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 우리 얘기 좀 해. -->
새벽 3시.
가라앉은 가을 안개보다 더 싸늘한 메시지는, 마치 일종의 사형선고 내지는 결투 신청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즉답하지는 않았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늦은 시각, 이런 상황에서 얘기해 봐야 좋은 결과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적당한 피로와, 적당한 취기.
평소라면 바로 잠들었을 조건이었음에도 쉬이 잠들지 못하고 밤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대신 냉기가 담긴 문자가 돌아왔다.
- 우리가 처음 만났던 카페로 12시까지 나와.
평소 같은 친절함이나 배려 따위는 없었다.
짧은 단문에, 명령하듯 툭 끊긴 어미는 꼭 얘기하기 싫은 사람과 억지로 대화하듯 날카롭기 그지없다.
기분이 오묘하다.
‘얘가 원래 이렇게 차가웠나?’
아니다.
평상시엔 따듯하다 못해 말투에서, 목소리에서, 얼굴에서 사랑이 잔뜩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나 긴 기다림과 불안 속에서 그 따뜻함은 모조리 식어 없어졌겠지.
저번 헌팅 끝나고 지훈은 병원에 입원했다.
지훈이야 어차피 재생 될 걸 알았기에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따위 전혀 관심 없었지만, 시연은 아니었다.
뇌출혈, 측두엽 손상, 근육 파열, 심근경색, 전신 2도 화상.
지훈이 입은 부상이었다.
저 중 하나만 걸려도 사람 반병신 되는 중상. 그게 겹치고 또 겹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빈사였다.
시연은 겁에 질렸다.
‘죽으면 어떡하지?’
재생 변이를 모르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같이 돌아온 칼콘은 아예 팔, 다리가 없어져 있었다.
드문드문 칼콘을 들여다보며 혹시라도 지훈이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생각하며 매일 밤 한 숨도 못 잤던 시연이었다.
결과적만 보자면 지훈은 다행히 눈을 떴다.
엄청난 재생력으로 후유증 하나 없이 완치됐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안심할 틈도 없었다.
- 나 헌팅 가야 돼.
시연은 이참에 건강 검진 쭉 하고, 푹 쉬자고 말렸지만 지훈은 전혀 듣질 않았다.
나름 칼콘을 치료하기 위한 의로운 행동이었지만, 시연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아무런 설명 없는 독단이었다.
그리고 의리나 우정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시연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훈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위험 속, 아무리 마음이 따뜻한 시연이라 할지라도 차갑게 굳었다.
차갑게 식은 심장은 뜨거운 이성을 잡아먹었다.
- 친구 따위 알 게 뭐야! 그냥, 그냥 나랑 살자… 응?
당연히 입에 담지는 않았다. 저 말을 했다가는 다시는 지훈을 보지 못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 해 봐야 듣지도 않을 걸 알았다.
- 안 돼.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어.
시연의 마음이 타들어갔다.
어떻게 말려도 소용없었다.
결국 얼마나 걸린다는 말도 없이 지훈이 떠났다.
그리고 10일 후 돌아왔다.
여기까지가 대충 시연과의 사이가 틀어진 계기였다.
지훈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사실 내가 이 반지를 사용하는 대가로, 어떤 미친 마법사랑 계약을 했어. 그래서 걔 말은 꼭 들어야 돼. 그리고 내가 다쳤는데도 신경을 안 쓴 건, 내가 재생 변이를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거야.
될 수 있으면 나도 쉬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칼콘이 너무 다쳐버려서 쟤를 치료해 달라고 그 마법사랑 거래를 했어. 근데 그 거래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버렸지 뭐야.
‘씨발, 저걸 믿겠냐?’
일반인이면 모를까, 시연은 연구원이었다.
그것도 세드에 대한 온갖 정보 및 민간에는 나돌지도 않는 고급 정보를 잔뜩 들고 있는 BOSA의 연구원.
당연히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리 없다.
만약 반지와 아쵸프무자의 정체를 묻는다면?
사실대로 말 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이거니와, 믿는다고 해도 또 문제였다.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하다.
예전 같이 사랑이 넘칠 때야 증거 없이 무슨 말을 해도 일단 믿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냉기 풀풀 흐르는데 저딴 얘기 해봐야 나올 말은 딱 하나였다.
-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내가 그 반지 한 번 껴볼게. 아니면 그 아쵸 어쩌고 하는 여자를 내가 직접 만나보던가.
둘 중 어느 쪽이든 파멸이다.
반지는 끼자마자 바로 각성을 시작하는데 그 부작용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 도덕성 상실, 영혼 발화, 심정지, 혈액 역류, 강제 변이.
지훈, 칼콘이야 운이 좋아 부작용 없이 넘겼다고는 하지만 만약 시연은 넘지 못한다면?
- 겨우 이런 일로 날 부른 거야? süüde(발화).
아쵸프무자는 첫 만남에서 지훈에게 불을 붙였었다.
만약 시연에게도 그렇게 한다면?
‘사실대로 말 할 순 없다.’
결국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살기 위해 몇 번 해본 적은 있었지만 선호하진 않았다. 이상하게 거짓말을 할 때 마다 꼭 일이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다. 일단 보고 얘기하자.’
어차피 혼자서 고민해 봐야 해결 될 문제도 아니었다.
환복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 ☆ ☆
서구 카페.
시연은 지훈과 처음 만났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청초하게 꾸민 평소와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옷은 노출이 심한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 위에 안에 비치는 회색 가디건을 걸쳤다.
화장 또한 평소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눈은 검은 색 아이 쉐도우와 라이너를 이용해 꼬리를 길게 올렸으며, 얼굴을 톤을 전체적으로 다운시켜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에서 모든 남자를 끌어들일 것 같은 요염함과, 베일 듯 한 날카로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그 강력한 매력에 끌렸는지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저기요, 잠시만요.”
“…?”
시연은 대답도 안 하고 눈만 돌려 쳐다봤다.
“… 괜찮아 보여서 그런데,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남자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시연은 짜증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곤 남자를 눈 밖으로 밀어냈다.
명백한 무시.
“저기요?”
서지도, 앉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
남자가 애절히 불렀지만, 시연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결국 남자는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후 시연에게 다가오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온 몸으로 검은 아우라를 잔뜩 뿜어내니, 다들 모욕당할 게 무서웠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정오 5분 전.
카페 앞에 벤츠 한 대가 멈춰 섰다.
익숙한 벤츠에 시연의 얼굴이 가볍게 흔들렸다.
반가움, 애절함, 걱정, 사랑.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외로움, 그리움,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들어섰다.
시연은 결정적인 순간에 대비하듯,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가슴이 작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 ☆ ☆
짤랑.
단순히 카페 문을 열었을 뿐인데도, 손에 땀이 들어찼다.
꽤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정. 긴장이었다.
최상위 관리자와 싸웠을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었다. 단지 어떻게 싸워야 할까 하는 생각만 있었을 뿐.
하지만 지금은 그저 미친 듯이 긴장됐다.
손에 잔뜩 묻은 땀을 허벅지에 닦았다.
가만히 뒀다간 손이 축축하게 젖을 것 같았다.
‘진정하자.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결국 거짓말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했다.
동시에 진실 또한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직 지훈도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진실을 말했다가는 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단지 아무런 변명 없이 사과할 생각이었다.
숨을 정리하고는 카페를 슥 훑었다.
시연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기도 잠시.
그녀와 처음으로 만났던 자리에, 한 여자가 보였다.
먹물처럼 까만 머리와 대조되는 하얀 얼굴. 그리고 포인트처럼 찍힌 피처럼 붉은 입술.
시연이었다.
평소 모습이 백합처럼 청소했다면, 지금은 마치 검은 장미처럼 톡 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화장 좀 바꾸고, 옷 좀 평소와 다르게 입은 것뿐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은 인지의 80%를 시각에 의존하는 동물이었다.
초두효과나, 첫인상, 5초의 법칙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뚜벅, 뚜벅.
걸어가는 내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마치 집중 이능을 쓴 것 마냥 이동하는 몇 초의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랜만이네.”
“어.”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첫 만남. 마법을 연습했을 때와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그 때는 지훈이 저렇게 냉소적인 태도였다면, 지금은 시연이 그랬다.
둘 다 품은 말은 많았음에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맹수들이 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결국 지훈이 먼저 말 했다.
“뭐 마실래?”
“됐어.”
싫다는 시연을 내버려 두고,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음료가 나올 때 까지 계속 침묵이 이어졌다.
좌불안석.
침묵이 마치 목이라도 조르는 것 같다.
속이 타서 커피를 쭉 들이킨다.
뜨겁다. 하지만 애써 무시한다.
“우리 무슨 사이야?”
시연이 물었다.
“애인.”
짧게 대답했다.
“… 그래.”
안도? 체념?
알 수 없었다.
“왜 전화 안 받았어?”
이번엔 이쪽이 물었다.
“그냥.”
시연이 짧게 대답했다.
다시 대화가 끊긴다.
슬슬 짜증이 났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하지 않고 기다렸다. 잘못 된 말을 꺼냈다간 꼬리가 잡힐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마치 서로 총 겨눈 체 발포 명령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다시 5분이 지났다.
“나 사랑해?”
“어.”
“근데 왜 그랬어?”
아마 ‘왜 무시하고 헌팅 나갔어?’ 라는 물음이겠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그게 나보다 더 중요해?”
양자택일.
애초에 선택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비슷한 예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와 친구야, 나야 정도가 있었다.
“미안하다.”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칼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헌팅을 나갔지만, 그 과정에서 시연은 아마 속이 문드러졌을 것이다.
지현에게 들어보니 기절해 있었을 때에도 24시간 동안 옆에 붙어서 병간호를 했던 시연이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칼콘의 연인이던 톨퐁은 칼콘이 다치자마자 바로 이별통보를 하지 않았던가.
의도치 않은 상처라고 한들 상관없었다.
시연이 상처를 받은 건 사실이고, 그녀는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물론 권리는 아니다.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했다.
의도치 않은 일이라고 해서 그 일이 무죄가 된다면, 이 세상에 유죄인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걸 알기 때문이다.
“뭘 잘못했는데?”
남자 돌게 만드는 진형적인 질문이 돌아왔다. 확실히 남자 많이 못 만나본 티가 나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은 남자들을 돌게 만드는 질문.
뭘 잘못했는데?
하지만 지훈은 전형적인 질문에 속으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시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 거라 내심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