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치 못한 방문자 -->
“왔어?”
집에 도착하자 지현이 까트를 씹고 있었다.
“말하는 꼬라지 봐. 동네 개가 지나 가냐?”
“기분 잡치게 왜 오자마자 시비야.”
“됐다. 말을 말자. 밥은 먹었냐?”
지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 씹으면 배 안고파서 괜찮아.”
까트는 옅은 진통과 진정 효과가 있는 반면 사소한 부작용이 있었다. 바로 식욕 저하와 나태함이었다.
아마 배가 고프지도 않고, 차리기도 귀찮으니 먹지 않은 모양이다.
“좀 먹어라. 그러다 또 아프면 어쩌려고?”
“꼬우면 해주던가.”
순간 화딱지가 나서 한 마디 하려다 말았다.
상대는 환자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식사를 준비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근데 까트는 어디서 구했어? 요즘 단속 심하잖아.”
“석중 할배.”
“돈은? 또 도박했어?”
저번에도 말했듯 도박은 끊은 지 한참 됐다.
하우스 경비로 일하며 딸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도박 끊었다고 몇 번을 말해. 그리고 계집질도 안 해.”
“그럼 도대체 뭘 해서 돈 벌었는데? 사람이라도 죽였어?”
사람을 죽였냐는 말에 덜컥거렸다.
어제는 아니어도 분명 근래에 누구 죽이긴 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메뉴는 보급용 채소가 들어간 야채 죽으로 정했다.
맘 같아선 좀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지만, 식량 인플레 때문에 가격이 만만찮아 어쩔 수 없었다.
약 값이랑 월세만으로도 사정이 빠듯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식비를 줄여야만 했다.
‘이제 각성자가 됐으니, 벌이가 조금 더 나아질 거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생각을 하며 지현을 쳐다봤다.
“뭘 그렇게 봐.”
“아니, 그냥.”
한 동안 식기 소리와, 멀찍이서 라디오 소리만 들렸다.
“오빠.”
“왜.”
“음… 어, 이거 맛있네.”
지현이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뭐. 용돈 떨어졌냐?”
“미안해.”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지훈의 눈이 초승달마냥 휘었다.
“요즘 너무 심한 말 한 것 같아. 아프고, 힘든데…. 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오빠는 항상 밤에 나돌아 다니니까 속상해서 그랬어. 내가 잘못했어.”
굉장히 오래간만에 듣는 사과.
그간 쌓였던 감정들이 사르르 녹는 것을 느꼈지만, 지훈은 부끄러웠기에 표현하진 않았다.
“무섭게 왜 그러냐.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빨리 약 먹어야겠다.”
“사람이 사과하는데 그게 할 말이야?”
지현이 얼굴을 찡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제야 지훈은 조금 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좀 정상 같네. 나 좀 잘 테니까 깨우지 마라. 밤이나 새벽에 일어날 거야.”
“그러던가. 나 좀 밖에 나갔다 온다. 돈 좀 가져가도 돼?”
지훈은 머릿속으로 돈 계산을 했다.
이번 달 집세랑 약 값, 그리고 남은 돈으로 식비를 대면 딱 맞아 떨어지는 돈이었다.
빠듯했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훈은 이제 각성자다.
저 정도 지출은 상관없을 것 같았다.
“가서 영양가 있는 음식 좀 사먹어. 근데 밖에 나가도 되겠어? 오늘 아파 보이던데.”
“괜찮을 것 같아.”
지훈은 그런 지현을 배웅하곤 이불 위에 몸을 뉘였다.
‘진짜 각성자가 된 건가. 그렇게 되고 싶었는데, 정작 되니까 별 감흥이 없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인 까닭인지 몸이 녹아드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 ☆ ☆
-봄에 이어 … … 무덤을 파헤친 … … 경찰 당국은 … 강력 범죄 … … 가디언에게 의탁 … ….
얼마나 잤을까.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드문드문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몇 시지.’
저녁 6시. 점심 쯤 누웠으니 그럭저럭 피곤을 떨쳐낼 만큼은 잔 거였다.
지훈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폈다.
어제 강도 높은 노동을 한지라 몸 여기저기가 걸려야 했지만 그런 거 전혀 없이 상쾌하기만 했다.
각성의 여파였다.
‘확실히 각성하니까 몸이 달라지네. 그나저나 저거 무슨 뉴스야?’
잠결에 들은 내용인지라 정확히 알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대충 들어보니 어제 관을 딴 게 방송을 탄 모양이었다.
‘가디언은 개뿔. 바쁜 놈들이 뭐한다고 나 같은 잡범을 쫓아?'
수배됐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지훈은 콧방귀만 꼈다.
이 도시. 정확하겐 서울 포탈 너머에 있는 개척지는 치안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관광객이 아무것도 모르고 야밤에 나돌아 다녔다간, 10분 만에 강도-강간-살인으로 피해자 올림픽 그랜드 슬램을 달성할 수 있는 도시였다.
이런 강력 범죄가 넘쳐나는 도시에서 도대체 뭐 한다고 도굴꾼 따윌 잡는다고 가디언까지 파견한단 말인가?
녀석들은 강력 범죄 처리하기도 바빴다.
아마 저건 안심하라고 내보내는 전시용 뉴스리라.
언제까지나 계속 누워 있을 순 없었으므로 대충 일어나 몸단장을 하곤 끼니를 때웠다.
지현은 외출한 후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 놈의 지지배는 여태 뭘 하고 싸돌아다니는 거야.’
들어오면 한 소리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전화기로 향하려는 찰나, 눈에 이상한 쪽지 한 장이 들어왔다.
누군가 문틈 아래로 집어넣은 듯, 신발 사이에 껴있었다.
서권곽 무덤 네가 팠지?
종이를 불로 지져서 만든 듯 글자 주변에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지훈은 그걸 보자마자 마치 등 뒤로 누군가가 칼이라도 대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씨발… 이거 뭐야. 누가 보낸 거야.’
혀에 시멘트를 머금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재 이 도시는 만성 전기 부족에 허덕이는 터라 CCTV가 없음은 물론, 치안 병력도 모자라 경범죄는 방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공권력일 가능성은 적었다.
‘애초에 공권력이었으면 자고 있을 때 수갑 채웠을 거다. 누구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무덤 주인의 지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쪽지의 발신인을 알아봐야 했기에 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나가기 직전 지현에게 메모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은 모텔에서 자라.
혹시라도 부재중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상대가 지훈을 찾아다녔다면 분명 뒷골목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을 터. 그럼 굳이 정보상을 찾아갈 필요도 없이 석중에게 가는 게 빨랐다.
“돈 벌어서 좀 쉴 줄 알았드마. 벌써 왔니? 가서 여자라도 안으면서 회포라도 풀지.”
석중은 육포 비스므리한 것을 씹으며 농을 건넸다.
“뭘 그렇게 맛있게 먹소?”
“오크 고환 말린 것. 이게 남자에 그래 좋다 하드마.”
순간 칼콘 생각이 나며 사타구니가 아려왔다.
“또라이도 아니고 그런 걸 왜 먹소, 도대체?”
“니는 아침마다 펄떡펄떡 하이 그런 말 하는 기지. 뭔 짓을 해도 고추에 반응이 없으면 무슨 기분인지 아니?”
정신 나간 늙은이랑 더 대화를 했다간 이쪽도 맛이 갈 것 같았기에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나저나 혹시 나 찾는 사람 없었소?”
석중은 잠시 반 쯤 벗겨진 머리를 긁었다.
“그러고 오늘 점심에 양키 하나 왔었디. 머리 붉고 왼쪽 얼굴에 화상 있는 여자. 근데 그게 와?”
“그 년 우리 집까지 찾아왔소.”
“관 딴 거 걸렸구나? 거 보래 내 뭐라 했니. 남의 관 따재끼다 목 따이는 기라고. 거 잘 됐네, 이 벌그지 쓰애끼야.”
“할배. 나 지금 진지하니까 농담 그만두쇼.”
“쯧. 별 말 없더라. 언제 한 번 찾아간다고 했드나, 뭐라나? 그래 전해 달라 했디.”
뭔가 이상했다.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간다는 말 먼저 하다니?
“잠깐. 관 따기 한 사람이 누구냐곤 묻지 않았소?”
“읎디. 이 쓰애끼, 내가 그 정도 사람으로밖에 안보이니!”
아무리 거래관계라고 한들 명분이나 이익 없이 상대를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는 게 뒷골목의 불문율이었다.
‘그럼 도대체 내가 관 딴 건 어떻게 안거야?’
“그 년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시체 구덩이 가보라. 그 놈이면 알그다.”
시체 구덩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이름과 달리 술집이었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장소인데, 거대 범죄조직 언더 다크와 접점이 있음은 물론, 기타 불법적인 거래나 계약이 체결되는 장소였다.
그만큼 뒷골목의 소문이나 정보는 저 곳에 모인다고 봐도 무방했다.
“할배, 정보 고맙소. 나 이제 가봐야겠소.”
“꼴 보이 길가다 객사할 것 같디. 조심하고 다니라.”
“개소리 집어치우고, 오크 부랄이나 마저 드쇼.”
☆ ☆ ☆
시체 구덩이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중간에 있었다.
경계에 딱 걸친 모습이, 마치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 같았다.
“오~ 지훈. 오래간만!”
“생맥으로 한 잔 줘.”
다짜고짜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예의상 맥주를 시켰다.
주인은 능숙하게 맥주를 내려놓곤 지훈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 방송도 타고 좋겠어. 어떻게 이장 사업은 잘 됐어?
- 듣는 귀 많은데 헛소리 그만 하지. 내가 잡혀가서 혓바닥 나불대면 너도 좋을 거 하나 없을 텐데?
“역시는 역시 역시군. 넌 유머가 너무 부족해.”
“만화 대사 같은 것 좀 따라하지 마라. 오글거린다.”
“오, 너도 아는구나?”
주인이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달콤 쌉싸름했다.
주당들, 그러니까 지훈 같은 사람들이 간혹 ‘술은 달다.’ 하는 농을 던지긴 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진짜로 달았다.
“뭐야, 이거 왜 달아?”
“세드산 보리야. 골든 하플링들이 키운 보리로 만들었지.”
“이런 빌어먹을. 내 주머니 사정 알면서 이딴 물건을 가져와? 도로 가져가.”
일반 맥주는 그럭저럭 사먹을 만 했지만, 세드산 맥주는 얘기가 달랐다.
게다가 골든 하플링이면 농업 쪽으로 둘째가면 서러울 종족이 아니던가.
당장 저 맥주를 지구로 가져다 팔면 가격이 어마무시 할거였다. 그러니 포탈 넘기 전이라 세금 떼고 계산한다고 해도 한 잔에 양주 뺨따구 후려 칠 정도로 비쌀 게 분명했다.
지훈은 돈 절대 못 낸다며 배짱을 부렸다.
“그냥 들여온 기념으로 한 번 꺼내본 거야. 돈은 됐어.”
“이런 걸 공짜로 준다? 뒤쪽 수입이 좀 짭짤하신가봐?”
“뭐 지훈 같은 사람들이 도와주니 편하지. 저번에 엘프 건은 고마웠어.”
엘프라는 말에 지훈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 녀석 어떻게 됐지? 암놈 같았는데.”
주인은 갑자기 그건 갑자기 왜 궁금하냐고 물었지만, 지훈은 대답만 재촉했다.
“도축 됐을 걸. 요즘 암시장에서 엘프 고기 먹어보려고 환장한 놈들 많아.”
“쯧.”
“그나저나, 오늘 바쁘지 않으면 일 좀 도와주지? 언더 다크 쪽에서 좋은 일거리가 하나 들어왔어“
“될 수 있으면 그 녀석들이랑은 엮이고 싫다고 했잖아.”
“왜~ 벌이 좋잖아.”
“돈이 급하면 모를까 제정신 박혀 있을 때는 될 수 있으면 그 녀석들과는 거래트기 싫다. 그리고 오늘은 일 때문에 온 것도 아니고.”
“호오, 그럼 무슨 일로 왔는데?”
지훈은 맥주를 홀짝거리곤 말했다.
“혹시 나 찾는 사람은 없었나?”
“오늘 오후에 한 명 있었어.”
불길한 예상이 점점 현실이 되어갔다.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뭐라고 했는데?”
“몰라, 지훈 혹시 반지 같은 거 훔쳤어? 잘 가지고 있으라고 하던데.”
“혹시 관 땄냐고 물어보진 않던가?”
“전혀. 물어봤다고 해도 내가 대답해 줬을 리가 없잖아?”
'도대체 내가 관 딴 건 어떻게 안거야?'
석중도 아니고, 시체 구덩이 주인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알아낸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저 둘을 제외하고도 지훈이 간혹 도굴을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있었으나, 그들은 일반인이 함부로 찾아갈 수 없는 위험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단 녀석은 이 반지에 대해 알고 있다.’
저건 반지의 전 주인과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얘기였다.
‘언행으로 보건데 내가 반지를 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보복이 목적이라면 습격했어도 됐을 건데 왜 그런 말을 남긴 거지?’
정보가 더 필요했다.
‘골통 깨지겠네.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