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잡아먹는 괴물 -->
엘프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칼콘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가서 사례나 받을까 싶어서 갔는데, 총 겨누더라.”
호들갑 떨 것 없었기에, 가감 없는 사실을 말해줬다.
“겁도 없네. 그래서?”
“조금 골려줬다.”
“그냥 죽이지, 왜?”
칼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말을 부드럽게 해서 그렇지, 그도 세드의 주민이었다.
무기를 겨누는 순간.
곧 상대가 적이라고 인식한 순간 그 어떤 자비도 없이 짓밟았다.
그게 바로 오크의 방식이었고, 더 나아가 세드에 사는 모든 존재가 살아남기 위해 꼭 숙지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애들 죽이면 꿈자리 사납다.”
죽이라는 말에 지훈이 슬쩍 얼굴을 굳혔다.
과거 이블 포인트를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이쪽도 권총 한 방에 생사를 오가는 시절에야 당연히 총 꺼내는 순간 죽였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피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쓸 데 없이 살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죽어 마땅한 녀석들 죽이기도 바쁜데, 뭐한다고 죄 없는 애들까지 죽인단 말인가.
물론 저 쪽에서 먼저 위협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로 봐줄 수 있을 수준이었다.
‘서로 의심하지 않으면 죽는 세상이다.’
씁쓸함이 몰려와 담배를 물었다.
“응. 어쨌든 사례는?”
“빨아먹을 놈이 따로 있지, 뭔 가난한 민간인을 뜯어.”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한 줌 꺼냈다.
루비솔트부쉬, 엘프 형제가 옮기던 과일이었다.
‘사례금은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칼콘은 사례금으로 뜯은(?) 과일을 바라보며 킁 소리를 냈지만, 별 말 없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래도 맛은 있네.”
“이게 맛있다고?”
과연 이해할 수 없는 입맛이었다.
“근데 이런 소리 들을 거 알면서 왜 도와줬어? 그냥 버리고 가지.”
“변덕이지 뭐.”
그걸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겼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퍽!
칼곤이 질질 끌고 오던 강도를 내던졌다. 강도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사, 살려주세요….”
“서로 알 거 아는 사람끼리 길게 얘기하지 말자. 피차 대가리 굴리며 쓸 데 없는 혓바닥질 하지 말자고. 알간?”
강도는 재빨리 눈알을 굴렸다.
살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뭐, 뭘 원하십니까?”
“창고 어디 있냐.”
보통 강도들은 공권력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물건을 바로 처분하지 않았다.
까닭에 물건들을 아지트에 숨겨뒀다가 상인으로 위장해서 한 번에 몰아다 파는 게 보통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강도는 시미치를 뗐다.
‘쉽게는 말 안 하시겠다?’
상대는 악인이다.
이블 포인트 따위 걱정할 필요 없었다.
지훈이 칼콘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꾸욱!
칼콘이 징 박힌 그리브로 강도를 지르밟았다.
“아, 아아악! 악! 진짜 몰라요!”
“그래?”
뻑!
빈토레즈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때렸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
강도가 고통 때문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침만 흘렸다.
“저, 저는 정말….”
“틀렸어.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니야.”
이번엔 허벅지를 밟았다.
날카로운 비명 튀었다.
약 60초 간 묻지도 않고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졌다.
강도는 반 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지훈은 그런 강도의 귀에 속삭였다.
“이번에도 헛소리 하면, 네 물건을 잘라낼 거야. 잘 생각해서 말 해.”
남자에게 있어 고간에 있는 그것은 제 2의 심장이라 불릴 만큼 민감한 부위였다.
강도가 희번덕거렸다.
“제, 제발요… 제발….”
“너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내가 왜 널 죽여? 난 네 목숨에는 관심이 없어. 단지 너희가 쟁여놓은 물건만 있으면 된다고. 창고 위치만 얘기해. 살려줄게.”
죽음의 공포에 눈이 멀은 강도의 귀에, 달콤한 유혹의 말이 쏟아졌다.
“정말요?”
“약속하지.”
강도는 결국 얼마 못 가 위치를 실토했다.
바로 창고로 향해야 했기에, 셋이 나란히 강도 측 화물차에 올라탔다. 죽은 강도들의 장비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우야, 차 몰고 따라와라!”
“어, 어… 네? 저 운전면허 없는데요?”
비싼 유지비 어찌 감당하며 타냐는 생각에 면허도 따놓지 않은 민우였다.
결국 칼콘이 페커리가 실린 화물차를 운전해서 따라오기로 하고, 강도 차량엔 지훈, 민우, 강도가 나란히 앉게 됐다.
민우는 강도의 얼굴을 보더니 살짝 난색을 표했다.
“왜 그래? 아는 놈이야?”
“아니… 뭐… 그냥요.”
미적지근한 반응이 나왔으나, 굳이 묻진 않았다.
길안내를 받던 도중, 강도가 민우를 빤히 쳐다봤다.
민우는 시선을 피했다. 결국 강도는 지훈에게 눈을 돌렸다.
“저기… 낯이 익어서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건 알아서 뭐하게. 복수라도 하게?”
강도가 도리질을 쳤다.
“아뇨. 어떻게 감히. 살려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무슨 복수입니까.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별 상관없을 것 같아서 이름을 알려줬다.
강도는 이름을 듣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유명한 미친… 아니, 지훈 형님이셨습니까?”
미친 사냥개라고 말하려다 만 것 같았다. 하긴, 별명이래도 남 주둥이로 들어서 기분 좋을 소리는 아니었다.
“나 아냐?”
“어휴… 이 주변에 전부 지훈 형님 나와바린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넌 뭐하는 새낀데 강도질 하고 있냐.”
강도는 입이 마르는지 몇 번 쩝쩝대곤 말을 이었다.
“저… 저, 레니게이드 조직원입니다. 강탈팀이에요….”
레니게이드.
몇 번 들었던 이름인데 살짝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뭐하는 곳이었더라?’
기억을 더듬기도 잠시.
김중배가 떠올랐다.
“레니게이드면 중배네 마약 유통로?”
“어, 중배 형님 아십니까?”
손수 저승으로 보내줬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다.
“참 멋진 분이셨지 말입니다. 혼자서 팀도 꾸리시구요.”
강도는 그렇게 말하며 민우를 쳐다봤다.
민우는 애써 태연한 척 했다.
“그래? 그건 모르겠고. 얼마나 더 가야 되냐?”
“이제 곧 있으면 도착입니다!”
강도는 경비가 하나 있으니 주의하라고 덧붙였다.
“동료 아냐? 막 팔아도 돼?”
“저 죽게 생겼는데 지금 그게 문젠가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서 혐오감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이동하자 작은 구릉이 나왔다.
아지트는 구릉의 고저를 이용한 동굴이었는데, 강도 말대로 동굴 앞에 사람이 하나 서있었다.
“민우야, 이거 핸들 좀 잡아라.”
“아, 네? 네.”
딴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민우는 화들짝 놀랐지만 금세 핸들을 잡았다.
지훈은 그 사이 창밖으로 빈토레즈를 내밀고는….
‘이능 발동. 집중.’
푝!
경비가 풀썩 쓰러졌다.
“후우… 욱.”
“괜찮으세요?”
가벼운 구토감이 일었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자주 쓰니까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지네.’
“괜찮아. 신경 꺼라.”
이후 아지트에 들어가 온갖 장비들을 다 쓸어 담았다.
아티펙트로 보이는 물건도 몇 개 있었으나, 고등급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제 내려서 짐 싣자.”
이후 강도 포함 넷이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강도가 민우에게 슬쩍 붙었다.
“나 너 알아, 새끼야. 우민우.”
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새끼 중배 형님 죽고 나서 어디로 갔나 했더니, 기껏 미친개 밑으로 들어갔냐?”
“닥치고 일이나 해라.”
닥치라는 말에 강도가 얼굴을 붉혔다.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나 좀 살려줘. 씨발.”
“형님이 살려주신다고 하셨잖아. 뭐가 문젠데?”
강도가 장난 하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병신아, 그걸 믿냐? 네가 얘기 좀 잘 해보라고!”
불쾌했는지 민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지금 부탁하는 사람 말투냐?”
“너 이 새끼, 레니게이드 배신하고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저 미친개야 석중 할배가 지키고 있으니 못 건들지만, 너는 아닐걸.”
되도 않는 협박이었기에, 민우는 가볍게 무시했다.
애초에 민우는 중배의 고용인이었을 뿐, 레니게이드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날 도와주면 돌아가서 잘 얘기해 줄게. 내가 너 살려 주는 거야, 병신아. 이 세상은 줄 잘 잡는 놈이 이기는 거 몰라? 어디로 붙어야 할지 잘 생각해.”
원래 강도 인성이 저거 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민우가 얼마나 만만해 보였으면 저랬는지, 심지어 둘 다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 민우는 강도의 고압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도는 계속해서 민우에게 말을 건넸지만, 민우는 전부 무시했다.
거친 노동이 끝나자 다들 허리를 쭉 폈다.
“저, 저는 이제 가 봐도 됩니까?”
생명 연장의 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표정으로, 강도가 비굴하게 물었다. 이에 지훈은 일축했다.
“벗어.”
“네?”
“방탄복 벗으라고.”
강도가 울상을 지었다.
“저, 저 이거 없으면 어떻게….”
“그거야 내 알바 아니지.”
“파, 팔려고 벗기는 거죠? 다른 의미는 없으신 거죠?”
“나중에 설명해 줄게. 일단 벗어.”
결국 강도는 입고 있던 방탄복을 차에 실었다.
“칼콘.”
말 할 것도 없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칼콘이 창고에서 챙겨놓은 메이스를 꽉 쥐었다.
“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알면서 뭘 물어.”
“사, 살려준다고 약속했잖아! 얘기가 다르잖아!
약속이라는 말에 지훈이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난 사람하고 한 약속만 지켜서 말이지.”
강도가 절규하며 부르짖었다.
“나는, 나는 사람 아니냐? 봐봐. 지구도 아닌 세드잖아. 오크, 엘프 같은 온갖 괴물들이 넘쳐나는데 같은 인간끼리 죽이면 어쩌자고! 이러다 종족전쟁 나면 다 죽는 거야!”
“너 이 새끼야, 말해봐. 엘프만 털었냐?”
당연히 아니었다.
강도가 입을 다물었다.
이 근방은 강도 출몰 소식 때문에 엘프가 거의 통행하지 않는 장소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주 목표는 인간이 될 터였다.
“인두겁 쓰고 사람 잡아먹는 새끼가 사람이라고? 개소리 하고 앉아있네.”
“그래, 죽여. 죽이라고. 근데 말이야 이거 알아둬. 우민우 쟤 레니게이드다! 쟤가 전부 꼰지를 거라고!”
마지막 발악인지, 강도는 민우를 물고 늘어졌다.
지훈은 슬쩍 민우를 쳐다봤다.
“아, 아닙….”
민우가 뭐라 얘기하기도 전에, 지훈이 칼콘에게 명령했다.
후욱 - 뻑! 뻐억. … … 뻑!
풀썩.
강도가 바닥에 축 늘어졌다.
민우는 그 모습을 보자 겁에 질렸다.
“혀, 형님 그게… 진짜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말없이 민우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이에 민우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으나, 지훈보다 빠르진 못했다.
“저, 저는 그런 짓 절대 안 해요… 아시잖아요!”
민우는 얻어맞을까 눈을 꾹 감았지만, 지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민우의 어깨를 토닥였을 뿐이었다.
“다 알고 있었어, 새끼야.”
중배 이름이 나온 순간 이미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
“너 겁은 많아도 배신은 안할 거 안다.”
집어먹었던 겁이 한 순간에 녹아 없어졌기 때문일까?
민우는 딸꾹질을 하며 훌쩍거렸다.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온갖 배신과 암투가 난무하던 중배 팀에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인정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사내새끼가 질질 짜기는. 그만 울어, 집에 가자.”
칼콘은 강도 차량에, 지훈과 민우는 페커리 차량에 올라탔다.
조용히 운전만 하고 있자니 민우가 물었다.
“저기 형님.”
“왜.”
“이번 일 계기로 레니게이드랑 척 지면 어떡해요?”
아무래도 강도가 한 말이 신경 쓰인 모양이다.
“목격자도, 생존자도 없는데 지들이 어떻게 알아?”
정답이었다.
모두 죽여서 수사망을 피하는 강도처럼, 강도 역시 모두 죽여 버리면 범인을 찾기 어려웠다.
“쟤네 좋은 총 많이 챙겨놨던데, 갖고 싶은 거 있냐?”
“아뇨. 무거운 거 못 들어서요. 그냥 이대로도 좋아요.”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좋은 총이나 아티펙트를 들어봐야, 무거워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 안 드느니만 못했다.
“그래라.”
“형님.”
“왜.”
“고맙습니다….”
지훈이 픽 웃었다.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