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102화 (102/173)

<-- 생각 외로 좋은 결과. -->

실험실에 들어가자 교수가 계약서를 하나 내밀었다.

“명목상이지만, 필요한 절차라서… 한 번 쭉 읽어보고 결정해 주십시오. 여기다 사인하면 됩니다.”

교수는 8장짜리 계약서를 넘겨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

그 모습이 꼭 읽지도 맑고 사인만 하라는 것 같아 기분이 확 나빠졌다.

‘이 새끼가?’

“내가 당신들 뭘 믿고 사인을 하란 말이오? 거 참 아까부터 재미없게 나오네.”

본디 도살자도 백정이라 부르면 인간백정이 되고, 백선생이라 부르면 사람 구할 위인이 되는 게 요즘 세상이었다.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휙 던져버렸다.

사실 읽기도 짜증나던 참이다.

“어, 어… 왜 그러십니까? 뭐 문제라도….”

“내가 살면서 느낀 게 있소. 계약서에 싸인 하라는 새끼들 치고 나한테 좋은 일 한 놈은 하나도 없었다는 거. 좋은 일은 그냥 대충 해주면서, 꼭 나한테 불이익 올 일은 계약서로 확실히 하자고 하더라고?”

안 봐도 비디오였다.

퍼주듯이 좋은 일 할 거면 뭐한다고 계약서 쓸까.

“아니, 그게 아니고…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절차….”

“거 혓바닥이 쓸 데 없이 기네. 기다리쇼. 사람이 변명만 가득하면, 입에서 똥내가 나는 법이거든. 근데 당신 입에는 하수구 냄새가 나네?”

교수 말을 무시하고 바로 114를 통해 변호사 사무실을 연결, 바로 헌팅 계약 전문 변호사를 호출했다.

대충 강남대로에서 낙삼대까지 오래 걸려봐야 30분.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으로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테이블 위로 발을 올렸다.

“계약서 없이 가던가, 아니면 변호사 오고 나서 다시 얘기하던가. 꼴리는 대로 하쇼.”

교수는 끙 소리를 내며 설득했지만, 지훈은 모조리 무시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결국 교수는 변호사가 올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 ☆

그 시각, 강남대로.

“우오오오! 칼콘, 이걸 봐라. 이 녀석은 뭐지!? 매우 신명나는 춤사위로군! 전쟁 전에 흥을 돋우는 녀석인가!?”

가벡이 입을 쩍 벌리며 외쳤다.

거기에 칼콘까지 오도도 달려와 합세했다.

“우와! 멋있다! 꼭 온 몸에 관절이 있는 것 같아! 민우, 저거 뭐야!?”

팡, 팡, 팡, 팡!

노래와 함께 격한 춤사위를 보이는 거대한 덩어리.

바로 행사장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비닐 인형이었다.

격하게 움직이니 이방인에게는 생명체로 보인 모양이다.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할까 고민하던 민우는 결국 한숨과 함께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오… 산에만 살던 사람 도시 구경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진짜….”

덤으로 가벡과 크락의 기행으로 주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상태였다.

우와… 저거 뭐야, 이종족?

진짜 이상하게 생겼다.

사진 찍자, 인스타에 올려야지!

보통 미성년자나 어린 아이들을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몬스터 새끼들은 죄다 총으로 쏴 죽여야 해.

왜 동맹 따위를 맺어서는…

씨발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20대 후반 이상의 성인들은 대부분 적개심을 나타냈다.

거친 시대를 겪은 세대와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차이였다.

아무래도 몬스터 브레이크 아웃, 개척 시대, 종족 전쟁을 거쳐 가며 타 종족에게 친구 혹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이종족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민우 역시 오크에게 부모님을 잃은 과거가 있었다.

지금이야 칼콘 덕에 목숨도 몇 번 구하고, 같이 헌팅 다니는 동료로서 아무런 앙금이 없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동료’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아무런 접점 없이 만났다면, 민우 역시 다짜고짜 얼굴부터 찌푸렸을 게 분명하다.

‘슬슬 말릴까.’

민우가 칼콘과 가벡에게 다가갔다.

“크롸롸! 신이시여! 신이시여! 나를 전장으로 데려가 주오!”

“우롸! 우롸! 우롸! 전쟁, 전쟁, 전쟁!”

둘은 무슨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토템을 놓고 숭배라도 하는 것 마냥 열정적인 종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거 인형이야, 바보들아!”

민우는 얼굴이 터질 것 같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둘을 질질 끌어 사람들 사이를 벗어났다.

“인형이 어떻게 움직인단 말인가! 거짓말 하지 마라.”

“그래, 인형은 계집애들이나 갖고 노는 거야. 근데 이 녀석을 봐! 역동적인 움직임은 딱 전사의 풍채가 보이잖아?”

“그냥 닥치고 자자. 응?”

결국 민우는 반 강제로 둘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날 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는 다음과 같았다.

흔한 몬스터의 우상숭배.jpg

☆ ☆ ☆

변호사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이후 교수와 말을 주고받으며 계약서를 수정하길 몇 번.

“이제 사인하셔도 괜찮습니다.”

“수고했소.”

지훈은 계약서에 사인한 후 변호사의 명함을 받았다.

추후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한 대비이자, 교수에게 보낼 허튼 짓 말라는 경고였다.

비싼 값 주고 고용한 만큼 효과는 탁월해 보였다.

교수는 변호사와 지훈에게 이 실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밖에 새어나가면 안 된다고 연신 함구를 요청했다.

“말할 곳도 없으니 신경 쓰지 마쇼.”

교수는 지훈의 긍정을 듣고서야 조금 진정한 것 같았다.

이후 다시 한 번 이동, 실험을 위해 옷을 전부 탈의했다.

“속옷만 남기고 전부 탈의한 뒤 이 장갑을 껴 주세요.”

고개만 까닥이고는 옷을 벗어 내려갔다.

신발, 양말, 쟈켓, 티셔츠, 바지.

옷을 하나씩 벗어갈수록, 생살과 함께 수 없이 많은 흉터들이 드러났다.

등에는 관통상을 입은 것 같은 흉터가 6개,

왼발등 위에는 칼이 박혔던 것 같은 상처,

오른 상완에는 뼈가 부러져 피부에 남은 흉터 2개,

겨드랑이 아래에는 수술로 남은 흉측한 흉터가 있었다.

본디 정상적인 의사였으면 레이저를 이용 최소 부위만 절단했겠지만, 뒷골목 의사에게 받은 탓에 그 흉터가 무슨 주먹만큼 크게 남았다.

그 외에도 온 몸에 상처가 없는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뒷골목에서 일하며 거의 하루걸러 하루마다 싸움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매일 샤워할 때 마다 보는 흉터였음에도, 어째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지금은 그나마 재생 때문에 흉터가 안 남는 게 다행이군.’

찌익 - 찍.

장갑은 핑거 오픈형 찍찍이 장갑이었다.

무슨 애들 장난감 같아 어이가 없었지만, 아마 실험 대상의 손 크기가 다양할 경우를 고려한 듯싶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지?’

속이 반짝거려 자세히 살펴보니, 동색을 띄는 금속이 그물망에 잔뜩 쌓여있었다.

AMP 같았다. 아마 사용자의 몸에 접촉해 있어야만 효과를 발휘하는 모양이다.

장갑을 끼자 차가운 느낌과 함께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우으으으응 -

지훈의 몸에 있는 이능과 공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있자니 반지도 같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이내 오래간만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능 간섭 확인. 출처 미확인. 저항할 수 없는 형태입니다. 주의해 주십시오.

‘별 거 아니니까 무시. 심각한 일 생기면 그 때 얘기해.’

반지의 대답을 들은 뒤 작게 심호흡을 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조교가 들어와 실험실로 안내했다.

실험실은 마치 정신병원 마냥 주변에 온통 흰색만 가득했다. 그 외 돌발 상황도 대비했는지 유비 및 실험실 벽에 단단한 소재가 사용된 것 같았다.

쾅!

지직!

주먹으로 힘껏 때리자 벽에 가벼운 균열이 생겼다.

- 뭐, 뭡니까! 혹시 금속 반응으로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거나 기타 정신적 간섭이 있습니까?

실험실 스피커에서 교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냥 얼마나 단단할까 싶어서 쳐봤어. 단단하네.”

과거 벽을 때려봤을 때, 벽에 커다란 흔적이 남았었다.

반면 실험실 격벽은 균열만 남았으니, 실컷 날뛰어도 문제 될 것 없어 보였다.

- 실험 시작하겠습니다. 김지훈 씨, 당신은 어떤 이능을 갖고 있습니까?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물어왔다.

아마 실험내용 녹화를 위한 질문이리라.

“가속 E, 집중 F. 둘 다 강화계.”

그 외에도 신규 이능 포인트가 2개 남아있었다. 이 포인트는 기존 이능을 강화하는 대에도, 새로운 이능을 확보하는 대에도 쓸 수 있었다.

사실 맘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쓸 수 있었지만, 언제 어디에 어떤 이능이 필요할지 몰라 일단은 아껴놓는 중이었다.

가속의 경우 등급이 올라가면 부작용이 줄어들었고 집중은 시간 및 다중작업의 능률이 올라가는 듯 것 같았다. 물론 지금으로도 충분했기에 올릴 필요 없는 기능들이었다.

추후 최상위 관리자만큼이나 강력한 적을 만나면 모를까, 지금 당장 뭘 결정해야 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 EP-23번과 EP-49번. 둘 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 이능이군요. 혹시 한 번 보여줄 수 있습니까?

“뭐 던질 거하고, 맞출 것 좀 가져와 보쇼.”

서비스 해주는 심정으로 도구를 요청했다.

얼마 후 조교가 들어와 사과와 동전을 가져왔다.

‘쯧, 사과는 사람 머리 같아서 영 불편한데 꼭 가져와도 이딴 걸 가져오나.’

불평하기보다는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었기에 군말 없이 보여 줄 준비를 했다.

“지금 보여주면 되나?”

- 예. 처음에는 AMP 장갑을 빼고, 두 번째는 AMP 장갑을 끼고 해주시면 됩니다.

찌익 - 찍, 찌직.

장갑을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바로 이능을 발동했다.

‘이능 발동, 집중. 가속.’

이후 왼손에 들고 있던 사과 3개를 집어 던졌다.

후 - 우 - 웅.

느린 속도로 떠오른 사과는, 액션 영화의 슬로우 모션마냥 느리게 빙글 빙글 돌았다.

이후 오른손에 잘 끼워뒀던 동전을 던졌다.

훅, 훅, 훅!

동전이 시속 120km는 되어 보일 법한 속도로 날아가 사과에 틀어박혔다. 아무런 훈련 없이 던져서 120km.

운동선수들 엿 먹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으나,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맨몸으로 총알도 튕겨내고, 철근도 구부리는 힘이다.

애초에 인간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 호오… 대단하군요.

이능 2개를 겹쳐서 썼기 때문에 사용 시간을 길게 뒀다간 부작용 역시 제곱이 될 터.

동전이 사과에 맞자마자 바로 이능을 풀어버렸다.

“후우… 후우….”

옅은 현기증이 났기에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교수는 그 외에도 가속 이능을 쓰고 달려보라는 등, 왕복 뜀뛰기를 하라는 등 순발력을 보는 실험을 계속했다.

당연히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넘을 정도로 괴랄한 기록이 튀어나왔다.

- 그럼 AMP를 끼고 해보겠습니다. 같은 작업을 다시 한 번 반복해 주세요.

장갑을 끼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얼마나 효과가 좋기에 함구까지 시켜가며 실험이야?’

실험 도중 어이가 없어져서 든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곧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호기심은 그 반동으로 이능을 확인하게 만들었다.

‘정보.

다른 건 다 변한 게 없었다. 단지…

이능 : D 등급 (15+7)

이능력 - 집중 E(+1)등급, 가속 D(+1)등급

이능 능력치와 각 이능이 1단계씩 상승되어 있었다.

‘이런 씨발… 뭐 이딴 물건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노벨상이고 나발이고, 노벨 재단을 사버리고도 남을 돈을 벌 수 있을 세기의 대 발견이다.

그 순간 흐릿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교수가 머뭇거리는 지, 정부가 어째서 뜸을 들이는지, 의문의 일행이 무슨 이유로 연구팀을 습격했는지.

뭐 교수야 돈이 급해서 빨리 이 기술이 상용화되길 원했다. 그러니 실험을 강행, 과정이 들킬까 애가 탔던 거였고,

정부, 정확하게는 해당 실험을 맡은 ‘높으신 분’은 저 기술을 누구한테 어떻게 팔아먹어야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질질 끈 거였으며,

언더 다크는 연구라면 일단 확보해 놨다가 나중에 큰 돈 받고 팔 수 있었기에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습격한 거였다.

어쨌든 실상은 시궁창이었으나, 그 안에서 발견된 건 그 어느 보석이던 전부 싸구려로 만들 수 있는 보물이었다.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저 연구가 외국이 쥐도 새도 모르게 팔려나가든,

교수가 정부를 배신하고 연구자료 들고 도망가든,

조교가 교수를 죽이고 타 국가로 망명을 하든,

무슨 사단이든 크게 한 번 터질 터였다.

물론 지훈은 그딴 거 관심 없었다.

미쳐버린 세상에 미친 놈 몇 명 늘어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생각 외로 좋은 물건을 얻었다.’

단지 좋은 물건을 얻었다는 사실이 좋을 뿐이었다.

나만 좋으면 됐지, 타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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