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과몰입공금]
안드레아가 천한 노예 계집과 함께 매일같이 뒹구느라 침실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벨리오나는 거의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상대가 올리비아와 같은 귀족일 때는 자존심이 상하긴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노예 계집이 도망쳤을 때만 해도 벨리오나는 안드레아가 곧 청혼하리라는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자신의 생일 축하 연회 때 언질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눈엣가시가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철저하게 혼인에 무관심했다.
다른 여자가 또 붙었나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수도원의 성직자처럼 지내는 안드레아 덕분에 칼리드나스 공작가의 분위기 또한 경건해졌다는 평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언제 본격적으로 혼담이 오갈 것인가 날짜만 꼽던 중 새로운 소식이 당도했다. 도망쳤던 노예 계집이 붙잡혀왔다는.
‘무슨 수를 내야 해.’
고심하던 벨리오나는 꿈쩍도 않는 안드레아보다는 그녀의 아버지, 페를레티 국왕을 움직여보자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훌륭한 핑계거리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조르기에 왕녀로서의 체통도 지키고 명분도 서는.
안드레아가 갑자기 불려온 데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앙케르 족의 침입이 빈번하다는 호소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칼리드나스 경이 나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어떠한가?”
강력한 응징으로 본보기를 삼기 위해 그에 걸맞은 칼리드나스 가의 군대가 출정해주었으면 하는 국왕의 바람에 안드레아는 쉬이 응하지 않았다.
“그곳은 누엘 후작의 사유지와 근접한 곳이 아닙니까?”
“음….”
지금껏 그래왔듯이 안드레아가 순순히 명을 받들 줄 알았던 페를레티 국왕은 난처한 탄식과 함께 수염을 쓸었다.
“누엘 후작의 사유지와 근접하다는 건 경의 말이 맞다.”
“누엘 가의 사병이 장식이 아닌 이상, 굳이 제 군대가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오만한…! 만대에 길이 빛날 페를레티 국왕이시여! 부디 방자한 안드레아 칼리드나스 공작을 벌해주소서!”
안드레아의 모욕적인 발언에 발끈한 테를로가 누엘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섰다. 그러나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라는 뜻으로 엄하게 노려보는 국왕의 눈빛에 잠자코 물러났다.
“하나,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니 마냥 후작의 사병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는 법. 한 번만, 본때를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후작의 사병에게만 의지한다는 건 과장이었다. 국왕의 군대가 이미 주둔해있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군사적 요충지라는 표현에도 문제는 있었다. 앙케르 족의 침입이 빈번하다곤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끽해야 식량과 땔감 정도를 약탈해가는 잔챙이였다. 굳이 따지자면 안드레아가 이전의 전투에서 상대해온 적들이 훨씬 강하고 잔혹했다.
따라서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안드레아는 이쯤에서 국왕의 청을 수락하기로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테를로가 누엘에게 망신을 준 것으로 족했다. 게다가 한 번뿐이라니까.
“폐하의 뜻이 옳습니다.”
안드레아는 명을 받들겠다는 의미로 순순히 검을 내어 검집째 바쳤다. 출정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그의 오른쪽 어깨에 두 번, 검이 가볍게 툭툭 닿았다 떨어졌다.
***
당분간 친우를 못 보게 된 아쉬움을 달래러 라이너스가 친히 공작저까지 동행했다.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즐거워 보이는 라이너스에게 안드레아가 조소를 던졌다.
“오래 걸리진 않겠지?”
“모르지.”
“음. 이기고 돌아오면, 뭐, 당연히 이기겠지만, 바로 벨리오나와의 결혼을 추진할 생각이신가 봐.”
“그래?”
안드레아는 비로소 라이너스가 유독 즐거워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혼인 소식을 들은 그의 반응이 궁금했던 거다.
“벨라가 머리를 잘 썼지. 승전의 상으로 청혼을 주선할 이유도 생기고, 또, 유명하잖나. 전쟁터에서 자네의 금욕은.”
동생의 앙큼한 잔꾀가 오빠인 라이너스의 입장에서는 꽤 자랑스러운 듯했다. 안드레아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얘기였다. 지금 안드레아는 한 가지 궁금증에 빠져 있었다. 국왕의 청을 수락한 궁극적 이유이기도 했다.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성싶었다.
때문에 공작저에 도착해서도 곁에 찰싹 붙어 있는 라이너스는 그에게 짐이었다. 어째서 빨리 돌아가지 않냐는 안드레아의 의중을 읽은 라이너스가 뻔뻔스레 굴었다.
“무려 칼리드나스 공작이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다니. 믿을 수 없군.”
공작저에 가까워질수록 가파르게 상승하던 안드레아의 입매는 라이너스의 방해로 인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손수 차를 따라주는 안드레아의 정성에 라이너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안드레아가 차가운 물을 섞기 전까진.
“어서 마시고 꺼지라는 거지.”
미지근한 차를 라이너스는 일부러 반 모금씩, 천천히 삼켰다. 점차 썩어 들어가는 안드레아의 근사한 미소를 혼자 보기 아깝다고 생각하며.
“귀여운 카나리아 때문인가?”
문 건너편을 눈짓하며 라이너스가 물었다. 호기심에 들뜬 나머지 일순 안드레아의 눈빛이 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의외라서. 도망친 걸 다시 잡아오다니. 혹시, 마음이 있나?”
고작 노예 따위를 마음에 품다니.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생각하면서도 라이너스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카나리아가 돌아온 후, 안드레아는 묘하게 인간적이 되었다. 뜨거운 차에 차가운 물을 섞는 의외의 행동을 저지른다든지 하는.
“음, 그러니까, 사랑 말이야.”
그래서 조금은 기대했다. 어쩌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라이너스의 기대는 안드레아의 싸늘한 냉소에 여지없이 꺾였다.
“그럴 리가.”
코웃음 친 안드레아가 더는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바로 화제를 돌렸다. 새로운 교역품에 관한 것으로, 칼리드나스 가의 교역에 대해서는 좀처럼 들려주지 않는 안드레아였기에 라이너스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이던 라이너스가 비로소 만족한 표정을 지었을 때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호오, 오늘 새로운 걸 알아가는군. 그나저나 시간을 많이 앗아서 어쩌지?”
“별말씀을.”
그동안 내색은 못 했지만 은근히 궁금히 여겼던 점들이 해소된 라이너스는 흐뭇한 기분으로 칼리드나스 가를 떠났다. 너무 흡족한 나머지 교역 건으로 라티시아에게 쏠린 제 눈과 귀를 막으려는 안드레아의 의도를 깨달은 건 왕궁에 거의 다다라서였다.
“하! 이런. 완전히 넘어갔네.”
제 이마를 탁 친 라이너스가 지나온 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훑었지만, 이미 떠나온 지 한참이었다.
호기심 많은 왕자를 배웅한 후, 기나긴 복도를 되짚는 동안 안드레아의 머릿속에 라이너스와 나눴던 대화 중 유독 한 부분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마음이 있나?’
안드레아는 자문했다.
‘누가. 내가?’
그러곤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헛소리.”
라이너스는 종종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노예와 사랑이라. 그게 가당키나 한 질문인지. 라티시아에 대한 감정은 소유욕에 가까웠다. 안드레아는 그다지 물욕이 없는 편이지만, 한번 제 것이 된 것은 혼자만 오롯이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유하르가 라티시아를 지키지 못해 그녀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면 박제를 해서 보관해두었을 거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의 연장선일 따름이고.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안드레아는 줄곧 궁금했던 것의 답을 구하기 위해 곧장 라티시아에게 향했다. 페를레티 국왕이 언급한 접경 지역은 일 년의 대부분 눈이 오는 곳이었다. 라티시아도 눈을 본 적이 있을까. 그게 그렇게도 궁금했다. 그런데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그의 침대에 그녀가 없었다.
‘설마….’
발밑이 푹 꺼지는 기분에 안드레아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뗐다. 그러다 창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라티시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부재에 뻣뻣하게 굳었던 뒷목의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 안드레아가 가까이 다가가도 라티시아는 눈치채지 못하고 창밖의 아름드리나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처음 그의 방에서 나갔던 날 누워서 잠을 청했던, 테오도르 뷔테르와 종종 어울리기도 했던 그 나무였다. 누구를 추억하는가. 복부 밑바닥부터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화를 누르다 새어나간 낮은 숨소리에 화들짝 놀란 라티시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셨어요.”
얼른 창틀에서 내려섰지만, 라티시아는 안드레아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얼핏 마주친 시선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서였다. 손님에게 코웃음 칠 때도 저런 눈빛이었을까? 마음이 있냐는 물음에 냉소 섞인 안드레아의 답을, 라티시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가슴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던 느낌도. 저도 모르게 틀어쥐었던 문고리의 차가운 금속성도, 하얗게 질려 있던 제 손도. 고의는 아니었지만, 대화를 엿들은 대가는 혹독했다. 그녀의 주인은 그냥 인형이 필요한 거다. 멋대로 갖고 놀 수 있는 인형. 그녀는 그냥, 노예일 뿐이니까.
익히 알고 있었던 건데도 서글펐다.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모르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공작이 지옥에서 꺼내주었다고, 도망쳤던 그녀를 용서하고 아픈 상처를 보살펴주었다고, 맛난 음식으로 배를 채워주었다고, 밤마다 그녀를 뜨겁게 원한다고, 그 이상의 다른 걸 바라다니.
되짚어보면 공작이 제게 해주었던 건 기르는 개에게도 해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아프면 치료해주고, 이따금 귀여워해주고. 평생을 사람의 온기에 굶주렸던 라티시아에게 공작이 내밀어준 손은 아사 직전에 맛본 사탕처럼 달콤했다. 너무 달콤한 나머지 본질을 망각할 만큼.
무얼 기대했던 걸까.
라티시아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공작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착각했던 게. 그래서 제 마음도 홀랑 내어주고 말아버린 게. 어차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테오도르에게 두들겨 맞은 상처를 끌어안고 눈물을 삼키던 밤, 공작이 떠올랐을 때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언제가 되었건 공작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주인이고, 그녀는 노예다. 그것만이 명백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공작의 침실로 되돌아오는 길, 가시덤불을 밟은 것처럼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아 이따금 멈추어서 눈꺼풀을 깜박여야 했다.
습관처럼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바로 전날 밤에도 공작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 허리를 치켜들고 엉덩이를 흔들었던 걸 떠올리곤 도망치듯 창가로 갔다. 달팽이처럼 등을 동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으니 쓰린 가슴이 조금은 달래지는 듯도 싶었다.
“무슨 생각 중이었지?”
“…아무것도요.”
그냥 상심한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그녀의 주인은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혹시 엿들은 걸 들킨 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라티시아에게 안드레아가 정원의 아름드리나무를 눈짓해 보였다.
“거슬린다면 베어버리지.”
“네? 베어버리다니요, 주인님. 아니요, 거슬리지 않아요, 주인님. 정말 너무 멋진 나무예요.”
정말 멋진 나무라는 라티시아의 말에 전에 없던 심술이 일었다. 나무를 베어버리고 싶은 건 처음부터 그였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였더라. 수백 년 동안 칼리드나스 가의 정원을 지켜온 저 나무가 거슬리기 시작한 건.
“저, 음….”
어째서인지 더욱 험악해지기만 하는 안드레아의 분위기에 라티시아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주인님을 닮은 나무인걸요. 베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요.”
“나를 닮았다, 라. 어디가.”
“음, 음… 일단 주인님처럼 크고요, 포근하고….”
아니다. 솔직히 라티시아에게 아름드리나무와 그녀의 주인이 가끔 겹쳐보였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라티시아의 어설픈 거짓말은 안드레아의 예리한 감에 여지없이 걸려버렸다.
“그게 전부인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추궁할 일인가. 자신을 닮았다는 말에 이미 풀린 기분이건만, 끝까지 속내를 끄집어내고야 말려는 스스로가 안드레아는 이상했다. 설령 테오도르 뷔테르와의 좋은 기억을 되새겼다 한들 별것도 아닌 것을. 까짓 아무 힘도 없는 추억 따위.
그럼에도 알아야겠다. 속속들이 파헤쳐서 먼지 한 톨 남는 것 없도록. 라티시아는 제게 그래야 했다.
“그게….”
라티시아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안드레아의 입 안이 말랐다. 이리 초조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랬다. 슬쩍, 안드레아를 올려다본 라티시아가 마침내 어렵게 입을 뗐다.
“실은… 실은 꼭… 주인님의, 그….”
“…….”
“그곳… 같아요.”
뿌리로 갈수록 유난히 둘레가 굵어지는 나무였다. 장대한 길이는 말할 것도 없고.
황당한 비유에 안드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언가 잘못 들었겠지, 싶었다. 하지만 천진하게 눈을 깜박이는 라티시아를 보면, 그가 들은 게 맞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안드레아는 이내 허리가 휘도록 웃었다.
“칭찬, 고맙군.”
이제 어안이 벙벙해진 쪽은 라티시아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 칭찬의 의미가 아니었다. 어떻게 노예가 주인을 칭찬할 수 있단 말인가? 의도야 어쨌든, 공작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눈을 본 적 있나?”
“눈이요? 아니요.”
그녀의 유일한 창이나 다름없었던 테오도르의 그림에서도 눈은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쪽 지방의 겨울은 비교적 온화하게 지나가는 편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이, 안드레아가 눈에 대해 설명했다.
희고, 차갑고, 깨끗하며, 단단하게 뭉쳐서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기도 하다고.
얼음은 아닌데 그 비슷한 무언가, 굳이 비교하자면 얼음을 갈아낸 것 비슷하다는 표현에도 라티시아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고 싶은가?”
“네. 엄청 예쁘겠죠?”
안드레아가 바라던 반응이었다. 눈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라티시아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물론.”
짧게 속삭이며 도톰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지금껏 참은 게 용했다. 라티시아가 정원의 아름드리나무와 그의 것을 비교하는 깜찍한 짓을 했을 때부터 줄곧 그녀의 안에 뿌리박고 싶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라티시아의 심장까지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칭칭 동여매 저만을 향해 뛰도록 쥐어짜고 싶었다.
“아, 주인님…!”
전희 없이 곧바로 다리 한쪽을 들어 걸치는 안드레아의 가슴팍을, 라티시아가 반사적으로 밀어냈다. 언제나 그렇듯 바위처럼 꿈쩍 않고, 안드레아는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갔다. 나무의 밑동을 닮았다던 뿌리의 끝까지.
“하윽…!”
충분히 밑이 물렁해졌을 때 삽입해도 공작의 거근은 버겁다. 더군다나 예고 없이 들이닥친 지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라티시아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작은 새처럼 빠르게 벌떡이는 라티시아의 하얀 가슴 위에 안드레아가 얼굴을 묻었다. 단맛 나는 살을 물고 빨다가 유난히 도드라진 정점을 잘게 씹어 희롱했다.
“아, 아응….”
아랫배가 멋대로 조이는 느낌에 라티시아가 신음하며 매달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도 밀어내놓고 젖꼭지 좀 빨아줬다고 자지러지는 꼴이라니. 라티시아는 그런 제가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작이 이럴 때마다 질 수 없다는 듯 앙칼지게 침입자를 물어대는 자신의 아래를 알아서였다. 제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너무 민망했다.
‘분명 이상한 표정일 거야.’
언젠가 거울 앞에서 했던 정사를 떠올린 라티시아는 그만 울상이 되었다. 얼굴을 가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한쪽 다리가 공작의 팔에 걸쳐 있어 다른 다리는 발끝으로 겨우 지탱하는 정도였다. 손을 떼는 순간 뒤로 넘어갈 게 뻔했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라티시아가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걸 알아챈 안드레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유가 넘치나 본데.”
“아, 아응!”
간신히 버티고 있던 다리마저 덜렁 들린 라티시아가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하지만 라티시아가 절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뒤가 창이었다. 정원의 아름드리나무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 그건 정원을 지나는 누구라도 고개를 조금만 들면 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허공에 들려 공작의 움직임에 따라 그네를 타듯이 뒤로 밀렸다 앞으로 박혀 들어가는 제 모습을.
“주인님, 침대… 흣, 로… 네?”
“너와 내가 이러는 걸 사람들이 모를 것 같나?”
“그래, 도… 하앙!”
공작이 경고하듯 허리를 쳐올렸다. 더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규칙적이지만 정확하게, 공작은 그녀가 느끼는 지점만을 집요하게 찔러댔다. 등줄기에서 시작된 전율이 전신으로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으으응, 응! 아, 아아앙!”
제 입에서 새어나간 높은 교성이 반향이 되어 다시 들려오는 걸 들으며 라티시아는 축 늘어진 몸을 눈앞의 단단한 상체에 기댔다. 겨우 숨을 고르는 동안 아직도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질구에서 맑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을 윤활제 삼아 맞물린 하체를 빼지 않은 채, 공작이 움켜쥔 라티시아의 동그란 엉덩이를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응, 흐으….”
쾌감의 여운이 다시 한번 라티시아를 훑고 지나갔다. 안드레아는 품에 쏙 안겨선 잘게 떨리는 여체의 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느긋하게 사정했다. 달콤한 포도향에 묵직한 정액 냄새가 비릿하게 섞여들었다.
라티시아에게는 끝을 알리는 냄새였지만, 안드레아에게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 천천히 즐길 차례였다. 여전히 몸을 묻어둔 채, 안드레아가 걸음을 옮기자 걸음걸이에 따라 라티시아의 엉덩이가 좌우로 가볍게 튕겼다.
“흑, 주인님, 아….”
안 된다며 힘없이 젓던 라티시아의 고개가 단단한 손아귀에 잡혔다. 그대로 입술이고 신음이고 먹혀 들어갔다. 등이 폭신하게 묻히는 느낌과 동시에 아래에서 질퍽질퍽 튀는 소리가 났다. 혀, 성기, 손가락… 제게 들어온 살덩이란 살덩이를 속절없이 받아들이면서 라티시아는 아득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이 밤 또한 무척 길어질 것 같다고.
***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전장에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것도 노예를.
고요한 술렁임이 유하르의 피부로 느껴졌지만, 그의 상관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출발 전, 전례 없던 일에 유하르는 실례를 무릅쓰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라티시아와 동행하느냐고.
“음.”
순간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견고한 가면과도 같은 얼굴에 떠오른 온화한 빛에 유하르는 당황하며 눈을 비볐다. 순간 상관의 눈 색깔이 달콤한 벌꿀 색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을 깜박이고 확인한 안드레아의 눈 색깔은, 당연히 짙푸른 사파이어 색이었다.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
이번에는 귀를 의심했다. 제가 뭘 들은 건지. 눈을 보여주려고?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의 귀뿐 아니라 상관의 머리도 의심됐지만, 유하르는 두말 않고 두 사람 분의 출정 준비를 마쳤다.
그런 연유로 이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설원에 라티시아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초기에는 은발에 보라색 눈을 가진 눈의 요정을 만났다는 목격담이 간혹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의 여자라는 게 알려졌다.
장정들도 꽤 고전하는 이 추위에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라티시아는 잘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의 침대에서 거의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바깥에 우락부락한 사내놈들만 가득한 걸 생각하면 감춰두는 속내도 이해 못할 바 아니었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공작에게 밤새 시달린 라티시아는 낮에는 늘 기진맥진 늘어져 있기 일쑤였다.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안드레아와는 대조적이었다.
너무나 다른 둘의 모습에 유하르는 라티시아가 정말 요정이어서 밤새 안드레나 칼리드나스에게 마법을 거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 이르렀다.
유하르의 상상이 영 생뚱맞은 건 아니었다. 여유로운 겉보기와 다르게 안드레아의 속은 하루가 다르게 초조해져갔다.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라티시아의 태도 때문이었다.
“주인님. 안아주세요.”
교태를 부리며 감겨올 때면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에 자신이 한가득한데, 분명 그러한데….
“무슨 생각 중이지?”
“아무것도요.”
열기로 한껏 달구어졌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뿐이었다. 그에게 안겨 할딱거릴 때를 제외하곤 라티시아는 무기력했다. 생기가 빠져버린 인형처럼 종일 멍하니 있었다. 초점 없이 허공을 헤매는 색 바랜 눈동자를 볼 때마다 안드레아의 손끝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싸늘해졌다.
가라앉은 안드레아의 기분을 알아챈 라티시아가 생긋 웃었다.
“정말이에요, 주인님. 다만 여긴 좀 추워요.”
“그럼 전쟁을 빨리 끝내야겠군.”
안드레아의 농담에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소녀처럼 까르륵 웃음을 터트린 라티시아가 이내 애교를 떨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안아주세요, 주인님.”
둥근 눈망울 속에 수줍게 핀 제비꽃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석연찮은 기분에 사로잡혀 안드레아는 라티시아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겨울 바다처럼 싸늘한 시선에도 무감한 채 흔들리지 않는 라티시아의 보랏빛 눈에 안드레아는 명치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추가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낭패감을 맛봤다.
“부끄러워요….”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라티시아의 아래는 이미 물렁하게 풀어져 있었다. 확실히 그의 것임을 인식시킨 뒤엔 줄곧 이런 상태였다. 안고자 하면 얼마든지 안고 존득하게 그의 것을 감싸오는 속살을 맛보면 됐다. 예쁘게 앙알대는 속삭임이 점차 교성으로 드높아지는 걸 즐기기만 하면 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에게 맞춰진 몸, 오직 그를 위해 길들여진 그만의 노예.
모두 그가 뜻한 그대로였다. 완벽한 그의 소유가 되었는데, 그랬는데. 어째서 마음을 구걸하는 건 자신인 것 같은지. 주객이 전도돼도 한참 전도됐다.
그럴수록 안드레아는 한계까지 라티시아를 몰아붙였다. 쾌감에 절어서 흐느낄 때면 라티시아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살아 있다니?
안드레아는 반문했다. 멀쩡히 숨 쉬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웃어.”
못마땅한 눈빛으로 강요하는 안드레아의 명령에 잠시 의아해하던 라티시아가 이내 활짝 웃었다. 흠잡을 데 없는 모습에 안드레아는 갈증을 느꼈다. 울라고 하면 라티시아는 어떻게든 눈물을 짜낼 것이다. 감정 없는 인형이 표정을 모방하듯이.
여전히 그린 듯 양끝이 올라가 있는 라티시아의 입술을 안드레아가 거칠게 삼켰다. 보드라운 살점을 아프게 빨아들이고, 사정없이 혀를 놀려 여린 살이란 살은 온통 쓸고 찔러댔다.
“음, 읍…!”
당황해 버둥거리는 몸을 짓누르고 라티시아가 느끼는 부분만을 연달아 짓찧었다. 그에게 덥석 물린 혀가 신음을 뱉지 못해 잘게 떨렸다. 가쁘게 터져 나오는 숨마저도 남김없이 삼키며 안을 달궈댔다. 벗어나려던 몸부림이 잦아들더니, 낭창한 허리가 완만한 호를 그리며 경직됐다.
“아흣, 아, 아아아….”
강렬한 흥분으로 벌벌 떨리는 가는 허리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부여잡은 안드레아가 안을 빠르게 박아댔다. 도장을 찍듯이, 자궁구를 콱 틀어막은 끝에 적지 않은 양의 정액이 안을 때리듯이 쏘아졌다.
탈력한 내벽이 우물우물 그의 것을 뱉어내자 달콤한 체취에 섞인 아릿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라티시아는 이미 정신을 놓은 후였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격렬한 정사 끝에 쌔근쌔근 잠에 떨어진 라티시아를 보며 안드레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의 예쁜 새에게 붙여진 별명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요정은 무슨.’
혼을 쏙 빼먹는 마녀라면 몰라도.
안드레아는 굳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라티시아의 작고 말랑한 발을 주물렀다. 그의 새가 멋대로 돌아다니는 게 싫어서 안드레아는 일부러 신발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쩌다 그가 자리를 비운 밤이면 라티시아가 정처 없이 주변을 배회하는 걸 안다.
무얼 찾아 헤매는 걸까.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꽁꽁 언 발을 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안드레아는 때마침 누군가 바친 흰 담비 가죽을 들어 올렸다. 자꾸만 도망가려는 새가 괘씸하지만, 새의 주인으로서 얼어 죽지 않게 보살펴줄 필요가 그에게 있었다. 멀리 날아갔다가도 온기가 그리워 돌아오도록.
라티시아는 부드럽게 볼을 간질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공작이 그녀를 깨우는 일은 흔치 않았다. 보통은 알아서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 두는 편이어서, 라티시아는 무슨 일인가 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안드레아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을 쓸던 것을 내밀었다. 양말 비슷하게 생긴 폭신한 털가죽을 받아든 라티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가요, 주인님?”
“도망치다 발이 얼어버리면 곤란하니까.”
“아….”
민망함에 라티시아의 볼이 붉어졌다.
알고 있었구나.
어차피 알 거라는 생각은 했다. 도처에 그의 병사들이 깔려 있으니. 그래도 공작이 직접 입 밖에 낸 이상 더는 혼자만의 일탈은 아니었다.
안드레아의 짐작과 다르게 라티시아는 그의 곁을 벗어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언젠가 버려지고 말 장난감 같은 존재라는 게.
군인들은 공작저의 하인들처럼 조심스럽지 않았다. 적당히 눈치 보며 함구할 줄 모르는 군인들 덕택에 라티시아는 적지 않은 것들을 귀동냥으로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이 전쟁이 끝나면 공작은 왕녀와 혼인하리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티시아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버려지겠지.’
어차피 자신은 인형에 불과하니까. 굳이 왕녀와의 혼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은 언제고 쓰고 버리면 그만인 소모품이었다. 라이너스 왕자와의 대화만 보더라도 그랬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라티시아는 노예인 자신이 진심으로 미워졌다. 견딜 수 없이 미워질 땐 맨발로 눈을 밟았다. 두텁게 쌓인 폭신한 눈에 발을 디디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발밑이 툭 꺼지는 까마득한 느낌이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차갑게 얼어 발가락의 감각이 무뎌지는 것도 좋았다. 이대로 심장까지 얼어버리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버틸 용기가 없다는 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죽는 건 여전히 두려웠다. 버림받는 것도, 하여 홀로 남는 것도… 온통 두려운 것투성이다.
때문에 그녀의 주인이 보드라운 발싸개를 내밀었을 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제 발로 떠나라는 무언의 압박 같아서. 물론 그런 의미의 선물이 아니라는 건 안다. 알기에 공손히 받아들었다.
“감사해요, 주인님.”
이제 웃을 차례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불안이 안면의 근육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억지 미소마저 지어지지 않아서, 라티시아는 몹시 당황했다. 안드레아가 이맛살을 구기며 뭐라고 하려는 찰나, 유하르가 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저….”
그저 보고차 들렸을 뿐인 유하르는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에 멈칫했다. 그냥 모른 척 임무를 수행해도 됐으련만, 어색한 표정의 라티시아와 언짢은 게 분명한 상관의 모습에 발도,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무슨 상황일까.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 유하르의 눈동자가 정신 사납게 굴러다녔다. 라티시아가 깨어 있는 것도 의외였지만….
‘저건…?’
유하르는 처음 제 상관이 이곳에 라티시아를 데리고 왔을 때 느꼈던 당혹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비단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전쟁터에 여자를 불러들이는, 않던 일을 해서만은 아니었다. 숨을 쉬면 그 모양을 따라 자잘한 얼음 조각이 맺힐 정도인 이곳에, 공작의 여자는 맨발인 채였다.
흰 토끼의 앞발처럼 작고 하얀 두 발은 유하르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아무리 무심한 제 상관이라도 설마하니 아끼는 노예를 그런 차림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 발을 제외한 나머지는 바람 샐 틈 없이 꼭꼭 싸매서 더욱 기묘하게 보이기도 했다.
‘차가워요.’
유하르는 차가운 눈밭에 발을 디뎠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신발을 달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라티시아에게 칼리드나스 공작이 뭐라고 답했는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날아오르면 되잖나, 카나리아.’
유하르는 귀를 의심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저런 농담도 던질 줄 아는 남자였나. 얼떨떨하게 바라본 표정이 짓궂으면서도 무척 부드러워서 한 번 더 놀랐던.
‘이리로.’
안드레아는 신발은 필요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라티시아를 번쩍 들어 안고 막사로 향했었다. 작은 체구 때문인지 라티시아는 정말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안겼다.
그날 이후로 라티시아는 줄곧 맨발이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지금은 무척 따스해 보이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발이라기에는 조금 부족한 모양새였다. 바닥에 밑창을 덧대지 않은 발싸개였다.
그러나 유하르가 당혹스러운 건 라티시아가 맨발에서 벗어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유는 발싸개의 원형에 있었다.
‘귀한 백담비로 고작 발싸개라니.’
담비 털로 만든 발싸개는 벌써 바닥과 닿는 부분의 털이 망가져 있었다. 형편없이 모지라진 발바닥 부분에 유하르는 제 가죽이 닳는 기분을 맛봤다.
“주인님께서 선물해주셨어요.”
아까운 백담비 털에서 눈을 못 떼는 유하르의 지대한 관심에 라티시아가 수줍게 중얼거렸다. 불편하게 할 마음은 아니었는데. 유하르는 뒤늦게 자신의 무신경한 행동을 후회했다. 그러나 변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바로 안드레아가 따지듯 물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유하르는 비로소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까닭을 상기했다. 물자 현황을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의례적인 일과 중 하나였다. 목적을 말하자 안드레아가 먼저 집무실로 향했다.
“시작해.”
“네, 우선 받으십시오.”
수치가 적힌 자료를 받아든 안드레아는 그것을 보지도 않고 탁상 위로 던져두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이끄는 군대는 언제나 그렇듯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으니.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훌륭할 테니까. 굳이 문제를 찾자면, 너무… 정말이지 너무나도 훌륭한 게 문제였다.
“…양호합니다.”
며칠째 같은 말로 끝맺으며, 유하르는 진심으로 너무 훌륭한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접전이 지지부진하게 길어지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이길 수 있는데 이기지 않는다.
언제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데, 승전보는 울릴 생각을 않는다. 잡았다간 풀어주고, 몰았다간 놓아주고… 마치 유희를 즐기는 것처럼.
‘적들을 말려 죽일 셈인가?’
진지하게 가능성을 점쳐보았으나, 깔끔하고 가차 없는 안드레아의 성정을 생각하면 확률이 낮았다. 정말이지 높으신 분의 속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유하르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이상입니다.”
나 같은 녀석은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장땡이다, 속편한 결론을 내린 유하르가 이만 막사를 나서기 위해 운을 뗐다. 평소라면 유하르가 덧붙이기 전에 먼저 나가라고 해주었을 것을.
아무래도 다른 지시 사항이 있는 것 같아 유하르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안드레아의 입에서 나온 건 그의 직책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질문이었다.
“그건 발찌인가?”
“네? 아, 이것 말씀입니까?”
안드레아가 눈짓한 것은 유하르가 장미목을 깎아 만든 팔찌로, 돌아가면 여동생에게 주기 위해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직접 깎아 만든 것이었다. 섬세한 손재주는 유하르의 자랑이기도 했다. 팔찌가 발찌로 보이는 건 조금 그랬지만, 손목처럼 가느다란 라티시아를 생각하면 상관의 착각도 충분히 이해할 법했다.
“네, 발찌입니다.”
눈치가 빠른 유하르는 즉시 발찌로 이름 붙인 팔찌를 뿌듯하게 내보였다. 유하르가 알기로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여자의 장신구에 관심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건 그만큼 그의 솜씨가 뛰어나단 뜻이리라.
“소일거리 삼아 만들던 것인데….”
“소일이라.”
“그게….”
“전쟁터에서 아주 한가하고 좋은 자세로군.”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평가에 유하르는 잠자코 손에 든 것을 바쳤다. 안드레아는 유하르가 내민 발찌를 사양 없이 받아들었다. 작은 장식이 라티시아의 발목에서 잘그락거리면 꽤 듣기 좋을 것 같았다. 사슬을 채우고 싶은 그의 소유욕을 어느 정도 잠재워줄 듯도 싶었다.
유하르는 상관의 입가에 떠오른 만족감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안드레아가 팔찌의 존재를 입에 올린 순간부터 어차피 바칠 생각이었으므로 아깝지는 않았다. 오히려 라티시아에게 돌아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남녀 사이의 이면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보이는 바로 판단하자면, 라티시아는 무언가를 조르는 법이 없었다.
바라는 것이 없는, 빈껍데기.
자수정처럼 예쁜 보랏빛 눈이 이따금 공허해지는 걸 유하르는 알고 있었다. 유하르가 아는 걸 안드레아가 모를 리 없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하르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자신의 상관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안드레아는 안 가고 뭐 하냐는 듯 문을 눈짓했다. 심리적으로 가까워졌다고 느낀 건 저뿐인 듯했다. 유하르는 문득 외로워졌다.
그러나 유하르의 외로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감상에 잠겨 있을 겨를이 없었다. 정오 즈음에 뜻밖의 인물이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저분이 왜…?’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유하르는 벨리오나 왕녀를 막사까지 안내하고 나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찜찜했다. 왕녀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고, 어련히 공작이 알아서 잘 처신하리란 걸 알아도 그랬다.
‘괜찮을까?’
몇 걸음 옮기지 않아서 유하르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튀어나온 못처럼 라티시아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
왕녀는 고고했다. 비천한 노예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상함이 묻어났다. 오전에 공작이 갑자기 깨웠던 탓에 채 피로가 풀리지 않아 비몽사몽 누워 있던 라티시아는 왕녀의 등장에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바닥에 한참을 엎드려 있어야 했다.
‘아파….’
무릎에 눌려서인지, 아랫배가 기분 나쁠 정도로 딱딱하게 뭉쳤을 때쯤, 왕녀가 그만 일어나라 명했다.
“너는 예의도 수치도 모르는 천한 짐승이다. 한데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절이라니, 심히 불쾌하구나.”
왕녀의 어조에서는 라티시아에게 명령하는 것조차도 몹시 기분이 상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묻어났다. 자신에게 예를 올릴 자격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던 라티시아는 급한 대로 발싸개를 집어 들고 무작정 막사를 벗어났다.
헐벗은 라티시아를 보고 막사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 둘이 키들거렸다. 갑작스레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나온 라티시아의 머리카락이 칼바람에 흩날렸다. 지독한 추위에 순식간에 귓구멍이 먹먹해졌다. 병사들의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히죽거리는 입만은 똑바로 보였다.
온 세상이 그녀를 두고 비웃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지.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라티시아는 깊은 눈에 빠져 푹 엎어졌다. 이런 바보 같은 꼴이라니. 사방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라티시아는 벌떡 일어났다. 팔도, 다리도, 감각이 없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겨우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났다고 여기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라티시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빽빽한 자작나무였다. 어떤 것이 눈이고, 어떤 것이 나무인지 구별되지 않는, 오직 백과 흑만이 지배하는 세계.
‘여기가….’
어디지.
“누구….”
두려움에 젖은 라티시아의 음성에 왈칵, 눈물이 묻어났다.
“누구 없어요?”
없어, 없어, 없어….
자신의 목소리만이 반향이 되어 돌아왔다. 아무도 없으니 그냥 포기하라고.
길을 되짚고 싶었지만, 강한 바람이 그녀의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나무가 너무 빽빽해서 방향조차 종잡을 수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던 라티시아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웅크린 라티시아의 두 볼에 진한 눈물 두 줄기가 흘러내렸다. 떨어지기 전에 뺨에 그대로 얼어붙은 눈물에 라티시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어찌 되어도 다 괜찮으니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라티시아는 입술을 열었다.
잔잔한 파도, 당신의 귀를 간질이네. 사랑한다 속삭이네. 잠든 그대 듣지 못한다 하여도.
놀랍게도, 노래가 나왔다. 공작이 제 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때가 떠올라 라티시아는 다시 한번 옅게 웃었다. 그러다 제 노래에 취해 그대로 잠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