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과몰입공금]
“양아버지라고요?”
자신이 후작가의 영애라니. 별안간 신분이 바뀌어 얼떨떨해진 라티시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시나. 안드레아는 느긋하게 순진해빠진 라티시아의 말을 기다렸다.
“…그럼,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할까요?”
“굳이.”
“네….”
어쩐지 풀이 죽은 라티시아에게 안드레아가 차근히 설명했다. 어디까지나 혼인을 위한 형식적인 거라고.
“하지만….”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며 무어라고 중얼거리려던 라티시아의 입술이 그대로 굳게 닫혔다. 이럴 때마다 안드레아의 속은 탁한 연기로 가득 찬 것처럼 답답했다. 정말 작고 연약한 새처럼 여간 다루기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말해, 어서.”
“주인님과 결혼해도 될지… 제가, 감히.”
“당신.”
“…….”
“주인님이라는 호칭부터 집어치워.”
하지만 주인님이 익숙한걸. 당신, 이라는 말은 아무리 해도 입에 붙지 않는다. 노예에서 공작 부인이라니. 너무 변화가 급격해 라티시아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눈치가 보이고 별것 아닌 일에도 벌벌 떨렸다.
“네 아들도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라고 할 텐가.”
“아들인지 딸인지 아직 모르잖아요.”
고개를 저으면서도 라티시아가 소심하게 항변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단호했다. 칼리드나스 가문의 첫째는 모두 사내아이였다. 그도, 그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조부의 아버지도. 또 대부분 외동이었다.
“그러니 둘째는 없어, 라티시아.”
“네….”
주인님은 아이를 싫어하는 모양이다, 라티시아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안드레아의 음험한 시선 같은 건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 자체에 대한 안드레아의 감정은 무색에 가까웠다. 그저 탐탁지 않았다. 라티시아의 일부를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가 뿌린 씨앗이 움트는 것임에도 불쾌했다.
그래도 라티시아가 조금 더 응석받이가 된 건 좋았다. 아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의 눈빛도 좋았다. 한 가지 궁금증을 해결하리란 기대도 있었다.
젖에서도 포도 맛이 날까.
“왜….”
안드레아의 시선이 집요하게 가슴의 정점에 꽂힌 것을 깨달은 라티시아가 저도 모르게 옷을 여몄다. 임신하고 나서 생긴 눈에 띈 변화중의 하나가 젖꼭지의 색이었다. 좀 더 짙어지고 유륜이 넓어졌다. 안드레아는 풋과실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간다며 농담했지만, 라티시아는 그저 제 몸이 낯설기만 했다.
하긴, 낯선 게 몸뿐이랴. 그래도 라티시아는 제게 주어진 과제에 착실히 임했다. 안드레아와 나란히 주례 앞에 서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눈부시게 하얀 백합에 자잘한 보라색 제비꽃으로 가장자리를 빈틈없이 꾸민 버진로드 끝에 라티시아가 섰다.
요정처럼 아름답다고 입소문이 자자한 신부를 보기 위해 하객들의 목이 기린처럼 길어졌다. 그중에는 대체 얼마나 예쁘기에, 하는 비딱한 시선도 있었다. 대부분은 누엘 후작을 협박하여 라티시아를 후작가의 양녀로 들인 사건에 대해 귀족 전체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고 분개하는 이들이었다.
제게 쏠린 이목을 아는 라티시아는 아무 생각도 않고 그저 발을 한 발 한 발 딛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드레스 자락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다른 걸 신경 쓰다간 그대로 밟고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입을 땐 부담스럽기만 했던 드레스였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침착하자.’
라티시아는 심호흡을 하며 첫발을 내디뎠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래봤자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달린 건 똑같다며 안드레아의 처사를 비난하던 이들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달빛을 엮어 땋은 것 같은 은색 머리카락에 고혹적인 보라색 눈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신비로움이었다.
완전히 홀려버린 하객들의 시선이 라티시아에게 못 박혀 있는 이때, 안드레아의 인내심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 결혼식은 순전히 라티시아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좀 더 당당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렇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라티시아를 눈에 담을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을. 빌어먹을 결혼식 따위가 뭐라고. 누구라도 붙잡아 눈알을 뽑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안드레아는 더는 라티시아의 느린 걸음을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마중 나갔다.
마침내 둘이 나란히 섰을 때야 사람들은 미몽에서 깨어났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라티시아를 귀족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몇몇은 속으로 생각했다. 라티시아처럼 매혹적인 노예를 감당할만한 남자는 안드레아뿐일 거라고.
이처럼 누가 봐도 하나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성혼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 선포되었다. 임신 중인 라티시아의 건강을 생각해 예식이 짧게 진행된 까닭에 피로연은 일찍부터 시작되어 오래도록 이어졌다.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홀로 신방을 지키고 있던 라티시아는 갑자기 문 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못 볼 거라도 본 표정이군.”
안드레아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라티시아를 꼬집었다. 예상은 했지만, 긴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을 상대했음에도 흐트러진 구석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답답하게 목을 죄고 있던 타이를 푸르며 안드레아가 살짝 질책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피곤할 텐데 푹 쉬지 않고 뭐 하고 있었냐는 말에 문득 라티시아의 뺨이 장밋빛으로 붉어졌다.
“첫날밤… 이잖아요.”
조금 의문이긴 했다. 아기까지 가진 마당에 이걸 첫날밤이라고 할 수 있나. 그래도 공식적인 부부가 되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밤인 건 맞으니 라티시아는 당당하기로 했다. 라티시아의 대답이 꽤 의외였던지, 안드레아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첫날밤에 신부의 의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달콤한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며 안드레아가 물었다.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다니, 열과 성을 다해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었다.
“네… 아니, 그보다도….”
거침없이 드레스를 젖히고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안드레아 때문에 라티시아는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래도 용케 퍼붓는 키스 세례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주인님.”
“당신.”
“…네, 당… 신이요….”
“안드레아라고 불러도 좋고.”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까마득한데 이름을 부르라니. 그런 건 꿈에서도 못할 일이었다. 잔뜩 굳어 얼어버린 라티시아의 뺨을 따스한 키스로 녹이며 안드레아가 채근했다.
“물어볼 거 있다며.”
“네, 그게, 저….”
슬쩍 눈치를 살핀 라티시아가 별안간 눈을 꾹 감고 내질렀다.
“저를!”
“…….”
“사랑하시나요….”
패기 있게 꺼낸 것치곤 마무리가 약했다. 그래서인지 돌아온 대답도 영 시원찮았다.
“물론.”
“진짜로요.”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 생각에 골몰하던 안드레아는, 서운한 기색이 다분히 묻어나는 라티시아의 확인에 하던 것을 멈췄다.
“진짜가 아니면 뭔데.”
그의 품에 단단히 안긴 라티시아가 차마 더 묻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조금 전까지 그가 빨고 있던 가슴의 타액이 증발된 자리가 차게 식어 선득했다. 덕분에 심장까지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괜히 물어봤나.
질문이 너무 늦은 것 같긴 했다. 이런 질문은 아무리 늦어도 혼인 서약 전에 했어야 했다고. 사랑이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직접 튀어나온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대답을 듣긴 했으니까, 라티시아는 그만 안드레아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를 안은 팔은 더욱 단단하게 가녀린 몸을 죄어왔다.
“너는.”
“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어서.”
이거 꽤 난감한 질문이었구나.
라티시아는 질문을 역으로 돌려받은 뒤에야 안드레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나 쑥스럽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고백이라니.
“그게….”
좀처럼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않는 라티시아를, 안드레아가 숨 막힐 듯이 안아왔다. 마치 그녀가 무어라 말하든 답은 정해져있다는 듯이.
그의 새, 그의 여자.
그 정도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래요.”
결정적인 한마디는 쏙 빼놓은 채, 잘도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이런 어설픈 고백만으로도 안드레아는 한시름 놓았다. 그녀를 사슬처럼 꽉 조이던 팔이 슬쩍 느슨해져, 라티시아는 비로소 그가 긴장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사랑한다는 달콤한 속삭임보다 이편이 훨씬 기뻤다.
밀려오는 안도감에 라티시아는 조금 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가 그의 단단한 복부에 부드럽게 비벼졌다. 사타구니가 아플 정도로 자극적이었으나 안드레아는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라티시아의 달콤한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
워낙 가녀려 무사히 아기를 낳을까 걱정을 샀던 라티시아는 순산했다. 안드레아의 말대로 사내아이였다. 안드레아의 눈, 코, 입, 머리카락 색깔을 꼭 빼닮은. 유일하게 라티시아를 닮은 건 순백의 피부뿐이었다. 그마저도 아버지의 냉기 도는 흰 피부를 생각하면 닮았다고 하기 애매했지만.
한마디로 칼리드나스 가의 거푸집에서 찍어냈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라티시아는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무사히 제게 와준 아기가 그저 사랑스럽고 대견했다. 라티시아는 종일 아기의 통통하고 보드라운 살결을 따라 어루만지며 행복해했다. 이따금 눈물을 글썽이면서, 대부분은 가슴이 터질 듯 차오르는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런 라티시아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건 안드레아에게 꽤 즐거운 일이었으나 그녀를 독점하지 못하는 불만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나마 안드레아를 인내하게 만드는 건 이제나저제나 그녀의 가슴을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안 돼요.”
라티시아는 고대하는 눈빛으로 마주 앉아 있는 안드레아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젖먹이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어이없게도, 그녀의 남편은 아기의 주식을 탐내고 있었다.
“정말, 안 돼요.”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그녀와 아기를 번갈아보는 안드레아에게, 라티시아가 다시 한번 선을 그었다.
“그러지… 말아요.”
어쩐지 억울해져, 라티시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언젠가 저 남자가 누군가를 부러워할 일이 있을까, 잠시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럴 상대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이제야 답을 찾았다. 안드레아는 진심으로 자신의 아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작 젖, 그 한 가지 이유로.
밀어내는 그녀를 보는 안드레아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묻어났지만, 라티시아는 거듭 못 박았다.
“알죠? 아기 거예요.”
안드레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모성은 날카로웠다. 강인함마저 느껴지는 라티시아의 태도에 안드레아는 순순히 물러났다. 젖의 맛이야 냄새만 맡아도 충분히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아기에게서 풍겨오는 달큼한 젖비린내에는 분명히 포도향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경고 한마디 정도는 남겨뒀다.
“어릴 때부터 너무 단맛에 길들여지면 좋지 않아.”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라티시아가 눈을 흘겼다. 이 또한 못 보던 모습이어서, 안드레아는 기분 좋게 넘겼다.
“유모를 구해놓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꼭 아기에게 라티시아를 빼앗겨서만은 아니었다. 아기는 유모에게 맡기고 산모는 쉬면서 조리하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라티시아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했다.
“그건 싫, 싫어요. 안 돼요, 제발!”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라티시아에게는 동물적인 감각이 살아 있었다. 때문에 아기를 떼어놓는 게 팔다리를 자르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원망 가득한 눈초리는 안드레아에게 테오도르 뷔테르가 있었을 당시를 떠올리게 했다. 급격하게 일어난 짜증을 억누르며 안드레아가 타일렀다.
“평생 골골거리고 싶은 건가? 그 꼴은 내가 못 봐.”
그예 라티시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기분을 느꼈는지, 잘만 젖을 빨던 아기도 별안간 빽빽 울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울어대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안드레아의 코에 달콤한 포도향이 스쳤다.
문득 안드레아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라티시아도 진정시키고 자신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방안이.
“좋아, 네 뜻을 따르도록 하지. 한 가지만 지켜준다면….”
“그게 뭔데요?”
라티시아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 너머로 악마처럼 미소 짓고 있는 안드레아가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안드레아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라티시아가 허락하자, 안드레아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녀의 가슴을 탐했다.
쭙, 추릅, 즈으읍….
욕심껏 뽀얀 가슴을 움켜쥔 안드레아는 통통한 젖꼭지를 성에 찰 때까지 빨아들였다. 볼이 움푹 패도록 젖가슴을 물고 있는 모양이 그 어떤 때보다도 외설적이어서, 라티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앙… 하앙!”
아기를 두고 이래도 되는 걸까. 죄책감에 싸인 라티시아와 달리 안드레아는 매우 흡족해 보였다. 설마 모유로 배를 채우려는 걸까. 끝없이 쪽쪽 빨아대는 안드레아를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정이었다.
“그만, 아, 응!”
아기에게 먹일 게 부족할까 걱정에 잠긴 라티시아가 억지로 머리통을 떼어내려 했지만, 안드레아는 그녀를 가볍게 제압하고 더욱 악착스레 달라붙었다.
라티시아의 기우는 괜한 것이 아니어서, 정작 아기에게 젖을 물릴 시간이 되었을 땐 양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기진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기는 자연스럽게 유모에게 넘어갔다. 라티시아는 다시 한번 원망 섞인 시선을 안드레아에게 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미움은 받았지만, 안드레아에게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까짓 눈총쯤이야 얼마든지 받아주지. 여유롭게 웃으며 안드레아는 라티시아의 무르익은 여체가 주는 쾌감을 만끽했다. 다시금 라티시아를 독점하게 된 이 순간이 그저 기꺼웠다.
라티시아가 아기에게 집중하는 동안 완전히 그녀의 관심 밖에 있던 안드레아는 철저한 소외감을 맛봤다.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던 시간. 얼마나 라티시아의 회복을 바랐던가?
그의 새는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어야 한다. 깃털 하나조차도. 영원히. 안드레아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말 그럴 줄로만 알았다.
그리 머지않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는.
***
사랑하는 여자가 제 아이를 배서 부른 배로 뒤뚱거리는 뒷모습처럼 흐뭇한 광경이 또 있을까. 그렇다 한들 어떤 경우에도 예외는 있는 법. 안드레아의 예외는 라티시아였다.
몹시도 못마땅한 눈길로 라티시아를 쫓던 안드레아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질문을 툭 던졌다.
“왜 자꾸 아이를 가지는 거지?”
그걸 정녕 모른단 말인가. 유하르는 어이없는 속내를 공손한 눈빛 뒤에 감춘 채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야, 하고 또 하니까요. 쉼 없이, 셀 수 없이, 아주 많이.’
그렇게 해대는데 임신이 안 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라티시아의 몸이 가녀렸기에 망정이지 건실한 여자 같았으면 벌써 열 손가락을 채우고도 남음직했다.
그러나 유하르의 입바른 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혀끝을 맴돌다 마른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요즘 왜 이렇게 직언이 하고 싶은지. 겨우 남작의 작위를 얻었을 뿐인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 아닐까. 유하르는 괜히 복부를 쓰다듬어보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니 잘도 이런 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거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미 시큰둥한 안드레아의 귀에는 유하르의 축하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지만. 어쩌겠나.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라티시아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버린 것 같은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를 떠올리면 그가 가진 불만을 이해할법하기도 했지만,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안드레아의 귀여운 2세를 보면 공감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라티시아는 정말 요정인걸까. 항상 소녀 같기만 하니.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에 위화감이 들 정도로, 라티시아는 아이 엄마 같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웃는 모습은 더욱더.
“압빠아!”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안드레아에게 뛰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라티시아의 얼굴은 그야말로 활짝 피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안드레아는 아들을 번쩍 안아 들고 환하게 미소 짓는 라티시아에게 느긋하게 다가갔다.
“조금 전에 아기가 또 찼어요! 딸일까요? 딸이면 좋겠는데.”
“글쎄.”
즐거운 표정으로 궁금해하는 라티시아의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안드레아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새장에서 안온하게 재잘대는 새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아니, 바울 체살리에가 했던 말이라 했나.
기억을 더듬던 안드레아는 이내 피식 웃으며 지난 대화를 끄집어내기를 포기했다. 누가 말한 게 무어 대수라고. 정말 중요한 건 이리도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나.
굳이 떠올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당돌하게 고개를 젓던 라티시아가 안드레아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갇힌 새는 울지 않아요.’
그래.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