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과몰입공금]
길어질 이유가 없는 전쟁이었다. 말 그대로 구실에 불과했다. 그녀와의 약혼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지지부진한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적으로 열세인 것도, 물자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참다못한 벨리오나는 첩자를 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앙케르 족 측에서 은근히 항복할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는데 공작 쪽에서 모른 척했다고.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일부러 이기고 있지 않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벨리오나는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여 머나먼 길을 몸소 행차한 귀하고 귀하신 벨리오나 페를레티 왕녀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안드레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법도 없었다. 그저 빈 침대를 발견하고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 중 하나를 불러들였을 뿐.
“어디로 갔지?”
병사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이어 들어온 다른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한 명이 겨우 더듬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윽!”
말을 마치기 무섭게 병사의 목에 단도가 박혔다. 안드레아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단도를 뽑으며 비아냥거렸다.
“쓸모도 없는 머리통은 왜 달고 있지?”
단도가 박혔던 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벨리오나의 드레스를 벌겋게 적셨다. 야만적인 장면에 벨리오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굳어 있던 남은 병사가 허겁지겁 손짓 발짓으로 라티시아의 행방을 알렸다.
“그게… 저, 숲… 쪽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네, 분명히, 아니, 어쨌거나 그쪽으로…!”
“똑바로 말해.”
“가다가 몇 번 넘어졌는데, 그 뒤론, 잘… 모르겠….”
말을 맺지 못한 병사가 끝내 흐느꼈다. 동시에 지린내가 벨리오나의 코를 찔렀다. 결국 동료와 똑같은 답을 내어놓은 병사의 바지와 발밑의 색이 짙어져 있었다. 짜증스럽게 단도를 닦는 안드레아에게 벨리오나가 한 걸음 다가섰다.
“칼리드나스 공작, 더 이상의 살생은 무의미해요.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만둬줘요.”
그래봤자 노예가 하나 도망간 것 아니냐는 말은, 어쩐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무려 왕녀가 자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만해 달라 부탁했는데, 안드레아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단도를 나머지 병사의 목에 찔러 넣었다. 칼집에 칼을 넣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이번에는 단도를 뽑지 않은 채 두었기 때문에 벨리오나의 드레스가 젖는 일은 없었다.
“무슨 제안을 하러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답은 거절입니다, 왕녀.”
안드레아가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잘라냈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이것만도 예의를 갖춘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전해졌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귀찮은 짐을 떠맡기듯, 밖을 향해 왕녀를 모시라고 이른 칼리드나스는 가벼운 묵례조차 없이 그녀를 지나쳐 나가버렸다. 결국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채 덩그러니 홀로 남은 벨리오나는 이를 악물었다. 요망한 계집을 이곳에 데려왔다고 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인지도 몰랐다.
‘고얀 것…!’
가랑이에 정액 마를 날이 없다는데, 순진한 척 새침을 떨며 깜박이던 보라색 눈을 떠올리자 분노가 치밀었다. 왕녀와 공작의 혼인이 고작 노예 계집 하나 때문에 어그러지다니.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그야말로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그런 음란한 탕녀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어쩌면 안드레아가 변방에 있는 지금이 일을 도모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인지 모른다. 자신에게 협조해줄 적당한 인물을 고르며, 벨리오나는 지체 없이 왕궁으로 돌아갔다.
***
라티시아는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유하르가 유심히 봐두었던 발싸개가 근처에 떨어져 있어 시간을 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얇은 옷만 걸친 채 눈 사이에 갇혀 있던 탓에 이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뒤였다.
입술, 갸름한 턱, 손끝, 발끝이 청색으로 얼어버린 라티시아를, 안드레아는 어미 새가 알을 품듯이 소중하게 안아 옮겼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과 달리, 라티시아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내일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라티시아를 진찰한 의사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뭘 모르는 유하르가 봐도 라티시아는 결코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물러가라.”
무거운 분위기에 유하르는 감히 대답도 못한 채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라티시아의 곁을 지키고 있는 공작의 뒷모습에 언젠가 라티시아가 죽을 고비를 당했을 때가 겹쳐졌다. 테오도르 뷔테르에게서 그녀를 구해왔을 때였다.
다소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던 그때와 마냥 가라앉은 지금의 공작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어찌될는지.’
험악한 표정으로 이곳을 벗어나던 벨리오나 왕녀를 떠올린 유하르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마음은 이럴진대 눈치 없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라티시아를 수색하느라 저녁을 굶은 탓이었다. 유하르의 걸음은 어느새 병사들이 어울리고 있는 모닥불가로 향하고 있었다.
‘한심하군.’
유하르는 혀를 차며 후회했다. 막상 왁자지껄한 사이에 끼려니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술에는 신 몰래 악마가 양, 사자, 돼지, 그리고 원숭이의 피를 탔다 했던가. 그리하여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양처럼 순하게 웃다가 이어 사자처럼 사나워지고 거나하게 취하면 돼지처럼 추잡해지고 원숭이처럼 시끄러워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거나하게 취해 원숭이처럼 구는 병사들을 바라보는 유하르의 눈매는 곱지 않았다. 전쟁 중에 술은 금지였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벨리오나 왕녀가 격려를 위해 안주와 술을 잔뜩 하사하고 갔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승기를 잡고 있는 데다가 전후 사정을 생각하면 축제 같은 지금의 분위기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으나,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와 그가 끼고 다니는 여자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대체 뭘까!”
오늘도 돼지 멱따는 소리로 누군가가 외쳤다. 유하르의 기억이 맞다면 공작의 막사에 저녁 식사를 차리러 들어갔다 나온 병사였다. 그건 곧 어떤 장면을 목격했다는 뜻일 테고, 역시 유하르의 추측이 맞다면 아마도 가벼운 키스 정도일 가능성이 컸다.
유하르가 알기로 안드레아 공작은 남 앞에서 라티시아를 안지 않았다. 누가 보든 거리낌 없이 올리비아와 살을 섞어대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간 섹스에 굶주린 이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큰 이슈인 모양이었다.
“가축 같은 노예 년하고 키스라니, 공작의 위신도 땅에 떨어졌군.”
돼지로 변한 놈의 말을 받아 다른 녀석이 사자처럼 음험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옆에 앉아 있던 병사가 원숭이같이 킬킬거렸다.
“자위도구 같은 거겠지. 설마. 어이, 폴. 너도 그제 양이랑 하지 않았어? 메에, 음메에, 신음이 아주 죽이던데.”
“닥쳐, 이 병신 새끼야.”
폴이 옥수수 스프를 뜨던 숟가락을 냅다 원숭이 녀석에게 던지자, 걸쭉한 스프가 사방으로 튀었다. 스프 방울을 닦아내며 폴을 조롱하던 병사가 마저 그를 놀려댔다.
“왜 이래? 듣기로는 공작의 애완동물보다 네 양이 더 나은 것 같아서 그래. 부러워서 그런다고.”
“저런 미친 놈!”
누군가 외치자 따라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이런….’
위험하다.
선을 넘은 발언이 이어지자 유하르는 본능적으로 닥쳐올 재앙을 감지했다. 이걸 공작이 듣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앓아누워 있는 라티시아 때문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공작이 아닌가. 머릿속에 펼쳐진 끔찍한 장면을 애써 지우며 유하르는 흐트러진 무리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밤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정리하고….”
휘휘 창을 휘둘러 일부러 술병들을 넘어뜨리고 널브러진 병사를 찔러 깨우던 유하르는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삽시간에 달라진 분위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이들의 낯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빗겨가는 법이 없는지.
천천히 뒤로 돌아선 유하르는 모두를 닥치게 만든 인물을 확인했다. 가뜩이나 푸른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눈이 형형한 안광에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유하르는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예를 갖췄다.
“오셨… 습니까.”
“음.”
유하르는 그의 상관이 짤막한 답과 함께 흥미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턱을 쓰다듬는 걸 지켜보았다. 긴 검신이 달빛을 하얗게 반사시키며 뽑아져 나오는 것도, 예리하게 벼린 검이 뜨거운 피로 연거푸 덧칠되는 것도, 날 끝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선혈도.
격전지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지금보다 비현실적이진 않았다. 몸과 분리된 머리통들이 흙바닥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도, 데굴거림이 멈추고 난 뒤의 숨 막히는 정적도. 무리에 끼지 않은 이들도 여럿 있었지만, 눈 깜박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안드레아가 너그러이 허락했다.
“내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도 좋다.”
당연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잘린 머리로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공작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모두들 고개를 돌리기에 급급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유하르만 시선을 피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좋다. 유하르?”
“네? 없, 없습니다.”
“유감이군.”
뭐가 유감이라는 걸까. 궁금했지만 이 역시 물어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유감이라는 말을 끝으로 공작이 돌아선 것만으로도 시름을 덜었다. 괜히 서늘해진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유하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신의 수습을 지시했다.
‘그런데 왜….’
라티시아의 곁을 지키지 않고 나온 걸까. 안드레아를 급히 뒤따른 유하르는 라티시아를 봐주었던 의사와 다시 마주쳤다.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부르다니, 라티시아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기엔 제 상관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의원을 부르러 가는 길에 함부로 입을 놀리던 놈들을 응징하지 않았나. 목숨이 일각에 달려 있었더라면, 그런 데 낭비할 시간이 없었을 테다.
‘그럼 왜?’
결국 도돌이표였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앞서가는 안드레아의 뒷모습을 바라본 유하르는 뒤늦게 그의 상관의 어깨에 얹힌 긴장을 눈치챘다. 마냥 조급하진 않은, 어딘가 느긋함이 느껴지는 긴장.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약간의 하혈이 있었다는 안드레아의 설명에 한층 자세히 라티시아를 살핀 의사가 조심스럽게 진단을 내렸다.
“아기는 무사한 것 같습니다.”
헉, 숨을 크게 들이마신 유하르가 막 축하의 인사말을 전하려 할 때였다. 유하르의 반응을 눈치챈 안드레아가 딱 잘라 저지했다.
“다물어라.”
냉랭한 눈빛은 이 일을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와 같았다. 유하르도, 의사도 바로 공작의 의도를 알아챘다.
배 속에 품은 아기의 생명력 때문인지, 라티시아는 의사의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바로 다음 날 의식을 차렸고 이틀 후에는 먹고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안드레아의 군대가 일격에 적들을 함몰시킨 건 그다음 날이었다.
승전 소식을 전해들은 페를레티 국왕은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귀환 일에 맞춰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다.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식기, 태양처럼 눈부신 샹들리에, 멋들어진 휘장…. 마냥 화려하기만 한 이면에도 어둠은 있었다.
로카디는 어둠 속의 쥐처럼 눈을 빛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승전보에 누구보다도 분개한 로카디였다. 마차가 뒤집히는 사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로카디에게는 악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테오도르 뷔테르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 기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벨리오나 왕녀와의 만남은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이었다. 왕녀의 주문이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멸망을 바란다는 점에서는 그와 같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직접 놈의 눈알을 뽑고 손목을 자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게 어디인가. 로카디에게는 실로 천금 같은 기회였다. 칼리드나스 가의 문장이 큼직하게 수놓아진 망토를 두르고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도사리고 앉아 있던 로카디는, 제게 뒤탈 없도록 하라는 의미의 눈짓을 보내는 올리비아를 보고 사람의 사이는 어찌 될지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벨리오나 왕녀와 올리비아는 앙숙이라고 들었는데, 라티시아라는 연적 앞에 하나로 똘똘 뭉치지 않았는가. 로카디에게 왕녀를 소개한 이도 올리비아였다.
‘엇…!’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던 로카디의 눈앞에 표적이 나타났다.
“갑자기 단둘이 할 얘기라니, 이러면 무서워지는데.”
“무서워할 건 없어요, 오라버니.”
라이너스 왕세자를 따로 불러낸 벨리오나가, 그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그를 등진 자세가 된 라이너스를 보며 로카디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잠깐 정신을 잃을 정도로만. 수십, 수백 번 연습한 그대로.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릴 때는 왕세자를 해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막상 때가 되니 스스로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졌다. 꽈악, 단검의 손자루를 단단히 틀어쥔 로카디는 번개같이 라이너스에게 달려들어, 노리고 있던 지점을 정확히 찔렀다.
오른쪽 가장 마지막 갈비뼈의 사이에.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라이너스가 쓰러졌다.
“아악! 안 돼!”
벨리오나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로카디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연회장을 가로질러 밖으로 도망쳤다. 갑작스런 상황에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뇌리에 남은 건 망토 위의 화려한 칼리드나스 가의 문장이었다.
왕세자를 해했다는 누명을 쓴 안드레아는 연회장 근처의 장미 정원에서 붙잡혔다. 언젠가 벨리오나 왕녀와 대화를 나눴던 장소이기도 했다.
재수 없는 곳.
안드레아는 하나같이 자신이 라이너스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을 보았노라, 입을 모으는 귀족들의 증언을 귓등으로 흘리며 장미 정원을 두고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가뜩이나 라티시아 때문에 기분이 저조한데, 아주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라티시아는 대놓고 그를 거부했다. 어이없는 이유였다. 아기가 다친다는 이유였다. 그의 성기를 배 속의 아기를 위협하는 몽둥이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안드레아가 무시하고 안으려 하자, 노래를 불러 그를 강제로 재워버렸다. 언제 잠재우는 능력을 되찾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해, 안드레아는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막 테를로가 누엘이 자신도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라이너스 왕세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한 직후였다. 안드레아의 실소를 자신을 향한 비웃음으로 오해한 테를로가가 발끈했다.
“중죄를 저지르고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칼리드나스 공작을 엄벌에 처하소서!”
모기 소리처럼 신경을 긁는 테를로가의 징징거림에 안드레아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정말 보았나. 나라는 걸 확인했느냔 말이다.”
날카로운 질문에 어깨가 움찔 떨리긴 했지만, 테를로가는 꿋꿋하게 제 입장을 고수했다. 사실 테를로가는 많은 이들이 보았다는 칼리드나스 가의 망토도 보지 못했다. 소란이 일 때 그는 약혼녀의 눈을 피해 유혹할 상대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드레아를 지목한 이유는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모자라도 눈치만큼은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테를로가는 바로 어찌 돌아가는 사정인지 알아챘다.
어느 쪽에 서면 좋을 것인가.
굳이 잴 필요도 없이 왕녀였다. 단순히 숫자로만 봐도 왕녀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훨씬 우세했다. 벨리오나 왕녀와는 대척점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올리비아까지 ‘사실은 사실’이라며 안드레아의 범행에 대해 이견이 없음을 드러냈다.
안드레아를 사이에 둔 벨리오나 왕녀와 올리비아의 신경전은 익히 알려져 있던 차라, 그러한 올리비아의 증언은 매우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이쯤 되니 테를로가는 정말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라이너스의 등에 칼을 꽂는 장면을 목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페를레티 국왕 역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안드레아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던 페를레티 국왕은 벨리오나, 올리비아에 이어 테를로가까지 가세하자 한 방향으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죄인을 잡아 가두라. 형벌은 왕세자가 깨어난 뒤 재판을 통해 내리겠다.”
국왕의 명령에 바로 결박당한 안드레아는 꼿꼿이 고개를 쳐든 채 감옥으로 향했다.
‘재수 없는 자식.’
죄인 주제에 끝까지 자존심은 살아서. 끌려가는 안드레아를 향해 침을 뱉은 테를로가의 가슴에 음험한 쾌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