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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의 반지-83화 (83/173)

<-- 위험한 진실과 안전한 무지. -->

기계 문이 열리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이 문이 열리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만 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명. ‘선택받은 자‘를 기다리기 위해 무겁디, 무거운 세월의 무게를 견뎌왔을 거라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드디어…!’

고생 끝에 도착했다는 마음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햇빛을 못 봐서 날카로워 졌던 마음도, 전투와 피로에 찌든 육체도 모두 맑게 변하는 것 같았다.

당당한 걸음으로, 만 년 동안 그 누구도 밟지 않은 땅에 발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만하거나, 거만한 마음을 먹진 않았다.

단 한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시간을 짊어져 온 이들이 잠든 장소였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고이 잠든 시간의 망령들에게 짧게 묵념했다.

‘내가 너희들이 생각하는 선택받은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미안하게 됐다.’

선택받은 자.

마치 거대한 숙명을 끌어안은 것 같은 이름이었다.

반면 지훈은, 단지 거래를 끝내고 동료를 구하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만약 지훈이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고대인들의 신성한 성지를 흙발로 어지럽히고, 그들이 만 년 동안 품어온 염원을 강탈한 최악의 도굴꾼이 됐다.

‘그래서 어쩌라고.’

관심 없었다.

이미 멸망해 버린 문명보다, 동료가 더 중요했다.

그게 다였다.

“우와, 이게 무슨….”

민우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봤다.

방은 마치 거대한 홀 같은 형태였는데,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이 살아있기라도 한 듯 주기적으로 푸른빛을 뿜어냈다.

아마 만 년 동안 유지되고 있는 전원의 근원인 것 같았다.

기록실은 그 수정을 감싸듯,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거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민우가 조심스럽게 원형 난간 끝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 봤다. 끝이 보이질 않았다. 빛이 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깊이를 가늠하려 쫓아 봐도 끝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수평선이나 지평선마냥, 쭉 이어져 있었다.

뛰어 내리면 바닥에 닿기 전에 탈수로 죽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러서, 위험하다.”

위험천만한 깊이와 달리 안전장치는 얇은 난간 하나가 다였다. 자칫 잘못해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민우를 끄집어 낸 뒤 편안한 발걸음으로 방 안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다른 곳과 달리, 딱 한 곳. 수정 쪽으로 돌출 된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 끝에는 뭉툭하게 튀어나온 기계가 위치하고 있었다.

기록 접근 단말기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쪽으로 간다.”

1시간 후.

단말기 앞에는 사람 모양을 한 기계가 서있었다.

여타 다른 기계와 달리, 바닥에 붙어있는 일체형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방패 올리고 기다려. 공격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와서 방심으로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방패를 앞세운 가벡 뒤에 엄폐해, 조금씩 구체 앞으로 다가갔다.

남은 거리가 약 50M 쯤 됐을 때.

우으으으응 - !

반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본인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미약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기묘한 공명음까지 내며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그와 동시에 죽은 듯 가만히 있던 기계가 눈을 떴다.

마치 눈 대신 사파이어가 박혀있기라도 하듯, 영롱한 푸른색 눈동자였다.

- 미천한 것이 위대하신 그 분의 사자를 뵙습니다.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까지 들었던 기계음과 다른, 사람의 소리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귀에는 무거운 침묵과 함께 작은 이명밖에 들리질 않았다. 그럼에도 마치 귀로 들은 것 마냥, 모든 내용들이 머릿속에 입력됐다.

- 당신께서 오기까지, 96,231,212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6,231,212시간. 자그마치 10,985년 이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가 탄생하기도 전이었다.

그 말은 곧 인간이 석기시대를 살고 있을 때, FS들은 이미 이 유적을 건설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됐다.

‘나를 기다렸다고?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아쵸푸므자와의 거래를 위해 들어온 지훈이었다.

그 전까지는 이 유적에 대해서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알더라도 돈 받고 정보나 팔았을 것이었다.

- 저희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위대하신 그 분께서 저희에게 언젠가 사자를 보내실 거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머리가 복잡했다.

마치 차례로 연결되어 있어야 할 연결고리가, 한 곳에 뭉텅이로 섞여있는 느낌이었다.

‘반지와 반응을 하는 걸 보면, 저 위대하신 그 분 이라는 새끼는 아쵸프무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 보면 러시아 하수구에서도, 차원 여행자가 아쵸푸므자를 ‘위대하신 그 분‘ 이라 불렀다.

당시에는 강력한 마법사였기에, 그렇게 부를 수도 있었겠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다.

어차피 거래였다.

반지를 쓰는 대가로, 칼콘을 치료해 주는 대가로 잡무를 처리했을 뿐이었다.

단지 빨리 처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뭔가 어그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불안했다.

‘그 새끼가 도대체 나한테 뭘 시키고 있는 거지?’

가끔은 악의 없는 행동이 파멸을 부를 때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아파트에 사는 고양이가 단순 심심풀이로 화분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위의 얘기처럼 사람 몇 죽어나가고 말 얘기라면 그냥 무시할 수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10억을 받을 수 있는 대신, 본인이 모르는 이 세상 누군가가 죽는다.

누를까, 말까.

지훈은 고민할 것 없이 버튼을 연타할 사람이었다.

연결고리 없는 몇 명 보다 10억이 더 가치 있었다.

하지만 그 스케일이 커지니까 얘기가 달라졌다.

반지를 쓰는 대가로…

듣도 보도 못한 차원 여행자를 잡아오라고 시켰고,

만 년 전에 멸망한 종족의 기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아쵸푸므자는 저 두 물건으로 뭘 하려는 걸까?

나랑 관계없는 사람 몇 죽고 만다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혹시 그게 행성 혹은 차원 단위의 위험이라면?

싸늘했다.

심장이 굳는 것 같았다.

본인의 욕심이 낳은 악의 없는 중립적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억 혹은 조 단위의 생명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아쵸푸므자는 그 만큼 알 수 없는 존재였고, 또한 위험한 존재였다.

‘진정하자. 일단은 진실에 가까워지는 게 급선무다. 선택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괴상하게 연결되는 사건들 때문에 확대해석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불안정한 확신을 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 내가 어떻게 사자인 걸 알았지?

어떻게 의사를 전할까 고민하자, 마치 몸속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목소리가 울렸다.

일부러 오해하기 쉽게끔 살짝 꼬아서 물어봤다.

본래 묻고 싶었던 내용은 ‘내가 선택받은 자가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였지만, 그딴 말 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그 분께서는 사자님께서 본인이 선택받은 자임을 증명하는 징표를 가지고 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 저희도 처음엔 그 징표를 몰랐으나, 사자님께서 시스템에 반지를 접촉하셨을 때 저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께서 우리들의 사자라는 것을.

잘 듣다가 마지막에서 덜컥 걸렸다.

저 기계는 분명 당신‘들’ 이라고 말했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는 뜻이었다.

‘나 말고도 다른 사자가 있었다는 말인가?’

조심히 내용을 곱씹었다.

문득 아쵸푸므자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내가 이 반지를 써도 상관없나?

딱히. 권곽도 이미 죽었으니까 상관없어.

서권곽.

반지의 저번 주인이자, 지훈이 파헤쳤던 무덤의 주인이다.

생각이 닿자마자 물었다.

- 나 말고도 몇 명의 사자가 왔었지?

기계는 100년 전에 셋, 50년 전에 하나, 지금 하나. 그리고 5년 후에 하나가 왔었다고 대답했다.

지훈을 제외, 총 다섯 명의 사자가 왔었다는 말이었다.

‘잠깐만…?’

왔었다.

왔었다는 보통 과거에 쓰는 말이었다. 하지만 기계는 분명 5년 후에도 사자가 찾아 ‘왔었다’라고 얘기했다.

말에 오류가 있었다. 혹시 실수라도 한 걸까?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상대는 기계였다.

- 잠깐. 5년 후에 누군가가 ‘왔었다’고?

- 예. 찾아오셨었습니다.

-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 안 되잖아.

기계는 잠시 침묵했다.

키이이잉 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 5번째 사자님이셨습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훈이 6번째 사자로써, 지금 단말기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근데 ‘5년 후에 5번째 사자가 왔었다?’

‘미래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먼저 도착했다고?’

누가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듯, 머리가 아파왔다.

그냥 가도 상관없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혈액 속에 이물질이 들어가 흐르고 있는 것 마냥,

내성 발톱이 발가락을 파고 들어가는 것 마냥,

귀에 벌레가 들어간 것 마냥,

신경쓰이는 게 너무 많아 이상하게 넘길 수 없었다.

- 방문자 기록. 서권곽. 96,245,394 시간 째 방문. 기록을 가져가셨습니다.

- 미래에 왔던 기록이 지금 남아있다고?

- … 연산 실패. 사견을 담아 얘기합니다. 인과율 혹은 시간이 어그러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짐작할 수 있는 정보가 없습니다.

인과율, 시간.

아쵸푸므자가 말버릇처럼 읊던 단어들이었다.

서권곽.

권능의 반지의 전 주인이었다.

5년 ‘후‘에, 지훈보다 ‘먼저‘ 도착한 사자.

시간이 어그러졌다는 증거였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상황에 설명이 되질 않았다.

- 너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 이 유적은 무한한 시간을 견딜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습니다. 까닭에 시간의 뒤틀림이나 왜곡에 대해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가졌습니다.

대충이나마 지금 상황을 그려보자면…

1 - 지훈 전에 권능의 반지를 썼던 사람이 5명이 있었다.

2 - 5번째 사용자는 서권곽이었다.

3 - 서권곽은 5년 후, 현재에 있는 지훈보다 ‘먼저’ 이 유적에 도착해서 기록을 가져갔다.

‘5년을 기다리면 서권곽이 여기에 다시 나타날까?’

그럴 수 없었다.

서권곽은 현재 사망한 상태였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아쵸푸므자도 그렇게 말했다.

‘시간 그리고 인과율이 어그러져 있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이해도 할 수 없고, 이유도 몰랐지만 모든 증거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쵸푸므자. 아무것도 설명 안 해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처음 계약할 때도 생각하긴 했었다.

달콤한 꿀을 품은 독사과라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대체 그러면서까지 뭘 하고 싶은 거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알고 싶다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지.

더 이상 고민해봐야 풀릴 문제가 없었으므로, 지훈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 기록을 받고 싶다.

- 사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우으으응…

반지와 기계가 커다란 공명음을 내뱉었다.

이내 기계의 배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안에는 투명한 관에 담긴 푸른색 구체가 들어있었다.

- 저희는 적응에, 진화에 실패했습니다. 당신들께서는 저희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 주십시오.

실패라니?

뭔가 묻고 싶은 지훈이었지만, 채 묻기 전에 기계가 작동을 멈췄다.

“잠까….”

더 이상 머릿속으로 대화할 수 없었다.

붙잡기 위한 말이 공허로 변해 방안에 울렸다.

“뭐?”

말소리에 가벡이 번쩍 반응했다.

“형님, 어… 손에 뭐 들고 계세요?”

“기록.”

“움직이지도 않으셨는데… 언제… 뭐 이제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능이 강해졌어요?”

무슨 개소린가 싶어 한 대 쥐어박으려다 멈췄다.

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기계와 얘기한 시간이 어림잡아 1시간은 됐거늘… 단 1분도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게 바로 시간 왜곡에 대한 저항인가.’

엄청난 기술력에 어이가 없어졌다.

“물건 찾았다. 이제 돌아간다.”

가벡과 민우 입장에서는 대치 잠깐 했는데,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지훈의 뒤를 따라갔다.

둘 다 뭔가 묻거나 하진 않았다. 단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의뢰가 끝났기에,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걸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마냥 신비한 광경이었다.

기분 환기는 짧았다.

길어 보였던 길도 어느새 끝났고, 눈앞에는 문이 있었다.

“열어.”

가벡이 방패로 버튼을 툭 눌러서 문을 열었다.

쉬이이익!

살다 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데,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 말이다.

마치 혈관에 피딱지라도 낀 듯 불쾌하고, 손발에는 땀이 잔뜩 나 도망가라는 듯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순간들.

찰나를 바라보는 1초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지금 느낀 기분이 딱 그랬다.

문이 열리자 보지 못했던 게 하나 있었다.

사람 머리만 한 강철 구체였는데, 중력을 거스르기라도 한 양 공중에 떠 있었다.

‘뭐지?’

귀환 장치인가 싶기도 잠시.

웅 -

구체에서 붉은 빛이 일행을 횡으로 훑었다.

초속 100M는 될 법한 빠른 속도의 레이저.

함정에서 봤던 절단 레이저였다.

가벡이야 방패로 막고 있었으니 괜찮아 보였고, 지훈은 가속 이능으로 피하면 됐다.

하지만 몸이 노출되어 있던 민우는 피할 수 없다.

맞는다. 몸이 두 동강이 난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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