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휴식과 준비 -->
핸드폰을 열어 지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서 하도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출발하기 전에 스마트 폰으로 하나 사줬었다.
- 나 한국 개척지 왔다. 너 오늘 치료날짜니까, 혼자 가서 치료해라. 내 방 침대 시트 들어보면 검은색 카드 한 장 있으니까 그걸로 치료비 긁어라. 나 볼 일 있어서 늦는다.
어차피 돈만 있으면 가서 누워있다 오는 게 끝이었다.
딱히 같이 가줄 필요는 없었기에 카드 위치만 알려줬다.
문자 보낸 지 30초 만에 답장이 왔다.
게임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어? 왔어? 꽤 오래 걸렸네.
드문드문 살아있다는 연락은 했지만, 그래도 꽤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으니 걱정은 했던 걸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별일 없었다. 그리고 치료하고 오는 길에 맛있는 것도 좀 사 먹고 해라.
- ㅇㅋ ㄱㅅ
입가에 자잘하게 생겼던 주름도 잠시.
성의 없는 자음 네 개에 가장의 권위가 실시간으로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으나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딸도 아니고 여동생인데 뭘 바라겠는가.
적당히 사고나 안 치고, 병이나 나으면 그걸로 됐다.
‘에휴, 썅년. 제발 병이나 낫고 더는 아프지 마라.’
이후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착신음이 채 3번도 울리기 전에 받았다.
“자기야!”
강아지가 집 나갔다 돌아온 주인을 반기듯, 반가움과 기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다.
꼬리가 달려 있으면 붕붕 흔들었을 것 같다.
“어, 나야. 개척지 도착했어.”
“응! 나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
근 10일 동안 헌팅 다녀오면서 연락을 자주 못 한 탓에, 많이 외로웠나 보다. 특히 칼날 정글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아예 연락조차 되지 않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지훈 역시 시연이 보고 싶었던 마음은 마찬가지였던 터라,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을 접어두고 바로 보사로 향했다.
보사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잡생각이 떠올랐다.
중국 개척지에서 칵톨레므를 원격제어하던 연구원들이었다.
‘저 정도 기술이라면 사람에도 쓸 수 있을 거다.’
보사는 돈이 되는 기술이라면 모조리 연구하는 기업. 특히 군사 계통이랑 무기 계통은 환장하고 달려들었는데, 정황상 가능할 게 분명했다.
아마 지훈이 모르는 끔찍한 기술이 발명됐거나 준비 중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관계자와 국가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 몇몇만 알고 있을 거라고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자본주의에 이끌리는 과학.
도덕성이 결여된 기술.
저 둘이 합쳐지면 굉장한 결과물이 나오겠지.
사람 죽이는 무기를 개발하는 것도 효율로만 계산할 테고, 돈이 된다 싶은 연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개발한다.
저 건물 지하에서도 그런 위험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과 함께, ‘혹시 시연도 그런 연구를 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예쁜 얼굴로, 사랑스러운 미소를 가진 시연이 버튼 하나로 사람을 억 단위로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든다면?
기분이 찝찝해졌다.
‘만들었으면 무슨 상관이야. 나도 사람 여럿 죽였는데.’
애초에 똥 묻은 개가 벼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지훈이 시연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 세상 고민의 95%는 현실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시연이 주차장으로 달려왔다.
오래간만에 본다고 있는 힘 없는 힘 다 주고 나온 모습.
그 모습을 보자 찝찝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뭐 한다고 화장을 그렇게 열심히 했어.”
평소에 잘 안 그리는 아이라인도 세심하게 그렸고, 웬만해선 잘 안 하는 볼터치로 가벼운 홍조까지 넣었으며, 쉐도우를 이용한 음영으로 코도 높아 보이게끔 했다.
“오래간만에 보니까 예뻐 보이고 싶어서!”
나 예뻐? 하며 얼굴을 들이대는 시연.
두근!
저런 얼굴로 조금만 움직이면 입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오는 건, 참으로 사람 당황하게 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우심실을 노린 매서운 일격이랄까?
얼굴이 확 달아올라 얼굴을 돌리니 거기까지 따라와서 ‘왜, 왜~ 나 보니까 좋아서 죽을 것 같애?’ 하는 모습에 결국 반쯤 기절할 때까지 심장을 두드려 맞았다.
“자기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우리 뭐 할 거야?”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계속 운전만 했던 터라 조금 찝찝했다.
“씻고 싶은데, 괜찮아?”
모텔에 가자는 얘기였다.
부끄러웠던 건지 시연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싫은 건 아닌데……. 화장한 거 다 지워지잖아……. 예뻐 보이려고 아침부터 신경 써서 한 건데……. 음…….”
볼을 긁적거렸다.
“한 이틀 못 씻어서 냄새날 텐데, 상관없어?”
이동한다고 잠은 전부 차에서 잤던 까닭이었다.
시연은 벌어진 재킷을 양손 멱살 잡듯 잡고는 획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킁, 킁.
냄새 맡는 모습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아무 냄새가 안 나는 것 같은데?”
시연만 상관없다면야, 냄새 따위 무슨 상관이랴.
“그래, 그럼 밥부터 먹자. 뭐 먹고 싶어? 사줄게.”
“진짜~? 나 비싼 거 좋아하는데~”
“괜찮아.”
아무리 비싼 거 먹어봐야 한 끼에 200만 원 내외였다.
그 정도는 마음껏 내줄 수 있거니와, 시연 자체가 사치를 잘 부리지 않았기에 그 정도로 비싼 음식을 부를 것 같지도 않았다.
시연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 라면 먹고 싶어! 일본식 라면!”
머리를 긁적였다.
“일본식 라면? 그게 뭐야?”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지면서, 그 반사효과로 과거에 유명했던 일본 음식도 거의 다 빛을 바랐다.
지훈도 딱 한 번 먹어본 ‘초밥’이 일본 음식이라는 걸 몰랐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인스턴트 말고 다른 라면. 내가 잘하는 집 알아~ 가자.”
맛.
별로 없었다.
식사 후 같이 하룻밤을 보냈다.
열정적이고 행복한 시간도 잠시.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 내내 같이 있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쵸프무자가 말한 시간까지 별로 남지 않았다.’
정확한 시간은 말하지 않았지만, 가늠하자면 약 3일 전후로 연락이 올 것 같았다. 그 전에 만전을 기해놔야 했다.
해야 할 일은 정리하자면 크게 세 가지였다.
분실한 빈토레즈를 대신할 총기 구입.
총알에 불어넣을 공격용 마법 습득.
이능을 수련해 실용성 확보.
‘총부터 사자.’
새로운 이능을 얻었다지만 어차피 총이 없으면 쓸 수도 없는 애물단지였다.
현재 수중에 글록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9mm로는 영 믿음이 가지를 않았다. 탄환은 물론이오, 장탄수, 파괴력, 명중률 모두 소총보다 월등히 떨어졌다.
비무장 일반인에게 쏘면 모를까 지금 지훈이 주로 상대하는 적들은 전부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진 놈들. 손톱만 한 9mm 권총탄으로는 택도 없다.
오래간만에 승호의 총포상에 찾았다.
문지기로 서 있던 녀석이 꾸벅 90도 폴더 인사를 했다.
조직에 들어가기보단 혼자서 일을 처리했던 지훈에게 있어서 저런 인사는 영 떨떠름하게 느껴졌다.
“볼 때마다 얘기하잖아, 그런 거 하지 마라.”
“그래도 행님이잖습니까!”
“요즘 깡패 새끼들도 그딴 거 안 한다고, 엉?”
“저는 깡패 아니니까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행님!”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제가 좋다는 걸 뭐 어찌 막겠는가.
“승호 안에 있냐?”
“있긴 한데 손님도 같이 있지 말입니다. 근데 보니까 조금 이따가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슴돠.”
“한 번 보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 보다는 안에서 음료나 마시는 게 좋았기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이익 -
“아, 진짜 아빠! 아빠는 왜 항상 반대만 하는데!?”
문을 열자마자 총포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높은 목소리가 찡~ 하고 울렸다.
뭔 일인가 싶어 슬쩍 구석으로 이동하며 상황을 살폈다.
“네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동거야! 미쳤냐!”
“나 이제 다 컸다니까!? 동거하게 해줘, 내가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했어, 아니면 임신을 하게 해달라고 했어! 그냥 같이 살게만 해줘, 해달라고!”
대화 두 번 들으니 한 번에 상황 파악이 끝났다.
여자는 승호의 딸인 ‘승희’였고, 그 옆에는 딱 봐도 허세 끼 가득한 양아치가 거만하게 서 있었다.
나이는 많이 잡아봐야 고등학생 정도. 반면 승희는 이제 초등학생티를 갓 벗은 것 같았다.
‘하이고……. 중학생 때 일 쳤다는 건 들었는데, 아니 뭔 저 나이에 저렇게 큰딸이 있어.’
나이를 보니 꼬마의 거만한 태도가 대충 이해가 갔다.
승호가 뒷골목 일에서 손 뗀 지 약 3년.
지훈이야 최근까지 일 처리하며 다녔으니 이 사람, 저 사람 아는 사람이 많았지만 승호는 이제 뒷골목에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람이었다.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뒷골목에 옅게 걸쳐 있는 사람이나 새로 들어온 새내기는 잘 모르는 게 당연했다.
마음 같아서는 둘 다 치워버리고 빨리 총이나 보고 싶었지만, 승호에게 있어선 중요한 문제인지라 가만히 지켜봤다.
“안 돼, 미친년아! 당장 집으로 들어가, 너 이제 외출 금지니까 그렇게 알아!”
“아빠 진짜 존나 밥맛이야!”
결국 승희가 울음을 터트렸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자 화가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아니 왜 내 여자 울리고 그래요! 미쳤어요?”
그 모습을 보자 어이가 우주까지 날아가는 걸 느꼈다.
‘내가 봤을 때 미친 건 네놈 같다.’
저게 어디 제 여자친구 가족한테 할 말인가?
뭐 이상한 연애소설이나 영화 같은 거 보고 저러는 모양인데,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행동이었다.
민머리인 승호의 머리가 붉으락푸르락하며 힘줄이 잔뜩 돋아났다. 그 표정이 딱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샷건을 갈기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짓 했다가는 딸과의 관계에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깊디깊은 골이 생길 게 분명하다.
도와줄까 싶은 심정으로 슬쩍 승호에게 손짓했다.
- 야, 도와줘?
승호는 슬쩍 눈만 옮겨 지훈의 존재를 확인했다.
승호에게 있어서 지훈은 달갑지 않은 순간에 맞이한 불청객이었으나 지금으로써는 딱 필요한 인물이기도 했다.
눈이 마주쳤기에 바로 몸으로 말을 건넸다.
승희 남자친구를 가리킨 후,
한 대 때리는 시늉을 한 뒤,
여부를 묻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뜻이 전해진 건지 승호가 한숨을 내쉬며 끄덕였다.
승낙 신호였다.
승호야 승희의 아버지니 딸 보는 데서 제 손으로 남자친구를 조질 수 없겠지만, 지훈은 승희와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몇 번 보긴 했지만, 승희가 그걸 기억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는 곧 지훈이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어떻게 조지든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승희가 지훈을 원망하긴 할 테지만…….
어차피 둘이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이었다.
승호는 가족에게 자기가 뒷골목 시절에 알던 사람들을 절대 소개 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고, 지훈 역시 그런 승호의 마음을 알았기에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다.
승희를 봤던 것도 길 가다가 멀찍이서 본 게 다였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예의 좀 가르쳐 줘 볼까.’
친구를 곤란하게 함은 물론, 지훈의 시간까지 허비하게끔 만든 녀석에게 분노를 풀어 줄 시간이었다.
최근 들어 이상하게 별 시답잖은 놈들이랑 엮이는 것 같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세상이 미쳤는데 그 주민이 또라이가 아니면 그것도 또 코미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