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 -->
싸늘하게 부는 겨울 밤바람마냥 분위기가 굳는다.
오고 가는 정겨운 말 따위는 없다. 눈빛에 분노, 불신, 혐오만을 담아 쳐다볼 뿐이었다.
“하하하하, 재미있어.”
아쵸프무자는 신선하다는 듯 말했으나, 입만 비틀 뿐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몇 번이고 죽일 수 있는 상대 앞에서 부리는 배짱은, 꼭 제 목에 송곳을 들이대는 것 마냥 아찔하고 또한 두려웠다.
하지만 가끔은 본인이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기 위해, 그런 위험한 배짱을 부려야 할 때도 있는 법.
지훈에게 있어서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때로는 진실을 알기 위해 바늘을 삼켜야 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제 목으로 꿀떡꿀떡 넘겼던 게 꿀인지 독인지도 모른 체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
“뭐가 그렇게 궁금해?”
아쵸프무자는 들어보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런 그녀의 손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넌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비틀어진 시간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일그러진 인과율을 바로잡으려고 하고 있지.”
저번에도 들었던 대답이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어째서?
아쵸프무자가 한낱 실력 좋은 마법사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뛰어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그가 왜 시간이네 인과율이네 하며 그딴 것들을 바로 잡으려고 한단 말인가?
“이유는?”
“어느 미치광이가 가져올 파멸을 막기 위해서.”
“그 미치광이라는 놈은 ‘그 녀석’을 얘기하는 건가?”
언젠가 한 번 이름을 들은 적 있기는 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 그 이름. 지구에서 만났던 거인이 말한 흑막과 차원 여행자가 입에 담았던 녀석이었다.
“하즈무포카. 맞아. 그 녀석이야.”
“그 녀석의 부하가 도대체 왜 날 찾아온 거지?”
거인은 분명 지훈을 회유하려고 했다. 또한, 언행으로 봤을 때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널 갖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뒷골목에서 이름 날리던 해결사, 실력 좋은 용병, 위법과 적법 사이를 줄 타는 무뢰한, 그리고 미래를 걱정하는 가장.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지훈보다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저번에 박물관에서 봤던 중국 국가 지정 헌터 천청운만 해도 그랬고, 굳이 멀리 갈 것 없이 한국만 쳐도 이름 석 자만 대도 ‘아 그 사람?’ 할 실력자가 많았다.
“내가 도대체 뭐 길래?”
질문에 아쵸프무자는 조용히 지훈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시선을 따라 손을 훑자 권능의 반지가 보였다.
“이런 썅……. 도대체 이 반지가 뭐지?”
“말 그대로야 권능에 도달할 수 있지. 네가 원한다면 신이 될 수도 있어. 그게 이 세상에 파멸을 몰고 올 광신이 될지, 비틀어진 시간과 인과율을 돌려놓을 정신 제대로 박힌 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소리. 겨우 각성 제어 하나로 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써는 여기까지밖에 얘기할 수 없어. 믿든 안 믿든 상관하지 않아. 물론 네가 지금 하는 의심대로,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겠지. 난 너의 의견을 존중해.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을 꿰뚫린다는 건 퍽 불유쾌한 일이었다.
“좋다. 그럼 권능을 얻을 수 있다고 치자, 빌어먹을 이블 포인트는 도대체 왜 넣어놓은 거지?”
“사용자를 선별하기 위해서야. 손을 쓸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전에 잘라내야 했거든. 네 선임자가 딱 그런 존재였지.”
선임자, 아마 서권곽을 말하는 듯했다.
“의외였어. 티 없이 깨끗한 존재는 작은 먹물 한 방울에도 너무나도 쉽게 변해버렸어. 난 그를 포기해야 했지.”
FS에서도 서권곽이 반지를 사용했었다는 식의 얘기를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서권곽은 죽었을 텐데? 나보다 훨씬 전에 행동한 건가?”
답은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확인을 위해 물었다.
“아니. 너와는 다른 시간이었지. 오늘이 몇 월 며칠이야?”
날짜를 말해주자 아쵸프무자가 피식 웃었다.
“공교롭네. 오늘이 딱 서권곽이 타락하기 시작한 날짜였어. 그리고 얼마 못 가 파멸을 선택했지.”
이로써 명백해졌다.
서권곽은 사망한 상태지만, 현재와는 ‘다른 시간대’에서는 반지를 사용했던 존재였다. 이는 곧 아쵸프무자가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존재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역시 인간은 아니었나.’
인간이 시간을 조종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퍽 다른 모습일 게 분명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광기 넘치는 곳이 됐으리라.
비슷한 곳을 꼽자면 지옥정도?
“너는 뭐지?”
“나는 아쵸프무자. 지금은 여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어. 아까도 말했듯, 너무 과한 정보는 없느니만 못하거든.”
목 바로 아래까지 욕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좋다, 그럼 하즈무포카는 뭘 하려는 생각이지?”
“말해준다고 해도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단지 녀석은 모든 질서가 파괴된 혼돈을 만들려고 해.”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이미 인류가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도덕과 인간적인 부분이 거세된 상태. 말이 질서고 국가지, 이미 세계는 힘 있는 놈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
“헛짓거리 하는군. 내버려 둬도 알아서 망할 텐데, 굳이 정성 들여 제 손으로 작살 낼 필요가 있는가?”
“뭔가 오해하고 있네. 저 녀석의 작업은 이제 시작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머나먼 과거부터 계속 진행 중이었어. 지금도 착실히 계단을 밟아가고 있지.”
“뭐?”
“잘 생각해봐. 차원 왜곡 현상이 왜 생겼을까?”
순간 머리가 굳었다.
포탈이 열린지 이제 근 6년.
세드에 대한 많은 수수께끼가 풀렸지만, 아직 그 누구도 포탈 그리고 차원 왜곡 현상에 대해서 밝혀내질 못했다.
“설마……. 포탈을 연 게 하즈무포카라고?”
아쵸프무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침묵 속에 긍정이 있다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왜? 무슨 이유로?”
“나도 이유는 몰라. 단순 변덕이라고 추측할 뿐이야. 인간도 가끔 변덕으로 벌레를 죽이거나, 가지고 놀잖아?”
인간이 벌레를 죽이듯, 인간을 미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존재라는 걸까? 본인이 벌레에 비유됐다는 불쾌함보다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그 녀석의 정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쵸프무자.
“그 질문도 답할 수 없어. 단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4만 시간 안에 포탈이 닫힐 거라는 거야.”
4만 시간.
약 4년이었다.
“포탈이 닫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남아있던 이들은 다음 포탈이 열리기 전까지 이 차원에 갇히게 되겠지.”
섬뜩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너한테는 굉장히 충격적인 얘기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현실이야. 그리고 세대가 반복돼서 인간이 지구와 포탈을 잊기 시작하면 또다시 새로운 포탈이 열릴 거야. 만약 인류가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면, 하즈무포카는 어떤 수를 써서든 그 기록을 없애려고 하겠지.”
기록을 없애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물음이 있었다.
“FS는?”
FS는 분명 기록을 남겼고, 몇 번이나 시간이 뒤틀렸음에도 그 기록을 꿋꿋이 지켜왔다.
“내가 했어. 하즈무포카의 눈을 피하느라 고생했지.”
“하…….”
그러고 보면 뭔가 이상했다.
인간, 오크, 버그베어, 엘프, 오우거, 트롤.
전부 이족보행 휴머노이드인데 그 모습이 전부 달랐다.
이에 의문을 가진 생물학자가 DNA 검사를 해 본 결과 비슷한 종도 있었으나, 몇몇 종은 아예 새로운 DNA 형태를 가졌었다.
진화학, 사회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본디 한 종족이 문명을 이루기 시작하면, 타 종족이 문명화 되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잠재적 생존경쟁자기 때문이다.
“설마 세드에 있는 종족들이 전부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맞아. 아마 그 녀석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까지 이 작업을 반복하겠지.”
충격에 말도 나오질 않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스치듯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 저희는 실패했습니다. 이에 후발 주자들은 저희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끔 기록을 남겼습니다.
FS들은 분명 본인들이 ‘실패’했다고 말했다.
도대체 무엇에 실패했다는 말인가?
그에 대한 진실이 적혀있는 기록은 분명 아쵸프무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물으려는 순간 아쵸프무자가 고개를 저었다.
“답할 수 없어.”
“다른 질문을 하지, 너는 내가 처음으로 널 선택한 필멸자라고 했었다. 그 뜻은 뭐지?”
아쵸프무자는 우습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선임자들은 내가 직접 선택한 자들이었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그 신념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무력까지 가진 존재들. 하지만 넌 그들과 달라.”
회색 인간.
검지도, 하얗지도 않아 어디에든 속할 수 있는 존재.
정확하게 지훈을 뜻하는 단어였다.
“마치 반지가 너를 부르기라도 한 것 같았어. 처음 있는 일에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그냥 믿어보기로 했어.”
못마땅한 까닭 하나로 사람을 몇 번이냐 태워 죽였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불편하게 사는군. 본인이 직접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대리인을 세워서 처리하려고 하지?”
“이번에는 여기까지밖에 알려줄 수 없어. 그 질문에는 나중에 다시 물어 봐.”
짜증이 솟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인간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존재지 않던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많았지만, 아예 앞이 보이지 않는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알겠군.”
“엄청난 일을 짊어진 소감은 어때?”
세계의 질서, 시간 그리고 인과율. 전부 본인의 어깨에 짊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딴 거 내 알 바 뭐지? 좆이나 까라. 난 3년 안에 돈 모아서 세드를 뜰 거다. 포탈이 닫히거나 말거나 그딴 거 내 알바 아니란 말이다.”
아쵸프무자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말일지도 모르나, 지훈에게 있어서는 저게 본심이었다.
이미 맛이 간 이 세계는 이미 시체처럼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아무리 인공호흡을 해도 변하는 게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썩어버린 세계의 기득권층이 돼 떵떵거리며 사는 게 차라리 좋았다.
“그 말은 곧 반지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야?”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지훈이 큰돈을 벌기 위해선 반지가 필요했다.
아직까지는.
“아니, 아직은 이 반지가 필요하다. 지금은 합이 맞으니 네 수족이 되어주겠지만, 그것도 내가 원할 때까지 만이다.”
타 죽을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녀가 힘으로 짓누를 생각이었다면, 이미 지훈은 몇 번이나 죽었을 목숨. 어차피 굽히고 들어가도 결과가 똑같을 바에는 가슴 당당히 펴고 제 할 말을 하는 게 좋았다.
“재미있네. 신선해. 이제 나도 앞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어. 하지만 너는 다를 거라는 기분이 들어.”
“멋대로 생각해라.”
질문이 끝났으니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이렇게 얘기나 하자고 온 건 아닐 텐데?”
빠른 태도 전환.
어차피 피차 친목을 도모할 사이는 아니었다.
아쵸프무자는 본인의 일을 위해 지훈을 이용했을 뿐이었고, 지훈은 본인의 미래를 위해 반지가 필요할 뿐이었다.
“어웨이큰……. 아니지, 이 시간대에선 그 이름이 아니야. 일본 개척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구 자료를 가져와.”
뜬금없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얼굴이 구겨졌다.
“그 방사능과 마법 오염 덩어리로 들어가라고?”
“맞아. 그 안에 내가 원하는 자료가 있어.”
FS유적 때도 너무 위험해서 개같이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방사능과 마법 오염으로 범벅된 땅으로 기어들어 가서, 도대체 뭔 연구인지도 모를 걸 가져오라고 한다.
어이가 없어졌다.
“개소리 집어치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는군.”
이에 아쵸프무자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넌 아직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거지. 원한다면 여기서 멈춰도 좋아. 보복은 없어, 모든 일을 없던 걸로 해줄게.”
싫으면 반지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당연히 거절했다.
“빌어먹을. 정보는?”
“모든 건 반지 안에 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쵸프무자는 녹아들듯 사라졌다.
- Ahne komistab taluma päikesevalgus, O minu talled.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차피 별 중요한 얘기도 아닌 것 같았기에, 바로 반지를 확인했다.
‘좆같이 힘든 일이겠군.’
제한 시간 15일.
일본 개척지에 다녀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