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의 반지-33화 (33/173)

<-- 우리 무슨 사이야? -->

보글보글.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고 휘휘 젓길 몇 분.

라면 냄새에 잠이 깼는지, 시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네.”

“속은 좀 어때?”

“쓰려….”

물이라도 건네줄까 싶어 뒤로 돌자, 나체가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보기 좋을 정도로 봉긋 솟은 가슴과,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허리 그리고 섹시함을 뿜어내는 골반까지.

옷 위로 봤을 때도 좋다고 몸매가 느꼈지만, 실제로 보니 또 새로웠다.

“옷 좀 입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어제 볼 거 다 봤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시연은 주섬주섬 속옷을 입곤, 쓰레기통을 뒤졌다.

“뭐 찾아?”

“콘돔.”

“그건 왜?”

“마법사의 정액에는 미량의 마력이 흐른대. 궁금해서 조사해 보려고. 마침 도구도 여기 있고.”

누가 연구원 아니랄까봐 참 연구원다운 말이었다.

“밥 먹고 해라. 비위 상한다.”

“그럴까? 원랜 아침 안 먹는데, 다른 사람이 해주니까 또 맛있어 보이네.”

“웃기는 소리. 내가 해서 맛있는 거겠지. 아무한테나 해주는 요리 아니니까 영광으로 알아.”

“겨우 라면 갖고?”

“싫으면 말던가.”

“아, 너무해!”

“그만하고 와서 들어.”

테이블 위로 조촐한 식사가 차려졌다.

한 동안 후루룩 거리는 소리만 났다.

몸을 섞고 나서 정이 든 건지, 아니면 마음에 들었기에 몸을 섞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연이 라면을 먹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은근히 귀엽네. 백치미도 있어 보이고.’

꼭 말 잘들을 것 같은 강아지 같은 느낌이랄까?

“있잖아, 나 각성자랑 한 건 처음이다?”

“그래? 어땠는데.”

“나 앞으로 일반인이랑은 못할 것 같아….”

“푸웁!”

정정한다.

저건 강아지 탈 쓴 여우다.

“참, 그런 얼굴로 위험한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사실이잖아. 원래 과학자는 사실을 말하는데 망설임이 있으면 안 돼. 직업병 같은 거야.”

식사가 끝난 후, 시연은 진짜 마력 검사를 실시했다.

“진짜 마력이 흐르는구나…. 신기하다. 한 번 봐볼래?”

궁금하긴 했으나 비위가 상할 것 같아 그만뒀다.

“최근에 마법사의 아이는 실제로 마력을 각성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논문을 봤거든. 참 신기해.”

순간 지훈은 전날 시연과 만나기로 했던 이유가 ‘마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게 떠올랐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저건 뭐야?”

연구 테이블을 훑다 독특하게 생긴 물건을 발견했다.

리더기처럼 생긴 물건. 각성자 능력 감지기였다. 하지만 지훈이 알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시제품이야. 한 번 써볼래?”

“그러던가.”

바코드마냥 위 아래로 훑자, 삑 하는 소리가 나며 정보가 나타났다.

[정보]

등급 : C 등급

근력 : E 등급 (16)

민첩 : E 등급 (17)

저항 : E 등급 (15)

마력 : E 등급 (11)

이능 : F 등급 (9)

잠재 : S 등급 ([email protected]#$//)

이전 버전과 다르게 정확한 수치까지 찍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단순 검사만으로 티어까지 알아내는 건 무리였는지, 티어는 나타나 있질 않았다.

“이거 뭐야. 잠재가 왜이래?”

잠재 등급이 깨져 나오자 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계로는 확인 가능할까 싶었는데, 아쉽군.’

반면 지훈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그냥 유야무야 넘어갔다.

“근데 너 C등급 이었어?”

각성자라고 말만 했지, 등급까진 제대로 말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대박… 나 C등급 각성자 처음 봐.”

“마법도 그렇고 C등급도 그렇고. 넌 죄다 처음이지?”

가벼운 핀잔에 속이 상했는지 시연이 독을 머금었다.

“응, 홍콩도 처음 가봤어.”

“컥!”

역시 얕볼 수 없는 여자다.

“하나 줄까? 시제품이긴 해도 어차피 상급 헌터들 사이에선 자주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막 줘도 상관없어?”

“뭐, 남자 친… 잠깐만.”

시연이 말을 하다 멈췄다.

비록 어제 몸을 섞었고, 지금 연인처럼 함께 있다고 한들 둘의 관계는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시연은 확답을 원했다.

“우리 무슨 사이야?”

이번엔 지훈도 말을 멈췄다.

“글쎄?”

“야! 죽을래?”

확답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시연이 그대로 멱살을 잡았다. 처음 키스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완력이었다.

“네가 생각하기엔 우리 무슨 사인데?”

“… 몰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는 짓을 보면 엄청나게 여우면서, 이럴 때 보면 또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 이었다.

굳이 대답해 줄 필요 없이, 머리만 쓰다듬었다.

“아 뭐야, 대답은 왜 안 해줘.”

“굳이 말이 필요해?”

“원래 여자는 확신이 필요한 거야.”

그 말에 지훈은 시연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 … …

시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여기, 가져가. 시제품이라 판매점에서 수리 안되니까, 부서지면 나한테 가져오면 돼.”

“잘 쓸게.”

지훈은 감지기 시제품을 짐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 있자니 시연이 뭔가 잊었다는 듯 물었다.

“근데 우리 어제 마법 보여준다고 만난 거 아니었나?”

“그랬지.”

“나 마법 못 봤어, 보여줘. 연구하고 싶단 말이야.”

별 문제 없는 부탁이었기에, 빠르게 몇 번 보여줬다.

☆ ☆ ☆

핸드폰 대리점.

시연과 지훈이 핸드폰을 둘러보고 있었다.

연락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시연이 핸드폰을 개통하라고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폰으로 보여 드릴까요?”

“혹시 이걸로 개통할 순 없소?”

저번에 구조대 호출용으로 샀던 선불폰을 내밀었다.

사실 기능 면에선 스마트폰이 훨씬 더 좋았으나, 안타깝게도 험한 일을 하는 헌터들에겐 맞질 않았다.

헌팅 과정에서 험난한 지형을 돌아다니는 건 물론, 전투를 해야 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우주선 통제 컴퓨터가 DOS(도스)를 쓰듯, 여러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 보단 단순 내구성이 좋은 피쳐폰이 더 좋았다.

“스마트 폰이 좋지 않아? 영상통화도 되고….”

“헌팅하다 부서지면 안 돼. 구조대 호출해야 할 경우도 있으니까 단단한 게 좋아.”

시연은 자기 의견이 묻히자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모습이 복어처럼 보여 살짝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지훈이 시연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쓰다듬는 것보단 머리를 헝크는 것에 가까웠지만, 시연은 그저 기분 좋은 듯 웃기만 했다.

“금방 개통해 드리겠습니다. 시간 좀 걸리니까 앉아서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시연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녀는 가까운 소파로 오종종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왜 그래 다리 아파?”

“아픈 건 아닌데….”

“어디 봐봐.”

다친 건 아닐까 싶어 바로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별 다른 외상은 보이질 않았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왜 그러는데?”

차마 아침 먹고 했던 운동 때문이라고는 죽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시연이었다.

소파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아이덴티티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고, 이것저것 만지는 가 싶더니 주문을 영창했다.

“avamine(개통).”

주문 이후 신기하게도 핸드폰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시연은 신이 나서 제일 먼저 자기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잊어버리지 마. 연락 자주하고, 알겠지?”

“너 일하는데 어떻게 자주 연락해.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자유 출근인데? 실적만 채우면 안 가도 돼. 집에서 일 해도 상관없고.”

열정 페이와 낮은 임금으로 유명한 한국과는 동떨어진 얘기에 입이 떡 벌어졌다. 연봉 5억 받는 사람이 자유출근이라니?

‘이래서 다들 보사, 아이덴티티 하는 구만.’

어떻게 해서든 지현을 보사 혹은 아이덴티티에 입사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은 순간이었다.

핸드폰을 개통하고 밖에 나오자 시연이 물었다.

“이제 뭐 할 거야?”

“글쎄. 집에 가봐야지. 외박 했으니까 동생이 기다릴 거야.”

“나도 같이 가자.”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거절했다.

- 우와, 대박. 보사 다닌데. 그런 언니가 왜 이딴 놈을 만나요? 나한테만 말 해봐요, 협박당했죠?

안 봐도 비디오였다.

거절의 뜻을 비치자 시연이 아쉬운지 끙 소리를 냈다.

“소개시켜주기엔 좀 이른 것 같다.”

“왜, 내가 부끄러운 거야?”

아니. 도리어 자랑스러웠다.

다만….

“내가 부끄럽다.”

너저분한 집은 물론이오, 가더라도 여동생이 무슨 짓거리를 할 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시연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계속 질문을 던졌으나, 대답 해주진 않았다. 그걸 마지막으로 여자 친구와의 달콤한 시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걱정할거란 예상과 달리 지현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왔어?”

“기껏 너 때문에 일찍 들어 왔는데, 걱정도 안 되냐?”

픽 웃는 소리가 돌아왔다.

“아니 이 동네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누군데, 내가 누굴 걱정해?”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지현이 길에서 시비가 붙었다가도, 지훈 이름만 나오면 상대방에서 꼬리를 말아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각성까지 했으니 도시 내에서 위험할 일은 전혀 없다고 봐야 옳았다.

“너 오늘 뭐하냐.”

“아무것도 없어. 왜?”

“병원 가자.”

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싫어.”

지현은 병원이 싫었다.

지금이야 지훈이 벌이가 좋으니 어떻게 될지 몰랐으나, 여태껏 병원에 갔을 때 마다 항상 같은 얘기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 미안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해드릴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료 기술이 더 발달하거나, 마법사를 찾아가셔야….

어차피 점점 줄어가는 수명, 굳이 제 발로 찾아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걔네 맨날 앵무새마냥 똑같은 말만 하잖아.”

“그래도 가봐야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 거 아냐.”

“싫어, 안 가.”

“지랄하지 말고 따라 와.”

마음 같아선 질질 끌고라도 가고 싶었으나 참았다.

지훈 역시 지현이 어떤 기분인지 어렴풋 알기 때문이었다.

“요즘 약 계속 먹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고 당장 죽을병도 아니라서 괜찮잖아?”

현재 지현이 앓고 있는 병은 한국명 혈석화, 세계명 스토닝(Stonning)이었다.

네윔이라 불리는 바위게(Stone crab)에 의해 옮는 병으로, 피가 서서히 굳어가는 증상을 가진 병이었다.

현대 의학으로썬 완치가 불가능했으며, 네윔톨이란 약품을 먹어 병의 악화를 늦추는 정도만 가능했다.

“지금은 가서 상황만 볼 거고, 급하다 싶으면 바로 마법사 찾아갈 거야.”

마법사라는 말에 지현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혈석화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마법이었다.

소위 치유사로 불리는 이들이 마법을 이용한 전문 의료 행위를 했는데,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거나 고통을 원하지 않는 이들이 많이 찾았다.

“지, 진짜?”

“어.”

“치유사한테 치료 받으려면 많이 비싸잖아….”

문제는 바로 가격이었다.

치유사라는 직업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적 정비는 물론 가격 평준화까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험은 기대할 수도 없었고,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런 거 걱정하지 마라. 나중에 보사나 아이덴티티 취직해서 갚으면 된다.”

“내가 어떻게 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네.”

진심으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지현은 농담으로 들렸나보다.

“어쨌든, 가자. 이제 맘 좀 생겼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못이기는 척 가줄게.”

“개소리 그만하고 빨리 와라.”

☆ ☆ ☆

다행히 검사 결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혈석화는 총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다음과 같았다.

가벼운 답답함을 느끼는 정도로 그치는 초기.

혈관이 막히기 시작해서 온 몸에 멍이 드는 중기.

내장 기관이 막혀서 서서히 죽어가는 말기.

다행히 지현은 중기에서 멈춰있었다.

“일단 네윔톨만 잘 드신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과거엔 참 듣기 싫은 말이었지만, 지금은 다행으로 들렸다.

예전에는 약을 살 돈이 없으니 서서히 죽어가라는 말로 들렸지만, 지금은 그깟 약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치유사 찾아가 보자.”

“응!”

몸에 드문드문 멍이 있긴 했으나, 지현이 활기차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 어딘가가 뭉클해지는 지훈이었다.

☆ ☆ ☆

“대충 어떻소?”

치유사는 소견서와 검사 결과를 보더니 턱을 쓸었다.

“중기네요. 왜 이렇게 될 때 까지 내버려 둔 겁니까?”

대답이야 간단했다. 돈 때문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유추할 수 있는 답이었기에, 살짝 화가 났다.

아마 치유사는 마법을 배웠다는 이유 하나로 가난 따윈 접해보지도 못했고, 공함할 수도 없는 사람이리라.

“이 쪽 사정이니 알 거 없고. 치료 할 수 있소, 없소?”

“있습니다. 근데 좀 오래 걸릴 겁니다.”

설명에 따르면 한 번에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혈석화 치료는 바이러스 중화와 채혈이 동시에 이뤄지는데, 한 번에 많은 양을 뽑으면 환자가 사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상관없소. 된다니 다행이군.”

들었던 대로 치료비는 총 2억 조금 넘게 나올 거라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은 것은 각 치료시마다 분할 납부 방식이었다는 것이었다.

“오늘 당장 치료 시작합시다.”

많은 액수였지만 고민할 것 없었다.

치료는 약 30분 정도 걸렸다.

물리치료 받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있는 게 다였다.

“신기해. 하나도 안 아파.”

“다행이네.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지현은 팔에 있던 멍 자국을 주물러봤다.

평소라면 작은 덩어리들이 잡혀야 했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우와… 없어졌어. 나 진짜 낫고 있는 거야?”

현실감이 없는지 지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법 한 게, 약물 치료, 수술치료도 없이 가만히 누워있는데 병이 호전됐다. 꿈이라도 꾸는 기분일 것이다.

“응. 계속 받으면 완치될 거야.”

지훈은 그런 지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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