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66화 (66/173)

<-- 다시 한 번 그가쉬 클랜으로. -->

의뢰 이틀 전.

오래간만에 시체 구덩이에 모여 가볍게 술을 한 잔 했다.

이 쪽 일이라는 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외줄타기였기에 항상 나가기 전에 한 번씩 즐기자는 취지에서였다.

적당히 먹고 있던 찰나 주인이 슬그머니 다가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그냥 연구원들 호위야. 별 거 없어.”

그 말을 듣자마자 주인이 차갑게 식었다.

“그거 하지 마.”

주인은 평소 가벼운 태도로 농이나 건네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정색하며 말하니 뭔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밑도 끝도 없이 뭐야?”

“그냥 하지 마. 연구원이면 위험하잖아.”

구린 냄새가 나서 정보를 물었지만, 주인은 입을 꾹 다문 체 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미 다 잡힌 일이야.”

지금 와서 취소했다간 정부와 사이가 틀어질 수 있었다.

비록 정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받는 입장인지라 될 수 있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았다.

“나는 분명 말 했어. 하지 말라고. 선택은 지훈이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인은 사라져 버렸다.

칼콘은 슬쩍 분위기를 살피다가 물었다. 이미 장비까지 구입해 놓은 상태였다.

“어쩔 거야?”

“지금 와서 발 빼긴 늦었다. 그냥 한다.”

일단 사정 상 한다고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신경이 쓰이는 지훈이었다.

의뢰 당일.

시연과 지현의 인사를 뒤로 하고 동구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향했다. 정부가 주도한 사업인 만큼, 집결 장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엄청 많네.’

대충 세어보니 어림잡아 40명 즘 됐다.

“왔어?”

“오셨어요?”

칼콘과 민우는 집결지 외곽에서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칼콘이야 담배 피는 모습을 자주 봤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민우는 최근 들어 담배 피는 모습이 부쩍 보여 궁금했다.

“요즘 담배가 늘었다?”

“사람이 많으니까 좀 떨리네요. 지금 끌게요.”

비꼬는 걸로 들렸는지 비벼 끄려는 민우였지만, 됐다고 내버려 뒀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꼰대질은 성격에 안 맞아서 못 한다. 펴.”

남는 시간은 적당히 장비를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 인원 확인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시간이 되자 공무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외쳤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자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옮겼다.

“각자 신분증 꺼내서 보여주시면 됩니다. 운전면허증 되고, 개척지 주거증도 됩니다.”

정부 사업이니만큼 관리를 철저히 하는 모양이었다. 신분증을 꺼내기 위해 지갑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칼콘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어… 있잖아, 지훈. 나, 불법 체류 중인데. 어떡해?”

머리가 하얘졌다.

“미친 새끼야. 저번에 거주권 땄다며. 그거 어쨌어?”

“그게 저번에 술 먹고 싸움했다가… 잘렸어.”

이대로 있다간 칼콘이 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대책을 강구했으나, 딱히 묘안 없이 시간만 흘렀다.

“김지훈 님, 김지훈 님 안 계십니까?”

“여기 있소.”

일단 차례가 왔기에 가서 신분증을 보여줬다. 그 다음으로 민우 차례가 됐고, 마지막으로 칼콘 이름이 튀어나왔다.

“크라카투스 님!”

“어, 어… 응!”

칼콘이 어정쩡한 자세로 공무원 앞에 섰다.

“신분증 혹은 거주 확인증 보여 주세요.”

“그게 말이야… 집에 놓고 왔어.”

공무원이 찡그렸다.

“미확인자를 호위대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기껏 장비까지 다 마련했는데, 출발도 못 할 위기였다.

일의 경중이 경중인지라 뇌물이 먹힐 것 같지도 않았고, 어째 빠져나갈 수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결국 칼콘을 놓고라도 출발하려는 순간….

“어, 칼콘 씨 아닙니까?”

구세주가 나타났다.

교수였다.

“와, 안녕! 잘 지냈어?”

교수는 오크 특유의 반말이 익숙하지 않은지,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받았다. 그 모습이 반말로 대답할지, 존대할 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근데 무슨 일입니까?”

이 때다 싶어 교수에게 사정을 대충 설명했다. 그러자 교수는 도끼눈을 뜨곤 공무원을 쳐다봤다.

“그게… 절대 어물쩍 넘어가지 말라고 해서….”

말 할 필요도 없었는지, 교수는 신경질적으로 손목을 빙빙 돌렸다. 알아서 처리하라는 의미였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결국 일처리 하는 사람은 공무원이었다. 상급자가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책상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인지라 융통성이 조금 부족합니다.”

“아닙니다, 교수님.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돌아갈 뻔 했는데 다행이군요.”

“연구를 끝마칠 수 있게 해주신 분인데 이 정도 못해드리겠습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인자하게 웃었다.

인원 확인이 끝난 후 전체적인 임무 브리핑과 함께 역할이 분배됐다.

[브리핑]

목표 : 정철수 교수 외 5명 연구인력 호위 및 연구에 관련된 모든 물품을 임무 종료 시까지 보호.

호위 구성 : 45명 (용병 20명, 군인 20명)

종족 구성 : 인간 43명, 오크 1명, 켄코 1명.

차량 : 5대. (SUV 3대, 두돈반 트럭 2대)

SUV엔 호위 대상 및 연구 도구가 들어 있음. 또한 각 차량마다 2명의 호위 인원이 붙어있음.

SUV 앞뒤로 두돈반 트럭이 에워싸서 호위함.

연구팀 일정 : 그가쉬 클랜으로 이동 후 일주일 간 지형 및 광물을 연구한 뒤 샘플을 들고 귀환함.

다행히 일행은 모두 뒤쪽 트럭에 배정 됐다.

교수는 지훈이 SUV에 탑승하길 원했지만, SUV 당 2인 밖에 탑승할 수 없는지라 거절했다.

부르르릉 -

마치 거대 몬스터 레이드 가는 것 마냥 다섯 대의 차량이 나란히 도로를 달렸다.

민우는 트럭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차량 행렬을 훑었다.

“길드라도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네요.”

“설레?”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사실 헌터라기 보단 길잡이에 가깝잖아요. 근데 호위에 끼니까 이상해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픽 웃음이 나왔다.

“이런 대규모 인원 습격할 미친놈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려. 방심하고 있으면 훅 간다.”

“방탄복 입었잖아요?”

민우는 큰맘 먹고 장만한 D등급 아티펙트를 두들겼다.

그에 지훈은 민우의 얼굴, 팔, 다리 등 보호되지 않은 부분을 슥 훑어줬다. 게다가 성능 좋은 방탄복을 입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방탄복으로 관통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무지막지한 운동 에너지는 어쩔 수 없었다.

집중포화를 당하거나, 기관총, 저격총, 샷건 슬러그 같은 거 맞았다간 뼈가 가루가 되거나 내장이 걸레가 된다.

“엄폐 똑바로 해.”

“걱정 마십쇼. 이래봬도 고블린 병영까지 털었습니다?”

기습해서 간신히 이긴 주제에 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괜히 사기 꺾어봐야 좋을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뱃을 지난 지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차량 행렬이 잠시 멈춰 섰다.

뭔가 싶어 밖을 내다보니 앞쪽 군용 트럭에서 사람인지 새인지 모를 생명체가 내렸다.

“켄코? 저딴 게 왜 우리나라 군대에 있어.”

“그러게. 희귀 종족인데 독특하다.”

희귀 종족이라는 말에 민우도 덩달아 구경하기 시작했다.

켄코는 새의 모습을 한 휴머노이드였다. 입 대신 딱딱한 부리가 달려있었고, 온 몸에는 깃털이 가득 달려있었으며, 팔 대신엔 날개가 돋아 있었다.

켄코는 평원을 달리는 가 싶더니 휙 하고 날아올랐다. 이후 높은 곳 까지 올라가 활동하며 주변을 빙빙 돌았다.

치직 -

그리고 그 순간 무전기가 울렸다.

- 여기는 독수리. 여기는 독수리. 주변에 위험해 보이는 대상은 없다. 출발하라.

켄코를 하늘에 띄워둔 채로 차량이 출발했다.

그 모습이 일종의 드론 같아 보였다.

철저히 감시하며 이동한 까닭인지, 일행은 별다른 일 없이 그가쉬 클랜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도중에 켄타우로스 무리와 마주치긴 했으나, 이쪽 전력이 월등했기에 잠시 대치만 했을 뿐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다.

☆ ☆ ☆

호위대는 무사히 그가쉬 클랜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샛길에서 지뢰를 밟았던 기억이 나서 도중에 손잡이를 꽉 잡았지만, 다행히 우려가 현실이 되진 않았다.

“기다렸습니다. 어서 오시지요.”

예복을 입은 그가쉬가 정중히 맞이했다.

가죽으로 만든 옷에 짐승의 뼈로 만든 장신구를 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중세 바이킹 같아 보였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식사 먼저 하시지요. 혹 회포를 푸시고 싶을까 싶어 전통에 따라 여자도 준비 했으니, 원하시면 식사 후 그 쪽으로 가셔도 좋습니다.”

“거절해도 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저희 종족은 일부일처제라서요.”

교수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거절했다.

마음 같아선 딱 잘라 거절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외교 문제가 될까 싶어 조심한 티가 났다.

한 동안 교수와 그가쉬 사이에 인사치레가 오갔다.

일행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문득 칼콘이 지훈을 툭툭 찔렀다.

괜한 잡담을 했다간 눈칫밥을 살 수 있기에 팔꿈치를 슬쩍 휘둘러 쳐냈다.

이 상황에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몰랐으나 칼콘은 조용히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쉬, 아니 정확하게는 그보다 조금 더 뒤 쪽이었다.

‘가벡?’

위치를 보건데 그가쉬를 호위하는 것 같았다.

저번에 이동 중 살짝 얘기했을 때는 투사(병사)라고 했거늘, 아무래도 진급한 모양이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지. 잘 됐군.’

쳐다보고 있으니, 가벡의 눈동자도 이쪽을 향했다.

대충 눈으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자니 그가쉬와 교수가 만찬회장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이제 이동 끝났으니 각자 개인 정비 하십쇼. 이제 안전지대니 저희 소대가 호위하겠습니다. 이제부턴 밤에 근무만 서주시면 됩니다.”

셋은 나란히 가까운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저번에 왔을 때는 적진 같았는데, 지금은 편안해요.”

“네, 주둥이에서 다 죽이고 포로만 빼가자는 말이 나왔으니 그럴 법도 하지.”

지훈이 슬쩍 비꼬자, 민우가 화들짝 놀랐다.

“아, 듣는 귀 많은데!”

“배고픈데 뭔 입씨름이냐. 밥이나 먹자.”

각자 가져온 도시락을 꺼냈다.

사실 브리핑 때 일체 식사는 그가쉬 측에서 제공한다고 알려주긴 했지만, 칼콘이 좋은 정보를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 걔네 음식 더럽게 맛없어. 도시락 싸가자.

일주일 정도 체류할 예정이었기에, 모든 식사를 가져갈 순 없었지만 적어도 한 끼 정도는 맛있게 먹고 싶었다.

‘어디 한 번 볼까.’

지훈은 시연이 준 도시락을 슬쩍 훑어봤다.

요리와는 연이 없었는지 산 도시락이었지만, 친절하게도 통에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 꼭 다치지 말고 돌아와!

피식 웃곤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넣었다.

“와 형수님이 싸주신 거예요?”

싸준 건 아니고 사준 거였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성의가 들었으면 그게 그거 아니던가.

“어.”

“우히히, 사이 좋네요?”

이상야릇한 말투에 칼콘도 슬쩍 귀를 기울였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대답하지 않으니, 민우가 박수를 쳤다.

“맞죠? 그죠? 거봐, 내가 둘이 계속 잘 될 줄 알았다니까.”

“지훈 사이 좋네~ 그래서 했어?”

“뭐 그런 걸 물어봐. 밥이나 먹어.”

무시하고 조용히 도시락을 열었다. 돈가스였다.

고칼리로 음식 먹고 힘을 내라는 의미였지만, 지훈은 그저 시연이 어린이 입맛이라고만 생각했다.

한 조각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형님은 저한테 감사하셔야 하지 말입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내가 왜.”

“지갑 안 열어 보셨어요?”

- 유 니드 어스 (you need us)

- 코, 콘돔이 왜 여기 들어가 있어!

지갑 이라는 말에 그 날 있었던 해프닝이 머리에 재생됐다.

‘맞아. 이 새끼 짓이었지.’

가끔 쓸 데 없는 말을 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딱 민우 같은 사람들 말이다.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넘어갈 껄 꼭 사서 매를 번다.

“그래, 아주 고맙다. 내가 큰 은혜를 까먹어 버렸네.”

지훈이 그대로 몸을 날려 민우의 머리를 옭아맸다.

“아악, 악! 형님 왜 그러세요!”

“고마워서 그런다, 이 십방새야.”

결론적으로 쓰긴 했지만, 그 날 있었던 콘돔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시연에게 놀림거리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 복수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아, 아아악!”

민우의 처절한 비명이 군락 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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