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엮이는 법. -->
그 모습을 쌍안경으로 지켜보던 한 인영이 있었다.
녀석은 눈을 조심스럽게 내려, 메모지를 쳐다봤다.
영어로 적혀 있었는데, 마치 분노가 흘러나오기라도 할 듯 휘갈겨 쓴 메모였다.
황인종, 키 170 후반, 마른 체형, 과격한 행동, 전투에 익숙함, 해당 연구와 관련이 있음, 정부 요원은 아님, 주무장은 빈토레즈와 글록, 창을 쓰는 모습도 보였음.
‘녀석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높은 확률로 정답인 것 같았다.
인영은 급히 핸드폰을 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서울, 언더 다크 휘하 병원.
파이로의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 - 띠리리 -
시간에 따라 부상이 치료 된 까닭일까?
거의 빈사상태였던 파이로가 조금 나아진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
… … … …
조용히 듣고 있기를 몇 분.
파이로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의 핸드폰 외곽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찾았다, 빌어먹을 황인종 새끼.’
으드득.
파이로가 어금니를 박살내기라도 할 듯, 이를 꽉 물었다.
A등급 각성자이자, 언더 다크의 집행자인 파이로는 여태껏 싸움에서 져 본 기억이 없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정체도 모르는 각성자에게 패배했다.
그 사실은 순식간에 언더 다크에 퍼져나갔다.
파이로가 졌다고?
그 새끼 성격 개차반인데 쌤통이군!
나대다가 언제 한 번 고꾸라질 줄 알았어.
본디 사람이 싸움을 하다보면 질 수도 있는 법. 하지만 패배를 모르고 독주해왔던 파이로는 달랐었다.
지훈에게 졌다는 그 사실이, 성역마냥 한 번도 더럽혀지지 않은 파이로의 자존심에 커다란 흙발자국을 남겼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언더 다크의 명령도, 집행자로서의 의부도, 승진을 위한 실적도 아니었다.
본인의 자존심을 짓밟은 상대를 없애버리는 거였다.
“그 녀석 추격해. 내가 직접 간다.”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았지만 상관 않는 눈치였다.
‘그 때는 방심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격에 작살을 내 주마.’
파이로는 맞고 있던 항생제를 떼어내고는 자리를 일으켰다.
부상으로 인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 무엇도 파이로를 말릴 수 없었다.
☆ ☆ ☆
관찰하던 언더 다크 정찰꾼이 전화를 끊고 이동했다.
아니, 이동하려 했다.
“Sa jälitama, et mees on(너도 저 녀석을 쫓아)?”
등 뒤에 후드를 눌러 쓴 사람만 없었다면 말이다.
‘뭐야… 도대체 언제…!’
언더 다크 정찰꾼은 품에서 남몰래 소음기가 달린 토카레프를 꺼냈다.
대답이 없자 후드가 되물었다.
“See oli korsett. Ehk keel on halvem võistlused? (맞아. 그랬었어. 하등 종족은 이 언어 모르지?)”
언더 다크 정찰꾼이 토카레프를 재빨리 뽑으며 사격!
푝푝푝!
웅 -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착각과 함께 후드가 사라졌다. 다시 그 녀석이 나타났을 때에는 언더 다크 정찰꾼의 가슴에 후드의 팔이 박혀있었다.
“Me tähenda Sir Lord tahtnud teda. Kahjuks ei hanteneun saate nädalal. (우리 주인님께서 저 녀석을 원해서 말이야. 안타깝게도 너희한테는 못 주겠네.)”
웅 -
후드는 손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뒤 사라져 버렸다.
기이한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 ☆ ☆
한편 실험실 안에는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정철수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안전을 지켜주던 경비가 본인들에게 총을 겨눴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다 병신인줄 아나보지? 너는 네가 똑똑한 줄은 알아도, 세상 사람들 중 당신만큼 똑똑한 사람 많다는 건 모르나 보군.”
퍽!
경비가 정철수 교수의 안면을 때린 뒤, 옆에 있던 연구원에게 총을 발포했다.
푝,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사람이 쓰러졌다.
“교수와 조교 빼고 모조리 죽이고 불 질러버려. 연구 자료 데이터와 연구원들을 데리고 이탈한다.”
경비는 명령을 내린 뒤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예, 의원님. 개미들이 도망갈 것 같아서 먼저 처리했습니다. 연구 데이터 들고 그 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경비는 한동안 통화 상대에게 지시를 들으며 ‘네, 네.’ 하는 말만 반복했다.
“와중에 실험을 받던 각성자가 하나 도망갔습니다. 그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의원은 잠시 침묵했다가, 뭐라 뭐라 지시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비가 전화를 끊자 교수가 희번덕거렸다.
“그, 그 인간이 이렇게 시켰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 이 연구 팔면 10대가 놀아도 될 정도로 엄청난 돈을 거머쥘 수 있소. 응? 제발 진정하고, 나랑 같이 붙읍시다. 내가 반을 떼어다 드리리다!”
애걸복걸했음에도, 경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벌레면 벌레답게 찌그러져 있어야지. 주제 모르고 나대면 이렇게 되는 거야.”
“이, 이제 나는… 내 연구는 어떻게 되는 거요!”
경비는 입에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의원님께서 연구 자료를 중국, 러시아에 판매하기로 결정하셨다. 거기에 너도 포함되니까,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앞으로도 같이 일하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물론 그때부터는 경비와 VIP 사이가 아닌, 노예와 간수 사이가 될 테지만 말이다.
교수는 끔찍한 상황에 비명을 질렀다.
이후 승강기 문이 열리며 경찰이 들이닥쳤지만, 경비가 몇 마디 하자 경찰들이 모두 물러섰다.
과연 ‘높으신 분’의 힘이 아닐 수 없었다.
☆ ☆ ☆
골머리 썩힐 문제 2개가 제거됨과 동시에, 정체 모를 추적자가 새롭게 하나 붙은 그 시점.
지훈은 자전거를 타고 정문을 통과했다.
이후 얼마나 달렸을까?
낙삼대학교에서 충분히 멀어지고 난 뒤에야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어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대로변에서 떨어진 주거지구임은 확실해 보였다.
될 수 있는 한 빠른 시간 내에 세드로 귀환해야했다.
거기에도 경찰이 있는 건 똑같았지만, 아무래도 사방에 CCTV가 쫙 깔린 서울보다 훨씬 나은 이유에서였다.
‘당장 포탈 터미널로 가도 검문에서 걸릴 가능성이 크다.’
개척지와 달리 서울은 위성을 이용한 인터넷망이 살아있었다. 그 말은 곧 수배 역시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는 뜻.
당장 터미널로 가봐야 구속당할 게 분명했다.
‘결국 뒷구멍을 파야하나.’
생각이 닿자마자 석중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드에서야 뒷골목 어딜 가도 지훈을 알았지만, 지구에서는 아니었다. 괜히 뒷골목 쑤시고 다녔다가는 정부가 건 현상금에 혹한 버러지들한테 물릴 수도 있었다.
“받았디.”
“할배, 난데. 서울에서 사고 좀 터져서 뒷구멍 필요하오.”
“네 눈데 장난전화를 그래 하니? 네 내가 누군지는 아니?”
“씨발, 핸드폰 좀 사라니까! 김지훈이오. 김지훈! 그딴 되도 않는 연막 치지 마쇼!”
석중은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거 쓰애끼, 서울 가서 사고쳤는갑디. 잘한다, 병신아. 사람 몇이나 죽였니? 많이 죽였으면 나도 도와주기 곤란하디.”
“별 거 아니고, 정부랑 좀 엮여버렸소. 대금 나중에 드릴 테니, 나랑 내 동생 숨을 안전가옥이랑 뒷구멍 좀 부탁하오.”
“으 - 디 보자. 모레에 김겨응슥이라는 땅꿀잽이가 토끼굴 하나 팔 예정이디. 전화번호 부를테이 까먹지 말고 잘 기억하라.”
석중이 불러 준 전화번호를 속으로 몇 번 이나 되뇌었다.
‘4885, 4885, 4855….’
슥 둘러 주변을 훑어봤다.
아무도 없다. 다시 전화기를 들려는 찰나…
‘전화 기록을 추적당할 수 있다.’
배터리를 분리한 뒤 핸드폰을 작살을 내버렸다.
만드라고라 때 구조대 호출용으로 샀던 정든 핸드폰과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가까운 대로, 공중전화.
외웠던 번호를 그대로 눌렀다.
뚜르르 - 뚜르르 - 띡.
“여보세요?”
성대가 맛이 가기라도 한 건지, 쇳소리가 잔뜩 섞인 늙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중 할배 소개로 전화했소. 토끼굴에 사람 하나 들어갈 자리가 필요한데.”
“호오? 내가 우리 석중이랑은 안 좋은 빚이 있는데 말이지. 그냥 들어주기는 좀 곤란한데?”
쇳소리 섞은 교태. 짜증과 불쾌를 불러일으키는 괴상한 조합이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빌어먹을 석중, 이 개새끼. 소개를 시켜줘도 꼭!’
“개인적인 빚은 알아서 처리하고, 값 잘 줄 테니 나랑 알아서 쇼부 봅시다.”
“요즘 토끼굴 많이 비싸. 검문도 심하고, 3장 어때?”
3천만 원.
보통 밀입국 가격이 천만 원이라는 걸 봤을 때 어이가 없을 정도로 큰 폭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쪽도 그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덥석 물었다.
“대신 오늘 당장 가지.”
“안 - 돼, 나도 일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럼 내일 새벽은 가능한가?”
“그거면 가능할지도?”
“돈 받아 처먹었으면 확답을 해, 씨발!”
“응, 돼. 출발 2시간 전, 그러니까 오전 5시까지 이 주소로 와. 무장은 안 돼.”
“그러도록 하지.”
땅굴잽이는 이후 강남대로 주변 빌딩 주소를 불러줬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며 기억한 뒤 전화를 끊었다.
현재 시각 오후 1시.
출발까지 약 14시간.
이동은 넉넉히 잡아도 2시간.
약 반나절 동안 시간을 죽일 장소가 필요했다.
진로가 결정되자 지훈은 바로 움직였다.
그 전에 민우와 칼콘에게 언질을 주고 싶었지만…
‘씨발, 돈 벌어다 도대체 어디다 다 쓰는 거야? 핸드폰 좀 사지, 이 개새끼들!’
안타깝게도 셋 다 핸드폰이 없었다.
☆ ☆ ☆
지훈이 결정한 은거 장소는 바로 대학 병원이었다.
유동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도 없거니와, 24시간 열려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복장 역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기에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이 바로 진입해도 됐다.
지훈은 1층 남자 화장실에 맨 안 쪽 칸에 들어가 앉았다.
한 곳에 계속 있으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1시간 마다 층을 바꿔가며 대기할 심산이었다.
병원이 15층이니 장소도, 시간도 충분했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변기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지루한 시간 속 여러 생각들이 흘렀다.
‘지현은?’
석중에게 말해뒀으니, 아마 눈치 빠른 늙은이가 챙길 게 분명했다. 괴팍하고 싸이코패스 같은 양반이지만, 일 처리하는 능력은 좋은 사람이었다.
‘민우, 칼콘, 가벡은?’
한 동안 헤매다가 경찰 조사에 소환될 테지만 딱히 걱정할 건 없었다. 어디 가서 나불댈 녀석들도 아니거니와, 무슨 일이 터졌는지도 몰랐다.
‘시연….’
가장 큰 문제였지만, 생각을 흩어버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듯 어떻게든 일이 잘 될 거라고 믿었다.
☆ ☆ ☆
새벽 3시.
지훈은 병원에서 나와 허리를 쭉 폈다.
변기에 불편하게 12시간이나 앉아있었더니 온 몸이 접혀버릴 것 같은 찌뿌둥함이 몰려 온 까닭이었다.
‘이제 토끼굴로 가면 되는 건가.’
바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될 수 있으면 대로를 피한 채 골목을 이용했다.
그렇게 약 30분 정도 이동했을 때, 원룸촌 가운데에 웬 남자 하나가 길을 가로막았다.
딸랑, 딸랑!
비키라는 종을 올려도 무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움찔!
온 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rääkigem natuke(우리 얘기 좀 할까?)”
남자의 입에서 룬어, 아니 고대종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