 일으키며 경비의 복부에 박치기를 꽂아 넣었다. 동시에 왼손으로는 좌측 경비의 얼굴을 농구공 집듯 잡고는 바닥에 꽂아버렸다.

뻑, 퍽!

왼팔로 짓누른 경비는 머리가 터져서 죽어버렸고, 박치기를 맞은 경비는 총을 쏠 수 없는 거리였기에 버둥거렸다.

꾸우우욱!

강력한 힘이 밀어냈으나 애초에 인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칼콘에, 각성까지 한 상태였다. 겨우 임플란트 몇 개 박았다고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머리를 밀어내는 손을 무시하곤, 경비의 어깨를 잡아 쑤욱 다가갔다.

경비와 칼콘의 눈이 마주쳤다.

경비가 손가락으로 칼콘의 눈을 찌르려 했지만, 칼콘은 바로 입으로 그 손가락을 물어버렸다.

으적, 으적.

인간과는 다른 전투 종족 특유의 톱니 이빨이 경비의 손가락을 순식간에 잘라버렸다.

겨우 손가락 2개로 만족할 수는 없었기에 바로 왼팔을 회수해 녀석의 이마에 내리꽂았다.

비명도 없이 그저 퍽 소리가 났다. 그게 끝이었다.

“그르르……. 그르르…….”

숨을 몰아쉬자 성대가 떨리며 짐승 소리가 튀어나왔다.

‘장비를 찾아야 해.’

칼콘은 창고 쪽으로 두 걸음쯤 걷다가 되돌아왔다. 총을 방어할 대비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방패를 들고 다녔겠지만, 지금은 없는 관계로, 축 늘어져 있는 시체를 들어 방패처럼 썼다. 오른손에는 총을 들었다.

뻑! 뻑! 지지직!

창고 문을 왼발로 찢어버리고 진입하자, 안에서 장비를 파기하던 경비들이 경계 사격을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타탕!

퍼버버버버벅!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과 함께 왼손에 들고 있던 바디벙커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강력한 탄환은 아닌지 경비의 몸만 터져나갈 뿐 칼콘의 몸에는 단 한 발도 박히질 않았다.

칼콘은 최대한 몸을 돌려 사선에서 벗어난 뒤, 눈만 움직여 적을 훑었다.

‘넷. 총기 무장. 방패 없음.’

위치가 파악되자 다음 행동은 간단했다.

탕, 탕, 탕, 탕!

회피?

그딴 건 칼콘과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그는 최전방에서 전진하던 방패병답게, 오로지 바디벙커 하나에 몸을 숨긴 채 총만 꺼내 갈겼다.

조준사격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명중률은 낮았다.

경비들은 엄폐하기 시작했고, 칼콘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적들이 어디로 숨었는지는 전부 파악했다.

그렇다면 이제 서서히 숨통을 조이면 됐다.

타다다다다당!

쿵, 쿵, 쿵, 쿵!

경비들은 재장전을 번갈아 하며 화망을 유지했지만, 칼콘은 이에 지지 않고 전진했다.

폭발성을 띈 탄환 때문에 바디벙커가 곧 뚫릴 것 같았지만, 어차피 그때쯤이면 새로운 녀석을 잡으면 됐다.

이윽고 칼콘이 첫 번째 엄폐물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총만 내밀어 풀 오토로 드르륵 긁었다.

고기 터지는 소리가 났기에 칼콘은 엄폐물 안에 들어가 바다 벙커와 총기를 교체했다.

바로 옆으로 탄환이 쏟아지는 정신 나간 광경이 펼쳐졌지만, 칼콘 머리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인간의 무기는 너무 편리해. 어찌 이렇게 쉽게 죽을까? 우리 종족이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면, 인간 따위 상대가 되질 않았을 텐데.’

철컥.

장비 교체를 마쳤기에 칼콘은 다시 전장으로 나섰다. 같은 방법으로 둘 제거하니, 마지막 녀석은 백병전을 걸어왔다.

파지지지직!

지훈을 제압했던 전기봉이었으나, 가볍게 왼손으로 막아냈다. B등급 아티펙트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기에 당연히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경비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으나, 칼콘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단지 왼발로 녀석의 몸을 뚫어버렸을 뿐이었다.

칼콘은 냄새로 제 장비를 찾아 재무장했다.

보호복을 입을까 말까 하는 문제로 한참을 고민했으나, 움직임을 방해받는 게 싫었기에 보호복은 내버려뒀다.

철컥, 철컥.

이후 칼콘은 방패를 진열대를 거치대 삼아 세워놓은 후, 멀찍이서 경비가 들고 있던 소총으로 갈겨봤다.

퍼버버벅!

폭발로 인해 흔들리긴 했지만 관통되진 않은 것 같았다. 칼콘은 그 모습을 보고 씩 미소를 지었다.

‘지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갈게. 기다려.’

창고에서 나와 밖으로 걸었다.

길을 몰랐다. 영어도 듣기만 조금 하지, 읽기나 말하기는 되지 않아 정보도 캘 수 없었다. 거의 헤맨다고 봐야 옳을 정도로 배회하길 잠시.

콰아아아앙!

큰 소리가 났기에 그쪽으로 달려갔다.

“Vaata, ma ei saa kütta veidi chill? (이봐, 좀 얌전하게 열 수 없어?)”

“If'm ei hakka kinni ja mind aidata. (도와주지 않을 거면 닥치고 있어.)”

본디 알아들을 수 없어야 하는 언어였거늘 이상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슨 언어인지 곱씹기를 잠시, 칼콘은 저 언어를 반지에서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건물만 한 짐승이 자신을 핥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재빨리 이동해 복도 구석에 있던 짐덩이 안에 숨었다.

크기가 커서 숨기 힘들어 보이기도 했지만, 워낙 잡동사니 사이에 숨은 지라 그저 방패가 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뚜벅, 뚜벅, 뚜벅.

“Ma ei tea, miks sa pead talle, et ta on teadus alamliiki sellest jamast? (어째서 그분께서 이딴 하위 종족의 연구자료가 필요하신 걸까?)”

“Ma ei tea. Ta ütles, et ainult inimese hasyeoteo lähedal võidu parim edu. (나도 몰라. 단지 그분께서는 인간이 제일 성공에 가까운 종족이라고 말씀하셨어.)”

칼콘은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숨어있었다.

“Sa tõesti arvad, et nad on sellist laeva? (넌 정말 그들이 그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Ma ei tea. See muidugi kogelemine. I ja ma olen rike. Uh, miks me saame aru oma isanda tahtmist? (난 몰라. 그게 당연한 거고. 너와 난 실패작이야. 우리가 어찌 높으신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어?)”

둘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쵸프무자에게 진실을 들은 것도 아니고, 그저 이 언어를 할 줄 아는 게 다인 칼콘이었다. 단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자니…….

대화와 발걸음 소리가 5초 뚝 끊겼다.

“Aeglane kiirenenud? (느꼈나?)”

“Jah, see heliseb kasutaja. (그래, 반지 사용자다.)”

발각됐다는 뜻이었기에 칼콘은 도망가려 했지만, 하즈무포카의 하수인이 더 빨랐다.

콰아아앙!

거대한 주먹이 잡동사니에 꽂혔기에, 기겁을 하고 튀어나와 방패를 들어 올렸다.

후속타가 날아올 거라는 생각과 달리, 하즈무포카의 하수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만 내뱉었다.

“Oak? Kuidas nii? Kus on see mees? (오크? 어째서? 저번에 그 인간은 어디 있지?)”

이미 헐크 같은 거인으로 변한 녀석이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니, 멀찍이서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 2개가 들렸다. 조심히 눈만 돌려 쳐다보니, 하즈무포카의 하수인들 너머로 지훈과 마법사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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