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통수 -->
시연이 웃었다.
취기가 올랐는지, 그녀 어깨에서 재킷이 흘러내리며 새하얀 목과 쇄골이 드러났다.
새하얀 백치미와 취기로 인한 무방비함이 겹쳐지자,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모르는 척 키스하면 받아줄 듯, 쇄골에 입을 맞추면 금방이라도 교성을 내뱉을 듯, 그랬다.
‘뭐 저렇게 무방비해.’
가슴 구석에서 배덕한 마음이 고개를 들이밀며 ‘해 봐. 괜찮을 걸?’하고 유혹했지만, 애써 쳐냈다.
“정신 나갔구만. 정신 차리쇼. 어디 잘못된다니까!”
“나 오늘 사실은 조금은 잘못될 각오 하고 나왔는데? 너무 외롭잖아….”
말문이 턱 막혔다.
“오늘 우리 두 번째 보는데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요?”
“두 번째 만나면 서로 잘못되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 없다.
서로 마음만 맞으면 되는 거 아니던가?
사람이라 한들 동물이었다.
아무리 사회에 맞춰졌다 한들 수컷과 암컷이다. 남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본능까지 억제할 순 없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니, 다들 맛이 가네.”
“맞아. 미친 세상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헛소리 그만하고 나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덥썩.
시연이 지훈의 멱살을 붙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마치 입술이 녹아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
깜짝 놀라 입을 열자, 시연의 혀가 파고들어왔다.
저항하려 밀어냈으나, 혀와 혀가 얽힐 뿐 효과는 없었다.
얼마 만에 키스를 한 건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단지….
부드러운 시현의 혀도,
립스틱과 화장품 향이 나는 시현의 얼굴도,
움직일 때 마다 살짝 살짝 닿는 시현의 가슴도,
얽매듯 다리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시현의 무릎도,
거친 키스 후 내뿜는 알코올 향이 섞인 시현의 날숨도.
모두 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기분 좋았다.
“숙맥처럼 굴더니, 키스는 잘하네?”
“무슨 소리. 저항한 거다.”
툭 튀어나온 칭찬이 부끄러웠기에, 시연의 이마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었다.
“이제 가자.”
“뭔 소리야. 어딜?”
“우리 집. 나 자취한다고 말했잖아. 안 갈 거야?”
이미 이성 따위는 키스와 동시에 녹아 없어졌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시점에서 더 이상 얌전 떨 필요는 없었다.
지훈은 긍정을 닮은 침묵을 건네곤, 계산을 위해 계산대로 향했다.
“얼맙니까?”
“32만 9천원입니다.”
지갑을 열어 카드를 꺼내려는 찰나….
툭.
콘돔이 떨어졌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시연과 지훈의 눈이 동시에 콘돔으로 향했고, 판이한 반응을 불러왔다.
‘저, 저, 저딴 게 왜 내 지갑에 들어있어!’
지훈은 심장에 입에서 튀어 나올 것 같을 정도로 놀랐고,
“얌전한 척 하더니. 거짓말쟁이.”
시연은 입에 여우같은 미소를 띠었다.
“잠깐. 오해다. 이건 오해야.”
“그럼 저거 뭐야? 풍선껌이야? 비타민?”
포장지에는 유 니드 어스, You need us 라고 이름은 정말 끝내주게 잘 지은 유명 콘돔 브랜드가 떡 하니 적혀있었다.
빼도 박도 못 하는 외통수.
굳어버린 머리로 갑자기 쌩뚱 맞은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 지훈 형님, 저 지갑 한 번 봐도 돼요?
민우가 워낙 떼를 쓰기에 잠깐 보여줬는데, 그 사이에 콘돔을 넣어놓은 모양이었다.
“대책 없는 남자보단 차라리 준비 된 남자가 좋아.”
다행히 시연은 픽 웃고 말았다.
…
약 15분 후.
집으로 향하는 길.
가게에서 벗어나자 취기와 함께 없어진 듯, 성적 긴장감도 서서히 옅어졌다. 이내 둘 사이엔 어색한 기류만 남았다.
“지금이라도 괜찮아. 원래 사람이 외로우면 이런 저런 말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실수였으면 물러도 된다.”
시연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술기운 날아간 거 안다. 점잔 그만 떨고 솔직히 말해.”
“조금 막나간 것 같긴 해….”
애초에 예상한 결과였다.
아무런 접점 없이, 두 번 만난 남녀가 잠자리를 갖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 집에만 데려다 줄게. 그 상태로 혼자 돌아다니면 큰 일 난다. 그리고 앞으로 술 좀 적당히 부어라, 지지배야.”
시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가로등 사이가 퍽 멀어 드문드문 어둠이 깔려 있었다. 거기다 나돌아 다니는 차와 사람까지 없으니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아 보였다.
“아, 보름달이다.”
문득 시연이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항상 삶에 치여 사느라 언제 하늘을 올려다봤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거늘,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솨아아아 -
마치 쏟아져 내릴 듯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였고, 그 사이로 보랏빛 달과 붉은색 달이 나란히 떠있었다.
“오늘이 더블 루나구나… 진짜 예쁘다.”
개척 초기에 실컷 봤던 광경이었기에, 지훈은 하늘은 슬쩍 훑기만 하곤 시연을 쳐다봤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치 달과 별과 하늘을 담은 듯 순수한 모습이었다.
‘예쁘네.’
그 모습이 싸움과 피로 얼룩진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이 가슴 한 편이 묘하게 쓰렸다.
‘어차피 지나가는 인연이다. 게다가 나는 외줄타기 인생이고, 저 여자는 보사 연구원이다.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을 건드려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어.’
고개를 돌려 시연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눈동자가 계속 시연에게 끌리는 건 왤까.
실컷 구경을 하고서야 다시 걸었다.
서로의 거리가 애매했기 때문일까?
걸음마다 서로의 손등이 살짝살짝 스쳤다.
시연의 손은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미치겠네, 진짜.’
이성과 본능이 서로 쥐어뜯고 싸우길 몇 분.
결국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덥석.
본능에 이끌려 손을 붙잡아 버렸다.
“어?”
시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별 말 하진 않았다.
거절인지 승낙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태도.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단순히 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서로 손바닥을 맞댔다.
그리곤….
검지를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
놀랐는지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반사적 저항이 잠시 있었으나, 말 그대로 잠시였다.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쑥 들어갔다.
누군가 말하길 처음이 어렵다고 했다.
처음이 어렵다고, 그 다음 부턴 아무런 저항 없이 중지, 약지, 새끼 순으로 들어가 깍지를 낄 수 있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부족했다.
‘민망해서 그대로 있는 걸 수도 있다.’
확신이 필요했다.
꾹!
지훈이 손을 꽉 쥐어 신호를 보냈다.
만약 관심이 없다면 모르는 척 지나갔을 터였다.
부드러운 시연의 손바닥에 지훈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시연은 조심스럽게 지훈을 쳐다봤다.
그리곤….
답을 보내줬다.
꾹.
승낙이었다.
그렇게 서로 손에 땀이 날 때 까지 깍지 꽉 쥐고 걷다보니, 어느새 시연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파트였는데, 단지를 보고 있자니 서울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로 말 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엘리베이터 없어?”
“응. 세드에 오래 살았다며 아파트는 처음 인가봐?”
“동구에는 이런 건물 없어.”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할 공간에 휑한 공간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만들다 만 것처럼 보였다.
“따라와.”
시연이 먼저 그 공간 안에 들어가며 지훈을 끌어당겼다.
“14층“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훅!
바람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환경이 휙 틀어졌다.
공간 이동이었다.
“신기하네.”
“나도 처음엔 신기했는데, 매일 쓰다보니까 익숙해졌어.”
긴 복도를 따라 많은 집들이 쭉 늘어졌다. 시연의 집은 맨 끝이라고 했다.
거의 다 왔기에 최대한 빨리 데려다 주려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웬일인지 시연이 따라오질 않았다.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시연에 맞춰 느긋느긋 걸었지만, 그나마도 잠시. 현관문 앞까지 도착해 버렸다.
“도착 했네….”
시연이 고개를 푹 숙이곤 말을 흐렸다.
“들어가라.”
지훈이 깍지를 풀고 뒤로 돌았다.
아니 돌려고 했다.
하지만 시연이 손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있잖아… 너는 원래 두 번째 보는 사람하고 키스해?”
“무슨 개소리야. 네가 했잖아.”
“몰라.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해.”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럼 왜 했어?”
“그러니까 네가 먼저….”
시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여자가 먼저 키스하면 다 받아 주는 사람이야?”
“아니.”
“그럼 나랑 키스 왜 계속 했어. 안 떼고?”
결정적인 순간임을 알았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집으로 함께 들어갈지, 왔던 길을 홀로 돌아갈지 정해진다.
고민됐다.
어떤 말을 하면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아 보였으니까. 좋았으니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몇 점짜리 대답이었는지는 몰랐다.
다행히 정답에 가까웠는지, 시연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팔을 끌어 당겼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
서로의 코끝만 호흡에 따라 조금씩 부딪혔다.
“있잖아…. 나 그냥 오늘 잘못 될래.”
“후회 할지도 몰라.”
“네가 그랬잖아.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그런 세상에 산다면 한 번쯤은 미쳐보는 것도 괜찮잖아?”
평소 내뱉던 말버릇이 남의 입에서 나오니 우스웠다.
“그래. 한 번쯤은 미쳐보는 것도 괜찮겠지.”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연이 활짝 웃었다.
집 문이 열렸고, 둘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지훈은 그대로 시연을 벽에 밀어붙여 입을 맞췄다.
☆ ☆ ☆
어떤 연구결과에 따르면 성생활에 가장 열정적인 사람은 운동선수도, 매춘부도, 예술가도 아닌 고학력자(박사, 석사, 연구원)라고 했었다.
지훈은 그 말이 딱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근력이 1 상승했습니다. E등급 (15) => E등급 (16)
- 민첩이 1 상승했습니다. E등급 (16) => E등급 (17)
☆ ☆ ☆
‘사고 쳤다.’
자고 일어나서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기억이 날아갈 정도로 알코올에 버무려 진 건 아니었으나, 분위기에는 잔뜩 취해 있었다.
덕분에 둘 다 땀에 흠뻑 젖을 때 까지 뒹굴었다.
지훈이 슬쩍 일어나 침대 옆을 살폈다.
“으음.”
시연은 아직 꿈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누웠으나 잠이 오질 않았기에, 대충 일어나 주변을 정리했다.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보면 시연이 충격 받을까 싶은 배려에서였다.
그 다음은 아침을 차리기 위해 집 안을 돌아다녔다.
‘이사한 지 얼마 안돼서 그런가, 휑하네.’
여자 집을 자주 가보진 못했지만, 다들 이렇진 않았다.
집에는 그 흔한 TV나 라디오도 없었고, 있는 가전기기라곤 냉장고와 전자레인지가 다였다.
‘뭔 여자 집 냉장고에 라면하고 즉석 밥밖에 없어.’
탐탁지 않았으나 남의 인생 신경써줄 여유는 없었기에 불평 없이 라면과 즉석 밥을 꺼냈다.
냄비에 물을 적당히 받은 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즉석 밥은 전자레인지에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