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개척지 -->
지루하다 못해 사람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운전이었다.
5시간 씩 끊어 자니 시간 감각이 없어지는 건 물론이오, 나중 가서는 지금이 오후 8시인지, 오전 8시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아, 토할 것 같네.”
장시간 운전하니 벤츠고 나발이고 없었다.
아무리 빛깔 좋은 통조림은 먹는 사람이나 좋지, 안에 들어가는 고기 입장이 되면 짜증나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중간 중간 휴게소에 들려서 켄타우르스 치즈, 가시나무 수액 껌, 엘프 사과 등 맛 좋은 음식을 먹었으니 버틸 수 있었다.
“와… 진짜 크네요.”
민우가 러시아 개척지를 둘러싼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10M는 가뿐히 넘을 거대한 철벽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함선 장갑처럼 보였다.
장벽 위에는 한국과의 전쟁을 우려했는지, 장거리 주포가 주기적으로 박혀있었다.
‘빌어먹게도 오래간만에 오는 군. 마지막으로 왔던 게 마약거래 때문이었던가.’
그 때는 정문이 아닌 쪽문(밀입국)을 이용했지만, 분명 그 때도 엄청나게 거대한 철벽을 지났다.
옛 생각을 하고 있자니 군복을 입은 여자가 다가와 창문을 열라는 듯 손을 빙빙 돌렸다.
“Паспорт(신분증).”
건네주자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리더기로 슥 훑었다.
이후 여자는 차 안을 슥 훑었다. 그러다 칼콘을 좀 오랫동안 쳐다보더니, 슬쩍 짜증을 부렸다.
“Грязные орк куб(더러운 오크 새끼).”
“Остановите глупость, или тянет его(헛소리 그만. 검문 계속 해).”
이에 지훈이 톡 쏘듯 말하자, 여자는 작게 욕을 내뱉었다.
“вниз(내려).”
“Вы делаете ошибку, в настоящее время.(우리 문제없다. 너 지금 실수하는 거다.)
지훈이 항변했으나, 여자는 ‘내려’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무래도 이종족에게 굉장히 베타적인 러시아인지라, 오크인 칼콘을 보고 보복성 검문을 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빈토레즈 포함 온갖 무기가 발견됐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으며 당장이라도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살얼음판도 잠시.
지훈이 각성자 등록증을 내밀었다.
“Прошла минута. Неважно(잠시 지나간다. 그게 다다.)
여자는 잠시 짜증을 부렸으나 통과 시켜줬다.
현재 한국과 러시아는 동맹 상태였다.
간혹 뇌물을 요구하거나, 이런 보복성 검문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각성자 등록증 같은 적법한 물건이 있으면 통과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여자만 가득한 군인들의 싸늘한 환대를 받으며, 일행은 러시아 개척지로 들어섰다.
“근데 왜 전부 여군만 있어요?”
“종족 전쟁 때 남자들 갈아 넣어서 그래.”
몬스터 브레이크 전에도 성비가 어그러진 러시아였다.
거기에 종족 전쟁 때 수많은 남자들이 희생됐으니, 지금에 와서는 남자가 귀한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러시아는 젊은 여자들을 징병하기 시작했고, 현재 개척지 치안 유지는 대부분 여군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전문 인력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여기 저기 문제가 터져 나왔지만, 뭐… 어떻게든 돌아가고는 있는 실정이었다.
일행은 가까운 호텔에 체크인 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긴 운전으로 쌓인 피로를 들고 갈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개척지가 미로였다면, 하수도는 미궁 수준으로 복잡한 공간이었다. 지도 없이는 절대 들어갈 순 없었다.
“오늘 밤은 푹 쉬고, 내일 지도 사서 바로 들어간다.”
민우에게 지도나 사오라고 시킬까 싶었지만 그만뒀다. 러시아어도 모르거니와, 괜히 강도라도 만났다간 골치 아팠다.
가격이 꽤 비싼 호텔이니만큼 잠자리는 편안했다.
다음 날.
일행은 가까운 인스턴트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한가하게 여행 온 입장도 아니었기에, 대충 제일 잘 나가는 걸로 시켰거늘 괴상한 음식이 튀어나왔다.
“이게 뭐야?”
네모 모양 컵라면 위에 마요네즈가 뿌려져 있었고, 후식(?)으로는 한국에서 자주 보던 초코과자가 나왔다.
민우는 러시아식 라면이거니 하고 후루룩 들이켰다가 시원하게 뿜어냈다.
“꾸어헉!”
느끼했다.
그것도 엄청.
라면도 일일 권장 나트륨 섭취량이 100%를 넘을 정도로 짠 음식인데, 거기에 기름 덩어리인 마요네즈를 더한다?
“이딴 걸 어떻게 먹어!”
결국 지훈과 민우는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반면 칼콘은 기름지고 좋다며 일행의 음식까지 들이켰다.
‘저 녀석은 도대체 못 먹는 게 뭘까.’
저번에 호기심으로 번데기를 먹여 봤을 때, 그냥 컵 째로 한 입에 털어 먹은 칼콘이었다.
아마 문명의 손길이 아주 조금이라도 닿아 있으면 모두 잘 먹을 것 같았다.
누군가에겐 만족스럽고, 누군가에겐 조촐했던 식사 후. 일행은 무장을 한 채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개척지 중앙 대로에서 몇 블록 이탈하지도 않았거늘, 벌써부터 사람 그림자가 옅어졌다.
“사람이 뭐 이렇게 없어요?”
“두리번거리지 마라. 강도 붙는다.”
초행길이라고 광고하는 민우에게 주의를 줬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차량이 벤츠였다.
주변 시선이 전부 여기에 꽂혀있는데, 초행길이라는 걸 광고하면 괜히 이상한 일 당할 게 뻔했다.
부러움, 시기, 질투 등이 두루 섞인 시선들을 끌고 다니길 잠시. 지훈은 거대한 쌍둥이 빌딩 앞에 차를 세웠다.
“와, 지훈 저거 봐봐. 하늘이 안 보여. 여기 어디야?”
“회색시장.”
회색 시장은 언더 다크가 관리하는 암시장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개척지 내에서 정기적으로 운영되는 불법 시장을 일컬었다.
지훈과 칼콘은 민우를 내버려둔 채 내렸다.
“차 지켜라. 누가 견인차 몰고 와도 절대 주지마라. 일단 총부터 보여줘. 사람 여럿이서 다가오면, 소음기 끼고 위협사격 해라.”
남의 개척지 내에서 총질 했다간 정치, 외교 문제로 엮여서 문제가 커질 수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치안 개판인 동네였다.
군인들 도착하기 전에 이탈하면 그만이다.
“네, 알겠습니다.”
긴장한 민우를 뒤로하고, 회색 시장으로 들어갔다.
회색 시장은 커다란 빌딩 사이에 위치했는데, 아침임에도 짙은 그늘이 진 모습이 그 이름에 퍽 걸맞아 보였다.
대충 몇 걸음 걷고 있자니 소년 하나가 다가왔다.
“멋진 형. 돈 주세요. 나 한국어 잘 해요.”
나이를 보건데 세드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어린 나이로 강제 이주를 당한 아이인 듯 했다.
불쌍한 인생이었지만, 그래봐야 알 바 아니었다.
“꺼져.”
붕가붕가하는 개 떼어내듯 발로 가볍게 밀었다.
브스스 밀려나기도 잠시. 소년은 다시 달려들었다.
“배고파요. 형 돈 주면 나 배불러요. 동생도 있어요.”
딱한 얘기였으나, 믿을 수는 없었다.
소위 말하는 수금용 새끼 거지일 수도 있었고, 소매치기 할 대상을 물색하기 위한 밑밥일수도 있었다.
몇 번 더 거절하고 있자니 칼콘이 소년과 눈을 맞췄다. 이후 칼콘은 위협의 뜻으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 따위 뼈 발라 먹으면 한 입도 안 돼. 인간은 어리면 어릴수록 맛이 좋지. 죽고 싶어?”
위협적인 비주얼 때문에 도망칠 법 했음에도, 소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먹어요! 대신 백만 원 줘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저 정도 깡다구 있는 녀석이면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배짱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드네.’
지갑에서 오만 원 짜리를 하나 꺼내 소년에게 쥐어 줬다.
“고맙습니다! 잘생긴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뜬금없는 세배를 받았다.
“됐고, 뭐 좀 물어보자. 도본옙스코 어디 있냐.”
도본옙스코라는 말에 아이가 허옇게 질렸다.
“죄송합니다, 형. 나 몰랐습니다. 돈 다시 드릴게요. 살려주세요.”
소년은 도망가려 했지만, 칼콘이 뒷덜미를 잡아버렸다.
“안 죽여. 빨리 안내나 하고 갈 길 가라.”
결국 소년은 울상을 지은 채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차량들로 빼곡해 있어야 할 주차장에는, 위험해 보이는 시장판이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 무기가 거래되고 있었고, 간혹 마약을 팔거나 매춘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소년은 주자장 관리실 앞에서 멈췄다.
“여기. 나는 이제 갈게요. 나 제발 죽이지 말아요.”
불안한 듯, 소년은 그 말만 남기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 (이하 편의를 위해 러시아어도 한글로 적겠습니다)
끼익.
문을 열자 CCTV를 훑던 반백의 중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불편한지 오른쪽에는 안대, 왼쪽에는 외눈 안경을 끼고 있었다.
“미친 사냥개 새끼. 죽고 싶어서 여길 기어들어왔나?”
외눈 남자, 아니 도본옙스코가 살기를 뿌렸다.
“아직도 꽁해있나? 부랄 값이 아깝다. 떼 새끼야.”
숨기지 않고 적의를 드러냈다.
이에 도본옙스코는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죽이기 전에 온 이유는 들어주마. 왜 왔지?”
“하수도 지도.”
하수도라는 말에 도본옙스코가 얼굴을 찌푸렸다.
현재 러시아의 하수도는 방사능 때문에 대부분 막혀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번 테러 때문에 하수도 관리에 무진장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하수도 지도는 대외비로 관리됐다.
“그게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구할 수 있는 거 알고 있다. 닥치고 내놔라.”
“내가 왜?”
“팔아라. 저번에 마약건 고꾸라져서 돈 급할 텐데?”
도본옙스코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무전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됐다. 죽어라.”
“후회할 텐데?”
경고하기도 전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둔기를 든 모습이 각성자처럼 보였지만, 사각에 숨어있던 칼콘이 녀석의 목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깔끔한 제압.
각성자의 목이 쑥 꺼지는가 싶더니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너, 이 새끼가…!”
도본옙스코가 책상 옆에 있던 토카레프를 들었다.
머리에 총이 겨눠졌음에도, 전혀 긴장되질 않았다.
이미 저항 등급이 D가 된 상태였다.
시험해 보지는 않았으나, 권총탄 따위는 손쉽게 튕겨낼 게 분명했다.
“단순히 물건 구하러 온 건데, 이러지 말지?”
“너한테 총 맞은 내 사촌동생은 아직까지 다리를 절며 산다. 내가 왜 널 살려줘야 하지?”
“그래야 내가 널 죽이지 않을 테니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말에 도본옙스코의 총구가 떨렸다.
어차피 말로 해야 들을 상대도 아니었기에, 들고 있던 각성자 감지기를 건네줬다.
“못 믿겠나? 찍어 봐.”
삐빅!
도본옙스코의 눈이 부풀었다.
전투에 직결되는 근력, 민첩, 저항 능력이 전부 D등급임은 물론, 이능까지 갖춘 C등급 각성자였다.
뒷골목 구멍가게나 운영하는 조직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씨발…!”
도본엡스코가 토카레프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꼭 죽여주마.”
부들부들 떠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좆이나 까 잡수고, 가서 하수도 지도 가져와.”
지도에 대한 대금 및 보상 명목으로 500만 원을 지불했다.
강탈 해와도 됐지만,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는 게 이 쪽 세계였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었으나, 적어도 보자마자 총질 할 사이는 되지 않는 게 좋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