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개척지, 그리고 자살숲 -->
굳이 차량을 렌트할 것도 없이 벤츠를 타고 달렸다.
민우는 익숙한 듯 조수석에 앉아서 껌을 씹었지만, 가벡은 마치 강아지마냥 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우어어어억!”
슬쩍 백미러로 훑고는 민우에게 눈치를 줬다.
“저거 좀 말리지?”
“말려봐야 다른 기행 벌리더라구요. 시트에 구멍 뚫거나 괴상한 짓 할지도 모르는데, 말려볼까요?”
저번에는 비둘기를 생으로 잡아먹었다고 했다.
부시맨마냥 온갖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니, 골치가 아팠다.
“그러고 보니 너 어쩌다 저거 껴안게 됐냐?”
“아… 진짜, 저 속 터져 죽을 것 같아요.”
민우가 울상을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옛정을 생각해 돈 몇 푼 쥐어주고 제 갈 길 알아서 찾으라고 해줄 예정이었다.
대충 칼콘 주변에 방만 얻어주면 굶어 죽거나 초대형 사고는 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지훈과 칼콘이 부상당하면서, 보호자 없는 가벡은 붕 떠버렸고… 정부에 의해 강제 송환 될 위기에 처했다.
“저 새끼, 저거. 교수한테 칼부림 하려고 했어요. 절대 못 돌아간다면서 도끼눈 뜨고 누구 하나 갈아버릴 기세로 말하는데, 어휴….”
주먹구구식으로 붙은 ‘감시’라지만, 외교로 따지자면 그가쉬 클랜의 외교관 역할로 온 가벡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하고 싶은 찰나 민우가 슬쩍 끼어들었고, 교수는 이 뜨거운 감자를 그에게 넘겨버렸다.
- 아는 사이 같으니까, 잘 하실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믿기는 개뿔.
그냥 책임전가였다.
나중에 그가쉬가 추격자를 보내면 ‘무슨 소립니까, 저 양반이 데리고 갔는데?’ 하고 꼬리나 자를 심산이었겠지.
“어쩌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제가 데려왔죠.”
그렇게 민우와 가벡의 뜨거운 동거가 시작됐다.
‘불쌍한 녀석. 귀찮은 걸 떠안았구나.’
가벡 문제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우선순위가 낮았기에 뒤로 휙 밀어버렸다.
30분 쯤 운전하자, 서쪽 톨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쪽 톨게이트와는 달리 격벽 높이도 낮았고, 주둔 병력도 하나도 없어 비교적 휑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항상 궁금했는데 왜 서쪽에는 병력이 없어요?”
“위험한 게 없으니까.”
“자살숲 있잖아요.”
“거기는 들어가지만 않으면 안전하잖아.”
자살숲은 세계에서 악명이 높은 미개척지였지만, 위험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안에는 위험한 몬스터가 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자살숲 밖으로는 단 한 마리도 기어 나오질 않았다.
게다가 대만 역시 자살숲 부근에 포탈이 열렸기에, 개척을 진행하려면 무조건 한국 정부와 충돌이 일어 날 게 분명했기에… 그냥 깔끔하게 세드 개척을 포기해 버렸다.
덕분에 대만 개척지는 전쟁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중계무역 및 관광에만 신경 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몬스터 위협도 없고, 전쟁 걱정도 없으니 한국 측도 서쪽 방향은 구색만 갖춰 놓을 뿐, 본격적인 방어는 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몰랐네요. 그냥 대만 개척지에 엄청 큰 쇼핑몰이랑, 관광단지 있다는 것만 알았어요.”
실제로 시연과 처음 만났을 때, 대만 개척지에서 사온 옷이라고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렇다고 들뜨지 마라. 이번 임무 엄청 위험한 거다.”
“예, 걱정 마세요.”
☆ ☆ ☆
격벽, 그리고 도로 밖에 보이질 않는 지루한 시간.
두 개척지간 교류가 적었기에, 시속 200km를 밟아 대만 개척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欢迎。灰色天堂,台湾的前沿。(환영합니다, 회색낙원 대만 개척지입니다.)”
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중국어는 말 몇 마디밖에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英语(영어)?”
톨게이트 직원은 방긋 웃고는 영어로 화답했다.
“welcome to gray heaven, Taiwan colony. (회색 낙원, 타이완 개척지에 오신 것을 완영합니다.)“
이제야 말이 조금 통했기에, 가볍게 통행료를 지불하고 개척지 안으로 진입했다. 무기 검문이나 범죄자 조회를 하던 러시아, 티그림과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어차피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은 전부 한국 톨게이트를 지났을 테니, 딱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만 개척지는 서울 개척지와 달리 인구 밀도가 높고 치안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여차 싶으면 바로 가디언이나 경찰이 출동하기 때문에, 범죄율도 낮고 외부인들도 조심하는 추세였다.
“Your life is precious. Do not commit suicide.(당신의 목숨은 소중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마세요.)”
톨게이트 직원은 영어로 된 책자를 건네줬다.
“야, 뭐라고 적혀있냐?”
민우는 슬쩍 훑어보니 웃음을 터트렸다.
“자살숲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말래요. 죽으려면 우리 동네 가서 죽으라는데요?”
목숨은 소중하니까 자살하지 말라?
과연 자살 명소다운 환영이 아닐 수 없었다.
☆ ☆ ☆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식량으로 쓸 MRE 30봉(5일치 식량)과 칼로리 블록, 그리고 구급약을 구입했다.
개척지 주변에 있는 자살숲 초입 지역의 지도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장비 확인이나 한 번 할까.’
[지훈]
개괄 : C등급 7티어 각성자.
분류 : 용병
무기.
M33 유탄발사기 (40mm 대전차 고폭탄 30발)
D등급 단검 (60cm, 투박한 서양식 양날검 모양)
방어구.
방탄 외투 (D등급), 방탄모 (F등급)
습작 954번 (B등급), 전투용 워커
기타.
휴대전화
2세대 나이트비전
[민우]
개괄 : 일반인.
분류 : 정보꾼, 지원 사수
무기.
MP5 (폭발탄환 60발, 일반 탄환 30발)
EMP 수류탄 2개
방어구.
경량 방탄모 (D등급), 경략 방탄복 (D등급)
경량 워커 (F등급), 보호경 (일반)
기타.
2세대 나이트비전
[가벡]
개괄 : E등급 3티어 각성자
분류 : 투사, 이도류, 덫 사냥꾼, 야만인
무기.
기괴하게 생긴 대검(120cm, 일반)
갈고리처럼 끝이 휜 단검(66cm, E등급)
방어구.
파편 및 폭발 방어용 방패 (F등급)
고블린 이빨 목걸이 (일반)
늑대 가죽 방어구 (일반)
방탄모 (일반)
운동화 (일반)
[공용]
삽.
자살숲 지도.
벽 폭파 혹은 입구 열기용 C4.
휴식용 침낭 2개.
칼로리 바 6개
MRE 30봉
식수.
전체적으로 중화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기계를 상대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훈은 여태까지 쓰던 글록, 빈토레즈, 여왕의 은혜 셋 중 단 하나도 들지 않았다.
민우 역시 유탄발사기를 들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무게 때문에 폭발 탄환으로 대체했다.
9mm 폭발탄환으로 얼마나 큰 위력을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가벡은 야만전사 차림에 운동화, 그리고 방패를 들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꼭 칼콘이 처음 헌팅을 나갔을 때랑 비슷…
‘씨발….’
칼콘 생각이 나자 이를 꽉 깨물었다.
“가자. 갈 길 멀다.”
일행은 장비를 챙겨 벤츠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첫 번째 자손들의 유적이 자살숲 내에 있는지라, 차량을 타고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만 개척지는 독특하게도 격벽이 없었다. 몬스터 혹은 인간들이 침입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지구에 있는 여느 도시 같아서 익숙했다.
하지만 울타리를 건너는 순간 위험천만한 세드 영역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 증거로 나무 울타리에 온갖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 자살 금지.
- Save your life, enjoy your life (죽지 마세요, 인생을 즐기세요.)
-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중국어, 영어, 한글로 적힌 온갖 문구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 작살나네요. 의외로 여기가 관광 명소래요. 여기 와서 저 울타리 슥 훑어보고 가면 삶에 의욕이 생긴다나?”
의욕은 무슨.
일그러진 회색 숲을 배경으로 싸구려 위로들을 읽고 있자니 도리어 자살 충동이 생길 것 같은 지훈이었다.
“지랄 그만하고, 슬슬 들어가자.”
울타리를 넘기 전 반지를 슬쩍 쓰다듬었다. 작은 진동과 함께 유적의 위치가 울타리 너머에 있음을 알려줬다.
“후… 가죠.”
셋이 나란히 울타리를 넘었다.
그 모습을 본 순찰 대원이 기겁을 하며 달려왔지만, 유탄 발사기를 보여주자 잠잠해졌다.
☆ ☆ ☆
자샆숲은 굉장히 독특한 느낌이었다.
티그림에 있는 숲들이 하늘을 찌를 듯 50M 이상 크게 자라났다면, 자살 숲은 나무 크기가 거의 5~6M 밖에 되질 않았다.
지질학자들은 그 이유를 바로 ‘화산지대’로 꼽았다.
대만 개척지 서쪽, 곧 자살숲 중앙 부분에는 커다란 휴화산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폭발 위험은 없다지만, 문제는 지반 아래로 용암이 흐른다는 거였다.
덕분에 가끔씩 지반이 아주 얕게 갈라져, 열기가 올라오는 일이 있었다. 까닭에 나무들이 그 열기를 따라 하늘로 자라지 않고, 땅 쪽으로 계속 머리를 들이밀었다.
화산 기후 특유의 알칼리성 회색 토양과, 위로 자라지 않고 아래로 자라는 기괴한 나무.
거기에 화산 원시림이라는 미아 되기 딱 좋은 구조가 어우러지자, 유명한 자살 명소로 떠오른 것.
- 어차피 인생 다 살았는데, 모은 돈 다 꼴아 박아서 세드 관광도 하고… 마지막은 자살숲에서 조용히 죽자.
덕분에 대만 개척지 관계자들은 이 ‘자살 관광’ 때문에 엄청난 몸서리를 쳤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냥 다 포기하고 반쯤은 방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지훈 일행이 자살을 하러 가는 건 아니었으므로, 목적지를 향해 전진했다.
훅! 훅!
산악지대 출신인 가벡이 먼저 앞장서서 길을 뚫었다.
E등급 아티펙트를 정글도 마냥 휘두르니, 과연 잔가지들이 휙휙 잘려나갔다.
“안 힘드냐? 벌써 30분 넘게 휘두르며 걸은 것 같은데.”
“기괴하게 생기긴 했지만, 가시 산맥처럼 긁힐 위험은 없어서 편하군.”
“그럼 계속 가라.”
팔팔한 가벡과 달리, 민우는 슬쩍 지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습한 기운 때문에 체력 저하가 빨랐던 탓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각성자, 전투 종족 사이에 일반인으로 꼈으니 꾹 참고 버틸 수밖에.
☆ ☆ ☆
2시간 쯤 이동하고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가볍게 MRE로 밥을 먹고 있자니, 멀리서 2인조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
“젠장 아쉽네.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남자들은 중국어로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대화 내용으로 봤을 때, 자살하러 왔거나 미아가 된 여자들만 노리는 범죄자들 같았다. 만약 일행에 여자가 껴있었거나, 여자만 있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저거 뭐야. 이상한 말 지껄이는데?”
가벡이 소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물었다. 반면 지훈은 적당히 알아들은 터라, 일단 제압할 준비를 했다.
“형씨, 여기는 왜 온 거야?”
남자가 중국어로 물었다.
민우가 슬쩍 MP5 쪽을 훑었다.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민우, 괜찮다. 그냥 밥 먹어.”
안심시키고는 가벡에게 눈짓해 단검을 빌렸다.
지훈이 검을 들자 범죄자들이 슬쩍 당황했다.
“뭐야, 우린 얘기하러 온 거라고?”
“Nice to meet you(반갑습니다)!”
지훈이 양팔을 벌려 환영하자, 범죄자들이 갸웃거렸다.
범죄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그 사이 지훈이 슬쩍 다가가…
푹.
풀썩.
범죄자 하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범죄자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총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훅!
털썩.
그나마도 금방 쓰러졌다.
“혀, 형님… 쟤네는 왜…?”
“말투 보니까 강도다. 약해 보이면 물건 털고, 여자였으면 강간했을 걸.”
민우는 시체를 보며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음식은 일단 애써 집어넣었다.
“뭐 그런 표정을 짓지? 계집은 강간하고, 약자의 물건을 약탈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던가?”
야만적으로 살아 온 가벡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시인, 문명인으로 살아온 민우는 그런 가벡을 벌레 보듯 쳐다봤다.
“밥이나 처먹어, 새끼들아. 가벡, 그리고 나랑 함께할 때에는 될 수 있으면 사고치지 마라. 누누이 얘기하지만 여기는 인간의 땅이다.”
가벡은 식사를 끝낸 손가락을 빨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좋은 총 쏠 수 있고,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다면야.”
- 이블 포인트가 1 감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