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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왜 문자가 깨져서 나와?’
직원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여태껏 이런 식으로 글자가 깨진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코드 섞인 오류도 들어가 있는 것을 봤을 때, 아예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단어가 섞여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말 나올 일을 만들어 놓으면 안 된다.’
직원은 속이 타들어 갔으나, 최대한 감정을 숨기며 말했다.
“손님, 죄송합니다. 일반적인 식별 작업으로는 알 수 없는 아이템인 것 같습니다.”
이에 더해 살짝 회색빛 거짓말을 섞었다.
가끔 A등급 이상의 아티펙트의 경우, 소위 말하는 ‘유니크’ 아티펙트가 발견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타 아티펙트와는 아예 차원을 달리하는 성능이 붙기 때문에 범용 데이터 베이스로는 번역이 안 돼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럴 경우 큰 대금을 받고 본사 직할 번역 팀에서 직접 식별을 해줬다.
물론 현재까진 B등급 이하 아티펙트에서 이런 경우가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직원은 이 상황을 단순 ‘오류’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이덴티티는 현재 각성자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초국적 기업이었다. 그런 초국적 기업이 만들어 놓은 데이터 베이스로 식별할 수 없다?
직원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아, 됐소. 그럴 수도 있지.”
지훈 역시 난처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아쵸푸므자, 이 정신 나간 새끼. 도대체 뭘 만들어 놨으면 식별에 오류가 생겨?’
생각해 보면 반지도 식별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잡동사니 창고라기에, 대충 아티펙트 아무거나 있을 줄 알았거늘, 반지와 비슷한 물건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이번 식별 대금은 무료로 하는 대신, 본사에 보내서 직접 번역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직원은 최대한 매뉴얼대로 응대했다.
각성자와 헌터들은 아이덴티티에 있어 최고의 고객임과 동시에 한정 된 고객이었다.
절대로 실망시켜선 안됐다.
“아니, 그딴 서비스 필요 없어.”
하지만 거절했다.
아쵸푸므자의 정체를 알 순 없었으나, 적어도 엄청난 아티펙트 제작자 및 고등급 마법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이 만들어낸 물건이니 절대 일반적인 물품은 아닐 터.
당연히 아이덴티티에 보냈다간 학계 뒤집어 질 정도로 큰 소동이 벌어진다.
괜히 사서 귀찮은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저희 아이덴티티는 반드시 손님께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직원이 급히 장갑을 쥐었다.
지훈이 그런 직원의 손을 쥐었다.
부르르르르.
손 부러질까 싶어 살살 잡고 있자니, 직원이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다.
“에헤이, 서비스가 도를 지나치네. 받기 싫은 성의는 부담이야. 몰라?
“그, 그래도 꼭….”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힘을 더 줬다.
꺽! 하는 소리와 함께 직원이 손을 놔버렸다.
“본사면 영국이잖아. 왕복 배송만 이주일 넘게 걸릴 텐데, 언제 기다리고 앉았어?”
“포탈 여러 개 넘나들며 운송하면 아마 사흘이면….”
“됐어. 내 물건에 다른 사람 손 때 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필요 없어.”
싫다고 일축하곤 장갑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직원은 손이 아픈지 꾹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러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보상을 하고 싶습니다.”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아닙니다, 아이덴티티는 항상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의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 나가고 싶었지만, 태도가 굳건해 일단 얘기나 들어봤다.
“뭔데?”
“이번 실수에 대한 배상으로 충전식 식별 기계를 제공하고 싶은데… 혹 괜찮겠습니까?”
충전식 식별 기계.
최근 아이딘티티에서 새로 발명한 식별 기기였다.
기존의 식별은 스크롤 혹은 식별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를 통해서만 할 수 있었다.
당연히 후자를 휴대하고 다닐 수는 없었으므로, 많은 헌터들이 전자에 의존했다. 하지만 여기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스크롤의 내구성이었다.
환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150만원 내외하는 식별 스크롤이었다.
보통 아티펙트 헌팅 팀이 헌팅 한 번 나가서 획득하는 아티펙트는 대략 10개 정도.
벌이가 좋으니 ‘그깟 천오백’ 할 수도 있는 가격이었지만, 아티펙트 헌팅은 벌이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부피가 큰 스크롤을 10개나 들고 다니기도 애매했고, 이동 혹은 전투 중에 소실되기라도 했다가는 엄청난 손해였다.
이에 아이덴티티는 작고 편리한 기계를 발명했으니, 그게 바로 충전식 식별 기계였다.
“내가 그걸 왜 받아?”
굉장히 좋은 제안이었으나, 평생 뭔가를 공짜로 받아보지 못한 지훈은 살짝 불쾌했다.
“저희는 어느 고객 한 분께도 최선을 다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 보다는 아이덴티티 측의 과실을 숨기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봐야 옳았다.
싫다고 거절했으나, 직원은 거의 반 강제로 지훈의 손에 식별기계를 쥐어줬다.
“필요 없어. 갖다 버린다니까?”
“제공한 이후로는 고객님의 소유물입니다. 어떻게 처리하셔도 무방합니다.”
직원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것저것 설명을 덧붙였다.
“최대 충전량은 세 번이며, 사용 시 전면 화면에 식별 정보가 출력됩니다. 충전량을 모두 소모하셨을 시에는, 가까운 아이덴티티 매장에 찾아오시면 충전하실 수 있습니다.”
충전 가격은 회당 200 가량.
스크롤보다는 조금 더 비쌌지만, 휴대성과 편리함을 봤을 때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항상 양질의 정보를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에도 또 찾아 주십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반 강제로 밖으로 안내 당했다.
‘이건 또 뭔…’
손에 들려있는 기계를 쳐다봤다.
이상한 장치가 되어있을까 싶었지만, 털어버렸다.
매장에 있던 물건을 개봉도 안 하고 바로 건네줬다. 뭘 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뭐 일단 식별도 했고, 기계도 얻었으니 돌아갈까.’
기계는 번역을 못해 원문을 그대로 전송했지만, 룬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훈은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에 대한 아티펙트라… 이걸 어디다 쓰지?’
당연한 얘기지만 아는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고 본인이 쓰자니, 주 무기는 총기요, 마법은 보조 역할로만 쓰니 아티펙트의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한다.
‘팔까?’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었다.
등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획득 가능성이 희소해지는 만큼, 아티펙트의 가격은 등급에 따라 천차만별로 올라갔다.
F등급은 아티펙트가 겨우 500만 원 정도밖에 하질 않지만, C등급은 5000만 원. B등급부터는 그냥 0이 하나씩 더 붙는다.
거기다가 부가적으로 붙은 능력치에 따라 가격이 미친 듯이 오르니, B등급이라 할지라도 그 가격을 감히 유추하기 어려운 게 아티펙트였다.
현재 지훈이 가진 물건은 B등급 마법 증폭 아티펙트였다.
실 가치를 계산하면 거의 10억은 거뜬히 나갈 물건이었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식별이었다.
식별이 불가능한 물건은 그 가치가 엄청나게 깎였다.
그도 그럴게, 저주 및 부작용을 가진 아티펙트도 존재했다.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사용법도 모르는 폭탄을 만지는 꼴이었다.
‘빌어먹을 아쵸푸므자. 왜 물건에 코멘트를 붙여놔.’
어려운 말 잔뜩 써놔서 식별도 안되거니와, ‘이거 코멘트가 이상하다. 만든 사람이 누구냐.’ 라는 말 들었다간 대답할 수도 없었다.
붉은 머리에 화상 있는 여잔데,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오.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됐다, 됐어. 때려치우자.’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누구 줄만한 동료도 없었고, 팔수도 없다.
‘그냥 내가 끼고 말지. 쯧.’
비록 마법 증폭에 관한 사항은 100% 이용할 수 없을지라도, B등급 아티펙트였다.
단순 보호용으로만 사용해도 절륜한 성능이다.
실제로 여왕의 은혜를 막아내지 않았던가.
끼워보니 다행히 사이즈가 딱 맞았다.
장갑을 끼자, 아니 정확하게는 장갑이 반지에 닿자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우으으응.
- 동일 제작자의 물건이 접촉되었습니다. 귀속할까요?
귀속.
무슨 개념인지는 몰랐다.
단지 반지를 처음 꼈을 때 무슨 경고 메시지 비슷한 게 들렸던 것 같은 기억이 났다.
‘하면 어떻게 되는데?’
- 물품 설명에 사용자님의 이름이 각인됨은 물론, 타인이 사용 시 페널티를 받습니다.
정확히 무슨 페널티인지 궁금했다.
- 상황에 따라 다르나, 영혼 발화, 심정지, 혈액 역류, 내출혈, 장기부전, 마나 회로 소각, 마나 역류, 마나 오염 같은 심각한 손상부터 약간 따끔한 것까지 다양합니다.
‘약간?’
약간이라는 문구에 몸이 떨렸다.
저 말은 곧 최소 바닥 굴러가며 고통에 몸서리 쳐야 하는 건 기본이고, 심하면 곱게 죽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나중에 믿음직한 동료가 생기거나, 돈이 급할 때 팔아야 할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괜히 귀속했다가 저주받은 물건 취급당하면 곤란하다.
‘하지 마.’
- 알겠습니다.
지훈은 장갑을 매만졌다. 철컥거리며 작은 쇳소리가 났지만, 은밀 기동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쓸 만하네.’
방탄외투 말고는 마땅한 방어구가 없다보니, 항상 손 부상을 주의했던 지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손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파편 혹은 화상이 걱정되는 상황에서도 조금 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됐다.
슬쩍 집에 가는 길에 룬어 지식을 이용해서, 개인 식별 사업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뒀다.
괜히 아이덴티티와 법 붙잡고 싸우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이덴티티 들어가서 남 눈치 보며 일하고 싶지도 않았다.
‘쉬고 싶을 때 쉬고, 일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제일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제 와서 직장인이 된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 ☆ ☆
돌아오니 지현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여기저기 찢어진 의자에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뭐야, 무섭게 왜 그래. 방사능 부작용이야?”
걱정된 모양인지 지현의 입에서 격한 안부가 쏟아졌다.
“됐다, 이 년아. 소파는 좀 어떠냐?”
이번에 이사하며 새로 하나 장만한 녀석이었다.
최고급은 아니어도 중고가 대비 성능이 좋은 제품이었는데, 푹신푹신해서 퍽 기분이 좋았다.
지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당장이라도 소파에 녹아내려 한 몸이 될 기세로 쭉 누웠다.
“이제 침대 필요 없어. 소파만 있으면 돼. 나 얘랑 결혼할 거니까 말리지 마.”
결혼이라는 말에 샷건이 떠올랐으나, 치워버렸다.
사람이면 모를까 물건에 쏘기는 아깝다.
“편해도 잠은 침대에서 자라. 몸 결린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래얍지요.”
“그나저나 너 치료일 다 되지 않았나?”
“응. 딱 오늘이야.”
굳이 미룰 거 없었기에 바로 나가자는 말을 꺼냈다.
“들어오자마자 바로 나가도 돼? 피곤하잖아.”
“딱히. 괜찮으니까, 빨리 옷 입고 나와라.”
각성 여파인지 이상하게 피곤하지가 않았다.
물론 그 대가로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대식 및 고칼로리 음식을 섭취해야 했지만, 먹는 거 좋아하니 문제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