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47화 (47/173)

<-- 아쵸푸므자의 부탁 -->

붉은 머리에 일그러진 왼쪽 얼굴.

기묘한 매력을 뿜어내는 여자, 아쵸푸므자였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사뭇 많은 불나방이 그녀 주변에서 타죽기라도 한 듯 짙은 그을음 냄새가 났다.

“Kuidas sul läheb(잘 지냈어)?”

단순한 안부 인사임에도, 지훈은 몸이 굳는 걸 느꼈다.

- süüde(발화)

이미 아는 사이임에도, 반가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단지 기억의 편린 속에서, 그녀가 몇 번이나 자신을 태워 죽였던 것 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빌어먹을 년.’

손이 떨렸다.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앎에도,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 글록을 손에 쥐었다.

“Ärge närvitsege. Ma tulin siia(긴장하지 마. 얘기하러 온 거야).”

“사람을 몇 번이나 태워 죽인 년 입에서 그런 소리 들으니 퍽 안심되는군.”

비꼬듯 말하자 아쵸푸므자가 까르르 웃었다.

“Mugavalt istuma(그러지 말고 편하게 있어).”

‘진정해. 이블 포인트만 낮으면 저 녀석과 싸울 일 없다.’

한숨과 함께 불안함을 토해내자 기분이 한 결 나아졌다.

“한글로 말해. 두 번 생각하기 불편하다.”

별 문제 없다는 듯, 아쵸푸므자의 입에서 한글이 나왔다.

“뉴트럴(중립)로 변했지?”

성향 변했다고 들은 게 겨우 1분 전이었다.

귀신처럼 나타난 걸 봤을 때, 이미 전부 알고 온 모양이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속으로 생각했음에도, 대답이 돌아왔다.

“그 반지를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해?”

“섬뜩하군. 그래서 찾아 온 용건이 뭐지?”

“설명 겸 부탁.”

목소리는 달콤하지만, 속에서 나온 말에는 독이 섞여있다.

첫 대면 때 아쵸푸므자는 분명 반지를 쓰는 대가로 몇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고 계약했었다.

아마 그 계약에 대한 내용이리라.

“짧게 해라. 너랑 오래 있고 싶지 않다.”

“잘 됐네. 어차피 나도 시간이 많지 않아. informatsioon(정보).”

아쵸푸므자의 말이 끝나자 반지가 작게 진동했다.

- 우으응

“이제 좀 쓸 만해 졌네. 수고했어.”

정보를 살펴 본 아쵸푸므자는 창조물 평가하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예의상 고맙다는 말로 답했다.

“아마 방금 이블 포인트가 64가 되면서 중립 성향으로 변했을 거야. 악이 아닌 성향, 곧 중립과 선 성향에는 보너스가 붙어. 이제부터 그걸 선택해야 할 거야.”

아쵸푸므자는 그렇게 설명하곤 선택 창을 띄웠다.

“살펴 봐.”

[성향 보너스, 행동 강령]

중립 성향 행동 강령은 중립 성향일 때만 적용되며, 50포인트 달성 시 변경 기회가 있다. 또한 선 성향(25포인트 이하)이 됐을 경우 새로운 행동 강령으로 교체된다.

고의적으로 이블 포인트를 올렸다 내린다고 한들, 한 번 정한 행동 강령은 변경되지 않는다.

선택할 수 있는 행동 강령은 다음과 같다.

- 순수 중립 : 선과 악. 모든 도덕적 잣대에서 초월한 존재를 염원한다.

포인트가 45가 될 경우 모든 능력치에 1 등급 보너스를 받는다. 반대로 45에서 편차가 5 이상 날 시 모든 능력치에 1 등급 페널티를 받는다.

- 참회자 : 자신이 했던 악행에 대해 깊이 뉘우쳐, 선한 사람이 되기를 염원한다.

이블 포인트가 1 감소할 때 마다 능력 포인트를 1점 추가로 얻는다. 반대의 경우 1점 증가할 때 마다 무작위 능력을 2점 잃는다.

또한 참회자 됐을 경우 이블 포인트의 감소 판정은 더욱 까다로워지나, 증가 판정은 훨씬 더 엄격해진다.

- 기만자 : 선과 질서를 연기하는 위선자를 염원한다.

이블 포인트를 희생해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에 2등급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능력 발동 시 이블 포인트가 10점 상승한다.

대신 사용자 소거 제한이 75로 낮아진다.

- 회색 인간 : 선과 악이 뒤섞인, 일반적인 인간을 염원한다. 즉시 10포인트의 보너스 포인트를 받지만, 대신 아무런 보너스와 페널티를 받지 않는다.

성향 보너스는 일종의 행동 강령 같았다.

순수한 중립은 이블 포인트를 45로 고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여태껏 무슨 일을 해도 이블 포인트가 증가 혹은 감소했던 것을 봤을 때 조건을 맞추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예를 들어 이블 포인트가 40인 상태에서 페커리 사건 때 엘프 형제를 마주쳤다면?

행동 강령에 의거해, 죽여야 했다.

이렇듯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이블 포인트를 45로 유지했을 시 총 60 포인트(모든 등급 1 증가)의 보너스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반면 참회자는 무조건 이블 포인트를 낮춰야 했다.

이블 포인트가 낮아지는 만큼 보너스를 받는 건 정말 매력적인 조건이나, 반대의 경우 페널티가 끔찍했다.

여태까진 일이 잘 풀려서 이블 포인트를 낮출 수 있었다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또한 페널티를 피하기 위해 무조건 어려운 방향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수도 있었기에, 양날의 검으로 봐야 옳았다.

‘한 마디로 개목걸이 차는 거군.’

기만자의 경우 이블 포인트를 희생해 일시적으로 엄청난 힘을 얻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거 제한이 75로 낮아진다는 얘기는, 당장이라도 삐끗했다간 바로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이블 포인트를 마음대로 낮출 수만 있다면 최고의 능력이다. 하지만 이쪽은 위험부담이 너무 높다.’

그 외 회색 인간은 아무런 특성이 없었지만, 확실한 보너스 포인트와 자유의지를 얻을 수 있었다.

뭐 하나 딱 좋다고 집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회색 인간을 제외한 모든 선택은 보너스를 얻는 대신 페널티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이는 곧 페널티를 피하기 위해 원치 않는 행동을 해야 할 수도 있음을 뜻했다.

살려두면 추후 위협이 될 적을 살려주거나,

비정한 방법으로 적을 공격할 수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이블 포인트를 맞추기 위해 죄 없는 누군가를 죽여야 할 수도 있었다.

결국 결정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부탁 먼저 들어보지. 네가 내게 뭘 시킬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만약 참회자를 선택했는데, 아쵸푸므자에게서 이블 포인트가 오를 게 분명해 보이는 부탁을 받았다간 외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러시아 하수도에서 차원 여행자를 녀석을 데려와.”

차원 여행자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단지 어렴풋이 세드와 지구가 다른 차원이라는 가설을 들어 본 적은 있었기에 그와 관련 된 존재인가 싶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정보는 반지에 넣어놨어. 아마 상태가 좋지 않을 거야. 그래도 죽이지 말고 꼭 산 채로 데려와.”

“네가 시킨 일을 해도 이블 포인트가 변경되나?”

아쵸푸므자는 반지의 제작자. 답을 해줄 수 있을 터였다.

“이번 일은 처리 방법에 따라서 낮아질 수도, 높아 질 수도 있어. 그리고 내가 하는 부탁 중 몇몇은 분명 이블 포인트가 오르기도 할 거야.”

한 마디로 선한 일만 시키지는 않는다는 얘기였다.

“내가 만약 부탁을 거절한다면?”

“반지를 가져갈 거야. 죽이진 않아.”

어떻게 할 거냐고 기다리는 아쵸푸므자였다.

대답이야 간단했다.

조그마한 심부름 피하기 위해 반지를 포기한다?

얼 척 없는 짓이다.

“데려가지. 하지만 온전한 상태라고는 장담하지 못 한다.”

“상관없어. 목숨만 붙여놓으면 돼.”

“좋아. 그리고 성향 보너스는 회색 인간을 선택하겠다.”

사실 이블 포인트만 신경 쓴다면, 다른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지만….

‘개목걸이를 찰 바엔 혀를 깨물고 죽겠다.’

반지를 얻고 난 후 간신히 되찾은 자유였다.

얻을 게 확실하지도 않은 보너스를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50포인트, 25포인트에서 변경 기회가 있지 않던가?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회색 인간이 되셨습니다.

- 보너스 포인트를 10 획득하셨습니다. 분배해 주세요.

일단 능력 등급을 올리는 게 급선무였기에, 포인트를 적절하게 나눠서 분배했다.

- 반영되었습니다.

근력 : E 등급 (19) = > D 등급 (20) +1

민첩 : E 등급 (19) = > D 등급 (20) +1

저항 : E 등급 (15) = > D 등급 (21) +5

이능 : F 등급 (9) = > E 등급 (15) +3

- 이능 등급이 올라 이능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획득한 이능 포인트는 새로운 이능보다는 기존 이능을 강화하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이능을 얻는다는 건 분명 매력적인 일이었으나, F랭크라면 분명 페널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기존 이능의 페널티를 낮추는 쪽으로 가야 한다.’

전투 중 쓰지 못할 새로운 이능 하다보다, 전투 중 도움이 되는 기존 이능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 반영되었습니다.

이능 : F 등급 가속 = > E 등급 가속

잘 분배 됐나 확인하기 위해, 정보창을 띄웠다.

[정보]

이름 : 김지훈

종족 : 인간

이블 포인트 : 64 (-1)

성향 : 뉴트럴

성향 보너스 : 회색 인간

등급 : C 등급 2티어

근력 : D 등급 (20)

민첩 : D 등급 (20)

저항 : D 등급 (21)

마력 : E 등급 (15)

이능 : E 등급 (12)

잠재 : S 등급 (?)

[신체 변이]

약한 재생

화염 속성

[이능력]

집중 (F 등급)

가속 (E 등급) (+1) : 사용자의 신체를 가속합니다.

1.8배속 까지 가속할 수 있으며, 부작용이 감소했습니다.

아쵸푸므자는 지훈의 정보창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Lõvi maitseb hea tunne(저번 사도보다 쓸 만하군).’

그 사이 지훈이 능력치 배분을 끝마쳤다.

“좋다. 계약이니 네 부탁을 들어주겠지만, 그 외에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없나?”

“그 반지를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보상을 원해?”

“일 해주고 뭔가 받지 않으면 허전해서 말이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대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긴장을 유발했으나, 버티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아쵸푸므자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네. 원하는 게 뭔데?”

“뭘 줄 수 있는지부터 들어봐야 할 것 같군.”

“많은 걸 줄 수 있지만, 네게 필요한 거라면 힘, 도구, 고유 마법, 돈 정도?”

“일이 끝난 뒤 선택해도 되나?”

“마음대로. 대신 168시간 안으로 끝내야 해.”

168시간이라면 일주일이었다.

준비 및 이동에 하루를 소비한다고 해도 충분했다.

“물건이나 준비해 놔라.”

“Ära oota häid tulemusi(좋은 결과를 기대할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쵸푸므자는 마치 녹아내리듯 사라져 버렸다. 참 익숙해지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지훈은 잠시 자리에 서 있었으나, 금방 발걸음을 옮겼다.

러시아 하수도에 있는 차원 여행자.

‘능력치도 오를 만큼 올랐고, 쉬기도 푹 쉬었다. 이제 다시 일 하러 가야한다.’

보상으로 뭘 줄지는 몰랐지만, 아쵸푸므자는 권능의 반지를 만들 만큼 실력 있는 아티펙트 메이커였다.

아무 물건이나 뱉어낸다고 한들, 일반 헌터 기준으로 수준 높은 녀석이 나올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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