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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의 반지-131화 (131/173)

<-- 모두가 용감한 건 아니다. -->

15일, 360시간.

생각보다 긴 시간이 아니었기에 늑장 부릴 여유는 없었다.

아쵸프무자와 대면하자마자 바로 일행에게 연락해, 다들 시체 구덩이 비즈니스 룸으로 모이라고 얘기했다.

아직 동구에 사는 칼콘이야 금방 도착하겠지만, 서구 끝자락에 사는 민우와 가벡은 시간이 걸릴 터.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 이번 목표의 정보를 훑었다.

[정보]

목표 : 일본 개척지에 있는 식육 진화 연구자료.

위치 : 일본 개척지 내부 군용 벙커 속 연구단지.

일본 개척지 안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인 실험이 있다. 전자 저장기기, 마법적 기록, 연구원 납치 혹은 뇌 적출 등 어느 방법을 써서든 연구 자료를 획득해야 한다.

현재 일본 개척지는 짙은 방사능과 마법 오염에 뒤덮여 있기에 매우 큰 주의를 요한다. 특히 마법 오염으로 인한 기상상태 혼란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부는 방사능 폭풍은 인체에 매우 치명적이다.

또한 러시아가 철수하며 타 국가가 해당 영토를 점령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외벽 및 개척지 내부에 지뢰 및 터렛을 남겨 놨으니 주의할 것.

그 외에도 개척지 내부에 남아있는 무국적자 및 리자드맨은 외지인에게 굉장히 배타적이니 주의.

확신할 수는 없으나 강력한 리자드맨 마법사(주술사)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하즈무포카가 하수인을 이용해 방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직접 보니 더 가관이었다.

일본 개척지는 방사능과 마법 오염이 잘 버무려져 있는 곳이다. 그냥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는 것만 해도 목숨 걸어야 할 판.

‘근데 거기에 위험요소가 뭐 저렇게 많아?’

듣도 보도 못한 방사능 폭풍이라 불리는 기상 이변.

자국 식민지였던 장소를 뺏기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욕심이 낳은 무자비한 함정과 살인 기계들.

외부인에게 굉장히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띤 개척지 내부 거주자들.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매우 강력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와 하즈무포카의 방해.

최악의 경우를 예상해 보자면…….

방사능 폭풍에 쫓기다가,

칼콘이나 민우가 지뢰를 밟아서 발목이 잘리고,

도망가던 와중에 터렛에게 긁혀 체력을 소진하며,

치료를 위해 이탈하다 일본인과 만나 시간을 잡아먹히고,

빈사 직전에 리자드맨이나 하즈무포카의 하수인을 만나…….

끝장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FS 유적도 굉장히 어려웠으나, 거긴 적어도 환경적인 요인은 안전하다 못해 매우 쾌적했다.

적도 기계 단 하나만 있던 지라 최악의 경우에는 EMP를 이용해 도망치면 됐으나 이번에는 그것도 안 됐다. 아마 여태까지 한 일 중 제일 어려운 일이 될 게 분명했다.

‘칼콘과 민우가 과연 이 일에 협력해줄까?’

가벡은 애초에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놨으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둘도 딱히 확답할 수는 없었다.

직접 생각해도 반쯤은 자살인데 남이 생각하면 오죽하랴.

본디 모든 존재는 자기에게는 매우 관대하지만, 남의 일에는 굉장히 까다로워지는 법이었다.

‘결국 용병인가.’

어차피 안에서 80% 이상 죽을 테니, 선금 없이 모집하면 싼 가격으로 부릴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는 자들이다 보니 수틀리면 미끼로 쓰고 도망가거나, 돈을 아끼기 위해 일 끝내고 직접 처리해도 됐…….

‘이런 썅, 지금 무슨 생각을……!’

확실히 일이 위태해지기 시작하자 뒷골목 시절 버릇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나 동료는 절대 버리거나 해하지 않았지만, 얼굴 모르는 생판 남 혹은 거래관계인 사람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게 바로 지훈이었다.

지금이야 굳이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이블 포인트 때문에 덜컥 걸리는 게 있어서 하지 않을 뿐이었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언제든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서 애꿎은 담배만 태웠다.

그 사이 칼콘이 들어와서 쾌활하게 인사했지만, 이내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입을 다물고 술만 부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민우와 가벡이 도착했다.

“예, 왔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일입니까?”

“안전한 거였으면 좋겠군.”

쾌활하게 인사하는 민우와 달리, 가벡은 뭔가 눈치를 챘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본디 그는 전쟁에서 죽어야만 신들의 전장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존재였다. 이번 임무는 전투보다는 약탈에 가까우니, 아마 본인 입장에서는 헛된 죽음이라 생각할 게 뻔했다.

“할 얘기가 있다.”

일행이 다 모였기에 바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일단 무거운 얘기니까, 듣기 전에 한잔하지.”

예전이었다면 쳐다도 못 볼 값 비싼 양주를 돌린 뒤, 한숨에 들이켰다. 식도가 따끔한 느낌도 잠시. 화끈한 느낌과 함께 머리에 피가 몰리기라도한 양 열기가 올라왔다.

“후-”

어려운 말을 꺼내기에 앞서, 고민과 망설임을 입안에 남아있던 알콜 향과 섞어 모조리 뱉어내 버렸다.

“아쵸프무자에게 일을 받아왔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오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뭔가 큰 건은 예상했던 모양이지만, 아마 아쵸프무자가 튀어나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으리라.

“난 안 한다. 이번 일 빠지도록 하지.”

말 끝나자마자 가벡이 단답했다.

무슨 일인지 듣지도 않고 거절부터 하는 꼴이, 저번일 때 엄청나게 고생했던 게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동료였으나 이익으로 뭉친 관계였다.

보상도 없이 목숨을 걸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강요는 하지 않아. 그러기엔 너무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보상도 약속할 수 없어. 가벡처럼 빠지고 싶으면 빠져도 괜찮아.”

가벡은 팔짱을 낀 뒤 콧김을 ‘흥!’하고 내뱉었다.

“어떤 일이 길래요? 들어나 보죠.”

민우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으나, 즉답은 하지 않고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반면 칼콘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양주로 병나발을 불었다.

“일본 개척지에 가야 한다.”

민우가 일본이라는 말에 얼굴을 팍 찡그렸다.

“거기 죽음의 땅이잖아요. 아무리 디스톨팅 스톤 나온다지만……. 거기 가려면 진짜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한데…….”

디스톨팅 스톤.

소위 왜곡석으로 불리는 물건으로, 마법 오염으로 발생하는 이상 현상의 부산물로 나오는 금속이었다.

소재 자체가 마력을 잘 머금을 수 있음은 물론, 강도와 탄성 역시 좋아 B등급 아티펙트 재료로 쓰였다.

주먹만 한 왜곡석 하나가 1억으로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으나, 문제는 그걸 구하기가 엄청나게 힘들다는 거였다.

그걸 주워오기 위해선 당연히 마법 오염지대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단 하나의 가감도 없이 한 발자국 잘못 디디면 그대로 황천으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말했잖아. 강요 안 한다고.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야. 그리고 난 너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거다.”

민우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선 같이 가고 싶어 보였으나, 너무 위험한 까닭에 고민하는 모양이다.

“크으~ 난 갈 거야. 근데 이 술 맛있네.”

칼콘이 나발 불던 술병을 내려놓으며 무슨 소풍 참가한다는 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되새겨 줄 필요가 있어 보였기에 보충 설명을 해 줄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임무는 정말 위험하다. 죽을 수도 있어.”

“얘기했잖아. 나는 지훈한테 목숨 2개…….”

빚졌다.

이주 당시 살해당하려던 걸 지훈이 살려줬고, 팔다리가 잘려서 서서히 죽어갈 걸 또 한 번 살려줬다.

“그딴 거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몇 번을 얘기 하냐. 중요한 문제니까 똑바로 생각하고 얘기해, 새끼야.”

반면 지훈은 그걸 빚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씨발, 친구 구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

“나 진지해, 지훈. 우리 종족에게 있어서 목숨을 구해준 이는 매우 귀중한 은인이야.”

“내가 괜찮다고.”

“난 안 괜찮아, 지훈. 나를 은혜도 못 갚는 무능한 전사로 만들 생각이야? 그건 내 손으로 엄니를 뽑아 버려도 시원찮은 일이야.”

엄니.

오크에게 있어서는 명예와 자존심을 뜻했다. 그걸 제 손으로 뽑는다는 건, 엄청난 불명예를 뜻하리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했다.

“고맙다……. 새끼야.”

“지훈도 날 위해서 아쵸랑 거래를 했잖아. 그러니 나도 당연히 지훈을 도와야지.”

칼콘이 부드럽게 어깨를 쓸었다. 굳은살 잔뜩 박힌 투박한 손임에도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후 약 2분 넘게 침묵이 이어졌다.

지훈을 위해서라면 당장에라도 불에도 뛰어들 칼콘과 달리, 민우는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비중이 높은 건 공포였다.

- 그즈즈즈즈즈즈즞!

FS유적에 있던 최상위 관리자.

그 녀석이 쐈던 엄청난 고열 레이저.

두려웠다.

너무나도 두려웠다.

지훈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욕심을 통한 자기보상 심리로 이어진다면, 민우의 PTSD는 공격성과 공포로 나타났다.

‘죽으면 어떡하지?’

무서웠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죽어서야 모두 허사였다.

FS의 최상위 관리자뿐만 아니더라도, 정글의 주인에게도 양팔이 골절된 민우였다. 거듭된 부상과 생명의 위협은 서서히 민우의 의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속으로는 아니었으리라.

으드드득.

긴 침묵 끝에 민우가 이를 갈며 말했다.

“씨발……. 존나 개 좆같네…….”

그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두려움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본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지훈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뒀다.

저게 정상이었다.

저게 당연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큰 공포를 가져다준다.

칼콘은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의지와 믿음을 가졌지만, 민우는 그렇지 못할 뿐이었다.

이 경우 칼콘이 대단한 거지 민우가 못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죽음이 가져오는 공포는 컸다.

뚝, 뚜둑, 뚝…….

민우가 울음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본인에 대한 분노,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것에 대한 서러움, 동료가 사지에 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수치심 등이 섞여 있었다.

“형님……. 진짜……. 죄송합니다. 저 너무 무섭습니다……. 죽는 게, 다치는 게……. 너무 무서워요……. 요즘 자다가도 악몽 때문에 벌떡벌떡 깨서…….”

으드드득!

민우가 어금니를 깨버릴 정도로 이를 심하게 갈았다.

본인의 포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행동은 아닌듯했다. 순수하게 도망친 것과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처럼 보였다.

“씨발……. 내가 각성자였으면……. 내가 이능 같은 거 쓸 수 있었으면……. 내가 강했으면……. 씨발……. 씨발……. 씨발…….”

결국 민우는 이쪽을 바라보고는 ‘죽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하고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가볍게 토닥여줬다.

“괜찮아. 그게 정상이야. 씨발 죽을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덜컥 나올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러니까 울지 마, 병신아.”

등을 토닥여주자 민우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계속 눈물을 토해냈다.

결국, 이번 일은 지훈과 칼콘 둘이서 가게 됐다.

“둘이서 가능할까?”

“미쳤냐, 가서 시체 될 일 있게.”

“그럼 어떻게 하려고? 내 아는 애들이라도 불러봐?”

칼콘이 아는 녀석 중에 각성자는 없었다. 그나마 쓸 만한 녀석은 갈색 고블린 ‘쉐그’였으나, 그 녀석은 밤도둑이지 전투에는 영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아는 사람이면 또 곤란했다.

‘수틀리면 버리거나, 미끼로 삼아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칼콘의 지인을 그렇게 버릴 수는 없었다. 덜컥 데려갔다가 없느니만 못한 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됐어, 필요 없어.”

“그럼 어떡해. 우리 둘이서는 못 가잖아?”

“나도 아니까, 조용히 하고 따라와.”

지훈은 벤츠를 몰아 빠르게 이동했다.

목적지는 용병 길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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