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과 악의 딜레마 -->
마치 화염처럼 붉은 체크 셔츠와, 물 빠진 스키니 진.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주얼한 차림에 칼콘과 민우가 바싹 긴장했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미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또라이들이 많이 나돌아 다닌다지만, 적어도 제 목숨 갖고 장난질 치는 놈은 없었다.
근데 방사능과 온갖 위험한 짐승 가득한 하수구에 비무장으로 들어왔다?
미친놈 혹은 그만한 실력이 되는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둘 다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지훈, 머리가 붉은 인간이야. 백인 같아. 하수도에 침입했다고 밀고할 수도 있어. 죽여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길을 잃은 건 아닐까요?”
절대 그럴 리 없다.
입구에 방사능과 위험 표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작살내려. 아군이야.”
“응. 근데 저 여자한테 타는 냄새 나. 화약이나 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화약이나 폭탄 정도면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이 주변이 모두 불바다가 될 수도 있었다.
칼콘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만 킁킁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과거 악연을 찾아가면서까지 간신히 알아 낸 입구였다.
근데 아쵸푸므자는 아무런 정보 없이 당연하다는 듯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첫 등장, 성향이 변했을 때, 그리고 지금.
모두 지훈의 위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불안함 섞인 호기심이 스쳤으나, 흘려보냈다. 가끔 호기심이 호승심보다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때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See mõõde Jaya reisida(그게 차원 여행자야)?”
“약속대로 시간 안에 잡아왔다.”
지훈은 칼콘에게 눈짓해 매고 있던 차원 여행자를 벽에 눕히게끔 시켰다.
하지만 아쵸푸므자에게 바로 넘겨주진 않았다.
“Hästi tehtud. Mida sa ei taha saada kui tasu(잘했어. 보상으로 뭘 원하지)?”
당장 넘기고 고등급 아티펙트를 받아도 됐다.
사실 그러는 쪽이 위험천만한 마법사를 자극하지도 않아 더 좋은 길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마음속에서 뭔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한다.’
가끔 살다보면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입으며 까지 어려운 길을 가는 경우가 몇 번 있다고 했던가.
지훈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보상이고 나발이고,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Aeg on kulla. Okei toetust vähendatakse(시간은 금이야. 보상이 줄어들어도 괜찮다면야).”
“듣는 귀 많은데, 그 좆같은 언어 집어 치워.”
“굉장히 공격적이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쵸푸므자의 입에서 유창한 한글이 나오자 칼콘과 민우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벽에 기대있던 차원 여행자는 겁에 질린 듯 오들오들 떨었다.
“저게 필요한 이유가 뭐지?”
“저번에도 말했잖아. 설명해 봐야 이해도 못 할 거고, 시간도 길게 늘어진다고. 싫어. 귀찮아.”
“칼콘, 내가 신호하면 저 새끼 죽여.”
칼콘은 당황했으나, 일단 시키는 대로 차원 여행자의 목에 작살을 들이댔다.
아쵸푸므자가 무슨 이유로 차원 여행자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지금 죽여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재밌네. 지금 뭐하는 거야?”
“일 시켜먹었으면, 내가 무슨 일 하는 지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실 아쵸푸므자가 마음만 먹으면 일행을 모두 죽이고 차원 여행자를 가져갈 수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몸소 나서지 않고 계약을 운운하는 것을 봤을 때 어떤 이유에서든 아쵸푸므자는 지훈이 필요한 걸로 보였다.
'절대 돌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다.'
예상대로 아쵸푸므자가 짜증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중에나마 내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걸 후회하게 해줄 거야. 저 녀석 풀어줘.”
풀어주라는 말에 민우와 칼콘이 기겁을 했다.
손짓 몇 번으로 사람 머리 터트릴 수 있는 녀석이었다.
“집어 치워. 저 새끼 풀어줬다가 도망치면 어쩔 건데?”
“걱정하지 마. 그러면 손수 내가 다시 잡아올게.”
아쵸푸므자가 나선다면 걱정할 거 전혀 없었다.
저쪽이 상처 입은 오소리라면, 이쪽은 불 뿜는 호랑이였다.
턱짓하자, 칼콘이 조심스럽게 티셔츠와 그물을 벗겼다.
눈물, 콧물, 침 범벅인 차원 여행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싸울 때는 자세히 못 봤지만, 몸 여기저기에 파충류마냥 비늘이 돋아 있었고, 코 대신 승모근 주변에 있는 아가미 비스무리한 기관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눈 역시 각막 위로 순막이 덮여 전체적으로 물고기 같은 인상이었다.
차원 여행자는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그리곤 아쵸푸므자를 보자마자….
“으어어, 어… 어….”
호랑이 앞에 놓인 토끼마냥 오들오들 떨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큰 공포에 짓눌린 것 같았다.
“Humble olemasolu julge otsida mulle otse(어디 미천한 존재가 나를 똑바로 보는가)?”
차원 여행자가 바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뭐라 웅얼거렸다. 너무 작은 까닭에 아가미가 꿀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가, 감히 미천한 도약자가 위대하신 높은 분을 뵙습니다.”
“Kus on hüpata moosi(점프 잼은 어디 있지)?”
“이 차원에 왔다가… 사냥꾼들에게 쫓겨 잃어버렸습니다. 분명 이 하수도 주변에 있을 것 같은데….”
“Kas see kutt teeb(그 녀석의 짓인가)?
“감히 제가 그 분의 이름을 입에 얹어도 되겠…습니까?”
아쵸푸므자가 거만한 자세로 발을 두 번 굴렀다.
“하즈무포카 님의 하수인 이었습니다… 점프 잼을 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거기에 저항….”
“Lõpeta. Nüüd ei ole hüpata moosi(그만. 그래서 지금은 점프 잼이 없다는 거군)?”
“예….”
“Tee valik. Ohdeonga leida hüpata moosi, hadeonga toime neli isiklikku mulle(선택해라. 점프 잼을 찾아오던가, 아니면 네 신변을 내게 의탁하던가.)“
차원 여행자는 고민하듯 눈동자를 굴렸다.
“잠시 능력을 사용해도 되겠나이까?”
“jah(해).”
차원 여행자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기도하듯 양손을 포갰다.
- 전방 전이계 이능 사용 감지. 주의하십시오.
사방이 박혀있는 터라 바람이 불 리가 없음에도, 마치 미풍이 지나간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바람이 온 몸을 핥는 것 같은 느낌도 잠시.
우으으으응!
칼콘의 배낭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이거 갑자기 왜이래!”
“haj(하)?”
찝찝한 기분에 정신없던 지훈은 문득 며칠 전 하수구에서 이상한 구체형 아티펙트를 주웠던 걸 떠올렸다.
'설마!?'
재빨리 칼콘의 배낭을 뒤져 점프 잼을 꺼냈다.
차원 여행자의 눈은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고, 아쵸푸므자는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Apostel on päde(이번 사도는 유능하군).'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저 우연이었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게, 칼콘이 지나가다 뭔가 반짝인다며 주워온 게 다였다.
하지만 가끔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어이없는 곳에 엮이기도 하는 게 인생이었다.
“이게 필요한 모양이지?”
“Asenda olete(대용품이 있었군).”
점프 잼을 들이밀었다. 아쵸푸므자가 미소만 짓고 있자, 차원 여행자가 끼어들었다.
“도, 돌려주세요. 그건 굉장히 위험한 물건입니다. 가지고 계시면 분명 차원협회의 대행자가 회수하러 올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팔아 치우면 너한테는 아무런 피해가 가질 않겠지.”
일부러 칼콘과 민우가 들으라는 듯, 아쵸푸므자는 한글로 말했다. 차원 여행자의 눈에 절망이 스쳤다.
“나는 사실 차원 여행자든 점프 잼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돼. 뭘 줄지 선택은 네가 해.”
하지만 아쵸푸므자는 차원 여행자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훈에게 무거운 선택지를 떠넘겼다.
“점프 잼… 이것만 있으면 차원 여행을 할 수 있는 건가?'
상황으로 보건데 점프 잼은 분명 차원 도약을 도와주는 도구였다. 그 까닭에 점프 잼을 분실한 차원 여행자가 하수도를 헤매고 있었고 말이다.
“아마 가쉬가 아닌 이종족이 사용하면 한 번 사용하고 나서 깨질 거야. 그래도 좋다면, 갈 수는 있겠지.”
도착지가 어디가 될지도 모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방향 관문이라는 얘기였다.
“차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이동 도구는 굉장히 비싼 걸로 알고 있어 지훈. 우리가 발견한 건데 굳이 넘겨줘야 할까?”
칼콘은 탐욕스럽게 말하자, 차원 여행자가 좌절했다.
“가, 가격을 들으면 저도 흔들릴 것 같지만… 그래도 굳이 살릴 수 있는데 돈 좀 벌자고 누구 팔아넘기는 건 좀… 게다가 저거 일방향이잖아요. 지옥으로 갈지도 모르는데 누가 쓰고 싶어 하겠어요. 분명 얼마 안 할 거예요. 아마도….”
반면 민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현실과 이상을 두고 타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저들 말에 신경 쓰지 마.”
마지막으로 아쵸푸므자는 어느 쪽이라도 좋다고 말했다.
본디 인생은 어려운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았다.
1 - 차원 여행자를 넘기고, 점프 잼을 챙긴다.
2 - 점프 잼을 넘기는 대신, 차원 여행자를 풀어준다.
아쵸푸므자 성격 상 점프 잼을 챙겼다고 준다고 약속 한 보상을 없애진 않을 것 같았다.
점프 잼을 챙기면 이블 포인트가 오를 게 분명했지만, 그에 준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반면 점프 잼을 넘긴다면 차원 여행자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지만, 추가 보상은 포기해야 한다.
'결국 타인의 목숨과 돈을 두고 결정하라는 건가.'
선과 악의 딜레마였다.
만약 지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돈이 급했던 옛날이라면, 서슴없이 점프 잼을 챙겼겠지.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조금 달랐다.
헌팅을 하며 주기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이블 포인트 문제도 생각해야 했다.
점프 잼.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일방향 차원 포탈 생성기.
연구 물품으로 팔아봐야 세금 떼고 최대 10억이었다.
인당 100억 쯤 되면 모를까, 세 명이서 나눠서 3억 가지고 고민하기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생각 정리는 모두 끝났다.
결정에 앞서 칼콘에게 물었다.
“네가 발견한 건데, 내가 결정해도 괜찮겠냐?”
“괜찮아. 난 항상 지훈의 의견을 존중해.”
소유권자의 결재도 떨어졌다.
“이딴 싸구려 돌멩이 하나에 내 양심과 신념을 팔기엔 너무 아깝지. 가져, 새끼야. 내 양심을 갖고 싶으면 더 큰 물건을 가져와야 할 거다.”
점프 잼을 아쵸푸므자에게 던졌다.
10억이 날아가는 순간이었음에도, 누구하나 아깝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좋아. 나는 이걸로 충분해.”
아쵸푸므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Agendid hea ja kurja keskel, südamesse. Seekord ma usaldan(선과 악의 경계에 있는 사도라. 마음에 들어. 이번엔 끝까지 믿어도 되겠어).’
“이걸로 이번 부탁은 끝이야. 수고들 했어.”
이후 아쵸푸므자는 차원 여행자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너는 이제 필요 없어. 특별히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지. hüpe nimetus(지정 전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차원 여행자의 몸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차원 여행자는 아쵸푸므자에게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지훈을 쳐다봤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차원 여행자의 이름을 걸고 꼭 잊지 않겠….”
“개소리 집어 치워. 너 좋아서 한 거 아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우응 -
인사를 마지막으로, 차원 여행자가 모습을 감췄다.
- 본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타인을 구했습니다. 이블 포인트가 2 감소했습니다.
- 티어가 올랐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좋아. 그럼 이제 보상 얘기를 해볼까.”
“시간이 너무 많이 허비돼서 좋은 건 못 줘.”
“상관없다.”
아쵸푸므자는 한 쪽 얼굴을 비틀었다.
“근데 저 둘은 뭐야?”
칼콘과 민우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친구, 부하, 하수인, 고용인 등 많은 단어가 있었지만 지훈의 생각한 말은 딱 하나였다.
“동료다.”
동료.
칼콘은 머쓱한지 픽 하고 웃었고, 민우는 뭉클한 듯 코를 훌쩍였다.
“그럼 저 녀석들도 챙겨줘야겠네. D pookimise, pesakond ladu(차원 접붙이기, 잡동사니 창고).”
아쵸푸므자의 손짓이 끝나자, 하수구 벽 한편이 울렁거리더니 괴상한 포탈이 생겨났다.
“제한 시간 5분. 한 손으로 들고 나올 수 있으면 뭐든 챙겨도 좋아. 시간이 지나면 영원히 갇히게 되니까 참고해.”
“어, 어? 네?”
민우가 머뭇거렸지만, 아쵸푸므자는 2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봐. 아마 3달 정도 걸릴 거야.”
우응 -
항상 그랬듯, 아쵸푸므자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모습이 꿈결 같아 눈을 부빈 민우와 칼콘이었지만, 이내 현실임을 깨달았다.
포탈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은 시간 4분 49초.
물건을 챙겨야 했다.
“뭐해, 새끼들아. 빨리 짐 내려놓고 달려!”
지훈은 멍하니 서있는 칼콘과 민우에게 소리를 지른 뒤, 바로 포탈 안으로 몸을 던졌다.
온 몸이 팽팽해지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우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