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과몰입공금]
라이너스까지 끌어들일 마음은 아니었다. 벨리오나에게 그는 아주 자상한 오빠였으므로.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안드레아가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노예를 데리고 있다는 그녀의 고발에도 페를레티 국왕은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노예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하던 것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실망한 벨리오나는 좀 더 치명적인 수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러려면 공모자가 필요했다. 자신처럼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를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벨리오나는 어렵지 않게 올리비아를 떠올렸고, 올리비아는 선뜻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둘의 합심은 계획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안드레아는 감옥에 갇혔고, 라티시아는 홀로 남았다. 그러나 아무리 주인이 없다고 해도 칼리드나스 가는 칼리드나스 가였다. 무방비해진 공작저에서 노예 계집을 빼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거라고 여겼던 벨리오나는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이대로라면 회복한 라이너스가 안드레아의 손을 들어줄 테고, 유유히 풀려난 안드레아는 눈엣가시 같은 노예와 계속해서 희희낙락 지내겠지. 그건 곤란했다. 애초에 안드레아의 사형 따위를 바란 건 아니었다.
벨리오나는 여전히 그와의 혼인을 원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그럼에도 일을 저지른 건 그저 조금 겁을 줄 요량이었다. 왕녀로서의 위신도 세울 겸, 자신을 돼지보다 더럽고 개보다 천한 노예와 같은 선상에 올려놓은 것에 대해 경고를 하기 위해서. 그러나 안드레아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벨리오나는 안드레아를 만나기 위해 시궁창 같은 감옥을 찾았다.
“아직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나요?”
“고귀하신 분께서 어찌 죄인과 혼약을 맺으시려는지.”
안드레아의 조롱에 벨리오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꾹 깨물었다.
“나와, 혼인… 혼인하지 않으면 당신을 구제할 방도가 없어요.”
애원과도 같은 강요에도 안드레아는 일관된 입장을 고수했다.
“귀족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뻔히 살아나갈 걸 아는 자의 태도였다. 벨리오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안드레아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설마 그 천한 것을 사랑하는 건… 아니겠죠?”
이번만큼은 안드레아도 답하지 않았다. 잠시 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낮게 두었을 뿐이었다. 이전에 그에게 들었던 어떤 말보다도 지금의 침묵이 벨리오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정말… 인가요? 노예를, 사랑한다고요?”
안드레아는 벨리오나가 던진 두 글자를 무심코 되뇌었다.
사랑? 사랑.
반복할수록 모호하던 감정의 경계가 뚜렷해졌다. 그런 거였나. 그간 그답지 않았던 짜증과 근원 모를 초조함이. 줄곧 무시하고 있었지만, 결론은 한 가지였다. 머리를 꽉 채우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기분에 호쾌한 웃음소리가 시원하게 터졌다.
“아.”
한참을 웃던 안드레아가 문득 벨리오나를 발견하고 멋쩍게 씩, 웃었다. 그녀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게 분명했다. 완전히 무시당한 벨리오나는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두… 두고 봐요!”
안드레아를 협박하면서도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 벨리오나는 도망치듯 감옥을 벗어났다. 그리곤 무리를 해서라도 천한 노예를 빼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대담하게도, 벨리오나는 공작저의 수색을 허하는 내용의 문서를 위조했다.
라티시아는 순순히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오로지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라티시아는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공작이 곤경에 빠졌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벨리오나 왕녀가 공작의 구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과 달랐지만, 언제나 그렇듯 라티시아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라티시아는 벨리오나 왕녀가 공작을 몹시 사랑하는 만큼 그의 아이를 어쩌지 못할 거라 굳게 믿었다.
“왕녀님, 제발 살려만 주세요. 그럼 죽은 듯이 살게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서, 절대 공작님의 아이라는 걸 밝히지 않을게요.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살려만 주신다면.”
“아… 아이?”
‘제까짓 게 뭔데 감히…!’
벨리오나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렸다. 동시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에 완벽하게 이성을 잃었다. 칼리드나스 공작과 노예 사이의 아이라니,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이물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벨리오나는 자신 대신 손에 피를 묻혀줄 인물을 알고 있었다.
“보기보다 영특한 데가 있구나. 네 말대로 칼리드나스 공작의 사생아가 세상에 공개되는 건 위험하지.”
벨리오나는 애써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데려가주마. 그곳에 숨어있으렴.”
왕녀의 가슴속에 들끓고 있는 악심을 눈치채지 못한 라티시아는 그저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왕녀님! 절대,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살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서글펐지만, 예정된 수순이었다. 라티시아는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갖고 놀다 질리면 언제든 버려질 인형이었다. 질리지 않는다 해도 왕녀와 혼인하면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으므로.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빨리 그 순간이 다가왔을 뿐.
라티시아는 배 속의 아이라도 건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겼다. 아직 배도 납작한 데다가 의사의 말에 따르면 콩알만큼 작지만, 세상 무엇보다 소중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이라는 걸 맺어본 적이 없는 라티시아는 저와 연결된 핏줄이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 벅찼다. 그러니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하나 라티시아의 소박한 소망은 낯익은 풍경이 가까워질수록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직 지하로는 발도 디디지 않았건만, 라티시아에게는 주변을 둘러싼 공기마저 익숙했다. 비밀스럽고, 음험한 기운이 떠도는 공기의 냄새.
평생을 갇혀 있던 지하 감옥의 냄새.
“왕녀님, 살려… 살려주세요!”
라티시아는 필사적으로 왕녀에게 매달렸다. 악귀처럼 달려든 로카디가 습하고 어두침침한 지하 감옥에 넣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싸늘한 바닥에 엎어지면서도, 왕녀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제발, 제발…!”
벨리오나는 라티시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그러곤 우아한 동작으로 라티시아에게 닿았던 자신의 손가락을 꼼꼼히 닦았다. 다 닦은 손수건은 아량이라도 베풀 듯 창살 안으로 던져 넣었다. 오염된 쓰레기란 뜻이었다.
“약속… 약속 하셨잖아요?”
망연한 눈길로 라티시아가 물었다. 눈물로 물든 보랏빛 눈동자가 꽤 마음에 들어서, 벨리오나는 마지막으로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약속대로란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줬으니, 너도 죽은 듯이 살렴.”
할 일을 마친 벨리오나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안드레아와 라티시아, 둘 중 누구에게라도 테오도르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분풀이하길 바라마지 않던 로카디가 즐거운 낯으로 그 뒤를 따랐다.
“제게 저 계집을 처분할 권한을 주십시오.”
“그건 아직… 아직 곤란하다.”
막상 속은 후련했으나, 그래도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반쪽짜리기는 하지만, 칼리드나스의 핏줄인 건 확실하니까. 끓어오르던 분노가 한소끔 가라앉고 나니, 본래 그리 모질지 못한 벨리오나의 마음에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너무 심했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기도, 노예도, 세상의 빛을 보아서는 안 되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벨리오나는, 자연스럽게 책임을 피할 방법을 떠올렸다.
“당분간 물도, 밥도, 주지 말고 지켜보아라.”
그럼 스스로 먹을 것을 거부했다는 해명이 가능했다. 어떻게든 라티시아의 신체를 훼손하려던 로카디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이 위험해 보여, 벨리오나는 감시인을 붙이기로 결심했다.
***
반란죄.
안드레아에게 붙은 죄명이었다. 죄인의 몸이 되다니.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칼리드나스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처음 있는 일이리라.
난생처음 겪는 일에도 안드레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둡고 습한 감옥에서 안드레아는 홀로 고아했다. 하루 한 번 제공되는 끼니를 천천히 음미하며 즐기고, 남는 시간에는 여유로운 자세로 책을 읽고, 규칙적으로 근력을 키웠다. 잘 때조차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안드레아를 보며, 간수들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반역의 죄를 저지른 중죄인이라 당장 내일 아침 목이 효수되어도 이상하지 않으나 간수들은 조심스러웠다. 마음만 먹으면 왕실의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그 칼리드나스다. 오죽하면 왕조가 바뀌어도 칼리드나스는 영원하다는 소리가 있을까.
언제 손바닥 뒤집듯 상황이 뒤집힐지 모르는 일이라서, 간수들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따금 찾아오는 유하르를, 간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눈치껏 들여보내 주었다. 소지품 검사를 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잡다한 문서나 낡은 깃펜 따위가 전부였다. 유하르가 그리 오래 머무르는 것도 아니어서, 그들은 유하르의 방문을 가벼이 여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처음에는 안드레아와 유하르의 동정에 촉각을 기울이던 이들도 하나둘 경계를 늦추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는 꽤 오랜 시간 유하르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공작이 처리해야 할 가문의 일이 오늘따라 많겠거니, 싶었다.
때마침 유하르가 질 좋은 육포와 포도주를 가져다주었기에 간수들은 그것들을 맛보며 잡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깥의 무른 분위기를 계속 살피며 유하르가 긍정했다.
“깃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말씀하신대로였습니다.”
자신이 투옥되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진 라티시아가 벨리오나 왕녀에 의해 다시 노예시장에 갇혀 있다는 첩보를 들은 안드레아는 유하르를 시켜 웬 깃펜의 주인에 대해 알아오라 지시했었다.
“깃펜은 바울 체살리에의 것이 맞았습니다.”
안드레아는 깃펜의 깃 부분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라티시아의 애액이 말라붙어 있는 부분이었다. 라티시아와 함께 감옥에 갇혀 무명의 노예로 지내다 죽음을 맞이한 영감은 페를레티 국왕의 전우이자 직언으로 유명했던 바울 체살리에였다.
“재미있군.”
바울 체살리에는 누구보다 노예제도를 적극 찬성하던 인물이었다. 페를레티 국왕은 바울 체살리에와 궤를 같이 하는 듯하더니 막판에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노예 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그 일로 페를레티 국왕과 완전히 틀어진 바울 체살리에는 그 뒤로 행방이 묘연했다.
“노예시장에 갇혀 있었을 줄이야.”
심상한 안드레아의 어조에 유하르는 침묵을 지켰다. 안드레아는 평온할 때가 가장 무섭다는 걸 경험으로 익히 알았다. 안드레아가 곧 쓰레기통에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깃펜의 주인을 알아보라고 했을 때는 이런 내막이 있을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노예제도를 앞장서서 추진하던 바울 체살리에가 노예가 되어 갇혀 죽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컸다. 바울 체살리에는 본보기로 세상에서 지워졌다. 노예시장이 단순한 암거래 장소가 아니라 국왕의 정적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수단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예시장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앞에서는 그렇게 백성을 위하는 척하더니.’
누구도 노예가 되어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가. 실은 존재 자체를 부정해 반대편에 선 자들을 압살하려는 게 목적이었다니. 노예를 인정하지 않은 이면은 이토록 음험하다. 유하르는 새삼 ‘높은 분’들의 검은 속내를 피부로 느끼고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유하르.”
“네, 말씀하십시오.”
“라이너스를 불러와라.”
“네? 하지만, 왕세자님께선 아직 병상에 계십니다.”
라이너스 왕세자가 의식을 차렸다고는 들었으나, 아직은 거동이 불편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랜 친우인 칼리드나스 공작을 감옥에 내깔겨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의 순진한 믿음에 조소를 날린 안드레아가 쥐고 있던 깃펜을 꺾어 깃을 주머니에 넣은 뒤 나머지 부분을 유하르에게 내밀었다.
“그거면 벌떡 일어나겠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러나 최대한 깍듯하게 부러진 깃펜을 받아든 유하르가 서둘러 문을 나섰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여전히 존재했다.
어째서 페를레티 국왕이 아니라 라이너스 왕세자인지,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는 어째서 라이너스 왕세자가 일어났을 거라고 확신하는지, 둘 사이에 우정 이상의 다른 것이 있는지.
성실한 유하르는 이 모든 의문을 뒤로한 채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저 같은 기사 따위는 문전에서 쫓겨나는 게 아닌가 걱정하면서.
그러나 유하르가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제 상관이 내다본 그대로였다. 유하르의 방문에도 침상에 누워 있던 라이너스는 바울 체살리에라는 이름과 함께 내밀어진 깃펜에 두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대로 안드레아를 만날 준비를 마쳤다.
“앞장서게.”
일이 너무 착착 진행되어 어리둥절할 지경이었으나, 유하르는 침착하게 길을 안내했다.
“상대가 너무 완벽하면 싸울 마음도 들지 않는다니까.”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유하르였지만, 라이너스의 씁쓸한 중얼거림만큼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동시에 어떻게 돌아가는 사태인가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감옥에 틀어박혀서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남자를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다만 안드레아와 라이너스가 조우할 순간이 걱정되었다. 만에 하나, 둘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게 되면 유하르 자신은 누구의 명령을 들어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아찔했으나 유하르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편에 서기로. 설령 그로 인해 바울 체살리에처럼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 해도.
그러나 유하르의 비장한 결심이 무색하게 두 남자가 서로를 대하는 분위기는 부드럽기만 했다. 먼저 능청을 떤 건 라이너스 왕세자였다.
“이거, 아주 제집같이 편안해 보이니 조금은 얄밉네.”
안드레아도 넉살 좋게 받아쳤다.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던데. 왕세자 따위는 집어치우고 광대나 하지 그래.”
과묵하기만 한 줄 알았던 안드레아의 말에 유하르는 제 상관의 입담에 감탄하다가, 광대라는 단어에 담긴 모욕에 뒤늦게 낯을 굳혔다. 정작 라이너스 본인은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건만.
“어디까지 알아냈어?”
“전부.”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단호한 어조에 라이너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그렇군.”
이번만큼은 유하르가 으쓱해도 좋았다.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긴 하나 직접 발로 뛰어 착실히 정황을 밝혀낸 건 유하르였으니까. 그러나 두 남자의 웃음 뒤에 감춰진 살벌한 분위기를 읽은 이상 자랑스러워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라이너스 왕세자만 들여보내고 자신은 밖에서 동정이나 살필 걸, 왜 따라 들어왔을까. 자신을 탓하면서, 유하르는 더 이상 날 선 대화가 오고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언제 유하르의 바람이 이뤄진 적이 있었느냐마는.
“안드레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왕세자로서가 아니라 오랜 친구로서 편히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안드레아의 정중한 태도에 그가 슬슬 라티시아의 목숨을 구걸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라이너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걸이라, 글쎄. 칼리드나스에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라티시아의 운명은 그들 페를레티 남매에게 달려 있으니까. 적어도 부탁 정도는 하지 않을까.
물론 라이너스는 흔쾌히 들어줄 마음이었다. 심정은 이해하나 벨리오나는 제 그릇에 맞지 않는 일을 벌였다. 아무리 노예라 한들 임신한 여자를 빼돌려 가두다니, 게다가 라티시아의 배 속에 든 건 안드레아의 핏줄 아닌가.
안드레아가 무사히 풀려나고 둘이 결혼하고 나면 이 일은 두고두고 흠이 될 터였다. 그러니 제 선에서 원만히 해결하는 편이 나았다.
“벨리오나 페를레티.”
“응.”
예상대로 흘러가는구나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지은 라이너스가 여유로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의 손을 내밀면 너그럽게 잡아 보기 좋은 모양새를 그릴 셈이었다. 나중에 안드레아의 누명이 벗겨지면 이는 또 하나의 미담이 되겠지.
그러나 안드레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라티너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네 동생이라서 살려준 줄 알아.”
“…….”
잠시 멍하니 있던 라이너스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엄지로 눈을 쓸며 라이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봐. 그러다 내가 거짓 증언이라도 하면 어쩔 거야? 평생 여기서 썩고 싶어? 아님, 단두대에 정말 목이 걸리고 싶은 거야?”
“암시장을 네게 주지.”
“그건 이미….”
제 것이라고 하려던 라이너스는 안드레아의 의도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암시장의 주인이 누군지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라이너스가 굳이 모르는 척 연기해가며 안드레아와 동행해 정황을 살폈던 이유였다.
주인이지만 주인이어선 안 된다.
하지만 음지의 것을 양지로 꺼내어 드러낸다면? 안드레아가 적발해내어 라이너스 왕세자에게 전권을 바친 것으로 하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동시에 노예를 두고 얽힌 복잡하고 더러운 일들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왕조의 기틀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업이니 왕위 계승도 무리 없이 이뤄질 테고.
“거절할 수가 없네.”
라이너스는 패배감을 느끼며 순순히 동의했다. 만약 거절한대도 안드레아는 나름의 방법을 찾아 돌파구를 찾을 게 분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정면 승부가 될 가능성이 컸다.
안드레아가 왕조와의 관계를 생각해 이 누추한 감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임을 새삼 깨달은 라이너스는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우고 쾌활하게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신세 좀 지자고.”
이와 같은 모종의 거래 끝에 안드레아는 즉시 풀려났다. 유하르에게 전달 사항을 알리고 곧장 암시장으로 향하는 안드레아에게 라이너스가 바짝 따라붙었다.
“설마 내가 자네를 바울 체살리에처럼 가둘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모를 일이지.”
허, 짧게 혀를 찬 라이너스가 서운하다는 투로 투덜댔다.
“그래서 깃펜의 절반을 증거로 남겨둔 건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깃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맞지만 라이너스가 추측한 이유로 절반을 남겨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라티시아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물로 흠뻑 젖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싫었을 뿐이었다.
이런 사정까지 라이너스가 알 필요가 있을까. 굳이 대답할 이유도 없고 귀찮기도 해서 안드레아는 침묵을 지켰다. 혼자 떠들다 민망해진 라이너스는 화제를 돌렸다. 가슴 졸이고 있을 벨리오나를 생각해서였다.
“벨라를 특별히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지 않은 일까지 뒤집어쓰는 건 아닌 듯해서. 너의 애완 새 말이야, 제 발로 따라나섰다더군. 굳이 끌어내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대. 그러니까, 음, 스스로 탈출했다는 말이야.”
탈출이라니 어감이 좀 이상하다. 마치 라티시아가 도망치고 싶어 했던 것 같지 않나.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결국 기회를 틈타 도망친 거나 다름없었기에 라이너스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찔리는 마음에 슬쩍 벨리오나에게 책임을 미뤘다.
“물론 그곳에 가둔 건 벨리오나가 너무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본인만 얘기하는 것 같다. 슬쩍 안드레아의 표정을 살피던 라이너스는 속으로 좀 놀랐다. 줄곧 흔들림 없던 안드레아의 얼굴이 한겨울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시 말해봐.”
안드레아의 주문에 라이너스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라이너스는 분명히 들었다. 쩡, 하고 얼음장에 균열이 가는 소리를.
자신이 안드레아에게 타격을 주는 일도 다 있다니. 라이너스는 작은 승리감을 맛봤다. 고작 노예의 이름을 팔아서 얻은 승리였지만, 라이너스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다만, 이런 안드레아와 혼인할 벨리오나가 조금 안쓰럽기는 했다. 상대가 올리비아일 때는 그래도 귀족이어서 체면이라도 섰는데, 이제는 금수와 맞먹는 노예니 벨리오나만 우습게 됐다.
솔직히 안드레아가 어쩔 셈인지 모르겠다. 아이를 낳는다 한들 생모가 노예인 이상 친자로 인정하기 힘들 텐데. 벨리오나의 입장을 고려해 왕실의 반대도 만만치 않을 테고.
여러 가능성을 점쳐보는 와중에 암시장의 입구에 당도했다. 성실한 문지기는 이번에도 고압적인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입장권을 보여주시오.”
안드레아가 입장권 대신 검을 길게 빼들었다. 동시에 둥근 머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라이너스는 괜히 제 목을 쓰다듬으며 안으로 향했다.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한 안드레아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라티시아.”
“주인님…?”
처음 그녀를 만났던 지하의 또 지하에, 안드레아의 작은 노예가 웅크리고 있었다. 갇힌 후 줄곧 그래왔던 듯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었다. 그러면서도 따라나서지 않으려는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래봤자 뒤는 벽이었지만.
안드레아는 도망치는 라티시아를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주인을 두고 도망간 발칙한 노예의 배 속에는 제 아이가 있다. 제 것을 찾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안드레아는 솔개가 먹이를 사냥하듯 라티시아를 낚아챘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벗어났다.
간발의 차이로 안드레아의 사병들이 들이닥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지하 세계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데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안드레아의 사병들이 닥치는 대로 찌르고 부순 결과였다.
만인의 관심을 모았던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반란죄 판결은 혐의 없음으로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암시장의 강력한 배후로 지목된 로카디와 올리비아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고, 벨리오나 왕녀는 문서를 위조한 죄로 근신에 처해졌다.
“근신이라니. 어린 아이 방에 가두는 모양새군.”
안드레아는 자신의 딸에게 내린 페를레티 국왕의 관대한 처분에 독설을 퍼부었다. 라이너스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얹든 제 얼굴에 먹칠하기였으므로. 이럴 때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는 게 상책이었다.
“녀석을 왜 가만 두는 거지?”
녀석이라 함은 테를로가 누엘을 가리켰다. 테를로가 누엘은 거짓 증언을 했음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 하긴, 그 당시 범인의 망토를 보았다고 목격한 대부분이 처벌을 면하긴 했다.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그들을 벌하지 말아달라는, 당사자인 안드레아의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렇다 쳐도 적극적으로 나선 테를로가까지 두둔하는 건, 라이너스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어 다른 뜻이라도 있는 건가?”
“나중에.”
안드레아의 심드렁한 대답에 라이너스는 테를로가 누엘이 불쌍해졌다. 얼마나 험악한 꼴을 당하려나.
“그건 그렇고 네 카나리아는?”
공식적으로 벨리오나 왕녀와의 혼인을 거절한 안드레아의 배우자 자리는 요즘 최고의 가십거리였다. 공공연하게 라티시아의 이름이 오르내리긴 했으나, 성혼 여부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귀족과 노예라니, 짝이 안 맞는 신발과 같았다. 나란히 설 수 없는 존재.
게다가 귀족도 그냥 귀족이 아니고 그 칼리드나스다. 요정처럼 예쁘다는 노예가 아기 백 명을 낳아도 둘의 혼인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귀족이 라티시아를 양녀로 들인다면, 신분의 상승이 가능했다.
하지만 누가 그런 너그러움을 발휘한단 말인가? 두고두고 가문의 수치가 될 텐데.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 안드레아… 어?”
자신만만하게 확신하던 라이너스의 음성이 흔들렸다. 억지로 너그러움을 발휘해야 하는 이가 누군지 깨달았기에.
***
올리비아와 로카디의 참수 소식을 들은 테를로가 누엘은 안드레아의 보복이 두려워 그날부터 줄곧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엘 후작은 초조해하는 아들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고작 불러낸 것으로 너를 탓하겠느냐.”
“거짓 증언을 했잖아요. 공작을 목격했다고.”
“그건….”
그러게 왜 그런 일을 벌였느냐고 탓하고 싶었지만, 은근히 돌아가는 상황을 즐긴 것도 사실이었기에 누엘 후작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눈엣가시 같던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를 보려면 감옥에 면회 가는 방법밖엔 없겠다며 아쉬운 척 조롱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하지만 여태 아무 얘기가 없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가주려는지도 모르지.”
“그럴까요?”
미심쩍어하면서도 테를로가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희미하게 스쳤다. 그들은 공공연한 정적이었으니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긴장이 풀린 테를로가의 눈에 며칠 동안 미뤄두었던 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때문에 낯선 기척에 설핏 잠에서 깨어나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를 보았을 때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드레아는 그를 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보기보다 담력이 있군, 테를로가 누엘.”
“내 침실엔 어떻게!”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침실을 휙 둘러본 안드레아가 누추하다는 짧은 감상을 남기자 테를로가의 얼굴은 그야말로 귀까지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기껏 내뱉은 말은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닐 텐데!”
“이제 좀 친해지려고.”
격의 없는 안드레아의 웃음에 테를로가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근사한 호를 그리고 있는 입술이건만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테를로가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라티시아를 양녀로 받아줘야겠다.”
긴말은 집어치우고 안드레아는 간단히 용건만 전했다.
“뭐, 뭐라고?”
테를로가의 어이없는 반문과 동시에 기운 빠진 탄식이 들려왔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존재가 너무 커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침대 곁에는 누엘 후작이 이마를 짚고 앉아 있었다.
“칼리드나스 공작, 근본 모를 천한 것을 양녀로 들이라니 너무 과한 요구 같소만.”
“그럼 다른 방법으로 죄를 갚을 수밖에.”
한순간에 서늘해진 안드레아의 음성에 테를로가는 자신이 화를 피한 것이 아니라 안드레아가 벌을 미뤄왔음을 알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럴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잡은 기회든, 철저히 마련해둔 계획이든 테를로가는 보기 좋게 덫에 걸려버렸다.
“다른 방법이 무언가? 무어라도 갚을 수 있다면 갚겠네. 귀공의 성에 차지는 않을 테지만….”
자신이 없어진 누엘 후작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천금을 낸다 한들 그게 칼리드나스 공작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산처럼 쌓인 금화 더미 위에 동전 하나를 얹어놓는 꼴일 텐데.
안면에서 미소를 싹 지운 안드레아가 아버지의 뒤에 숨어 동정만 살피는 테를로가를 불러냈다.
“테를로가. 부친을 설득하는 게 좋지 않겠나. 테오도르 뷔테르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눈과 손이 잘린 채 시체로 발견된 테오도르의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누엘 부자 역시 익히 알고 있었기에 안드레아의 협박에 얼굴이 희게 질렸다.
“네, 네 이놈! 그게 아버지 앞에서 할 소리…!”
안드레아는 더 듣지 않고 단검을 빼들었다. 거짓을 고한 테를로가의 선처를 구한 건 순전히 라티시아에게 신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쓸모가 없어진 테를로가를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하겠네! 해달라는 대로 다 하겠네! 그 아이를 양녀로 삼아 누엘 후작가의 여식으로서 권세를 누리게 하겠네! 그러니 제발, 제발 거두어주게나.”
안드레아가 진심임을 알아챈 누엘 후작이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와 매달렸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라면 충분히 마음먹은 대로 행하고도 남았다. 누엘 가도 유서 깊은 가문이지만 칼리드나스 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왕조도 뒤집을 수 있다는 칼리드나스인데, 하물며 후작의 아들쯤이야.
누엘 후작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노예를 양녀로 삼아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몇 배는 중요했다. 누엘 후작의 애원에 안드레아는 말없이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잠자코 그것을 받아든 누엘 후작의 서명이 빈칸을 채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