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41화 (141/173)

<-- 클레이보얀스 -->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민우였다.

“아……?”

기절한 적이 많지 않았던지라 기분이 멍했다.

심플하지만 푹신한 침대와 생활하기에 딱 알맞은 온도 그리고 사람이 산다는 증거로 보이는 생활 잡화들이 보였다.

‘어디지?’

일어나서 더 훑어보려고 했지만, 왼팔에 꽂혀있는 링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마지막 기억은 분명 이상한 기계에 감전된 거였다. 그를 통해 민우는 현재 이 장소가 연구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한다.’

당장 팔에 꽂힌 링거를 뽑아내고는, 무기가 될 만한 도구를 찾았다. 주변을 훑다 액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에는 행복해 보이는 가족사진이 들어있었다.

쨍!

액자를 깨고는 그중 길고 뾰족한 유리 조각을 집었다. 이후 책상에 올려 져 있던 잡지 한 페이지를 죽 찢어 유리에 돌돌 말아 손잡이를 만들었다.

꽈악!

민우는 유리 칼날을 쥐고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그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진정해라 우민우. 다 잘 될 거야……. 나도 이제 헌터다. 내 밥값은 내가 해야 해.’

오금이 저려 와서 잘 걸을 수는 없었지만, 애써 용기를 내 출입구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기회는 딱 한 번이야. 누가 들어오면 바로 습격해야 해.’

시도는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카메라였다.

☆ ☆ ☆

경비실.

화면을 훑던 경비의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직원 숙소 중 한 방의 불이 갑자기 꺼졌기 때문이었다.

경비는 잠시 행동을 멈췄다가 무전기를 잡았다.

- 치직.

“실험체 52번 기상. 담당자에게 통보 요망.”

☆ ☆ ☆

암흑 속에서 오감을 날카롭게 세워서 기다리길 30분.

밖에서 삑삑 하고 다이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치이익 - !

본디 사람의 눈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이동할 때 빛을 조절하기 때문에 잠시 시각을 잃었다.

민우는 이를 이용해 기습할 생각이었다.

아주 짧다 해도 상관없었다. 딱 2초만 있어도 유리 칼날이 목을 파고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훅!

유리 칼날이 날아들었고…….

쨍!

뭔가에 막혀 깨졌다.

“아아아악!”

유리를 쥐고 있던 손등에 깨진 유리가 잔뜩 박혔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상대를 훑자, 민우는 그제야 왜 유리가 깨졌는지 알 수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온 사람은 전신 방검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지지지직!

경비가 들고 있던 제압 봉이 푸른 스파크를 뿜었다.

…….

흰색 방에 탁자와 의자밖에 없는 살풍경한 공간.

그 안에 늙은 연구원과 민우가 앉아있었다. 그런 민우의 오른손에는 붕대와 함께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민우는 아무 말 없이 연구원을 쳐다봤다.

과거의 민우였다면 멋모르게 입을 나불거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끔은 웅변보다 침묵이 더 귀할 때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연구원은 언어를 바꿔가며 물었다.

그 어느 언어에도 민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연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나마 공용어에 가까운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저희 역시 비밀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이후에도 연구원은 상황을 부드럽게 바꾸기 위한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조용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좆 까.”

연구원은 욕을 들었음에도 미소를 지었다.

“한국 분이셨군요. 한국인을 데려오겠습니다.”

늙은 연구원이 나가고 머지않아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반가워요.”

“좆이나 까 잡숴, 이 발정난 창녀 같은 년아.”

젊은 여자 연구원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이후 그녀는 슬쩍 벽에 달린 거울을 쳐다봤다. 그 모습이 본인을 살핀다기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다른 무언가를 보는 것 같았다.

여자 연구원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그렇게 입이 험한가요?”

“전기로 사람 지지고 보는 미친년이 더 병신 아닌가?”

여자는 다시 거울을 쳐다봤다가 말했다.

“배고프죠? 우리 같이 밥 먹을래요?”

민우는 조용히 자기 복부를 쳐다봤다. 얼마나 굶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배가 고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메뉴는 따뜻한 쌀밥에 겉절이 그리고 미역국이었다.

연구소에는 한국인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국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상황에 김치?

김치가 너무 맛이 좋고 몸에도 좋아 순식간에 세계화가 됐을 리는 없다. 딱 봐도 비위 맞추려고 준비한 음식이겠지.

여자 연구원은 식사를 시작했다.

“덕분에 그리운 음식을 먹네요. 우리 회사 식당은 전부 양식이라 한식은 먹을 수 없거든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민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대신 밥을 한 움큼 퍼서는 입에 넣고 씹은 뒤…….

퉤!

여자 연구원의 얼굴과 음식에 뱉어버렸다. 연구원은 차가운 몸짓으로 얼굴을 닦고는 거울을 쳐다봤다.

덜컹.

여자 연구원이 말없이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이후 경비가 들어와 민우를 제압하더니, 다시 늙은 연구원이 들어왔다.

“원래 자네 이능력자들은 다 그런가? 그렇게 날뛰는 모습을 보니 꼭 광견병 걸린 개 같군.”

민우가 꿈틀거렸다.

모욕 때문이 아닌, ‘이능력자’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이능력자라니, 씨발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늙은 연구원이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본인도 모르고 있었나. 일이 쉽게 풀리겠군.’

연구원이 ESP 테스트용 카드를 들고 왔다.

ESP 카드는 물결, 별, 더하기, 사각형, 원이 5개씩 들어있는 카드 뭉치로, 투시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도구였다.

“개소리 집어치워, 내가 천리안을 가지고 있다고?”

“뭐 한국어로는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군요. 저희는 클레이보얀스(Clairvoyance, 투시)라고 부르지만요. 그뿐만 아니라 마인드 링크(Mind link, 정신 감응)도 아주 미미하게나마 가지고 계시더군요.”

민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만 찌푸렸다.

‘이 녀석들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걸까?’

거짓말이라기엔 연구원들이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이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민우는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현 상태를 보니 당신께선 아직 이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저희가 능력 개화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능력 개화. 이능력.

그 얼마나 갖고 싶었단 말인가!

민우의 눈에 잠시 감정의 쓰나미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짙은 의심이 채워졌다.

“해 봐, 어울려 주지.”

늙은 연구원은 씩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가죠.”

ESP 테스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 뒤, 테이블 위에 25장의 카드가 올라왔다.

“속임수나 트릭 같은 건 없습니다. 별을 찾아보시지요.”

“지금 장난해? 이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실패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간단한 실험이니까요. 단지 감을 이용해서 찾으시면 됩니다.”

민우는 카드를 쳐다봤지만,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뭐 어쩌라는 거지, 역시 거짓말인가.’

될 대로 되라는 심보로 아무거나 뒤집었다.

별 모양이다.

민우는 놀란 표정을, 연구원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하시지요.”

민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역시 별이었다.

‘경우의 수를 따져봤을 때 충분히 있을법한 우연이야.’

이번에는 고민하지 않고 연달아 세 장을 뒤집었다.

별.

별.

그리고 마지막도 별이었다.

25장의 카드 중 단 한 번에 같은 카드를 모조리 찾아낼 확률은 만분의 일도 되질 않았다. 민우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친……!’

“개소리 집어치워, 이거 다 별 모양이지?”

버럭 소리를 질렀음에도 연구원은 어깨만 으쓱했다.

“의심스러우면 직접 뒤집어 보시지요.”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이번에는 정확하게 원 모양 5개가 나왔다.

“이게 뭔……. 이 카드 전자기기 아냐? 내가 돌릴 때마다 표시되게끔 되어있는 거 아니냐고!”

그 말에 연구원이 무작위로 카드를 5장 뒤집었다. 각기 다른 카드들이었다. 이로는 증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연구원은 이후 카드를 세로로 찢어버렸다.

절대 전자기기는 아니라는 절대적 증명이었다.

“다른 실험을 준비하죠.”

다른 실험을 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민우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실험 결과는 전부 100%였다. 운으로 따지자면 로또를 100번도 더 맞았을 확률에, 결국 민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능은 사용자마다 그 특징이 달라서 저희도 어떻게 설명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일종의 식스 센스 같은 거죠. 인간의 오감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았다.

지훈 같은 경우 속으로 이능을 외쳐야 발동할 수 있지만, 파이로는 손만 뻗어도 불을 뿜어낼 수 있었다.

“현재 당신께선 이능을 가지고 있지만, 정확하게 활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저희가 그 능력 개화를 도와드리죠. 어떻습니까, 저희와 협력하시겠습니까?”

민우는 잠시 망설였다.

‘섣불리 손을 잡아도 괜찮을까?’

매력적이었지만, 그만큼 찔리는 부분도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 마음대로 하시지요.”

늙은 연구원은 목걸이형 키 카드를 민우에게 건넸다.

“주거동과 식당을 오갈 수 있는 카드입니다. 일단 몸이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시지요.”

늙은 연구원은 경비에게 이끌려 주거동으로 향하는 민우의 등을 쳐다봤다.

“이제 실험체 52호는 어쩌실 겁니까?”

“이능력 사용이 확실해 지면 바로 자백제 넣고 정보부터 뽑아낸다. 진짜 인간인지부터 확인해야 해.”

“다음 에는요?”

“나중에 클론 만들 수 있게 생체 데이터 백업한 뒤, 생체 연구를 시작한다. 저 녀석에게는 분명 비각성자가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비밀이 있을 거다.”

젊은 연구원은 클론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론이요? 벌써 됩니까?”

“아마 5개월 정도면 연구 끝날 거다.”

“하하……. 제가 생각해도 정말 미친 연구 속도네요.”

늙은 연구원은 얼굴에 짜증을 드러냈다.

“한가한 모양이지? 가서 녹화 데이터나 분석해.”

민우는 일단 주린 배부터 채운 뒤, 숙소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 복잡한 내용이 머릿속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이능력자라니…….’

처음엔 본인에 대한 것부터 시작했다.

‘내가 원하면 볼 수 있는 건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벽을 투시하려 노력했지만, 그 무엇도 볼 수 없었다.

‘단순 운이었던 걸까?’

볼 수 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민우는 가벡 같은 야만인이 아니었다. 조작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수없이 많은 실험을 모조리 조작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녀석들이 그렇게까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서까지 나를 속일 이유도 없다.’

민우는 단순한 일반인이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정치나 외교적으로 유용한 인물도 아니다. 결국, 모든 내용이 민우가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모였다.

‘근데 왜 안 보이는 걸까?’

몇 번이나 시도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숙소 벽만 보일 뿐이었다.

머지않아 포기하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푹신함에 피로가 몰려왔지만, 꾹 참고는 생각을 돌렸다.

‘그나저나, 지훈 형님이랑 칼콘은 어떻게 됐을까?’

분명 같이 납치됐거늘 어떻게 한 번을 볼 수가 없었다.

많은 생각이 스쳤다.

기절하지 않고 도망간 건 아닐까?

D등급처럼 버리고 간 걸까?

다른 연구실에서 같은 대우를 받고 있을까?

이상한 실험에 연루되진 않았을까?

‘위험한 상황은 않았겠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눈을 감은 그 순간…….

슈슈슈슈슉!

수없이 많은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 이게 뭐야?’

마치 MRI가 사람 몸을 훑듯, 머릿속에 순식간에 연구실 전체 이미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민우는 순간 저게 ‘투시’ 이능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훈 형님이랑 칼콘은 어디 있지?’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민우는 지훈이 정신병원 같은 공간에 지훈이 고치처럼 묶여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젠장, 역시 위험한 장소였어! 여기서 나가야 해!’

마음은 먹었으나 민우로써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구해주길 기다려야 할까?

잘 알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