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지가 F등급? -->
치료 과정은 저번과 같았다.
“나 갔다 온다~”
무통 치료인 까닭인지 지현은 소풍 나가는 아이마냥 천진난만하게 웃기만 했다.
“가서 사고나 치지 마라, 지지배야.”
안내를 받으며 들어가는 지현에게 주먹을 들어준 후, 시연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기다렸다.
- 뭐해?
- 그냥, 커피 먹고 있어. 자기는?
- 지현이 치료 받으러 와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 그러고 보니까 제대로 얘기를 못 들었네. 많이 아픈 거야?
대충 별 거 아니라고 둘러댔다.
병 자체는 심각한 병이었으나, 곧 치료될 거 굳이 걱정시킬 필요 없었다.
- 오늘 밤에 약속 있어?
- 응. 남자 동료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왜?
남자라는 말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 누구?
- 그냥 나랑 같이 일하는 연구원인데, 자꾸 같이 밥 먹자고 얘기 꺼내더라구. 여러 번 거절하기도 미안해서 같이 한 번 먹기로 했지.
참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연인이 됐다고 한들, 상대방이 내 소유물이 된 건 아니다. 그렇기에 내 연인이 누구와 뭘 하든, 그걸 강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성과 밥을 먹어야 할 수도 있으며, 심하게는 접대를 해야 할 경우도 있지 않던가.
머리로는 전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 오래간만에 마법 연습이나 할까 했거든. 맛있게 먹어라.
그럼에도 쿨하게 보내줬다.
이런 거 신경 쓰면 본인만 손해였다.
어차피 본인이 매력적이고, 잘났다면 상대가 바람피울 일 없다.
- 정말? 마법 연습 할 거면 나 구경 갈래! 그렇지 않아도 마도학 공부하고 싶어서 아이덴티티 측에 협조 공문 보냈는데, 거절당했거든.
마법이라는 말에 시연이 흥미를 보였다.
- 너 시간 없잖아. 약속은 어쩌고?
- 취소하지 뭐. 자기가 더 좋아.
상대 남자에게는 야속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원래 시간이라는 건 상대적인 거였다.
소중한 사람한테는 1분 1초도 쪼갤 수 있는 게 사랑이지 않던가.
- 그럼 치료 끝내고 데리러 갈게. 아마 1시간 쯤 걸릴 거야.
- 응!
…
대충 앉아서 알고 있는 마법들 연습하고 있자니, 지현이 돌아왔다.
“어, 왔냐.”
“응. 하나도 안 아파서 너무 신기해.”
웃고 있는 녀석을 쓰다듬으려니, 지현이 황급히 물러났다.
“워, 워! 불 끄고 해야지.”
잘못하면 동생 머리카락을 홀라당 태워 먹을 뻔 했다.
‘대머리 돼봐야 못생긴 건 똑같지만, 그래도 일단….’
마법을 해제하니 지현이 슬쩍 캔 음료를 가져왔다.
“기다리느라 목말랐지? 마셔. 언니가 쏜다.”
누구한테 받은 용돈으로 누구한테 쏜다는 건지 참 우스웠으나, 일단 성의가 대견해 한 입에 쏟아 넣었다.
벌컥 벌컥.
다 먹고 휴지통에 버리자니, 지현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에이, 그렇게 버리면 재활용 힘들잖아. 이리 줘.”
마치 매처럼 캔을 낚아간 지현은 바로….
꾸깃.
캔이 찌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차원 여행자와 싸웠을 때가 떠올랐다.
퍼억!
공간을 왜곡해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전부 찌그러뜨리는 강력한 공격.
만약 반지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지훈의 머리가 저 캔처럼 찌그러졌을 게 분명했다.
‘아… 갑자기 이게 왜….’
엄습한 현기증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있자니, 지현이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갑자기 왜 그래. 방사능 다 빠진 거 아니었어?”
방사능은 전부 배출됐고, 변이된 단백질도 전부 복원됐다.
단순 심리적인 요인이었다.
만드라고라 때도 후유증 때문에 고생했으니, 아마 이번 것도 조금 고생할 것 같았다. 아무리 몸이 각성했다고 한들, 정신은 아직 연약한 인간의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걱정하는 지현을 안심시키고는 차 위에 올랐다.
“집 가기 전에 시연이 데리러 갈 건데, 상관없지?”
상관있다면 바로 내리라고 할 생각으로 물었다.
“나야 상관없지. 이번엔 시누이 노릇 좀 해볼까.”
“됐다, 이 년아. 시발누이나 되지 마라.”
남매는 사이좋게 욕 주고받으며 보사로 향했다.
☆ ☆ ☆
그 시각, 시연은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하던 연구를 급히 정리한 뒤, 옷을 차려입고 토큰을 찍을 준비를 했다.
“시연 씨, 누구 만나려고 그렇게 옷을 챙겨 입어요?”
밤에 약속이 잡혀있던 남자가 다가와, 농을 건넸다.
“아, 미안해요. 저 오늘 급한 약속이 생겨서요.”
“네?”
남자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남자친구랑 연구할 게 생겨서요. 저녁은 다음에 먹어요.”
양해가 아닌 일방적인 통보.
빼도 박도 못하는 파토였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으니….
“시연 씨 남자친구 있었어요?”
“네, 잘 생겼어요! 사진 보여줄까요?”
“아, 아뇨… 괜찮아요.”
“그럼 시간 다 돼서 먼저 갈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시연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남자를 뒤로했다.
☆ ☆ ☆
보사 주차장.
지현은 차에서 내려 보사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와, 진짜 크다. 이게 보사야?”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나 보다.
“쪽팔리니까 그만 좀 두리번거려.”
담배를 쭉 빨며 주의를 줬지만, 지현은 듣지도 않은 척 계속 어슬렁거렸다.
그 모습이 수상해 보였는지 경비가 다가오려는 찰나….
“자기야!”
시연이 오도도 달려와 지훈에게 안겼다.
기껏해야 무게가 가벼운 여자의 돌진이라 꿈쩍도 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충격 흡수를 위해 살짝 밀려줬다.
“왔어?”
“응, 자기 보고 싶어서 빨리 정리하고 왔어.”
빨리 정리했다는 사람이 토 오픈 힐에, 쫙 달라붙는 원피스 그리고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연구하다가 가운만 벗고 왔을 리 없는 옷차림이니, 분명 전화 받자마자 재빨리 환복 했을 게 분명했다.
귀여워서 쓰다듬으니 시연이 픽 웃었다.
차에 탑승 후, 집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지현이 일하다 막 나와도 되냐고 묻자, 시연이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다고 답해줬다.
“대박, 대애애애박. 나도 보사에서 일하고 싶다!”
“그러니까 대학 가서 공부 열심히 해라.”
“응! 일단 병부터 낫고.”
픽 웃고는 엑셀에 발을 얹었다.
부으으으으 -
☆ ☆ ☆
이사하고 나서 집에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기에, 시연은 집을 슥 둘러보고 입을 벌렸다.
“와, 넓다. 몇 평이야?”
평수를 말해주고는 집 여기저기를 소개시켜줬다.
“집 보고 있으니까, 신혼 부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결혼 얘기가 나오자 지현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결혼? 둘이? 나는?”
아무래도 신혼 부부 사이에 껴서 살 수 없으니, 급 걱정이 된 모양이다.
당연히 아직 결혼 생각도 없고, 거처도 정하지 않았지만 골려 줄 생각으로 말했다.
“나가, 이 년아.”
“안 돼, 난 이 결혼 반댈세.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둘이 절대 결혼 못 해!”
지현이 사극 흉내를 내자, 지훈이 조심스럽게 베란다 근처 화분에서 흙을 한 줌 집는 척을 했다.
“말 잘 했다. 어디 한 번 눈으로 흙 좀 퍼먹어 봐라.”
“아아악, 언니. 이거 봐요. 이 사람이 맨날 이런다니까?”
“흙 먹은 다음엔 좀 맞자.”
지현이 비명을 지르며 제 방에 쏙 들어갔다.
시연은 그 모습을 보고 귀여운 듯 미소 지었다.
“사이좋네. 나도 저런 동생 있었으면 좋겠다.”
섬뜩한 소리에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대신 결혼하면 애 많이 낳자. 와글와글하게.”
시연이 씩 웃으며 찔렀다. 이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지훈 방에 들어가자 예쁜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담배 냄새가 제일 먼저 느껴졌다.
“담배 좀 끊으면 안 돼?”
“삶의 낙을 끊으라니, 야박하네.”
“건강에도 안 좋고, 가격도 비싸잖아.”
맞는 말이었으나 지훈에게 필수품이 딱 3개 있었다.
술, 담배, 믹스 커피.
“포기해, 절대 안 돼.”
“담배 냄새 싫은데….”
“걱정 마, 담배 냄새도 네가 싫대.”
시연이 볼을 부풀렸다.
다음으로 보여준 곳은 드레스 룸이었다.
아직까지는 지훈, 지현 둘 다 옷을 사지 않아 휑했다.
사실 지훈도 이거저거 꾸미는 것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척박하게 살아왔던 만큼,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대충 입어도 괜찮은 기본 아이템만 입기 일쑤였고, 낡아도 빈티지 룩으로 보일 법한 옷만 찾아 입었다.
그렇기에 바지는 거의 청바지요, 상의는 80%가 티셔츠, 20%가 재킷이었다.
“정장 입으면 정말 멋질 것 같은데.”
“넥타이 매면 누가 목 조르는 것 같아서 싫어.”
누군가는 적당히 죄이는 그 느낌이 긴장감을 살려준다고 말했지만, 지훈은 그저 목이 졸린다고 밖에 느끼질 않았다.
결국 옷으로 티격태격 하다가, 시연의 성화에 못 이겨 다음에 같이 쇼핑을 가자고 결정됐다.
마지막 코스는 바로 작업실이었다.
“우와, 대부분 여기서 준비하는구나.”
방 한구석에는 운동용 아령과 웨이트 바가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지훈의 장비가 걸려 있었으며, PC 옆에는 마법서가 몇 권 꽂혀있었다.
시연은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 훑고 다녔다.
“만져 봐도 돼?”
“창하고 총만 주의하고, 다른 건 다 괜찮아.”
시연은 이것저것 입어 보기도, 만져 보기도 하며 제 호기심을 충족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잘 데려온 것 같다.’
한동안 헌팅에 대한 말을 주고받길 잠시.
“근데, 요즘 헌팅 자주 나가네. 위험하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던 것 때문인지, 걱정스러운 말을 물었다.
사실 엄청나게 위험했다. 페커리 사냥 빼고는 대부분 목숨을 걸었고, 삐끗하면 바로 황천 갈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입에는 거짓을 담았다.
“아니, 전혀.”
“그래… 그냥, 좀 신경 쓰여서 물어봤어.”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시연이 슥 물러났다.
그녀는 제 일을 사랑하는 만큼, 남 일도 소중하다는 걸 아는 여자였다.
“응, 그럼 이제 마법 보자. 이번에는 진짜 연구할거야.”
시연이 분위기를 확 돌리며 안경을 하나 꺼냈다.
안경에 마석 비슷한 게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뭐하는 물건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석중 할배가 쓰던 안경이랑 비슷한데. 뭐지?’
“그건 또 뭐야?”
“단순한 마력 감지도구야. 쓰고 있으면 마력이 보여.”
시연은 지훈을 위 아래로 훑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 반지도 아티펙트였어?”
반지 주변에 아주 미세한 마력이 감지됐기 때문이었다.
매일 끼고 다녀서 단순 소중한 물건이거니 싶어 묻지 않았는데, 아티펙트인줄은 몰랐던 시연이었다.
“어, 맞아. 가벼운 거야.”
다 아는 마당에 되도 않는 거짓말 할 수도 없었기에, 중요한 말 다 잘라버리고 짧게 긍정했다.
“응. 그래 보이네. 미세하게 흐르는 게, F등급 정도로 보여.”
F등급이라는 말에 지훈이 슬쩍 눈을 굴렸다.
‘이런 미친 아티펙트가 겨우 F등급 이라고?’
착용자를 각성시켜 줌은 물론, 각성 능력을 제어해주며, 이블 포인트 제약까지 있고, 그 기능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안내역까지 붙은 반지였다.
그 외에도 동일 제작자의 아티펙트와 공명은 물론, 마법 감지 및 저항까지 붙은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절대 F등급일리 없었다.
게다가 지훈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마나 감지 저항 기능이었다.
실제로 반지가 품은 마력은 어마어마하게 때문에, 마법사 주변에만 가도 마력 농도가 높아진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였다.
이런 마력을 그대로 뒀다간 당연히 누군가가 의심을 품고 약탈을 할 수 있었다. 아쵸푸므자는 반지의 소유자가 끝없는 분쟁에 휘말리길 원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기능까지 넣어 놨다.
아마 이런 마력 억제가 없었다면, 시연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마나 덩어리와 마주했을 것이다.
“저 창에도 흐르고, 저 둥근 총알에도 보이네?”
각각 여왕의 은혜와 폭발 마력탄이었다.
‘굉장히 편리한 물건이다.’
그도 그럴 게, 원거리에서 슥 훑기만 하는 걸로 상대방의 장비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무력 돌파를 용이하게 해줌은 물론, 싸워야 할 상대와 싸우지 말아야 할 상대를 판별까지 해주니, 어찌 편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거 얼마야?”
“아이덴티티 물품이라 시중에 안 팔걸. 우리도 연구 기기 명목으로 간신히 가져온 거야.”
하긴, 그도 그럴 게 헌팅 다니면서 저런 장비를 쓰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필요해?”
“그냥 있으면 안전하겠다 싶어서.”
안전이라는 말에 시연이 집게손가락으로 입술을 짚었다.
하지만 딱히 별 말 없이, 바로 마법을 보고 싶다며 화제를 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