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07화 (107/173)

<-- 도망치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말이지. -->

집.

침대에 누워 멍 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별 탈 없이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엄청난 일에 휩쓸린 게 아닐까 싶은 걱정이 앞섰다.

- 아쵸프무자는 이 세상의 규칙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어. 그녀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 가자.

- 나는 균형을 맞추고 있어. 일그러진 퍼즐 조각들, 뒤틀린 인과율, 뒤집어진 시간들을 다시 돌려놔야 해. 그 과정에서 네가 필요한 것뿐이야.

- 원한다면 반지는 버려도 돼. 왜냐하면 내가 널 선택한 게 아니라, 네가 날 선택한 거거든. 필멸자 중에는 처음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정보도 부족하거니와, 뭐가 옳은지도 판단할 수 없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좆같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담배를 태우는 것 밖에 없었다.

‘반지를 버릴까?’

보복만 없다면 제일 좋은 선택지였다.

아무리 지훈이 강력해졌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을 기준으로 봤을 때 얘기였다.

집단을 상대로 혼자서 싸우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실제로 한국 정부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가정 하에, 저등급 각성자가 드문드문 섞인 군대와 싸운다고 가정한다면?

진다.

말할 것도 없었다. 계좌 동결은 당연하고, 공권력의 추적 때문에 손발이 죄다 잘려나간다.

어쩌다가 싸울법한 장비를 얻었다고 치자.

그래도 진다.

상대는 체계적인 군대였고, 집단이었다.

아무리 호구 내지는 집지키는 개 취급당하는 군대라지만, 그건 아군 입장에서 봤을 때나 할 수 있는 얘기다.

적으로 보면 그만큼 까다로운 상대가 없었다.

사람이 이정도인데, 괴물 녀석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사람이 맞긴 한 건가?’

확신할 순 없었다.

사람이 변이계 이능을 사용해서 괴물로 변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반대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고대어는 물론 전이계 이능까지 썼다.’

현재까지 인간 그리고 종족 동맹이 맺어진 그 어느 종족 중 그 누구도 전이계 이능을 사용한 예가 없었다.

‘차원 여행자인가? 아니면 아쵸프무자와 비슷한 존재?’

전부 추측일 뿐 정답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길 수 있으면 반지를 품지만… 이길 수 없다면?’

버려야 할까?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도 느꼈지만, 이 반지는 너무나도 달콤한 독사과였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맛을 즐겨도 괜찮지만, 입에 넣으면 넣을수록 점점 더 독에 중독되어 간다.

하지만 그 맛이 마치 천상과 같아 쉬이 버릴 수 없었다.

부들부들…

반지를 집어 던지려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변기에 집어넣고 물만 내려도 버릴 수 있었다.

주인의 허락도 있으니 보복도 없을 거다.

근데 버리지 못했다.

‘씨발….’

강제 각성, 각성 제어, 주변 이능 감지, 마법 식별 및 마법 저항, 상태 정보 제공, 몸 상태 진단, 생명 유지, 자동 보안, 기타 잡다한 정보에 대한 질의응답.

이 작은 반지에 저 기능들이 전부 다 들어가 있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저런 아티펙트는 찾을 수 없겠지.

욕심이 났다.

‘이걸 버리고 안전해지면 그걸로 끝인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아도 충분하긴 했다.

안전한 일만 찾아다녀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고, 회사나 길드에 취직해도 안정적인 벌이가 보장됐다.

근데 그렇게 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도망치는 거니까.

개척지에 넘어오고 한참동안이나 다른 사람 눈치 보며, 위험한 일 도망치며 하수구 쥐새끼마냥 썩은 고기를 뜯어먹고 살았다.

그때야 약한 몸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지금 지훈은 각성자였고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근데도 도망친다고?

강한 힘을 얻었는데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 때는 비무장이었다. 무기도 없었고, 동료도 없었다. 내가 지는 게 당연했어.’

만약 그 녀석을 잡는 데 특화된 무장을 한 채, 동료들과 함께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런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 않은 상대다.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필요는 없다.’

쥐새끼에게 있어 회피와 도주는 어쩔 수 없는 선택.

하지만 포식자에게 있어서는 필수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모조리 잡아먹어 주마.’

이를 꽉 깨물고는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손에 꼈다.

- 인식. 적합한 사용자. 반갑습니다, 김지훈님.

‘이 반지는 내 꺼다. 최후의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사실 저 위에 있던 것들을 다 제외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제일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이 반지를 기점으로 인생이 변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까닭에 지훈에게 있어 저 반지는 단순한 아티펙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 ☆ ☆

일단 반지를 더 가지고 있겠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몇 가지 준비해야 할 사안이 있었다.

바로 힘이다.

상대방이 누구고, 어떻게 싸우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준비하는 건 효율이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바로 시작했다.

바로 장비 점검이었다.

현재 지훈이 가진 아티펙트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1 - 습작 954번. (B등급, 마법 강화)

2 - 업을 짊어지는 자. (B+등급, 신원 미상의 영혼)

3 - 방탄모 (F등급)

4 - 마력감지 안경 (?등급, 사용하지 않음)

5 - 반 쯤 작살이 난 D등급 방탄 코트.

6 - 권능의 반지 (논외)

온 몸에 두르고 있어서 몰랐는데, 정작 하나하나 따져보니 영양가 있는 물건은 무기밖에 없었다.

유일한 B등급 방어구인 습작 954번 역시 방어력은 절륜했으나, 마법을 쓰지 않아 빛이 바래는 감이 있었다.

‘방탄모는 아예 F등급인가.’

저항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을까?

맨몸으로 맞아도 즉사할 위험이 적었기에, 빠른 이동 및 아크로바틱에 방해가 되는 방탄모는 잘 쓰지 않게 됐다.

사실 워낙 엄폐를 철저히 하거나, 단거리보다 중거리 전투를 선호, 혹은 빠른 속도로 이동했기 때문에 정밀 사격을 맞을 일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머리 방어구는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 방탄성능 보다는 방검이나 충격 완화를 할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하다.’

특히 뇌진탕이 문제였다.

몸이 강화되면서 다른 기관은 딱히 문제가 없었지만, 뇌까지 단단해질 수는 없었다.

까닭에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를 상쇄할 수 있는 방어구가 필요했다.

‘그 다음엔 부츠인가.’

현재 지훈은 일반 워커를 사용하고 있었다.

딱히 발에 총 맞을 일도 없거니와, 덫 혹은 위험한 지형을 밟았을 때 말고는 위험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돈이 썩어 넘치는 놈 아니고서야 함정용 가시에 비싼 신금속을 때려 박을 놈이 몇이나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몸통이다.’

제일 머리 아픈 부분이었다.

여태까지는 주로 탄막(화살, 탄환, 총알)을 쏟아내는 적을 상대했었다. 그러니 OTN탄에 저항이 있는 D등급 방탄 코트로도 충분했지만…

흑인(파이로), 최상위 관리자, 정체불명의 남자 등.

공격 방식이 다른 상대를 만나자 얘기가 달라졌다.

파이로 같은 경우 발현계 이능을 바탕으로, 강력한 화염 공격 혹은 폭발을 이용해서 공격했다.

‘그 새끼 공격은 액체형 화염처럼 들러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었다. 방탄 성능이 아무리 좋아봐야 모조리 녹아버리면 전부 무용지물이야.’

최상위 관리자 역시 비슷했다.

일반형 탄환이 먹히지 않자 고열 레이저로 코트를 아예 절단해 버렸다.

‘결국 방탄능력은 조금 포기하더라도, 화염 및 물리 내성 쪽으로 가야하나.’

그래야 했다.

정체불명의 남자는 변이계 이능을 바탕으로 괴물처럼 변한 뒤,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아마 이 녀석을 상대할 때에는 방탄복보다는 칼콘처럼 갑옷을 입는 게 낫겠지.

‘대충 저렇게 사면되겠군.’

대충 뭘 사야할지는 모두 정해졌다.

그럼에도 남은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이건 어쩐다….’

바로 AMP이었다.

지금은 조그마한 주괴 형태로 갖고 있었지만, 맨 살에 가까이 닿으면 닿을수록 능력이 강화되는 물건이었다.

그 말은 곧 실험 때 썼던 장갑처럼 몸에 항상 닿는 장비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한참 전투해야 하는데, 손에 꽉 쥐거나 주머니에 넣어 놓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모르겠다. 이건 전혀 모르겠어.’

장갑은 이미 습작 954번이 있기 때문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 문제는 알 만한 사람과 상의해 보기로 했다.

‘그럼 출발할까.’

“야, 나 나갔다 온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지현에게 말했다.

“엉~ 다녀와.”

최근 채팅에 재미가 붙었는지, 어째 시간만 나면 컴퓨터 앞에 들러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니터 안으로 들어가겠다, 들어가겠어.”

“걱정 마셔~”

☆ ☆ ☆

금속을 이용해 장비를 만들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정답은 바로 ‘대장간’ 혹은 ‘공장’이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양산형 제품밖에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AMP 같은 특이 성질 금속을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럼 자동적으로 전자를 찾아가야 하는데…

총이나 빵빵 쏴재끼고, 장비라면 죄다 상점에서 구한 지훈으로서는 알고 있는 곳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찾아갈 곳은 하나였다.

뚜벅, 뚜벅, 뚜벅.

퀴퀴한 썩은 곰팡이 냄새, 사람의 공포를 자극하는 은은한 화약 냄새 그리고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는 듯 위협하는 것 같은 C4.

석중의 가게였다.

끼이익 -

문일 열고 들어가자, 셔터가 닫힌 카운터가 보였다.

‘뭐야?’

잠겨있지 않았으니 부재중은 아니라는 소리인데, 석중은 도대체 어디가고 없단 말인가?

약 5분 정도 기다렸음에도 소식이 없자, 앉아서 기다릴 요량으로 구석에 다가갔다.

오락실에서나 보일법한 등받이 없는 의자가 보였다.

‘뭐야. 피?’

보통 의자는 사람 앉는데 쓰는 물건이거늘, 이상하게 의자 다리에 검게 말라붙은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도대체 의자로 뭔 짓을 한 걸까 싶은 생각도 잠시.

오크 부랄 말린 것 씹는 양반이 뭔들 못할까 싶어 추측하는 걸 그만둬 버렸다.

기다린 지 10분 째.

투척용 단검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놀았다.

기다린 지 15분 째.

밖에서 캔 음료를 하나 사 온 뒤, 투척용 단검을 던지는 연습을 했다.

던지는 것엔 소질이 별로 없는지 잘 맞지 않았다.

드르르륵!

20분 째 되자 셔터가 열리며 석중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라, 니 왜 여있니?”

“할배 뒈지기 전에 낯짝이나 한 번 더 보러 왔수다.”

심심풀이로 던지던 투척용 단검을 원래 전시되어 있던 곳에 돌려놨다.

“물건 내버려 두고 자리 막 비워도 되는 거요? 누가 훔쳐 가면 어쩌려고?”

도둑이 든다는 말에 석중이 프시식 하고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내 가게에 밤벌그지? 여 아무나 잡고 물어보라, 어느 간땡이 터진 쓰애끼가 내 집에서 물건 갖고 가드나.”

맞는 말이었다.

가져가봐야 3일 안에 죽는다.

게다가 카운터 밖에는 전부 일반 물품 및 싸구려 밖에 없으니, 가져가려면 가져가라는 심보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소?”

“내 손주랑 통화 좀 했디.”

손자?

악마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사람한테 손자라는 말이 나오니 퍽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이고, 아들은 고사하고 손자도 있소?”

“너 이 새끼 날 도대체 어떻기 보는 거니?”

“뭐긴, 마누라는 고사하고 돈 된다면 아들새끼도 인육으로 팔아버릴 노인네로 보이지.”

석중이 불쾌한 듯 잠시 얼굴을 굳혔으나 이내 웃었다.

평소 행실이 있으니 ‘저렇게 볼 법도 하디.’ 싶었나보다.

“거 어린 쓰애끼가 공부 하라고 학비 대줬드마, 까트나 빨메 텔런트 한다고 으슬렁거리는 거 아니겠니? 거 한 번만 더 그러면 좆 대가리 잘라버린다 했디.”

“하이고, 거 누구 핏줄 아니랄까봐 애 떡잎이 벌써부터 남다르네. 그러지 말고 아예 이쪽으로 데려오지 그러쇼?”

당연히 엿 먹으라는 심보로 던진 농담이었다.

내일 죽을 사람 아니면 뒷골목에는 그림자도 안 비추는 게 보통이었다.

“거 바지 까 보라. 네 좆 대가리 먼저 잘라다, 젓갈 담아 묶자. 거 참 때깔 좋게 맛있을 것 같지 않니?”

흔히들 노인들이 하는 ‘까불면 고추 따먹어 버린다’는 농담을 참 살벌하게 하는 석중이 아닐 수 없었다.

뭐 항상 저랬기에 픽 웃어 넘겼다.

미친 양반 상대하며 저런 농담에 화냈다가는 예전에 화병으로 요단강 건넜다.

더 이상 실없는 농담은 그만두고 본론을 꺼냈다.

“됐고, 솜씨 좋은 대장장이 좀 찾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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