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이제 가도 되나요? -->
“이보쇼, 두르랑 세놉 판다고? 요즘엔 까트 말고 그런 게 유행하나 보오?”
쪼그려 앉아 남자와 눈을 맞추려 하자, 상대가 고개를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왜 말을 안 합니까. 물건 안 팔 거요?”
“사, 살려주세요….”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만나면 어쩐다고 했지?”
지훈이 남자. 아니, 식물학자의 머리를 휘어잡았다.
“주, 죽인다고….”
“근데 어쩐다? 내가 널 봐버렸네.”
지훈이 그대로 식물학자의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뻑! 소리와 함께 작은 피가 튀었다.
“그 전에 얘기나 한 번 들어보자. 왜 여기 있냐?”
“가기 전에 모아뒀던 약들 처리하고 가려고 했어요. 버리긴 너무 아까워서….”
“그래서 우리 식물학자 선생이 뽕쟁이로 둔갑했다?”
“혀, 형님. 들어 보십쇼…. 이거 다 팔면 오백은 나옵니다. 바, 반절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식물학자가 급히 눈알을 굴렸다.
생명 연장의 꿈을 담은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짭짤한데?”
칼콘은 구미가 당기는지 슬쩍 지훈의 동의를 구했다.
비록 혼자 산다지만, 칼콘도 이것저것 돈 나갈 구멍이 많기에 수익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좋은 제안이긴 한데 내가 왜 너랑 거래를 해야 하지? 그냥 죽이고 뺏으면 되잖아.”
당연히 이블 포인트 때문에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대화를 수월하게 끌고 가기 위해 협박먼저 내뱉었다.
잘 먹힌 걸까?
반신불수가 된 희망에 식물학자의 낯빛이 썩어 들어갔다.
그는 다른 희망을 물색하다 문득 경비 무리를 발견했다.
“여기요! 이 사람이 절 죽이고 물건을 뺏으려고 합니다! 도와주세요!”
경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아, 귀찮게… 뭔데?”
“자그마한 오해가 있었소. 이놈이 빚이 있는데 갚질 않아서 말이오. 개인적인 원한이니, 대금만 받으면 잘 해결 될 거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근데 왜 저 안경잡이 머리는 까져있어? 팬 거 아냐?”
경비가 들고 있던 기관단총을 고쳐 잡았다.
여차하면 바로 쏠 기세였다.
“맞습니다! 여기 이 새끼가 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구해 주세요!”
경비는 한 쪽 입가만 비틀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네?”
보통 시장 경비라면 이용자를 보호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 시장’ 얘기고, 온갖 범죄가 비일비재한 암시장은 좀 얘기가 달랐다.
식물학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이런 일 해봐야 귀찮잖아.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응?”
경비는 저리 말하며 집게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일 하신다고 많이 힘드실 텐데 참 귀찮게 돼서 미안하오. 그러니 이거 받고, 어디 가서 약주라도 드시며 회포라도 푸쇼.”
익숙한 몸짓으로 경비의 주머니에 돈을 넣었다.
“에이, 사람을 뭐로 보고. 내가 겨우 푼돈 때문에… 에헤이, 이 사람 정말. 안 받는다니까.”
말과 다르게 재킷 주머니는 활짝 열려있다. 그 모습이 전형적인 범죄자처럼 보였다.
식물학자는 저 멀리 멀어지는 경비의 등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칼콘, 이 자식 끌고 와.”
퍽!
자유 시장에서 좀 떨어진 천막 구석에 식물학자가 처박혔다.
“그러게 가랄 때 좀 가지. 의심이 많은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지훈은 자주 애용하는 글록에 소음기를 달았다.
이블 포인트 건도 있었고, 지현과 동갑인지라 동정심이 일어 살려주려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돌아가지 않았다면 세드에 머물며 다른 동료와 연락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블 포인트로 죽으나, 암습당해서 죽으나 똑같다.’
아무리 지훈이 각성자고 전투에 익숙하다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자다가 총 맞으면 죽는다.
“다른 사람들한테 우리 얘기 한 적 있어?”
“없어요! 그냥 이거만 팔고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퍽!
본디 인간이란 살기 위해선 온갖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인지라 믿기 어려웠다.
한 동안 미끼용 질문과 대답이 오고갔고, 그 때 마다 지훈은 식물학자를 몰아 세웠다.
“다른 놈한테 말했잖아. 솔직히 너 같은 피라미는 살려둬도 상관없어. 네가 누구한테 불었는지 그것만 말해. 그럼 내가 먼저 찾아가서 그 녀석 없애면 되거든. 그것만 말하면 널 살려줄게. 그럼 살아서 본토로 갈 수 있는 거야. 어때?”
식물학자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요?”
“그래.”
정말 속에서 얻는 희망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식물학자는 순식간에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약 유통하는 놈들한테 말했는데 거절당했어요. 녀석들은 형님 건들기 싫다고 했어요. 명분이 없다면서… 건들면 전쟁해야 한다고….”
상대도 석중과 싸우기 싫으니 그냥 정당방위로 생각하기로 한 모양.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저 이제 가도 되나요?”
“아니.”
지훈은 슬라이드를 당겼다.
어차피 살려 줄 생각 따윈 없었다.
두 번 살려주는 행동은 상대방의 오만을 자극하고, 이는 머지않아 복수심으로 변한다.
철컥.
탄환이 장전됨과 동시에 식물학자의 표정이 삽시간에 탈색됐다.
“보, 보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거짓말이었어요?”
“거짓말은 네가 먼저 했잖아?”
칼콘에게 총을 건네주며 처리하라고 말하려는 순간….
“혀, 형님 밑에서 일하겠습니다! 저처럼 세드 식물학을 전공한 사람은 얼마 없어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민우가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드, 들어보십시오! 혹시 만드라고라 아십니까? 제가 서식지를 압니다! 그 녀석을 캐다 팔면 꽤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지랄한다. 우리가 시골 총각도 아니고 나물은 왜 캐.”
차가운 축갱령을 내리려는 순간 칼콘이 끼어들었다.
“아냐. 만드라고라는 좀 비싸.”
솔깃.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고민스러웠던 상황.
대강 가격을 물어보니 리터 당 삼, 사천 정도 한다는 정보가 돌아왔다.
“지훈. 찝찝한 건 알겠는데 이거 꽤 매력적인 일이야. 만드라고라만 단독으로 있으면 다른 헌팅에 비해서 안전하기도 하고.”
“이번 일만 끝나면 바로 본토로 돌아가겠습니다! 약속 할게요!”
어차피 겁 많고 유순한 식물학자의 성격상 뒤를 칠 만큼 강단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할 만 하겠군.'
지훈이 승낙의 뜻을 비치자 식물학자의 안색이 돌아왔다. 그는 긴장이 풀린 까닭인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같이 일하게 돼서 반갑군.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민우입니다. 우민우요. 감사합니다!”
“뭐 조금 불미스러운 과거가 있었지만, 원래 이 쪽 일 피아 구분이 좀 모호하니까 이해해.”
민우는 못마땅한지 살짝 부자연스런 미소를 지었으나,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 자비로운 행동에 따라 이블 포인트가 1점 감소했습니다.
- 이블 포인트 : 77 (-1)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추후 민우가 겁에 질려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도망간다고 해도 다른 일 알아보면 된다.’
☆ ☆ ☆
칼콘과 지훈은 마감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밤을 샌 까닭에 잠이 잘 와, 오는 동안 지루하지는 않았다.
우페스는 다음 장날이 8일 후라고 알려준 뒤,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그나저나 우민우는 어디 살길 래 안 보이는 거지?’
만약 가까운 곳에 살았다면 같은 버스를 타고 왔어야 했거늘,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꽤 먼 곳에 산다는 뜻이었다.
지금 지훈이 있는 서울 개척지는 동구와 서구로 나눠져 있으니, 서구에 살 수도 있었고 조금 멀리 있다고 해도 가장 가까운 대만 개척지가 최대였다.
‘뭐 전화만 연결되면 위치면 상관없겠지.’
“그래서, 다음 일은 정말 만드라고라 캐러 가는 거야?”
생각하고 있자니 칼콘이 쑥 끼어들었다.
“연락만 되면 그거 해야지. 안되면 다른 일 찾아보고.”
아직 결정된 사안은 없었기에, 나중에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말한 뒤 헤어졌다.
☆ ☆ ☆
“나왔다.”
집에 도착하자 지현이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기상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으나 인기척에 깼나 보다.
“늦게 왔네.”
“그냥 이것저것 하다보니까 좀 늦었어.”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아무리 초여름이라곤 하나 아직 밤에는 춥다. 곧 이상한 짓을 했더라도 환기하진 않았을 테지.
다행히 의심스런 냄새는 없었다.
“아~! 안했다고.”
지현이 눈치를 챘는지 사납게 소리쳤다.
행동을 읽혔기 때문인지 지훈이 살짝 깨갱했다.
“누가 뭐래?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의심했잖아!”
“전과가 있으니까 그렇지, 이 기집애야!”
지현은 뭔가 불만인 듯 도끼눈을 했으나, 그나마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게 뭐야?”
배낭에서 약과 함께 절인 과일이 나오자 지현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먹을 거야?”
“설탕 넣고 복숭아 절인 거. 그거나 퍼먹어.”
지현은 신이 난 어린애처럼 달려와 통을 받아갔다.
“그리고 멜로나 단종 된지가 언젠데 그런 걸 사오래? 여기가 아직도 서울로 보이냐?”
“아 답답한 양반아, 올 때 맛있는 거 사오란 말이었어.”
지현은 입안에 복숭아를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간혹 보급품으로 비스킷이나 초코바가 나오긴 했지만 뻑뻑해서 맛은 없었다.
“많이 먹고 살이나 쪄라.”
“뭐래!”
“이 년이 오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악! 악! 잘못했어!”
지훈이 꿀밤을 한 대 먹이려 하자, 지현은 숟가락 든 손 으로 애써 머리를 감쌌다.
“네윔톨 사왔으니까 약도 거르지 말고 꼬박꼬박 먹어. 이번에 돈 좀 크게 들어와서 아낄 필요 없다.”
지현은 눈을 빛내며 얼마나 들어왔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진 않았다.
“나 잘 테니까, 오늘 집주인한테 가서 월세 좀 내고와라. 그리고 남은 건 용돈하고.”
일부러 밀린 월세를 내고도 꽤 남는 돈을 쥐어줬다.
“오빠, 나 그럼 돈 내고 영화 좀 보고와도 돼?”
“사내질만 안 하면.”
“아, 진짜! 그만 해라?”
순간 지현이 몇 번 하지도 않은 도박이랑 계집질로 사골을 끓였던 게 생각나 살짝 울컥했으나, 그만뒀다.
애랑 싸워서 뭐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