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05화 (105/173)

<-- 위험한 진실에 가까워지다. -->

끼이이익!

자전거가 기괴한 소음을 내며 멈췄다.

보통 사람이나 경찰이었다면 무시하고 달렸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본능 한 구석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라도 보내는 듯 온몸에 긴장이 흘렀다.

“누구냐, 너.”

자전거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후드 앞주머니에 양 손을 집어넣었다. 오른손에는 K5, 왼손에는 삼단봉을 집었다.

상대가 고등급 각성자라면 쓸모없을 무장.

그럼에도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Ma ei oska keelt on halvem võistlused. Et rääkida iidse keele. (하등 종족 언어는 몰라. 고대어로 얘기 해.)”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태까지 고대어로 대화를 한 녀석은 딱 넷이었다.

아쵸프무자, 칼콘, 최상위 관리자, 차원 여행자.

아쵸프무자는 애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고,

칼콘은 반지를 통해 언어를 습득했으며,

최상위 관리자는 원어가 고대어로 보였고,

차원 여행자는 애초에 언어에 초탈한 존재로 보였다.

‘도대체 뭐하는 새끼야?’

외모로 봤을 때 동양인은 아니었다.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카락, 금색 눈동자.

이국적인 느낌?

아니다.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콕 집어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마치 다른 존재가 인간 거죽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양 이상해 보였다.

‘첫 번째 개척자는 아니다. 그 녀석들은 이미 멸망했어.’

올텅이나 최상위 관리자 같은 경우 생존해 있긴 했지만, 전력이 필요했기에 장거리 이동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한글을 모르는 걸 봤을 때 차원 여행자일 가능성 역시 없었다.

‘나 말고 또 다른 반지 사용자?’

저번 유적 탐험 시 얻은 정보로 봤을 때, 지훈 말고도 다른 ‘선임자’ 들이 있다고 했었다. 설마 싶어 빠르게 녀석의 손을 훑었으나 역시 반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뭐하는 새끼야, 아쵸프무자 같은 놈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위험한 상대였다.

현재 지훈은 B등급 각성자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지만… 아쵸프무자는 아예 등급제로 평가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논외’ 등급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i, vahepeal asi ei ole hea. (아냐, 그러지 마.)”

생각을 읽힌 건지, 행동을 읽힌 건지는 몰랐다.

상대가 예상한 행동을 해 봐야 금방 대응당할 게 분명했기에, 도망간다는 선택은 지워버렸다.

“Mis on umbes(무슨 용건이지)?”

지훈은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언제든지 K5를 꺼내 사격할 수 있게끔 자세를 잡으며 물었다.

남자가 씨익 웃으며 고대어로 말했다.

“Kas olete jõudnud pakkumisi(제안을 하러 왔어).”

“Ütle mulle(말해).”

“Tule koos meiega. Oh, nüüd sa hakitud lastetu, et peteti a'cho phumu-mzah. (우리와 함께 가자, 너는 지금 아쵸프무자에게 속고 있는 거야.)”

아쵸프무자의 이름이 나오자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Ma ei tea, kuidas seda öelda.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Sa teame nüüd need kutid tahavad teha? (너는 지금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어?)”

항상 궁금해 하던 내용에 날카로운 질문이 파고들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얻는 진실.

무지를 통해 얻는 안전.

현재로선 저 둘 사이를 외줄타기 하는 중이었다.

어느 쪽이든 섣불리 다가갔다간 균형이 무너진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호기심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Ma ei tea. Sa näed ei tea?(모른다. 그러는 너는 아는 모양이지?)”

“Selle olemasolu is'm püüdnud hävitada maailma.(그 존재는 이 세상의 규칙을 어그러뜨리려고 하고 있어.)”

뚱딴지같은 소리에 얼굴이 구겨졌다.

세드에 오래 살며 이런저런 정보를 들은 지훈이었거늘, 아쵸프무자 같은 힘을 쓰는 존재는 단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날아오는 전격을 정지시키고, 실제 팔과 차이가 전혀 없는 마법 의수를 들고 다니며, 차원까지 연결시키는 존재다.

그런 아쵸프무자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지훈의 힘을 빌리는 번거로운 짓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시간을 몇 번이나 돌려가며, 기나 긴 세월을 감수하며 말이다.

이해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뭔가 스쳐지나갔다.

상식을 벗어난 존재를 인간의 상식과 잣대로 판단하는 게 과연 옳은 시도인가?

아니다.

칼콘과 가벡만 해도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존재다.

근데 아쵸프무자를 인간의 상식으로 판단한다?

성립될 수 없는 얘기다.

생각이 위험한 진실 쪽으로 기울었다.

손만 뻗으면 당장 알아 볼 수 있는 상태.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Miks see nii on?(이유는?)”

“Nüüd ma ei saa öelda. Aga ma arvan, et kui me teeme seda koos temaga ja suur sätestab ei anna mulle selle aja.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우리가 모시는 위대하신 그 분과 함께할 생각이 있다면 그 때 말해주도록 하지.)”

저 남자는 아직 지훈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는지, 가벼운 회유의 말을 꺼냈다.

“Kas teil on tõendeid, et sa räägid tõtt? (네가 말하는 게 진실이라는 증거는 있나?)

“Pime usk nähtamatu vaesed lambad, kes ppunyiji ainult oodata ja apokalüptiline doom. (믿음을 보지 못한 불쌍한 눈먼 양에게는 파멸과 종말만이 기다릴 뿐이야.)”

마치 얕잡아 보듯 내려다보는 말투였다.

‘뭐하는 녀석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대충 심증만이 있을 뿐이었다.

지훈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1 - 아쵸프무자의 이름을 언급한 것을 봤을 때, 녀석은 반지의 정체 외에도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 - ‘우리’리는 단어가 사용됐다. 아쵸프무자처럼 개인으로 움직이는 녀석들은 아니고,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3 - ‘위대하신 그 분’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차원 여행자와 FS들이 아쵸프무자를 부를 때 썼던 단어와 일치한다.

4 - 무슨 이유에서든 저 녀석은 아쵸프무자가 세상의 규칙을 어그러뜨리려(종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뭐든 생각해내야 한다.’

뇌를 터져버리기 직전까지 혹사시키길 몇 초.

문득 러시아 하수도에서 아쵸프무자가 차원 여행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 녀석의 짓인가?

- 감히 제가 그 분의 이름을 입에 얹어도 되겠습니까?

- … … 님의 … 이었습니다. 점프 잼을 원…

중요한 부분에서 기억이 흐릿했다.

‘씨발!’

잘려나간 부분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차원 여행자와 만났을 당시 그녀는 부상당한 상태였다.

그 얘기는 곧 ‘아쵸프무자보다 먼저’ 점프 잼을 찾으려는 녀석이 있었다는 얘기.

‘결국 그 녀석이라는 새끼가 저 놈들의 수장이란 말인가.’

일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 있었다.

‘고래 싸움에 의도치 않게 껴버렸다.’

지훈에게 있어 아쵸프무자는 ‘반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상, 곧 집주인과 월세민 그 이상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다.

다른 집주인들 끼리 힘 싸움 하는 데 끼고 싶지 않았다.

“Saab olema meie juures?(우리와 함께 할 텐가?)”

“Ei ole huvitatud. Vaadake teine noormees. (관심 없다. 다른 놈 알아 봐.)”

절대 사양이었다.

지훈은 목줄 매인 개 마냥 살고 싶지 않았다.

까닭에 길드도 들어가지 않았고, 아이덴티티나 보사 사설 경비도 포기했다. 근데 고래 싸움 최전선으로 뛰어든다?

혀 깨물기 전까지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프히히히힉! 히익, 크이이….”

남자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언제라도 싸움이 날 수 있음을 직감했다.

후드에 숨겨놨던 K5와 삼단봉을 꺼내 들었다.

“Võitle koos minuga. Mul on? (나랑 싸우자는 거야?)”

“Kui te vältida võitleb. (피할 수 없다면.)”

상대방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저 녀석이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면, 강력한 녀석이 이런 자리에 튀어나오진 않았을 터.

어느 정도 승산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지금 나한텐 AMP이 있다. 여차 싶으면 가속 이능으로 이탈하면 그만이다.’

대로까지 달려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면 녀석도 쫓아오지 못하리라. 정신 나간 놈 아니고서야, 사람들 다 보는 대로 한복판에서 싸움을 걸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대치만 약 20초.

갑작스러운 반지의 경고와 함께 남자의 몸에서 기괴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 강력한 변이계 이능 감지. 주의!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부터, 온 몸의 뼈가 뒤틀리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도 잠시.

눈앞에 있던 남자가 높이가 3M는 될 법한 괴물로 변했다.

“이런… 미친?”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변이계 이능은 보통 팔이나 다리 같은 국소 부위를 변이시키는 게 보통이었다. 그나마도 마취제 없이 수술하는 것 마냥 극심한 고통이 유발되는데, 온 몸을 변이시킨다?

등급을 둘째치고 쇼크사 하지 않은 게 더 신기했다.

감탄도 잠시. 가만히 있다가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탕! 탕!

고요한 새벽 원룸촌에 시끄러운 총성!

‘제발, 제발… 효과 있어라!’

기도와 달리 9mm 탄환은 녀석의 살갗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전용 장비가 있으면 모를까, 비무장 상태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씨발!’

삼단봉을 집어 던져 버리곤, AMP을 집었다.

‘이능 발동, 가속!’

우응 -

AMP이 작게 진동함과 동시에 온몸이 빠르게…

- 강력한 전이계 이능 감지! 주의하십시오!

움직이기도 전에, 눈앞에 괴물이 튀어나왔다.

전에 딱 한 번 봤던 기술.

아직 인간으로서는 단 한 번도 관측되지 않은 이능이자, 차원 여행자가 썼던 강력한 능력…

공간 도약이었다.

‘이런 미친…!’

괴물의 손을 휘두른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

재빨리 손을 올려 방…

퍽!

세상이 빙글 도는 착각과 함께, 건물 외벽에 부딪쳤다.

쾅!

등에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는 걸 봤을 때, 견갑골 내지는 내장이 작살이 난 것 같았다.

“꺼, 꺽!”

- 신체를 재생합니다. 신진대사가 가속됩니다.

머리는 도망쳐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으나,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눈만 굴려 괴물이 다가오는 걸 쳐다봤다.

‘씨발… 여기까진가.’

죽음을 직감했다.

탕, 탕, 탕, 탕!

오른손만 들어 괴물에게 K5를 사격했지만, 괴물은 막지도 않고 맨몸으로 맞으며 전진했다.

이내 주먹을 들어 내려치려는 찰나…

멈칫.

부들부들…

괴물이 사시나무 떨듯, 온몸일 떨기 시작했다.

‘뭐…지?’

끊어져 가는 의식 사이로 괴물을 훑었다.

괴물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만난 듯 떨리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오른쪽으로 꺾였다.

눈동자를 따라 지훈도 고개를 돌렸다.

철컥.

여자 하나가 건물 문을 열며 나타났다.

피처럼 붉은 머리,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 스키니진. 그리고 화상으로 일그러진 왼쪽 얼굴.

아쵸프무자였다.

괴물은 아쵸프무자를 보자, 마치 호랑이를 앞에 둔 토끼처럼 벌벌 떨었다. 크기 차이만 약 1.5M가 넘게 났지만, 그 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모습이었다.

“Ma lihtsalt üritan kirjeldada, mis juhtub nüüd…. (다, 당신이 어째서 이 장소에….)”

아쵸프무자는 그 얘기를 다 듣지도 않았다.

“Ma viipas ja ütles, härrad mimul kõik teised sureb La. (내가 손짓하며 말하니, 미물들이여 모조리 타 죽으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괴물이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비명도 잠시, 아쵸프무자는 약 3초 정도 지켜보다 불을 꺼버렸다.

“maha(꺼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괴물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마 전이계 이능으로 도망간 듯싶었다.

아쵸프무자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와, 지훈을 내려다봤다.

“죽었어?”

“거의… 끄으, 씨발…!”

재생이 시작됨과 동시에, 아득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래서, 아직도 진실이 궁금해?”

아쵸프무자가 물었다.

진실.

사실 그딴 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지 지금 본인이 반지를 사용하는 대가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사실만 궁금했다.

그게 미친 마법사의 유희라면 적당한 선에서 어울려 주면 됐고, 세상에 균열을 가져올 재앙이라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B등급이면 충분하잖아?’

사실 더 이상 반지가 없어도 사는데 무리가 없었다.

반지를 뺀다고 해서 능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빠른 성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때가 되면 알려줄게. 하지만 지금은 아냐.”

아쵸프무자는 만난 후 처음으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좆같은 소리 집어치워.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될 거라면, 이딴 빌어먹을 반지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

반지를 빼서 아쵸프무자에게 내밀었으나, 받질 않았다.

“네가 지금 하는 일이 이 세상에 파멸을 가져올 건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 나는 균형을 맞춰야 해. 일그러진 퍼즐 조각들, 뒤틀린 인과율, 뒤집어진 시간들을 다시 돌려놔야 해. 그 과정에서 네가 필요한 거고.”

균형, 인과율, 시간.

그딴 거 좆이 되던 나발이 되던 알바 뭐란 말인가?

지훈은 소시민이었다. 그런 일에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도대체 왜 나지? 나를 왜 선택한 거지?”

선택이라는 말에 아쵸프무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 말을 틀렸어. 내가 널 선택한 게 아니라, 네가 날 선택한 거지. 필멸자 중에는 처음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들을 전부 되물었지만, 아쵸프무자는 대답하지 않고 서서히 녹아내릴 뿐이었다.

“언제나 말했듯, 시간이 부족해. 그 질문은 다음 만남까지 스스로 생각해 봐. 원한다면 반지는 버려도 좋아.”

“그게 무슨 말이지! 이봐! 아쵸프무자… 이봐!”

미친 듯 불렀지만, 아쵸프무자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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