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과몰입공금]
안드레아는 매일매일 라티시아에 대한 보고를 듣고도 이렇다 할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하르의 속이 타들어갔다.
“…아무래도 팔에 금이 간 것 같습니다. 왼쪽 팔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고했다.”
“그리고, 영양 상태가 몹시 좋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유하르는 빨리 데려오시라 간청하려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곧 쓰러질 겁니다.”
“알았다.”
칼리드나스 공작에게 남이 모르는 가학적인 취미가 있었나? 이쯤 되니 유하르는 헷갈렸다. 테오도르 뷔테르가 자기 걸 빨아보라며 들이댔다는 정황을 전할 때는 분명 제 상관이 라티시아를 불러들일 거라 여겼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눈 한번 깜박하는 법이 없었다. 피식 웃으며 ‘그래서, 했나?’하고 되물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유하르는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굳이 그녀를 감시하는 이유가 무언지. 정말 시체를 건지려는 목적인가? 그건 그것대로 이해 못 할 악취미다만….
“안 가고 뭐 하는 거지?”
유하르의 근본 없는 망상은 딱딱한 질문에 이내 가로막혀버렸다.
“더 보고할 것이 남았나?”
“아닙니다.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상관의 푸른 눈에 서린 냉기에 유하르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원래 이런 남자였지.’
잠시 방심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최근 들어 유독 웃음이 많아진 그의 상관도 한몫했다. 라티시아의 소식을 전할 때면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는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라티시아가 진창을 구르면 구를수록. 그래, 정말 즐거워 보였다….
공작저의 기나긴 복도를 지나던 유하르는 문득 오싹해졌다. 끝끝내 극한에 다다른 라티시아가 목숨을 잃어 정말 시체를 건네게 된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웃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였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아니,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젠장.’
갑자기 유하르의 걸음이 빨라졌다. 피골이 상접한 라티시아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미 위태롭지 않은가. 유하르가 아무리 질 좋은 고깃덩이나 먹을만한 빵을 적선해주어도 라티시아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맹물뿐이었다. 벌써 꽤 여러 날을 그래왔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바삐 움직이면서도 한편으론 안일한 마음도 들었다. 지금까지 별일 없이 목숨을 부지해왔으니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하는. 그러나 유하르는 그다지 운이 좋은 사내가 아니었다.
다시 라티시아를 찾았을 때, 그녀는 물론이고 테오도르 뷔테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망할!’
운이 좋지 않아도 꼼꼼한 유하르는 황급히 만일을 대비해 심어둔 사용인들을 찾았다. 그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라티시아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로카디가 직접 모는 마차가 있었다.
저 작자는 언제 풀려났지?
분명 칼리드나스 공작가에 잡혀 있었는데. 의아했지만 궁금해할 시간이 없었다. 유하르가 맹렬히 추격하자 로카디는 테오도르에게 라티시아를 버리라고 고함쳤다.
“그 저주받은 노예 년을 버리거라, 테오도르! 어서!”
로카디가 목이 찢어지도록 외치건만, 테오도르는 굳건했다. 악에 받쳐서 제 부친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년을 잡아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으면 공작의 얼굴이 아주 볼만할걸요? 절대 놓지 않겠어요. 말이나 빨리 달리라고요!”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칼리드나스 공작의 얼굴이 볼만해지는 게 그리 중요할까. 혀를 차면서 유하르는 더욱 간격을 좁혔다.
로카디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깡말라 비실비실한 계집이라도 덜어내야 가벼워질 것 같은데. 게다가 상대가 원하는 게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라티시아를 내어주면 재수 없게 붙잡히는 일은 없을 테다.
“테오도르! 그러다 우리가 위험해진다! 어서 계집을 줘버려!”
“싫다고요!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요?”
라티시아의 머리채를 움켜쥔 테오도르가 그녀의 귀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음흉하게 웃었다.
“공작이 비싼 값에 되사가지 않으면 널 헐값에 창녀로 굴릴 거야. 헐값이라지만 모이면 꽤 짭짤할걸.”
그러나 테오도르의 야심찬 계획은 바로 무너졌다. 바짝 쫓아온 유하르가 마차 위로 뛰어오르려 하자 당황한 로카디가 중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통제가 어긋난 말들은 제멋대로 뛰었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테오도르가 달리는 마차에서 라티시아를 발로 차 밀어냈다.
사람의 것 같지 않은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유하르는 즉각 추격을 멈추고 라티시아에게 향했다.
“괜찮습니까? 정신을 차려보세요! 이보세요, 제 말이 들립니까!”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늘어져 미동도 않는 라티시아를 흔드는 사이, 요란한 말울음 소리와 함께 굉음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유하르의 시선에 형편없이 부서진 로카디의 마차가 들어왔다.
쓰러진 라티시아를 말 위에 고정한 후, 유하르는 사고 현장을 지나쳐갔다. 부자의 생사를 확인하기에는 이쪽의 일이 급했다.
‘제발….’
라티시아의 숨이 붙어 있길 바라며, 유하르는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
유하르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라티시아의 숨은 가느다랗게나마 붙어 있었다. 그렇게 바랐으면서도, 막상 칼리드나스 공작저에 도착한 유하르는 차라리 그녀가 목숨을 잃은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라티시아의 몰골은 땅에서 파낸 시체 같았다. 꽤 오랜 시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살가죽을 손톱으로 살살 긁어내면 바로 뼈가 드러날 것만 같았다. 말에 태울 때도 짚으로 속을 채운 허수아비처럼 덜렁 들리지 않았던가.
제대로 씻지 못한 몸에서는 시취와 비슷한 악취가 났다. 테오도르에게 맞아서 생긴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고인 고름 속 우글거리는 구더기를 보았을 때, 비위가 썩 좋지 못한 편인 유하르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막판에 마차에서 떨어질 때 뒤틀렸는지 꺾어져 정반대쪽을 향하고 있는 팔도 기괴한 분위기를 더했다.
완전히 망가진 무엇.
유하르는 죽은 듯이 놓여 있는 라티시아를 보며 애도를 표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이런 것’을 원할 리 없다. 그녀는 쓸모를 잃은 새였다. 곧 버려질 그녀의 앞날을 점치다가, 유하르는 그 뒤처리를 십중팔구 제가 떠맡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살아 있는 걸 죽일 수도 없고. 죽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어쩐다.’
마음 약한 유하르가 제 머리카락을 한 움큼은 쥐어뜯었을 때였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깍듯이 인사하면서, 유하르는 본의 아니게 제 상관에게 흉한 장면을 보이게 되어 무척 송구스러워졌다. 안드레아는 이렇다 할 언급 없이 라티시아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유하르는 이제나저제나 지시가 떨어지길 기다렸으나, 어째 제 상관 쪽은 고요하기만 했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유하르는 어쩔 수 없이 안드레아의 기색을 살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용기를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 책임을 묻는다면 유하르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분노를 받아내는 건 온전히 제 몫이었다.
“어….”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눈알을 대각선 위로 올리는데 성공한 유하르는 멍청한 신음을 뱉었다. 뜻밖에도 그의 상관,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일부러 망가뜨린 인형을 보고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일부러…, 일부러?’
유하르의 머릿속에 퍼즐 몇 조각이 떠올랐다. 묵인된 도주, 폭력 상황에의 방치, 갑자기 나타난 로카디…. 그러나 이러한 단서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기 전에 갑자기 깨어진 침묵 때문에 유하르의 퍼즐 조각은 다시 어영부영 흩어져버렸다.
“수고했다.”
“네? 아,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이만 가도 좋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안드레아는 빈사 상태의 노예를 치우라고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느냐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은근한 미소를 띤 채 걸레처럼 늘어진 여자를 가볍게 안아들었을 뿐. 워낙 가볍긴 했지만, 안드레아가 드니 라티시아는 바싹 마른 낙엽같이 달랑 바닥에서 떨어졌다.
유하르는 멍하니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겨울철 나뭇가지 모양으로 앙상한 다리가 너른 어깨 밖으로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자그맣고 창백한 발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문이 여닫히고 안드레아가 객실을 나선 후에도 이상하게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 유하르는 서둘러 칼리드나스 가를 나섰다.
속이 홧홧해지도록 독한 술이라도 마셔야지. 정말이지 유하르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은 참혹한 몰골의 여자도, 기꺼워하던 눈빛 속에 면면히 흐르던 광기도.
***
다행이다.
라티시아는 눈에 익은 상아빛 천장을 보고 가장 처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직감적으로 테오도르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라니, 감사하다니. 라티시아는 스스로가 우스워 얼마간 배가 접히도록 웃었다. 그러다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뚝 멈췄다.
‘뭘까.’
이 기분은. 이상할 정도로 슬프지 않았다. 억지로 테오도르와의 좋았던 기억을 쥐어짜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후련했다. 그녀를 가두는 견고한 새장인 줄로만 알았던 이곳이 진정한 천국임을 라티시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나 기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라티시아는 웃지 않았다.
그저 먹고 자고 눈을 뜨면 다시 먹고 자고.
라티시아는 갓 태어난 새끼 짐승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갈라진 빗자루 같던 머리카락에 윤기가 돌고, 말라비틀어진 닭발 같던 손에 보드랍게 살이 차오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평온에도 걸림돌은 있었다. 밤마다 꾸는 악몽이었다. 테오도르가 귀를 잡아당기고 소리를 지르는 듯 생생한 악몽.
‘라티, 이 쌍년! 죽어버려!’
꿈속의 테오도르는 손도 눈도 제자리에 건재해서, 라티시아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부릅뜬 눈으로 그녀를 윽박질렀다. 불구인 테오도르가 주는 위협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에 떨었던 라티시아이기에, 건장한 테오도르가 주는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번번이,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한 채 하얗게 질려 있다가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아학!”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일어난 라티시아는 어둠을 희미하게 관통하는 달빛 덕분에 제가 어디 있는지 자각했다. 안도의 한숨이 작게 뒤따라 나왔다.
라티시아는 뒤틀어져 있던 팔을 조금씩 움직여보았다. 잘 낫고 있다는 증거로 어제보다 유연했다. 테오도르가 남긴 크고 작은 상처들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아문 상태였다.
하지만 어째서, 뇌리에 새겨진 상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그대로인 걸까.
곤죽이 된 뇌가 흘러넘쳐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부식된 것만 같다. 뼛조각이 부서지지 않도록, 라티시아는 덜덜 떨리는 몸을 꼭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웅크렸다. 조금이나마 진정되길 바랐지만 효과가 없었다.
라티시아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노래를 부르기 위함이었다. 스스로를 위로할 노래를. 곧잘 하던 짓이자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효과도 좋았다. 제 노래가 가진 힘을 아는 라티시아는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
그런데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었다 벌릴 때마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만 공허하게 흩어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라티시아는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아아, 짧게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다행히 아예 소리를 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라티시아는 엄습하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머릿속으로 가사를 음미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려 했다.
작은 꽃, 몰래 피었다 지네. 수줍게 붉힌 볼, 홀로 피었다 지네.
그러나 여전히 귀에 들리는 건 없었다. 라티시아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깔의 절망에 휩싸였다.
‘마지막으로 노래했던 게 언제였지?’
분명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공작저에 오고 나서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결이 다른 두려움이 그녀의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지금 라티시아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온통 물음표뿐이었다.
다시는 노래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버려지는 걸까?
겁에 질린 라티시아의 검은 동공에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냉기 도는 얼굴이 선연히 떠올랐다. 그때, 짧은 쇳소리가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라티시아는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있는 줄도 몰랐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어 조금 전 그녀가 그렸던 것과 똑같은 모습의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명을 지르더군.”
“…….”
“몸은, 많이 나아졌나?”
가까이 다가온 공작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쿵쿵쿵. 심장 고동이 북처럼 그녀의 고막을 울렸다. 문소리에 놀란 가슴의 두근거림이 가라앉을 줄 몰랐다. 라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꾹 눌렀다. 공작이 매일같이 자장가를 주문하던 게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할 수 없을 텐데.’
긴장으로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라티시아의 가느다란 목은 작은 움직임에도 크게 울려서, 턱을 쥔 안드레아의 손에도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겁먹은 토끼처럼 동그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새인 줄 알고 거뒀더니, 네 발 짐승이었나.
안드레아는 피식 웃었다. 그의 여린 새는 생각보다 훌륭하게 망가져서 돌아왔다. 다시는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상처가 아물어도 감히 그런 꿈은 꾸지 못하도록. 그는 그저 어르고 보듬어주기만 하면 되는 지금의 상태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절대적인 순종.
그가 바라는 대로.
안드레아는 만족스럽게 망가진 그의 새를 감상했다. 이 순간 라티시아의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키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주문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해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라티시아를 집어삼켰다.
극한까지 몰렸다가 되살아난 라티시아의 생에 대한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서, 이전의 그녀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짓을 자처했다.
“주인님.”
애원하듯이 제게로 뻗어오는 팔을, 안드레아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옷자락을 쥔 가느다란 손가락은 외줄에 매달린 듯 파랗게 질려 있었다. 갈망을 담은 보라색 눈동자가 느리게, 그러나 단호하게 깜박였다.
“안아주세요.”
“…….”
안아달라는 그녀의 요구에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그러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라티시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할지는 그녀에게 달렸다는 듯이.
라티시아에게 능란하게 남성을 리드할 숫기는 없었다. 그건 그녀의 주인도 잘 알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어쨌거나 공작이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으므로, 라티시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위로 올라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아래에 느껴지는 골격이 단단해서, 꼭 석상에 얼굴을 들이대는 기분이었다. 그래, 석상. 그렇게 생각하자 용기가 솟았다. 비록 입술을 맞추자마자 훅 밀고 들어온 뜨거운 숨결에 바로 사그라졌지만.
겨우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인데도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여전히 아무 반응 없는 공작 때문일까. 높은 나무에 걸린 과실을 따먹듯 고개를 치켜들고 입술을 빨던 라티시아의 손이 둘 곳을 모르고 배회하다 겨우 너른 가슴에 닿았다.
겁 많은 새처럼 살금살금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혀가 안드레아의 치아를 톡톡 건드렸다. 꼭 문을 열라고 두드리는 것처럼. 사양 않고 덥석 집어삼키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안드레아는 그녀가 알아서 하게 두었다.
목적이 따로 있던 이전의 구애와는 달리 오로지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한 라티시아의 노력이 꽤 즐거웠다. 라티시아가 어디까지 자신을 내던질까 궁금하기도 했다. 적어도 테오도르 뷔테르의 미래를 구걸하던 때 보여주었던 것 이상은 되어야 했다.
“주인님….”
입술이 물먹은 꽃봉오리처럼 부풀어 오르도록 키스하던 라티시아가 고개를 떼고 그의 상의를 벗겨도 좋은지 허락을 구했다. 안드레아는 순순히 팔을 들어 그녀를 도왔다. 긴장으로 느릿느릿,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낭비하는 시간을 즐기면서.
라티시아는 생각보다 열심이었다. 안드레아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가슴에 놓인 정점을 빡빡 소리가 나도록 빨아댔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젖꼭지가 성감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라티시아가 두 눈을 꼭 감고 매달려 입술을 오물거리는 걸 보자 비정상적으로 사타구니 사이가 부풀었다.
‘변태 같군.’
과하게 팽창한 아랫도리의 반응에 안드레아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점점 고개를 아래로 내리던 라티시아도 우뚝 솟은 거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안드레아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안드레아는 가뜩이나 긴장으로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가여운 새를 대놓고 놀렸다.
“맛있어 보이나?”
“…그게….”
가벼운 농담에도 라티시아는 대답을 고민했다. 아니라고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긍정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해질 것 같았다. 더 고민하는 대신 라티시아는 치마를 걷어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안드레아가 불뚝거리는 성기를 꺼내놓았다. 놀려댄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살며시 기둥을 쥐고서, 엉거주춤 자세를 낮춘 라티시아가 그 끝에 대고 내려앉았다. 귀두 끝에 미끌미끌하게 젖은 여린 살이 닿았다가 다시 떨어졌다.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계속해.”
아주 사람을 안달 나게 하려고 작정한 듯 들썩거리기를 반복하는 라티시아의 몸놀림에, 초조해진 안드레아가 참지 못하고 걷어 올린 치마를 한 손에 붙잡아 단박에 벗겨버렸다.
“앗…!”
우악스런 동작에 라티시아의 상체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제 가슴을 짚은 손을 떼어낸 안드레아가 그것을 그대로 옮겨 그녀가 놓쳤던 것을 다시 쥐도록 했다. 그리곤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받치고 라티시아가 하는 짓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으음, 응….”
라티시아는 조금 더 다리에 힘을 주기로 했다. 귀두 끝이 붉은 속살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이 정도는 할만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작의 일물이 그녀를 가를 때 주는 느낌을, 꽤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몸이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하는 탓이었다.
때문에 굵직한 호두 같은 안드레아의 귀두만 뜨겁게 달궈졌다 식기를 반복했다. 두 발과 무릎의 힘만으로 버틴 채 반쯤 일어났다 앉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라티시아의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아, 라티시아가 애원했다.
“그냥, 그냥 넣어주시면 안 돼요?”
“싫은데.”
빙글거리는 웃음에 야속한 눈빛이 돌아왔다. 여자가 제 위에 올라타 엉덩이를 흔드는 짓 따위,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다. 언제나 지배하고 잡아 삼키는 쪽은 그였다. 그녀만큼은 너그러움을 발휘해 예외로 두었는데, 발칙한 노예는 감사함을 모른다.
“노예 주제에 명령도 하고. 이렇게 건방져서야.”
“명령이 아니라 부탁… 이에요.”
정말 힘겨웠다. 비단 후들거리는 두 다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끄트머리만 얕게 왕복했는데도 길 끝의 깊숙한 곳이 자꾸만 조여들었다. 어서 꿀꺽 받아먹지 않고 무엇 하냐는 듯이. 좀 더 자세를 낮춰보기도 했지만, 초입부터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에 겁이 덜컥 나선 달싹 엉덩이를 들었다. 그게 안드레아를 얼마나 자극했는지도 모르고.
한마디로 안드레아에게는 괘씸한 짓이었다. 그래서 더욱 여유롭게 기다렸다. 라티시아의 힘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어차피 남은 밤은 그의 것이었으니, 시작 정도는 라티시아에게 주도권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인님….”
라티시아는 이제 완전히 그에게 몸을 걸친 채 울먹이고 있었다. 입에 작은 주먹을 물고 있는 모양으로, 선단이 박힌 입구가 침을 질질 흘려대며 옴직거렸다. 라티시아의 다리 힘이 약해지는 만큼 조금씩, 조금씩, 선단 아랫부분도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뜨끈한 내부와 흘러내린 애액이 사늘하게 식은 외부의 간극이 색달랐다. 기둥을 타고 줄줄 흐르는 투명한 액체를 쓸어 올려 질구에 대고 비벼대던 안드레아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제게 기댄 라티시아의 상체를 떼어냈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간신히 버티고 있던 라티시아의 몸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푸우욱-
끝까지 박힌 기둥이 자궁구를 찧어 올리는 느낌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하흑…!”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떠는 라티시아의 허리를 붙잡아 고정한 안드레아가 아래에서 위로 가차 없이 골반을 쳐올렸다. 질컥질컥, 젖은 음부에 마찰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말간 액이 왈칵왈칵 쏟아져 내렸다.
“아, 아으응, 주인님, 아….”
볼록 솟은 젖꼭지가 위아래로 출렁이는 가슴 위에서 우왕좌왕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양을 바라보는 안드레아의 눈빛이 탐욕스러웠다. 그냥 쳐다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라티시아는 한껏 달아올라선 가슴을 모아 바치듯이 내밀었다.
“주인님….”
안드레아는 마다 않고 탐스러운 과실을 덥석 베어 물었다. 통통하게 물오른 복숭아 같은 젖가슴에선 이질적인 포도향이 났다. 꼬들꼬들한 젖꼭지를 잘게 깨물어 희롱하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흡입하자 홱 젖혀진 라티시아의 목구멍에서 높은 신음이 울렸다.
“아앙! 앙!”
그에게 물린 젖꼭지에서 시작된 찌릿찌릿한 감각이 앙가슴을 타고 배꼽으로, 그리고 자궁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정점을 찍은 흥분의 파고에 활짝 휜 라티시아의 등허리가 잘게 떨렸다. 극렬한 쾌감에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골 안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악몽과도 같은 지난날이 빚어낸 끝없는 상념으로 괴로웠던 라티시아는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이대로 그의 품에 안겨 언제까지고 흔들리고 싶었다.
“주인님…, 흑….”
고통에 가까운 지독한 쾌락의 끝에 라티시아가 흐느꼈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환희와 서글픔 사이를 오락가락 오가며 널을 뛰던 감정의 끝은 암전이었다.
안드레아는 제게 기대 축 늘어진 라티시아를 가볍게 흔들었다.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쭉 뻗어버릴 줄은 몰랐다.
“…일어나야지.”
몇 번 더 라티시아를 깨워보려던 안드레아가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그의 것은 아직 흉흉하게 치솟은 그대로였다. 라티시아의 보드랍고 따스한 속살에 묻힌 채.
“어떡할까, 응?”
안드레아는 말 타는 자세로 잠들어버린 라티시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완전히 무방비한 표정이었다. 모처럼 안도한 채 편안히 잠들어 있는 라티시아를 깨우긴 아까웠다.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나.”
안드레아의 혼잣말에 라티시아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테오….”
제 좆을 뿌리 끝까지 물고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따위라니. 이제 겨우 길드나 했는데 자신이 너무 무르게 대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제라도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 안드레아의 가슴속에 포악한 음심이 들끓었다. 그대로 자세를 바꿔 라티시아를 눕히려는 찰나, 공포에 질린 비명이 연달아 쏟아졌다.
“싫… 싫어, 테오, 싫어…!”
그러곤 응석부리듯 그의 가슴에 코를 비볐다.
“주인님….”
“…….”
이게 뭐라고, 정말이지 이게 뭐라고 삽시간에 화가 탁 풀렸다. 고작 작은 응석 한 번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 바람에 라티시아가 몸을 뒤척였다. 품에서 살짝 벗어난 연약한 여체를 고쳐 안자,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랫배를 가득 메운 이물감에 잠시 까무러쳐 있던 라티시아가 가늘게 실눈을 떴다.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하나로 연결된 부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주인…님…?”
둘레만으로도 그를 짐작한 건 대견했지만, 만족스럽진 않았다. 안드레아는 슬쩍슬쩍 가볍게 아래를 튕기며 수컷 짐승이 암컷을 물 듯 라티시아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내가 네 주인이라는 자각은 있나.”
“흣… 네….”
라티시아가 자신 없이 대답했다. 정사 중에 혼자 가버렸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들었다. 긴 꿈을 꾸었는데, 실상은 발기가 풀리지 않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도. 무서우면서도 안온한 꿈이었는데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걸 떠올릴 겨를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면 확실히 알려나.”
안드레아는 그녀를 번쩍 안고 거울 앞에 세워놓았다. 라티시아는 공작에게 사로잡힌 자신과 똑바로 마주 서야 했다.
“여기까지, 들어갈 거다.”
음습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안드레아가 그녀의 배꼽 부근을 짚으며 서서히 자신의 남성을 밀어 넣었다. 한쪽 날개만 펼쳐진 나비처럼 오른편 발목이 잡힌 채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굵은 대가리가 빠듯하게 맞물렸다.
“아, 흐아….”
성난 구렁이처럼 사납게 들이미는 기세에, 잠시 그가 빠져나갔던 사이 오므라들어 좁게 맞물려 있던 길이 새로이 뚫리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남에게 관계하는 걸 보인 것도 수치스러웠지만, 직접 눈으로 목도하는 충격과는 비할 바 아니었다.
마침내, 그 커다란 것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고환만이 안달하듯 그녀의 엉덩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주인님, 너무, 너무 깊어요….”
잠깐 발끝에 힘을 풀었던 라티시아는 명치까지 찡하게 울리는 묵직한 느낌에 헉, 숨을 몰아쉬며 다시 종아리에 힘을 주어 바로 섰다. 키부터가 머리통 하나만큼은 차이가 나는데, 이런 자세론 무리였다. 단지 육중한 덩어리를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때문에 안드레아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을 때, 라티시아는 처절하게 흐느꼈다.
“앙, 아아! 하으읏! 주인, 님! 아, 앙! 흐으, 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그것이 어떻게 제 안을 오갈 수 있는지. 이리 고통스러운데 속을 긁어내리며 빠져나갈 때마다 아쉬운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뭔지. 어째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담금질해주었음 싶은지.
“여길 핥는 걸 특히 좋아하잖나.”
그녀를 반쯤 돌려세운 공작이 뾰족하게 솟은 유두를 희롱했다. 움찔, 안쪽의 근육이 크게 수축했다. 동그란 엉덩이에 골이 움푹 팰 정도로. 그녀의 아랫구멍이 급하게 조여드는 모양이 생생했다.
“하흐….”
적나라한 광경을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라티시아의 턱을, 안드레아가 똑바로 잡아 접합부로 향하게 했다. 오직 그만을 위해 벌어진 흠뻑 젖은 가랑이 사이로 번들거리는 기둥이 끝없이 드나들었다.
이건 단순히 몸을 섞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즈음, 라티시아는 빨라진 안드레아의 움직임에 거울을 잡고 간신히 버티며 헐떡이고 있었다. 더운 숨이 유리에 번지며 끊임없이 덧씌워졌다. 뿌연 거울 너머로 보랏빛 눈동자만이 선명했다.
공작의 커다란 손이 거울에 서린 김을 한숨에 지웠다. 뿌득, 마찰음과 함께 짙은 쾌감으로 일그러진 공작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동시에 라티시아도 절정에 올랐다.
“아응, 하아앙!”
거울 속에 비친 안드레아의 얼굴에 입술을 맞추는 자세로 무너진 라티시아가 숨을 색색 골랐다. 그게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아쥐고 제게 당긴 공작이 입술을 앗고 혀를 얽으며 남은 것을 털어내듯 허리를 잘게 흔들었다.
“아응, 으읏, 응….”
쾌감의 여운에 라티시아가 몸을 떨었다. 안드레아는 그제야 몸을 물려주었다. 퉁, 입구를 빠져나온 귀두를 따라 덩어리진 정액이 투둑, 툭, 떨어졌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느릿느릿 흘러내리는 백탁액을 쓸어 올려 그녀의 구멍에 대고 문지르며 안드레아는 생각했다.
유독 라티시아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사출액이 아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길게 생각하진 않았다. 아쉬우면 흘린 만큼 다시 채워 넣으면 되는 문제였다. 밤도, 낮도,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존재하니까.
안드레아는 라티시아를 안아 침대로 옮겼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라티시아의 얼굴에 불안이 어렸다.
아니죠? 설마….
노예인지라 차마 묻지 못하고 눈에만 떠오른 물음표에 안드레아가 쐐기를 박았다.
“못 견디겠거든 아까처럼 기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