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으로의 활로 -->
‘뭐했다고 능력치가 올라. 티어 업 해야만 오르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이블 포인트는 왜 또 낮아져?'
사실 이블 포인트를 생각했다면 저 양아치들을 그냥 보내줘야 했지만 잠시 까맣게 잊고 있던 지훈이었다.
본디 사람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고, 무의식중에 나오는 행동 관성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도리어 이블 포인트가 낮아졌다니 신기할 수밖에.
- 레벨 업 외에도 사용자님의 행동에 따라 몇몇 수치가 증감하기도 합니다.
근력 수치는 아마 운동 및 기타 몸 상태에 따라 증가 혹은 감소하는 모양이었다.
지훈은 앞으로 틈틈이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또한 이블 포인트는 보편적인 도덕적 잣대에 의해 판단됩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사람 두들겼는데 그게 왜 착한일인데?'
포인트가 낮아져 다행이긴 했지만, 증감의 원인을 제대로 알아둬야 했기에 되물었다.
- 기본적으로 사람을 폭행하는 것은 악한 행위이나, 만약 저들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다른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방법은 잘못됐으나 결과적으론 다른 피해자의 발생을 막았으니 해당 폭력은 선한 행위로 간주됐습니다.
설명으로 보건데 이블 포인트의 등락은 일차원적인 개념이 아닌, 결과와 과정 그리고 동기 같은 기타 요소까지 모조리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보.'
[정보]
이름 : 김지훈
이블 포인트 : 74 (-1)
근력 : E 등급 (15) (+1)
소거까지 남은 포인트는 16.
자칫 잘못하면 바로 저승행이라 생각하니 심장이 쫄깃했다.
'성인 흉내 따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반지를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겠군.’
지훈은 한숨을 푹 내쉬곤, 쓰러져 있는 양아치들을 한 곳에 모았다.
“앞으로 이런 일 하지 마라. 알겠냐?”
그 중 정신이 붙어있는 녀석들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지훈은 녀석들의 지갑을 모조리 뺏어 십 원 한 장 남기지 않고 탈탈 털곤, 옷은 전부 벗겨 적당한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아마 알몸으로 새벽거리를 배회해야 하는 꼴이 됐으니, 고생 좀 하리라.
☆ ☆ ☆
집에 돌아온 후 푹 쉰 뒤 앞으로의 활로를 생각했다.
비록 각성자가 됐다곤 하나, 범죄 전과 때문에 대형 길드엔 들어갈 수 없는 상황. 결국 남은 건 지금처럼 더러운 일을 하거나, 혼자서 팀을 꾸려야 하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블 포인트까지 신경 쓴다면 남은 건 하나.
무조건 혼자서 팀을 꾸려야만 했다.
말은 쉬웠지만 정작 뭘 해야 할지 생각하니 막막했다.
'일단 각성자 등록을 한 뒤 예방 접종부터 맞자.'
등록이 필수는 아니었으나, 비등록 상태로 범죄 목격자 혹은 증인으로 연루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예방 접종 역시 비싼 돈 내며 받아야 하니, 여러모로 따져도 받는 게 이득이었다.
그 이후엔 장비와 팀원이 필요했다.
사실 위험한 일 하는 거 아니고서야 직접적으로 몬스터와 몸을 부딪칠 일은 없을 테니 헌팅을 나가서는 문제가 없겠지만… 요는 경쟁자 혹은 강도였다.
몇몇 헌팅에 나가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나, 강도들은 전문적으로 헌터들을 털었다.
기껏 물건 다 구해놓고 강도에게 뺏기거나 살해당한다면? 안하느니만 못했다.
‘장비는 잡일 조금만 더 해서 마련한다 치고. 동료는?’
칼콘 말고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뒷골목 일 하며 아는 얼굴은 많았으나, 그 중 대부분은 척을 진 상태였다.
같이 일하자고 제안해 봐야 등에 칼밖에 날아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프로 용병을 고용하자니 돈이 문제였다.
결국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뭐 그림의 떡도 아니고, 젠장. 한동안은 여태까지 했던 일이나 계속해야겠군.'
이블 포인트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일 터.
고생길이 훤했다.
'그러고 보니 석중 할배가 땅굴잽이 일이 있다고 했던가.'
밀수는 거의 뇌물을 증여해 빠르게 통과하는 게 대부분이기에, 이블 포인트가 깎일 가능성도 낮았다.
지훈은 대충 일어나 몸단장을 하곤 전화기를 들었다.
휴대폰이 없는 지훈에게 있어서 유일한 연결 수단이었다.
뚜르르, 하고 연결음이 몇 번.
“킁… 누구?”
자다 일어났는지 수화기 너머로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저녁인데 언제까지 잘 생각이야. 이제 움직여야지.”
“지금 6시라고. 왜 벌써부터 전화를 해. 누구 급하게 죽여야 할 놈이라도 있어?”
“딱히. 일 하기 전에 할 말 있다. 1시간 후 시체 구덩이에서 보지.”
수화기 너머로 뭐라 뭐라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끊어버렸다.
한창 바쁠 저녁시간이었던 만큼, 시체 구덩이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단순 술손님부터 관광객, 용병, 정보 상인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지훈은 가까운 바에 앉아 주인과 목례한 뒤 맥주를 한 병 시켰다. 혼자 맥주를 홀짝이고 있자니, 쿵쿵 소리가 나며 칼콘이 들어왔다.
“왔어. 급하게 부른 이유가 뭔데?”
“그냥 심심해서.”
칼콘은 자리에 앉아 고양이 사료에 소젖(우유)를 주문했다.
“진짜 심심해서 부른 건가?”
“그냥 저냥 할 말도 있고.”
칼콘은 별 일이라는 듯 어깨만 으쓱이곤, 소젖 위에 둥둥 떠 있는 고양이 사료를 숟가락을 푹 퍼서 입에 넣었다.
보기만 해도 고양이 사료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기에, 비위가 상했다.
“맛있냐?”
“별미야. 영양소도 풍부하고 근육에도 좋아.”
조폭들도 몸을 불리기 위해 개 사료를 먹는다고 했던가?
성장과 육체 유지에만 초점을 맞춘 음식이라 몸에 좋거니와 가격도 싸겠지만… 그렇다고 즐겨 먹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종족이 다르니 입맛도 다를 터라 굳이 걸고넘어지진 않았다.
“너 키랑 몸무게가 몇이냐?”
“190에 108.”
굉장한 체구였다.
거기다 지방이 많은 게 아닌 근육만 가득한 체형이니 저 무게 대부분이 근육이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힘도 세겠지. 한 번 더 확인이나 해볼까.'
지훈이 살짝 미소 지었다.
“이봐, 술 값 걸고 팔씨름 내기 해 볼 생각 없나?”
칼콘이 고양이 사료를 씹으며 한 쪽 눈썹만 비틀었다.
“진심이야? 내가 양껏 먹으면 엄청 나올 텐데?”
체급은 둘째 치고 종족 자체가 달랐다.
원숭이랑 고릴라가 씨름을 하는 꼴이랄까?
“왜. 후달리냐?”
“허허허허. 후달려? 테이블 가져와!”
옆에서 구경하던 손님 하나가 자리를 치운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왔다.
칼콘과 지훈은 마주보로 나란히 앉았다.
- 이봐, 뭔데. 뭔데.
- 김지훈이랑 칼콘이 한 판 한다는 군!
- 워, 아무리 잔뼈 굵은 지훈이라도 칼콘한텐 안될걸?
단순한 인간과 오크의 힘겨루기라면 오크가 이길게 분명했다. 물론 각성 여부를 제외했을 때 말이다.
“준비됐어? 슬슬 시작해 볼까. 따~라라란~ 쿵작짝….”
“지고 나서 무르자고 하지나 마라, 칼콘.”
누군가 외친 시작소리를 신호로, 지훈과 칼콘의 팔이 동시에 부풀어 올랐다.
팽팽한 신경전!
“익!?”
너무나도 쉬운 승리를 예상했던 건지 칼콘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그 등등한 기세는 다 어디가 갖다 버렸냐?”
지훈이 살살 긁자, 칼콘이 왼 손으로 테이블을 거세게 누르며 전력을 다하길 시작했다.
마치 벽이 밀려오듯 거대한 힘이 지훈을 짓눌렀다!
‘미친. 힘이 셀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이 정도였어?’
여태껏 칼콘이 누군가를 때리면 픽픽 쓰러지는 것만 보곤 내심 힘이 세구나 했었다.
이렇게 직접 맞대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질 정도는 아니었다.
꾸욱!
지훈도 왼 손으로 테이블을 세게 누르며 온 힘을 팔에 집중했다.
부들부들.
이번엔 지훈의 팔이 칼콘을 밀어냈다!
지훈은 그 기세를 잃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그렇게 칼콘의 손이 테이블에 닿으려는 순간…!
쩍!
“어?”
“꺽?”
테이블이 두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와아아아아!
구경꾼들의 환호성에 섞인 주인의 비명이 들렸다.
“뭐야? 지훈 힘이 이렇게 셌었어?”
“아니. 전혀. 나는 근육 같은 거 전혀 키운 적 없다.”
칼콘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흠… 나 각성했다.”
“경사네. 근데 갑자기 각성이라니 뜬금없지 않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연 각성을 하던 강제 각성을 하던 각성자에겐 약 한 달에 걸쳐 징조가 보인다.
슬슬 앓는다던지 이상하게 잠이 하나도 오질 않는다던지 식욕이 왕성하던지 하는 것들이었다.
지훈에겐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이상한 점을 하나 들자면 근래에 들어 술을 물처럼 마셨다는 것 정도?
“뭐야. 술 많이 먹고 각성한 거야?”
칼콘의 물음에 지훈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여기서 술 잔뜩 먹으면 각성할 수 있단다!
- 여기 술 줘! 술!
순식간에 가게 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지훈은 적당히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말을 흐렸다.
“뭐 그렇다고 치자.”
칼콘을 믿지 못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잘못 새어나갔다간 아닌 밤중에 칼을 받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끄러운 틈을 타 지훈이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너 나랑 같이 헌팅할 생각 있냐?”
“헌팅? 갑작스럽네.”
“이제 각성도 했고, 큰물로 갈 생각이야. 위험한 일이니까 강요하진 않아.”
칼콘은 잠시 머리를 긁적였으나, 이내 승낙했다.
“난 괜찮아. 어차피 네게 목숨 빚진 이후로 난 너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거든.”
꽤 오래 전.
칼콘이 막 개척지로 이주했을 때 이종 포비아에게 죽을 뻔 했던 걸 지훈이 구해줬던 적이 있었다. 이후 칼콘은 생명을 빚졌다며 졸졸 따라다녔다.
“그건 잊어버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야.”
“뭐 어때? 중요한건 네가 내 목숨을 구했다는 거지.”
지훈은 슬쩍 고개를 돌리곤 입맛을 다셨다.
“고맙다.”
“당연한 건데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