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
식사 후 노닥거리고 있으니 가벡이 찾아왔다.
“오, 이게 누구야!”
전투 종족 특유의 전우애 때문인지 칼콘이 먼저 반응했다.
“잘 지냈나?”
“당연하지!”
둘은 서로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세게 부딪쳤다.
이후 가벡이 민우에게 다가가자,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고민하다 주먹을 내밀었다.
“널 전우로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랑 주먹을 부딪치면 네 달걀이 부서질 텐데?”
민우가 화들짝 놀라며 말로만 인사했다.
“반갑군, 가벡. 잘 지냈나?”
“딱히. 잘은 아니다.”
가벡은 주먹을 내밀었다. 이에 지훈은 있는 힘껏 부딪쳤다.
뻑!
“역시, 세군. 인간은 모두 약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 내가 강한 걸 어쩌겠나.”
실없는 농에 둘이 픽 하고 웃었다.
“연구팀 호위로 온 건가?”
“어쩌다 보니.”
한동안 이런저런 잡담이 이어졌다.
주로 근황 얘기였다.
“그나저나 전쟁은 어떻게 됐지?”
“끝났다. 하지만 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 승리였거늘 가벡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겐포의 유언대로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겐포의 가족을 모두 볼모로 잡았다.”
정리하자면 이랬다.
겐포가 죽은 후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분쟁의 씨앗은 남아있었다. 이에 그가쉬는 그 싹을 짓밟기 위해 차기 부족, 겐포의 가족을 모두 볼모로 붙잡아 버린 것이다.
가벡은 이 결과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는 도대체 뭘 위해 싸우고, 뭘 위해 죽은 거지?”
둘 중 하나가 끝장날 때까지 싸우자고 맹세했거늘, 정작 끝은 너무나도 미온하기만 했다.
지훈 입장에서는 전쟁이 빨리 끝나 희생자가 적은 편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저쪽 문화에선 그게 아니었나보다.
“죽은 전우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가벡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상실감이 엿보였다.
“전쟁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 한 대 펴라.”
위로의 말 대신 담배를 한 대 건넸다.
가끔은 위로보다, 작은 행동 하나가 더 나을 때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밤이 되자 켄코가 나이트비전을 낀 채로 날아올랐다.
그가쉬는 본인들이 지켜 줄 테니 경계할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원래 안전은 본인이 챙기는 게 제일이었다.
밤사이 켄코가 무전으로 다이어 울프 무리가 보인다고 했으나, 별다른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 ☆ ☆
일이 없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이러고 돈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나날이 계속됐다. 시체 구덩이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라 뒤숭숭했던 것도 겨우 며칠이 다였다.
몇 개 있는 고민이라곤 바로 음식과 지루함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제발, 이 밍밍한 국 좀 그만 먹고 싶어.”
칼콘이 음식을 보며 징징거렸다.
아침, 점심, 저녁 항상 같은 고깃국만 나왔다.
도시에서 배급되는 인공육과 보급용 채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싱싱한 재료를 쓴 음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싱거웠다.
그도 그럴게 버그베어는 원래 음식을 조리하지 않고 생으로 먹는 종족이었다. 게다가 산맥 한 가운데 위치한 군락이라 소금이나 후추 같은 조미료도 귀했던 것.
당연히 맛은 개뿔, 반 강제로 자연의 맛을 느껴야 했다.
“으… 이럴 거면 그냥 통으로 굽거나 훈제를 하지. 진짜 이걸 뭔 맛으로 먹어.”
칼콘은 국을 어린아이가 시금치 보듯 쳐다봤다. 결국 굶을 자신은 없었는지, 눈 꼭 감고 그대로 마셔버렸다.
식도를 따라 비린내가 올라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젠장. 고양이 사료라도 가져올 걸.”
“네가 고양이도 아니고 그걸 왜 먹냐, 도대체.”
“맛있어. 특히 소젖에 말아 먹으면 좋다고.”
“됐다. 그만하자, 밥 맛 떨어진다.”
징징거리는 칼콘과 달리 이쪽은 나름대로 방비를 해 왔다.
바로 맛소금이었다.
통구이로 나온다고 해도 찍어 먹으면 됐고, 국으로 나온다고 해도 타먹으면 됐다. 과연 완벽한 수비가 아닐 수 없었다.
“형님… 저 조금만 주시면 안 돼요?”
민우가 맛소금을 황금처럼 쳐다봤다.
녀석도 칼콘의 충고를 듣고 나름대로 비스킷과 칼로리 블록을 가져왔으나, 이틀 만에 전부 먹어버린 참이었다.
“나도 별로 없으니까 조금만 가져가.”
결재 떨어지자 민우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소금을 챙겼다.
참 감격스러울 거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민우의 사격 연습을 도와줬다.
기본적인 PRI(사격술 예비 훈련)부터 거리별 사격 실습, 사격시 팁 등 여러 가지 등이었다.
약 3일간 시간 날 때 마다 훈련시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다. 200M만 넘어가면 모든 총알이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쏜 거 맞아? 왜 빗나가.”
“그러게요.”
“너 영점 조절 제대로 한 거 맞냐?”
“그게 뭐에요?”
짓궂은 농담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농담이지?”
“진짜 모르는데요?”
이걸 때려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길 잠시.
“너 내가 사격장 가서 연습 하라고 했냐, 안 했냐.”
“이상하네요, 가서 쐈을 땐 정말 잘 맞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실내 사격장은 100M 넘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게다가 민우가 찾아간 곳이라면 분명 서구에 있었을 텐데, 그 땅값 비싼 곳에 거대한 사격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너 도대체 겐포 병영에선 어떻게 맞춘 건데?”
“그냥 목표를 중앙에 놓고 스위… 아니 방아쇠 당겼어요.”
그나마 다행은 병영과 민우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거였다.
만약 조금만 멀었다면 고블린들의 사격에 일방적으로 벌집이 됐을 게 분명했다.
결국 영점 먼저 잡아 준 다음 호흡관리 등을 가르쳤다.
지루해도 시간은 흐른다고 했던가?
어느새 연구 일정도 거의 끝나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끝인가.’
돌아갈 생각을 하며 짐을 싸고 있자니, 숙소에 웬 버그베어가 불쑥 들어왔다. 가벡이었다.
“나와. 할 말이 있다.”
민우와 칼콘이 슬쩍 눈치를 봤다.
혹여 저번에 졌던 게 신경 쓰여 결투라도 신청하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가 들어 있었다.
“지금 짐 싸잖아. 귀찮으니까 그냥 여기서 말해.”
“중요한 사안이다.”
농담 할 녀석은 아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벡은 이후 칼콘과 민우도 불러 군락 구석으로 향했다.
“뭔 얘기 하려고 뜸을 이렇게 들여. 누구 죽여야 할 사람이라도 있냐?”
가벡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난 이 군락에서 나가고 싶다.”
나름대로 많이 고민한 것 같았으나, 이쪽 입장에서는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나가. 뭐가 문제냐?”
원래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는 법이었다.
실제로 크락도 인간 도시에 와서 살지 않던가?
“추격자가 붙는다. 일족 중 내가 제일 강하니 붙잡히진 않겠지만… 동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슬슬 무슨 얘기를 꺼내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안 돼.”
“아직 말도 안 했다.”
“너 이 새끼, 데려가 달라고 할 거잖아.”
“정확하다.”
셋만 왔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의뢰 중이었다.
정부가 눈 치켜뜨고 있는데 원주민을 함부로 데려올 수 없었다.
“이유나 들어보자. 갑자기 왜 그러는데?”
공허함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가벡이 설명을 시작했다.
가벡은 자기가 그가쉬 클랜의 일족인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일족을 지키는 전사였고, 그가쉬가 제일 자랑스러워하는 투사였다.
그가 가는 곳엔 언제나 승리와 명예가 뒤따랐다.
하지만 저번 전쟁은 달랐다.
“많은 동료들이 죽었지만,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다.”
겐포 부족이 항복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승리였으나, 가벡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난 그런 더럽고 추잡한 승리는 인정하지 못한다. 적을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인질을 잡고 협잡질이나 하다니!”
가벡은 그가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명예롭지 않은 더럽고 치사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난 뭘 위해 싸운 거지? 우리가 알던 명예는 도대체 뭐지?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전쟁에 그딴 게 어디 있어. 그냥 정치하는 새끼들 입 놀음 몇 번에 젊은 새끼들 뒤지러 가는 거지.”
가벡은 해머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희미하게 생각만 했던 사실을 다른 사람 입에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가벡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다른 이도 동의한다고 말이다.
“난 더 이상 그가쉬와 같은 전장에서 싸울 수 없다. 이제 내 길을 가야할 때가 왔다.”
“잘 생각해. 밖에 나가봐야 이방인이야. 편견과 차별 섞인 냉대밖에 못 받는다고.”
“그런 녀석들은 모조리 때려눕히면 그만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함부로 데리고 나갔다간 애꿎은 사람 여럿 조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래, 어떻게 일이 잘 풀려서 간다고 쳐. 그 다음은 어쩔 건데. 인간들이 널 곱게 볼 것 같냐?”
“곱게 봐야 할 걸.”
“왜?”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그들만이 알겠지.”
아무래도 촌에만 살아 모르는 모양이었다.
현재 동맹이 체결되지 않은 종족이 타종족 영역에서 사고를 칠 경우 징벌적 사법제도가 적용된다.
최소 추방 혹은 징역에 최악의 경우에는 사형이었다.
조리 있게 설명해 줬지만 가벡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다른 놈에게 말하기 전에 흠씬 두들겨 패면 되지 않나?”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 설명하는 걸 그만뒀다.
“사정은 알겠는데, 어쨌든 안 돼. 우리는 너 못 태워.”
“차에 타기만 하면 되나?”
“뭐 차에만 타면 나갈 수는 있겠지. 어차피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니까.”
“알겠다.”
가벡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태평양을 넘으면 태풍이 된다는… 뭐 그렇고 그런 식상한 얘기다.
물론 저 태풍을 맞는 사람이 본인이 되면 그 때 부터는 전혀 식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 ☆ ☆
벌써 그가쉬 클랜에 온 지도 일주일.
아무 일 없는 평화 속에 연구가 끝났다.
“도울 수 있어서 좋았소.”
“편안히 연구를 할 수 있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가쉬와 교수가 서로 악수했다.
갈 길이 멀었기에, 교수는 이런 통과의례는 빨리 끝내고 싶은 눈치였다. 반면 그가쉬는 손을 놓질 않았다.
악수만 약 10초.
그가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서 전차는 언제 받을 수 있는 거요?
광업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그가쉬 클랜은 무기와 전차를 요구했다. 겐포 부족을 점령했다지만, 아직 가시산맥에는 많은 군소 종족들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난 이 산맥의 왕이 될 거다. 그 다음은 평원이고, 그 다음은 인간들을 굴복 시키리라! 이 세상을 오로지 버그베어만을 위한 땅으로 만들겠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저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단지 총과 전차만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큰 위협이 되지 않았음을 알기에 코웃음 쳤을 뿐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몬스터 브레이크 아웃으로 국제 사회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핵 개발을 완료한 상태였다.
혹여 만약에 그가쉬 클랜이 개척지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로 성장한다면 그 땐 주변 종족들의 합의를 받아 전술핵을 꽂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기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위해 총과 전차 따위 얼마든지 제공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 저는 연구원이라서 그런 문제는 잘….
- 만약 이렇게 총과 총알만으로 입 싹 씻을 생각이라면, 내 맹세컨대 네가 그 어디에 있던 쫓아가서 잘근잘근 씹어줄 거라 맹세할 수 있다.
경고의 의미로 그가쉬가 교수의 손을 꽉 쥐었다.
교수가 신음을 내뱉었다.
이상한 기류에 군인들이 총을 고쳐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