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94화 (94/173)

<-- 지금 나한테 시비 건 거냐? -->

- 이번 매치는 전직 미군 출신 헌터, 제이콥과 일본의 유명한 검도 선수 출신 와타나베의 경기입니다!

딱히 별 재밌어 보이는 화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지훈도 별 생각 없이 TV로 시선을 옮겼다.

격투기 같은 룰 있는 경기보단, 무규칙 진흙싸움을 더 선호했지만, 아무래도 보는 건 전자가 더 재밌었다.

- 예, 인사드리는 순간 막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두 선수 언제 봐도 파이팅이 넘치는군요!

제이콥스의 무장은 소위 바스타드 소드라 불리는 응용성 좋은 서양 검이었고, 와타나베는 일본도를 들고 있었다.

깡! 깡! 챙! 깡!

둘 다 저항이 어느 정도 높은 각성자였는지, 둘 다 날이 선 강철 검을 들고 있었다.

‘서양 검과 일본도인가. 아무래도 서양 쪽이 우세하겠군.’

사대주의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들어간 재료와 무게만 따져도 서양 검이 압승이었다.

등급 차이가 나면 모를까, 같은 등급이라면 힘으로 부딪치는 순간 얇고 가는 일본도 쪽이 부러질 게 당연했다.

그나마 날 손상을 최소화 하려면 칼을 흘리면서 횡이동을 해야 했는데, 그것도 열 댓 번이었다.

- 말씀 드리는 순간 데미지! 와타나베 선수 왼쪽 팔을 맞았습니다!

와타나베의 왼쪽 팔에서 붉은 액체가 팍 튀었다.

피는 아니고, 방송을 위해 붙인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실제로 부상 가능성이 있는 무기를 지급하면 그건 무투경기가 아닌 야만적인 살인경기였다.

근데 그렇다고 상처, 피 하나 없이 퍽퍽 소리만 나게 내버려 뒀다간 재미가 없을 게 당연했다.

이에 크라토스 측은 무기에 몇 가지 마법을 걸어 놨다.

타격 시 실제로 맞은 것 마냥 피가 터지는 것 같은 이펙트는 물론, 부상을 흉내 낸 가벼운 마비 효과였다.

‘끝났네.’

일본식 검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는 지훈이었지만,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 아! 제이콥, 검으로 와타나베의 목을 노립니다!

훅!

스릉!

파바바박!!

제이콥의 와타나베의 목을 때리자, 와타나베의 목에서 피가 나는 이펙트가 터져 나왔다.

딱 봐도 가짜였지만, 진 선수 입장에선 굉장히 모욕적인 연출이리라. 와타나베는 약 30초간 가짜 피를 쏟아내다 쓰러졌다.

“푸하하! 못 한다. 내가 해도 저거보단 잘하겠다!”

칼콘이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아무래도 헌팅 다니느라 대인끼리 무기 주고받을 적은 인간과 달리, 칼콘은 아예 병사로써 ‘인간을 죽이는 훈련‘을 받은 오크였다.

당연히 대인 전투에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인간들의 도시로 망명한 터라, 그 기술을 부릴 일이 적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칼콘을 적으로 만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친구 때문이라서가 아니었다.

전투 종족 특성으로 인해, 각성 안 하가도 전투 능력치가 3개나 E등급인 녀석이었다. 아마 지금은 반지의 영향으로 각성까지 했으니, 아마 그것보다 훨씬 더 높아져 있으리라.

거기에 잘 훈련 된 전투 실력까지 합쳐진다면?

총을 다룰 때는 어버버할 지 몰라도, 손에 검과 방패 쥐어주고 동급 인간이랑 붙이면 백에 구십은 칼콘이 이긴다.

“그럼 한 번 해볼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크라토스, 한 번 나가보지 않겠냐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차피 다음 헌팅을 나가기 전 까지 한 달 정도 푹 쉴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 간 칼콘은 좀이 쑤셔 버티지 못할 테니, 병원에서 질리도록 봤던 크라토스를 한 번 쯤은 하게 해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방송 보니까 헌터 짓 하면서 크라토스 뛰는 놈들 많아 보였으니 상관없겠지.’

실제로 방금 싸웠던 제이콥도 군인 그만두고 헌팅 뛰고 있는 사람이었다. 크라토스는 부업 정도였고 말이다.

칼콘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정말? 나 해도 돼?”

“정말이지, 그럼 가짜겠냐.”

신이 났는지 크게 웃으며 맥주를 들이키는 칼콘이었다.

“가벡, 너는 안 해? 너도 싸우는 거 좋아하잖아.”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니면 시시하다.”

민우의 물음에 가벡은 짧게 부정했다.

1억 건으로 신나게 말로 두들긴 까닭에 삐친 걸까?

뭐 아무렴 어떠랴.

한동안 크라토스 관련으로 시끄럽게 떠들고 있자니, 옆에 앉아있던 남자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쾅!

맥주이 테이블에 부딪치는 소리에서, 적잖이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거 존나게 시끄럽네. 조용히 좀 합시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보통 세드에서는 서로 간에 시비를 잘 안 걸었다.

그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상대가 총을 가지고 있거나, 각성자일 가능성이 있다.

2. 치안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진짜 죽을 수도 있다.

3. 혹여 상대방이 깽 값으로 마법 치료 받는다고 하면 손해 배상 및 합의금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특히 3번 때문이었다.

만약 어디 다쳤는데 병원 치료가 아닌 마법 치료 받겠다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툭 건드리고 합의금만 3~4000 깨질 수 있었다.

까닭에 부유한 사람이 아닐 경우, 저 돈 낼 바에는 그냥 사람 하나 죽여 버리고 타 국가 개척지에 밀입국 하는 편이 훨씬 싸게 먹혔다.

실제로 가까운 러시아 개척지만 해도 치안이 개판인지라, 한국 범죄자가 여럿 숨어 있었다.

‘하, 어떤 미친 새끼들이야?’

저런 이유들을 다 뛰어넘고 시비를 건다?

어지간히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참지 못할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이 생겼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우리가 좀 시끄러웠나 보군. 주의하지.”

시비 때문에 사람 병신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굽혀줬다.

하지만 가벡은 그러기 싫었는지, 즉각 반응했다.

“주의? 웃기는 소리. 저 녀석이 우릴 모욕했다. 이러고도 가만히 있으라고?”

칼콘은 동감하는 듯 싶었으나 지훈의 눈치를 살폈고, 민우는 사소한 일 때문에 싸울 필요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참아. 여기서 싸움 나면 누구 하나 병신 된다.”

세상이 불안정해 지면서, 인간은 문명인이 되기 위해 거세했던 야만성을 되살려냈다.

싸움이 나도 적당히 따위는 없었고, 무시 받으면 곧 밟혀 찌그러진다는 공포감에 굉장히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건 이번 경우에도 똑같으리라.

하지만 가벡은 인간이 아닌 그냥 야만인이었다.

“싫다. 내가 왜 네 명령을 들어야 하지?”

한숨이 나왔다.

“네가 싸우는 건 안 말리는데, 나랑 계속 같이 다니고 싶으면 앞으로 내 말을 듣는 게 좋을걸.”

적당히 설득하려는 찰나, 시비 건 남자들이 끼어들었다.

“왜, 무서워서 오줌 지릴 것 같냐? 쫄보 새끼.”

지훈을 향한 말이었다.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거늘, 화살이 이쪽으로 향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귀찮아서 피한거지, 절대로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었다.

배부른 호랑이를 건드려 굳이 죽음을 자초한 쥐에게, 도 넘은 아량을 베풀 필요는 없었다.

‘시체는 석중 할배한테 부탁하면 되겠군.’

요즘 칵톨레므 사냥철이라 그렇지 않아도 인간 육편이 잔뜩 필요했을 터였다.

“하, 뭐 이 새끼야?”

당장이라도 쳐죽일 듯 일어서자, 시비를 걸었던 남자도 환영이라는 듯 벌떡 일어섰다.

상대는 넷, 이쪽도 넷.

아주 사소한 계기라도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달려들 것 마냥 분위가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총 소리가 들렸다.

탕!

눈 여덟 쌍이 소리의 근원지로 급히 돌아갔다.

“자기들. 여기 테이블이랑 의자 바꾼 지 얼마 안 됐어. 내가 심판 봐줄 테니까 싸우려면 같이 나갈까?”

시비 건 남자들은 딱히 아무 말 하지 않고 주인과 지훈의 대답만 기다렸다.

“심판은 무슨 심판이야, 그냥 이 놈들 혓바닥만 뽑으면 되니까 참아. 금방 끝난다.”

그 와중에 가구가 부서진다면?

그냥 변상하면 됐다.

달려들려는 찰나 주인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나 가디언에 신고 넣는다? 그러면 피차 귀찮잖아. 게다가 이 총 안에 든 총알 굉장히 좋은 녀석이라 D등급 아티펙트도 관통한다고? 나 지훈은 쏘고 싶지 않아.”

가디언은 곤란했다.

각성자에게는 가중 처벌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헤죽 웃는 주인의 얼굴에 얼핏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좆대로 해라, 이 빌어먹을 새끼야.”

결국 지훈 일행과 시비 건 남자 일행 둘 다 시체 구덩이 뒷마당으로 향했다.

주변 건물들에 둘러싸여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 모습이 누구 하나 죽어도 어디로 새어나가지 않을 것 같아 묘하게 피 냄새가 풀풀 나는 것 같았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뒷마당 구석에 이름 모를 피가 잔뜩 굳어 있었고, 그 옆에는 도살도구가 걸려 있었다.

“장소는 신경 쓰지 마.”

주인은 가까운 나무 상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다들 법이네 뭐네 하기 귀찮았잖아. 신고 없이 누가 죽거나 다쳐도 일절 책임을 묻지 않기. 어때?”

신고가 없다면 이쪽은 도리어 그런 룰이 더 좋았다.

“이 쪽은 환영이다.”

“우리도 그 쪽이 좋아.”

양측 다 합의했다.

“그래, 여기 마법 걸어놔서 소리가 안 새어 나가니까, 총도 쏴도 돼.”

꼭 크라토스 특등석에 앉은 관객 같은 말투였다.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굉장히 밉상이었지만, 지훈과 취객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앞에 있는 놈 때려죽이기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럼 시~작!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제 각기 장비를 꺼내들었다.

[장비 현황]

[지훈 일행]

지훈 - 글록 (9mm 탄환 17발), 나이프 (일반)

가벡 - 오류기기 파괴용 곤봉 (B등급), 단검 (일반)

칼콘 - 왼 손 (B등급), 왼 발 (B등급)

민우 - 비무장.

[취객 일행]

A - MP5 (기관단총, 탄종 모름)

B - 식칼처럼 보이는 단검 1개. (알 수 없음)

C - 쇠파이프. (일반으로 보임)

D - 토카레프 (권총, 탄종 모름)

“혀, 형님! 저는 어떡해요!”

민우였다.

도시에서는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야, 너 무기 없어?”

“네, 네…!”

“에휴, 이거 써 이 새끼야!”

홀스터에 꽂힌 글록을 민우에게 대충 던져줬다.

이후 누구부터 조질까 고민하며 눈을 굴리고 있자니 상대방이 총을 꺼내는 걸 발견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본인이야 일반 탄환 정도는 맞아도 상관없었지만, 민우, 가벡, 칼콘은 안 된다.

장비 없이는 총알이 그대로 몸에 박히기 때문이었다.

MP5에 들어가는 탄수는 20발.

드르륵 긁어도 인당 2~3발 씩은 맞겠다.

대충 짓밟아 주겠다는 생각이 확 날아갔다.

싸움에서 총을 꺼냈다는 건 상대를 죽일 생각이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얘기는…

본인도 죽을 각오를 했다는 거였다.

‘이능 발동, 가속!’

펄떡, 펄떡, 펄떡!

심장이 마치 8기통 엔진처럼 미친 듯이 피를 펌프질하기 시작했다!

바로 총을 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타타타탓!

“씹 - 이능력 사용자!?”

아마 시비건 상대가 이능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에 절망했겠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타타타타타타탕!

취객의 MP5에서 엄청난 속도로 불이 뿜어져 나왔지만, 지훈은 단 한 발도 피하지 않았다.

양 팔로 가드하듯 얼굴과 상체를 가리고 돌진했다!

퍼버버버버벅!

수 없이 많은 탄환들이 몸에 부딪쳤다.

원래대로라면 딱딱한 탄환이 여린 살과 내장을 헤집어 놔야 했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이미 저항이 E를 넘어 D에 다다른 지훈이었다.

OTN 대구경 탄환이나, 대전차 기관총이면 모를까 손톱만한 9mm 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타타타타탕!

퍼버버버벅!

과거 포미시드 전투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조금 다를 게 있다면 이번엔 지훈이 탄막을 버티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정도였을까?

‘빌어먹을, 오라질나게 아프네.’

고통을 견디며 때를 기다렸다.

재장전을 한다면 그 사이 처죽이면 됐고,

총구를 돌려 탄막이 사라지면 바로 돌진하면 됐다.

‘대충 열 발인가.’

결국 취객은 모든 탄환을 지훈에게 발사했지만, 안타깝게도 지훈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틱! 틱, 틱!

탄약이 비었다는 증거.

공이가 허공을 때리는 소리.

그 소리를 신호로 지훈이 바로 달려들었다.

“다 쐈냐, 씹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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