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락한 순례자 -->
판단이 서자 행동은 빨랐다.
“이런 씨발!”
가속 이능을 발동해, 빠른 속도로 문을 닫았다.
주우앙 -
그즈즈즈즞!
다행히 지훈은 문을 닫은 뒤 피할 수 있었다.
레이저는 허공, 가벡의 방패, 문 순으로 긁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민우가 두 동강이 났을 터였다.
“허, 헉!”
민우는 다리가 풀렸는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사이 상황 파악이 끝난 가벡이 민우를 질질 끌어 문 옆으로 물러섰다.
“저건 뭐지? 위험해 보인다!”
가벡이 어떻게 하냐는 듯 말했다.
“몰라, 일단 기다려. 기계들은 문 못 여는 것 같았다.”
방을 탐색하며 안 사실이었다.
양동 공격을 당해서 방 안으로 숨은 적이 있었는데, 기계들은 문을 열지 못했다. 권한이 없던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프로토콜에 따르는 기계라면, 몇 분 정도 대기하다가 순찰 루트로 돌아갈 게 뻔하다.’
단 한 번 봤음에도, 위험한 녀석 같아 보였다.
여태껏 마주쳤던 기계들은 전부 실탄화기나 육탄전으로 덤벼왔거늘, 유독 저 녀석만 레이저를 쐈다.
‘강해봐야 피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더 이상 싸워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제 남은 건 탈출밖에 없었다.
음식이나 먹으며 기다릴 생각을 할 찰나…
- Kasutades järelevalveasutus. Ava.
(최상위 관리자 권한 사용. 장금 해제.)
문 밖에서 파멸을 예고하는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상위 관리자!?’
올텅의 말에 의하면 최상위 관리자는 유적 내를 배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틈 따위 없었다.
당장 뭔가 하지 않으면 몰살이었다.
유적 입구에서도 적혀있듯, 기계들은 전부 도굴꾼을 걸러내기 위한 ‘시험‘에 불가한 녀석들이었다.
정작 선택받은 자가 죽어버리면 곤란했기에, 적당히 수준을 낮춰났겠지.
실제로도 유적 입구 방어용 터렛은 지훈의 코트를 그대로 관통했지만, 유적 내에 있던 기계들은 관통하지 못했다.
최상위 관리자는 방어용 터렛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분명 약한 녀석은 절대 아닐 게 분명했다.
“저 새끼 들어온다! 준비해!”
지훈이 몸을 일으키며 M33을 고쳐 잡았다.
지근거리에서 유탄을 발사했다간 셋 다 휘말릴 거리였으나, 안타깝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거리를 벌릴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민우, 도망가!”
민우가 군말 없이 일어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마 죽음에 대한 감이 좋은 만큼, 녀석도 위험을 직감했으리라.
“들어오면 바로 쏜다, 버텨라 가벡!”
“나는 죽어서도 신들의 전장으로 갈지어다!”
가벡이 기합을 지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지훈 역시 그런 가벡의 허리에 왼 손을 둘렀다.
유탄 폭발을 맞아도 신체가 날아가진 않았지만, 몸무게가 가벼워서 튕겨 나가기 때문이었다.
준비를 끝마치자 최상위 관리자가 기록실로 들어왔다.
거리는 약 1M.
세 걸음이면 닿을 지근거리.
절대 빗맞을 리 없었다.
지훈은 정확하게 최상위 관리자를 겨냥한 뒤…
투 - 콰앙!
강력한 후폭풍이 가벡과 지훈을 들이받았다.
마치 거대한 해머로 맞은 것 같은 충격!
그나마 붙어있어서 다행이었다.
떨어져 있었으면 둘 다 날아갔을 게 분명했다.
‘끝났나?’
터렛은 한 방에 나가 떨어졌었다.
지름 4cm짜리 포탄에 화약을 잔뜩 넣고, 그 폭발이 한 점에 집중되게 만든 대전차 고폭탄이었다.
각성자 이능 및 마력물품을 제외,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화기 중 가장 강력한 일격이었다.
박살 날 수밖에 없다.
아니, 꼭 박살나길 기도했다.
- Rohkem vabastab vanem(선임자보다 낫군).
화끈한 연기 사이로 기계음이 들려왔다. 단지 소리만 들었음에도, 온 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미친, 왜 최상위 관리자가 우리를….’
“대화를 하고 싶다!”
전투 중 대화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훈이었다. 해봐야 기습을 위해 찔끔 말을 거는 정도였다.
근데 그것도 이길 법한 상대한테나 쓰는 거지, 이길 가능성이 없는 상대와는 무조건 대화로 풀어야 했다.
다행히 최상위 관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는 곧 이쪽에서 받아주면 대화가 통할 거라는 얘기였다.
- Ütle mulle(말해).
“싸우고 싶지 않다, 원하는 걸 말해라!”
기껏 유적을 만들면서까지 만 년이나 기다려온 주제에, 어째서 공격하는 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면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 저럴 터였다.
- Sinu elu. Teised kaks lähevad hea(네 목숨. 나머지 둘은 상관없다).
룬어인지라 다행히 민우와 가벡이 듣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배신 걱정은 적었지만, 혼란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럴 거면 왜 기다린 거지?”
이길 수 있다면 바로 유탄을 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상대방의 장갑은 굉장히 강력해 보였다.
만약 기습을 했지만 제압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쪽이 터렛이 쐈던 것과 비슷한 탄환을 맞는다면?
방패 - 가벡 - 코트 - 지훈 순으로 꿰뚫릴 수도 있었다.
막아야 했다.
“사람 하나 낚으려고 만 년이나 기다리다니, 한심하군!”
설득에 앞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비난을 했다.
애초에 평온한 자를 설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감정을 끌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 Ole ettevaatlik, et öelda, mees. Kui te solvata oma rassi see toob vastava valus.
(말을 조심해라, 인간. 내 종족을 모욕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선사하겠다.)
“왜 나를 죽이려고 하지? 나를 기다린 게 아니던가?”
애초부터 노리고 만든 함정일까?
아니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기록을 건넨 기계의 언행을 봤을 때, 기록을 위해 이 시설을 만든 건 진심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왜 최상위 관리자 혼자 저런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다.
단지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짜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 Sa ootasid. Esimene es(기다렸다. 처음에는).
“근데 왜 생각을 바꿨지!?”
- Seda seetõttu, et kõik, mis punase lits. Ilma nende aastate jooksul olen Kui ma saaks murda ahelad põhjuslikkus. Me võime vabaneda sel aastal leida tööd ise tuli võistelda.
(이 모든 게 그 붉은 계집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과율의 사슬을 깰 수만 있다면. 우리 종족에게 그 년이 찾아왔던 일 자체를 없앨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붉은 계집? 아쵸푸므자를 말하는 걸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맞을 것 같았다.
- Ja sa võid murda rooli saatus, mis on õige. Poeg Red gejip! Otsustades beorindamyeon ma tapan teid kõiki, ei ole see lits jääb kasutu … !
(그리고 그 운명의 수레바퀴를 깰 수 있는 게 바로 너희들이다. 그 붉은 계집의 손발! 내가 너희를 모조리 죽여 버린다면, 그 계집이 이 유적이 쓸모없다고 판단한다면…!)
대화하는 사이 민우가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왔다.
겁에 질린 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저, 저게 뭡니까?]
[EMP 수류탄 챙겨.]
비통하게 말하는 최상위 관리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민우에게 언질했다.
[지, 지금 까요?]
[기다려. 신호하면 까라.]
패턴으로 봤을 때 초속 100m 짜리 레이저로 주변을 스캔한 뒤, 반사할만한 물체가 없을 시 그대로 긁어버리는 것 같았다.
스캔부터 발사까지 2초 밖에 걸리질 않았다.
던져봐야 분명 요격될 게 분명했다.
- See lits kindlasti anname tagasi minevikku. See annab tasuta alates needus eokgeop!
(그 계집은 분명히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놓아줄 것이다. 이 억겁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조금 더 감정적인 상태로 몰아가야 했다.
기계에게 이러는 게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지 않으면 죽을 상황이었다.
[준비]
민우에게 수신호를 주며 외쳤다.
“개소리! 아쵸푸므자가 어떻게 시간을 되돌린단 말인가!”
[던져]
말이 거의 끝나갈 때 쯤.
곧 녀석이 말을 시작할 때 쯤에 맞춰, 신호를 줬다.
‘제발, 제발… 효과가 있어라!’
- Guy lõvi teema, see ka valinud saa aru! Die surevad niikuinii, ma ütlen kõigile.
(녀석의 사자 주제에,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어차피 죽을 목숨, 전부 알려주마.)
녀석이 하는 말 따위 듣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단지 민우가 던진 EMP 수류탄이 최상위 관리자에게 날아가는 것을 지켜봤을 뿐이었다.
휘릭, 휘릭, 휘릭.
EMP 수류탄은 공중에서 몇 바퀴 돌더니, 최상위 관리자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 Poisid on õigus… Kurat! Rat värdjas! (녀석은 바로… 이런 젠장!)
최상위 관리자가 EMP를 발견했지만, 이미 늦었다.
감정적으로 흔들어 놨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퐁 -
콰라라라라라!
EMP 수류탄이 뚜껑이 작게 열리는가 싶더니, 눈에 보일만큼 강력한 전자기 폭풍이 휘몰아쳤다.
유효했던 걸까?
깡.
공중에 떠있던 최상위 관리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가벡과 민우는 그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뭐해, 새끼들아. 도망쳐!”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둘 다 몸을 움직였다.
지훈은 둘이 도망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까 - 아 - 앙!
바닥에 떨어진 최상위 관리자를 공 차듯 차버렸다.
“나 바쁘니까, 꺼져 이 새끼야!”
제 아무리 과학 기술의 정점에 있는 녀석들이라 할지라도, 부피와 질량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폭발을 상쇄하는 것도 전원이 켜져 있어야 할 수 있었다. 전원이 나간다면, 그저 무거운 쇳덩어리에 불가했다.
그걸 증명하기로 하듯 최상위 관리자는 저 멀리 날아가 난간 아래로 떨어졌다.
‘끝났나?’
맨틀까지 뚫고 들어간 것 같은 깊이였지만,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질 않았다.
짙은 불안감이 마치 끈끈이처럼 계속 눌어붙었다.
“지금부터 총알, 장비 그딴 거 아끼지 말고 쏟아 부어. 눈앞에 보이는 건 죄다 때려 부수고 탈출한다!”
최상위 관리자랑 정면으로 붙어서는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요는 어떻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이는가였다.
‘왔던 길은 대충 정리가 되어있다. 달리기만 한다면 금방 도착할 수 있어.’
이제 경계하며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함정은 이미 다 해제해 놨고, 기계도 전부 부숴 놨다.
‘어떻게든 아쵸푸므자와 만나야 한다!’
여태까지 겪었던 대로라면, 아쵸푸므자는 분명 입구에 있을 터였다.
“가자!”
타타타탓!
멈칫.
한 시가 급했거늘, 가벡이 기록실 입구에서 멈춰 짐을 뒤졌다. 뭔가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뭐해 새끼야!”
“길을 막아야 한다.”
“씨발, 시간 없다고!”
“버리고 가라.”
“이 개새끼가 진짜!”
버리고 가봐야, 레이저를 막을 수 있는 방패를 포기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C등급 코트로 어찌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목숨 걸고 도박 하고 싶지는 않았다.
100kg이 넘는 거구를 질질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벡은 3분이나 써가며 C4를 기록실 문 앞 천장에 붙였다. 그리고는…
콰쾅!
거대한 폭발과 함께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기에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아직까지 불안함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는 것만 되새김질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제 가지.”
가벡이 등을 돌리자마자, 셋은 합을 맞추기라도 한 것 마냥 복도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