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우와 지현 -->
“건배!”
쨍!
잔 여섯 개가 동시에 부딪혔다.
특히 칼콘과 톨퐁이 세게 부딪혔다. 잔이 깨질까 싶을 정도였다.
꼴깍 꼴깍.
일행이 모두 술을 털어 넣었다.
주종은 바카디였는데, 칼콘이 강력 추천했다.
지훈은 처음부터 저딴 술 달리냐며 뜯어 말렸지만, 도리어 그게 일행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모두 먹어보겠다고 나섰다.
결국 모두의 입에 도수 높은 술이 들어갔고….
“크으으으!”
“푸하!
“후~“
“우웩!”
“꺽!”
“….”
제각기 다른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칼콘과 톨퐁은 사내대장부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내뱉었고, 시연은 기분 좋다는 듯 짧게 후~ 하고 말았으며, 지현과 민우는 씁쓸한 맛에 얼굴만 찌푸렸다.
반면 지훈은 아무 말 없이 술의 향을 음미했다.
“이거 대장부 술이네. 이름이 뭐야?”
톨퐁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물었다.
“바카디, 141.”
바카디는 75도를 넘는 괴악한 도수를 자랑하는 술이었다.
도수가 높은 만큼 숙취 역시 끝내주게 심했으나, 칵테일 혹은 혼합주에 넣기 좋아 널리 사랑받는 술이었다.
아무래도 바카디가 미국 술인지라 가격이 좀 비쌌지만, 기분 좀 내볼 생각으로 큰 맘 먹고 구입했다.
‘이제 여유도 좀 있으니까, 놀 때 확실히 놀자.’
지훈은 잔에 남은 바카디를 모두 털어 넣었다.
“아니 그냥 알코올 덩어린데, 이게 맛있다고?”
지현이 톨퐁을 쳐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민우 역시 동감이었는지,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이지! 술은 원래 독하면 독할수록 좋은 거야. 가성비가 좋잖아!”
물품 단속이 심한 오크 특성상, 술에 귀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특히 종족이 너무 호전적이라, 술만 취하면 난동을 부려대는 탓에 거의 대부분의 오크 군락에서는 술 유통을 금지하는 게 보통이었다.
잠시 나돈다고 해봐야 승리에 대한 포상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칼콘은 틈만 나면 술을 마셔댔고, 이는 톨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우… 됐다, 난 이거 말고 맥주 먹을래.”
“저도요.”
“응, 나도 맥주가 좋을 것 같아.”
술이 약한 지현, 민우, 시연은 바카디를 내려놓고 맥주를 손에 들었다.
흥겨운 파티가 계속됐다.
맛있는 고기, 좋은 술, 마음 맞는 사람.
세 박자가 어우러져 모두 즐거워하는 분위기였다.
“지훈, 분위기 좋은데 대표해서 할 말 없어?”
칼콘이 슬쩍 지훈을 쳐다봤다.
“꼰대도 아니고 뭐 그런 걸 하냐. 그냥 즐기면 되지.”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칼콘의 의견에 모두의 눈이 지훈에게 모였다.
그래, 한 마디 해봐.
나도 듣고 싶다~
들어는 드릴 게.
원래라면 별 말 안했을 지훈이었다. 하지만 취기도 있겠다, 한 마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다들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다치지 말고, 계속 잘 하자.”
허례의식 없는 성격이 잘 드러난 한 마디였다.
이에 칼콘을 시작으로, 일동 사이에 작은 박수가 지나갔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다들 흩어져 개인 시간을 가졌다.
칼콘은 톨퐁과 함께 바카디에 이어 보드카를 먹었고,
지현과 민우는 나이가 동갑이라는 걸 알았는지,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으며,
지훈과 시연은 가까운 의자 앉아있었다.
“어때?”
“왠지 외국에 온 것 같아서 기분 좋아.”
단순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집 주변 공터에서 하는 파티였지만, 시연에게는 미국의 홈 파티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외국이라. 외국보다는 다른 세계에 가깝지 않나?”
그 증거로 하늘에는 독특한 빛의 달이 떠있었다.
“아무렴. 난 그냥 좋아.”
“저번에는 외로워서 미칠 것 같다면서, 또 무슨 바람이야?”
실제로 외롭다고 한 번 미쳐보자며 사고 친 시연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세드로 반 강제로 발령 났는데, 당연히 외로웠지. 근데 지금은 괜찮아.”
왜, 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시연이 지훈의 손을 잡았다.
꾸욱.
“처음에는 싫었다? 막 길거리에 이상한 종족들 나돌아 다니고, 라디오나 뉴스에선 누구 죽었다는 뉴스밖에 안 나오고… 그래서 출근도 안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
시연은 슬픈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웃었다.
“근데 지금은 잘 왔다는 생각도 들어.”
저게 뭘 뜻하는지 알았기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술 취했어?”
시연은 취했냐는 말에 슬쩍 고개를 흔들었다.
“별로.”
“근데 뭐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해?”
“바보. 분위기 깨게 그런 말이나 하고!”
토라졌는지 시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내버려 두면 풀릴 것 같았기에, 깍지를 풀려고 하니 시연이 싫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 그래도 좋아….
읽기 쉬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딱히 표현해 줄 필요 없이, 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묶은 결에 맞춰 쓰다듬으니, 시연이 고양이 갸르릉 거리듯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맞다. 지현이가 이상한 소리 안 했어?”
“무슨 소리?”
폭탄 터질건 많았다.
뒷골목에서 이름 좀 날렸던 사람이라는 것과, 과거에 도박과 계집질 한 건 물론이오, 미친 사냥개라는 이름 달고 사람 여럿 조진 것도 있었다.
“장난기가 하고 많아서, 이상한 거짓말 했을까봐.”
“전혀. 시누이라고 해서 조금은 긴장했는데, 귀여워서 예외였다. 근데 자기랑 진짜 닮았더라.”
둘 다 거친 삶과 멱살 잡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둘 다 성격 더럽고, 입에 걸레 물고, 얼굴에서는 위험한 냄새 풀풀 났으니 어떻게 보면 닮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지훈은 저 사실을 부정했다.
“끔찍한 소리.”
“저기 지현 아가씨 봐봐. 지훈이랑 완전 닮지 않았어?”
시연이 지현을 가리키며 물었다.
현재 지현은 민우와 얘기 중이었는데, 민우가 술에 취한 듯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닮기는 개뿔.”
“근데 둘이 사이 진짜 좋아 보인다. 원래 친했어?”
시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우가 지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현이 당황한 듯 크게 움찔거렸다.
“아, 아니. 오늘 처음 본 사인데?”
“민우라는 사람 얼굴이 새빨갛다. 취한 거 아냐?”
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저 놈이 돌았나, 지금 누구 동생을 건드려?’
아무리 개차반이고, 악마 같다지만 동생이었다.
“잠시만, 나 저쪽 좀 가볼게.”
“다녀 와.”
☆ ☆ ☆
약 60분 전.
분위기가 무르익어, 자연스레 두 커플이 찢어지자 지현과 민우만 남았다.
“고기랑 술은 좋은데, 자리가 재미없네.”
지현은 커플들이 싫은지 킁 소리를 내며 비꼬았다.
“그, 그러게요.”
민우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지현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모시는 보스(?)의 여동생인 만큼, 상대하기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말투가 왜 그래?”
“아, 아뇨. 왜요?”
“우리 동갑이라며. 말 놔.”
지현의 얼굴에 지훈이 겹쳐 보인 까닭일까?
말 놨다간 그대로 보틀샷(술병으로 때리는 것)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 보는 사람은 조, 조금 어려워서요.”
회색빛 거짓말이다.
민우가 낯을 가리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여기서 조금이라도 삐끗했다가는 지훈이 악마 같은 얼굴로 달려올 것만 같았다.
“남자가 재미없기는… 됐어, 술이나 먹자.”
지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보드카를 집어 들었다.
술 자체에 복숭아 향이 첨가된 제품이었는데, 지현은 거기에 대해서 사이다까지 섞었다.
“마셔.”
“제가 술을 잘 못해서….”
당연히 술이 약한 민우는 뒤로 뺐다.
괜히 술 취했다간 이상한 짓 할 것 같아서였다.
“너 짜증나.”
하지만 지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민우가 급히 머리를 굴렸다.
지현 마음이 불편하다 = > 지훈을 부른다 = > 보틀샷
물론 지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평소 지훈을 무서워하던 민우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 공포감은 민우에게 약한 술을 들이키게 만들었고….
꿀꺽, 꿀꺽.
“잘 마시는데 왜 뺀 거야?”
“제가 술 취하면 말투가 이상해 져서….”
“괜찮아. 괜찮아. 취하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되지.”
“그럼 조금만 먹겠다는….”
꿀꺽, 꿀꺽.
지현은 오래간만에 술상대가 생겨서 좋았는지, 연달아 보드카를 잔뜩 들이켰다.
그에 따라 민우도 따라 마시다 보니, 언제부턴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옅어져 보드카를 쑥쑥 들이켰다.
그렇게 둘이서 보드카 반 병 정도 비웠을 무렵….
드디어 민우가 맛이 갔다.
“지현아!”
“미친놈. 낯가린다면서 갑자기 말까는 거 봐. 왜?”
“난 여자 친구가 없다는!”
평소라면 뭔 개소리하냐고 물었겠지만, 지현 역시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기에 픽 웃고 말았다.
“그래서 뭐. 왜 없는데?”
“나도 모르겠다는! 솔직히 나 정도면 잘 생기지 않았냐는? 이 정도면 중상은 되는 것 같다는!”
중상(中上)은 모르겠고, 중상(重傷)은 확실해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중상이 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야 모르지. 그냥 겉보기에는 괜찮은데?”
지현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평균, 그보다 조금 이하인 외모였으나 솔직히 말했다간 상처받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수 높은 안경부터 벗고, 머리 좀 깎으면 괜찮아 보일 것 같긴 해.”
“정말이냐는?”
“응.”
지현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칙칙 - 화르륵.
“너도 짝이 없다니, 불쌍하네. 나도 없는데.”
지현은 동료를 찾았다는 느낌에 안도했다.
평생 솔로로 갈 것 같았던 지훈이 갑자기 여자 친구를 만들면서, 염장이 아려오는 지현이었다.
‘나도 남자친구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앞에 있는 민우 말고. 제대로 된 놈으로 말이다.
“너 담배 피냐?”
“아니. 안 핀다는.”
“아니 무슨 남자가 담배도 안 펴? 여기 한 대 펴라.”
“그래? 그럼 한 편 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고….”
지현이 민우에게 담배를 권했고, 민우가 담뱃갑을 뒤적거리다 한 개비 꺼냈다.
다른 담배와는 다른, 살짝 녹색 빛을 띤 녀석이었다.
민우가 담배를 물자 지현이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칙칙, 칙.
칙칙칙. 칙칙.
하지만 가스가 다 떨어졌는지 불이 나오질 않았다.
“에이, 씨. 짜증나게.”
“불 없냐는?”
민우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지현은 오기가 생겼다.
“불이 없긴 왜 없어. 여기 있잖아.”
이상한 데서 지기 싫었는지, 지현은 자기가 물고 있는 담배를 가리켰다.
“갖다 대고, 빨아.”
“너, 너무 가까운 것 같지 않냐는….”
“남자가 뭐 그렇게 숫기가 없어?”
민우는 지현의 말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여기저기 치이며 무시당하며 살았다지만, 민우도 남자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까지 무시받기는 싫었다.
“알겠어. 가, 간다.”
민우가 담배를 물고 지현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아주 조금씩. 서서히.
서로 한 자국만 움직여도 몸이 부딪힐 거리.
잘 맞추지 못하고 있자니 담배 연기 섞인 지현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후우, 후우….
병원에서나 날 법한 약 냄새와, 건강에 나쁜 담배 냄새 그리고 언젠가 한 번 맡았던 것 같았던 초록 냄새가 섞였다.
민우는 ‘여자는 다 이런 냄새가 나는 건가.’ 생각했다.
“왜 그렇게 못 찾아? 너 처음이야?”
처음 맞았다.
결국 지현이 민우의 물건을 잡고 정확한 위치에 갖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