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과 거짓 사이 -->
싸늘했다. 공기 중에 바늘이라도 떠다니는 것 마냥, 온 몸이 불편했다. 살갗을 찢고 들어올 것 같은 날카로운 침묵.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짓누르는 듯 어깨가 무겁고,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폐가 따금 거리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 칼콘이 오른 손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내 손에 이 반지가 껴져있더라? 의사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려고 했는데 안 빠진다고 했어.”
당연한 얘기였다. 권능의 반지는 사용자의 동의가 있지 않은 한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근데 이 반지… 지훈 꺼 아니야? 이게 왜 내 손에 있어?”
칼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지와 대화를 나눠 봤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떠보는 것일 수도 있었고, 단순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내가 끼워놨어.”
솔직하게 털어놨다.
원래대로라면 반지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겠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친구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칼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지훈. 혹시 그 날 생각나? 묘지 파던 날.”
기억 못할 리 없었다.
권능의 반지를 얻은 날이자, 인생이 바뀐 날 아니던가.
그 와 별개로, 질문을 받자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역시 반지의 정체를 알아챈 건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반 강제로 칼콘에게 반지를 끼웠다지만, 본디 욕심이란 끝이 없는 물건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위태위태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지훈이 혼자서 뭐라 중얼거렸잖아.”
“그랬었지. 그게 왜.”
“나 그거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이 반지 도대체 뭐야?”
이미 다 알고 묻는 질문 같았다.
오리발을 내밀어야 할까, 아니면 순순히 인정해야 할까.
진실과 거짓.
본능과 이성.
머리와 가슴.
많은 선택 사이로 지훈이 말은 답은 하나였다.
“권능의 반지다.”
혀를 움직이며 뜨거운 진심을 내뱉으면서도, 머리는 차갑게 식어 최악의 경우를 대비했다.
만약 칼콘이 반지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만약 후환이 생길 것 같은 냄새가 난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왜 여태 말 안 했어?”
“분쟁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이좋은 친구라 할지라도 돈 거래를 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듯, 탐욕은 인간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그건 가진 자, 못 가진 자 양쪽 다 적용되는 얘기였다.
못 가진 자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양심을 판다면,
가진 자는 탐욕을 뺏기지 않기 위해 불신을 삼킨다.
지훈은 사실을 말하면 반지를 뺏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반지는 매력적이고, 엄청난 아티펙트였다.
아무리 동료라 할지라도 배신을 속삭일 수 있을 만큼.
처음 싹튼 걱정은 곧 의심으로 자라났고, 그 의심은 불신의 열매를 맺었다. 그래서 숨겼다.
가족에게도, 연인에게도, 동료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는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날 믿지 못한 거야?”
제 목숨까지 던져가며 구해 준 이에게 불신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까?
칼콘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그럴싸한 변명을 해서 칼콘을 설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더 이상 기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해도 공감도 바라지 않아. 변명도 하지 않겠다. 비난해도 괜찮다.”
칼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침묵 속으로 크라토스 해설이 끼어들었다.
- 무너집니다, 무너져요! 저런 반칙을 했다가는 앞으로 공정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신뢰가 깨질 수도 있는데요!
“담배 있어?”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칼콘의 손에 쥐어 줬다.
칙 - 칙. 화륵.
후읍 - 하아…
복잡한 감정들이 담배 연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눈물 대신 연기를 토해내는 것 마냥, 둘은 한 동안 담배만 태웠다.
불편한 분위기가 살갗을 뚫을 듯 날카로워 질 때 쯤…
“informatsioon(정보).”
칼콘의 입에서 낯선 언어가 튀어나왔다.
[정보]
종족 : 오크
이블 포인트 : 58
성향 : 뉴트럴 (중립)
등급 : E등급 1티어
근력 : E 등급 (19)
민첩 : E 등급 (15)
저항 : E 등급 (11)
잠재 : E 등급 (17)
이능 : 감지 불가
마력 : 감지 불가
[신체 변이]
없음
[이능력]
없음
칼콘의 눈동자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그에 집중하자 지훈에게도 정보가 전송됐다.
‘E등급인가.’
출중한 실력 외에도 전투 종족인 까닭인지, 시작부터 등급 및 능력치가 굉장히 높은 상태였다.
“나도 각성했어. 그 때 지훈이 왜 엎드렸는지 알 것 같아.”
“많이 아팠냐.”
“별로. 팔이랑 다리 때문에 신경 쓰지도 못했어.”
“그래….”
각성을 했음에도 축하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이미 팔, 다리가 없는 상태에서 각성해 봐야 헌팅을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끼워 줬으면,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근데 이해는 해. 나도 이런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뺏을까 하는 생각 한 번쯤은 했을 것 같아.”
“이해해 줘서 고맙다.”
“근데도 나한테 반지를 끼워 준거야?”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을 왜 감수했냐는 질문이었다.
“널 살리고 싶었어. 그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칼콘의 목숨이 필요했다. 하지만 비밀을 포기한다면 칼콘을 살릴 수 있었다.
소중한 동료의 목숨과, 반지의 비밀.
아찔한 선택의 순간에 놓였을 때, 지훈은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전자를 선택했다.
‘동료가 죽어 가는데 비밀,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칼콘은 한동안 생각을 하더니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반지 덕분에 살았어. 하지만 조금만 더 날 믿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네.”
대답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한 게 잘한 건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칼콘은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숨 살려준 인간 표정이 왜 그래. 지훈은 잘 한 거야. 덕분에 내가 살아남았잖아.”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
어색한 침묵 속으로 칼콘이 조용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뭐 하나 봤더니 반지를 빼내려 하고 있었다.
“조용히 빼서 멋지게 건네주려고 했는데, 손이 하나밖에 없어서 빼질 못하겠어. 도와줘.”
“괜찮겠어?”
“어차피 다 회복돼서 이제는 없어도 될 것 같아.”
“헌팅 갈 때 돌려줘도 돼. 조금 더 끼고 있어.”
“지훈, 나는 이제 이런 거 필요 없어. 괜찮아.”
이제 헌팅을 갈 수 없으니, 반지도 필요 없다는 뜻으로 들려 살짝 마음이 불편해졌다.
결국 칼콘을 이기지 못하고, 녀석에게 손을 얹었다.
“vabastamine(해제).”
그 누가 당겨도 절대 빠지지 않던 반지가 너무나도 쉽게 빠져나왔다. 지훈은 손에 들린 반지를 쳐다봤다.
“걱정 마,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갈게.”
“… 고맙다.”
“고맙기는 뭐가. 겨우 목숨 빚 갚나 했는데, 이번에도 결국 지훈한테 구해졌잖아. 아직도 2개라고.”
어이없어서 픽 웃으니 그제야 분위기가 나아졌다.
“드디어 웃네. 여태껏 지훈이 어떤 표정 짓고 있었는지 알아? 누구 잡아먹을 것 같았어. 어휴, 무서워라.”
“글쎄, 하나 잡아먹을 놈 있긴 하지.”
이름 모를 흑인, 트레이닝 복, 화염 계통 발현계 강성자.
칼콘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
줄곧 병원에만 있었단 탓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다.
죽었다면 무덤을 파헤쳐 시체라도 잘근잘근 씹어 먹을 생각이었고, 살았다면 지구 그 어디에 있던 끝까지 찾아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치욕스러운 죽음을 주겠다고 맹세했다.
‘칼콘을 치료한 다음,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주마.’
☆ ☆ ☆
서울.
언더 다크 휘하 영리 병원.
파이로가 침대에 누워 항생제를 맞고 있었다.
그 위로 시체 구덩이 주인이 그를 내려다 봤다.
“파이로가 병원에 누워있다니, 진풍경이네.”
“꺼져, 이 게이 새끼야. 네가 저격만 제대로 했어도…!”
반면 파이로는 주인을 보자 게거품을 물었다.
“이봐, 거리가 500도 더 됐어. 거기다 시속 50km로 달리는 놈을 어떻게 맞추라고 그래?”
물론 가속 이능 발동 중에는 맞출 수 없었지만, 마지막 일격 직전에는 분명 기회가 있었다.
파이로는 그 사실을 설명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주인은 그냥 픽 웃고만 말았을 뿐이었다.
“그냥 인정 해. 우리가 진거야, 파이로. 이거나 먹고 정신 차리라고.”
주인은 파이로의 손에 베지말을 한 병 쥐어줬다.
“지금 누굴 능욕하는 거냐!”
부글부글… 펑!
파이로 손에 들려있던 베지말이 끓는가 싶더니 머지않아 터져버렸다. 파편이 튀었으나, 둘 다 반응하지 않았다.
“진정해, 그렇게 이능 남발해봐야 몸만 상한다고.”
“닥쳐라, 스토커. 난 더 이상 널 믿지 않는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마지막 순간 널 구해준 건 나라는 걸 명심하라고.”
파이로는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는지 이를 꽉 깨물었다.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어. 빌어먹을 황인종 새끼들… 언젠가 두 놈 다 내 손으로 죽여주마.’
주인, 아니 스토커는 분노에 물든 파이로를 뒤로했다.
[파이로 완치까지 12주]
☆ ☆ ☆
그로부터 3일 정도 흐르자 퇴원할 수 있었다.
“벌써 퇴원하는 거야? 역시 빠르네.”
칼콘이 씩 웃으며 물었다. 반지에 대한 깊은 얘기를 터놓으면서, 신체 재생에 대한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됐네. 너는?”
“상처 아물 때 까지 기다리고, 그 다음엔 재활 받아야지.”
그나마 다행인 건 국가 임무 중 부상인지라 병원비가 전액 무료라는 점이었다. 물론 고액의 의수 구입은 예외였다.
“그래, 자주 들를 테니까 몸 만들고 있어.”
“몸은 왜?”
“헌팅 나가야지, 새끼야.”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칼콘은 헌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농담하지 말라며 웃어버렸다.
“지훈은 이제 뭐 할 거야?”
마음속으로 정해둔 일거리가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돈 벌어야지. 그래야 맛있는 사식도 잔뜩 사오지 않겠어?”
“에이, 고양이 사료에 소젖이면 된다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 집어 치워. 고기 잔뜩 먹여줄 테니까 빨리 낫기나 해라.”
픽 웃는 칼콘을 뒤로하고 퇴원 수속을 밟으러 향했다.
원무실 쪽으로 가고 있자니 시연이 칭얼거렸다.
“그냥 이참에 건강 검진 쭉 하자, 응?”
아마 두 번 연달아 병원에 입원을 했으니 걱정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었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아픈 곳도 없는데 병원에서 죽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안 돼.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어.”
“급한 거야?”
시연은 자기를 봐서라도 제발 좀 쉬라고 말했지만, 애써 쳐다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미워.”
결국 시연은 훌쩍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발목에 무거운 족쇄가 걸린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칼콘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