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12화 (12/17)

# 12

[과몰입공금]

로카디는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테오도르가 원래부터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게 연락이 없었다. 종종 모습을 보이던 술집에서도 테오도르를 못 본 지 한참 되었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로카디, 테오도르 그 녀석이 출세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 좀 진득이 기다려보라고. 또 누가 알아? 후세에 길이 남을 그림을 그리게 될지.”

술집 주인의 넉넉한 덕담에는 웃어넘겼지만 어째서인지 성기가 잘린 채 발견되었다는 빅터가 자꾸 떠올라, 로카디는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도움 안 되는 녀석들이랑 어울리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공작저에 찾아가도 공작이 만나주지 않으니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막상 만난다 해도 할 말이 없긴 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테오도르를 못 보았냐고?

‘어떡한다….’

그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이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테오도르가 작업에 몰두해 있느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식의 긍정적인 내용이면 더 좋고. 하지만 공작저는 로카디가 제집 마당처럼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제기랄! 어? 저건….”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리던 로카디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자주 노예들을 대량으로 사가는 올리비아 트랑, 그 여자였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로카디는 이마를 쳤다. 공작저에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을 포섭하면 될 것을. 그런 점에서 올리비아 트랑은 매우 적격이었다.

로카디는 올리비아 곁으로 다가갔다. 마음에 드는 노예가 있는지 올리비아가 젊은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건 얼마지?”

“아시다시피 제가 취급하는 노예는 모두 특상품입니다.”

로카디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특히 방금 고르신 저 노예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싱싱하죠. 길들이는 맛도 있을 겁니다.”

처음 노예시장에 잡혀온 노예들은 처한 현실을 부정하느라 팔려가서도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가학적인 행위를 즐기는 이들은 부러 그런 노예를 사가 굴복할 때까지 채찍질을 하기도 했다. 올리비아 트랑은 구미 당겨하면서도 언짢은 티를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었잖아?”

노예상 주제에 가타부타 말이 많다는 눈빛이었다. 지금이 바로 엎드릴 때였다. 기회를 포착한 로카디가 개처럼 살랑거렸다.

“저 노예에게는 값이 매겨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특별한 부탁이 있을 때 보답용으로 마련해둔 것이거든요.”

올리비아의 눈빛이 호의적으로 변하기까지는 순간이었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볼까?”

옳다구나. 역시 제대로 짚었다. 로카디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며 올리비아를 은밀한 장소로 안내했다. 로카디가 칼리드나스 공작저를 입에 올리자 올리비아의 호기심이 한층 짙어지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올리비아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장담할 순 없지만, 공작저에 심어놓은 사람이 있으니 비교적 정확한 소식을 얻어올 수 있겠지. 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올리비아는 뜸을 들이며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단서를 얻을게 하나라도 있나 싶어 무례할 정도로 그녀의 낯을 뜯어보던 로카디에게 올리비아가 다소 냉정하게 일러주었다.

“그 소식이 긍정적일 거란 기대는 하지 말고.”

“물론… 물론입죠.”

떨떠름하게 답했으나, 로카디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지명했던 노예에 덤으로 어린 노예까지 얹어주며 후하게 굴었던 건, 희망의 일환이었다. 좋은 일을 베풀었으니, 좋은 소식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그러나 며칠 뒤 올리비아가 전해온 소식은 비보 중의 비보였다. 테오도르로 추정되는 남자가 공작저에 별도로 마련된 지하 공간에 갇혀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어 로카디의 가슴을 무너뜨린 편지는, 해당 인물의 신체 일부가 심하게 훼손되었을 걸로 추정된다는 결론으로 이미 무너진 로카디의 가슴을 완전히 허물어뜨렸다.

그대로 병상에 드러누운 로카디가 갑자기 벌떡, 떨치고 일어난 건 사흘이 더 지나서였다. 몇 번이나 읽어 외워버린 편지를 벽난로 속에 던져 태워버린 로카디의 두 눈이 분노로 활활 불타올랐다. 믿을 수 없다. 저 편지는 거짓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공작저로 들어가야 한다니, 다시 원점이었다. 다행히 올리비아는 편지에 테오도르가 갇혀 있을 법한 장소를 상세하게 기술해두었다. 게다가 곧 있으면 벨리오나 페를레티 왕녀의 생일 축하연이었다. 그날만큼은 공작도 성을 비울 거고, 공작저의 하인들도 모처럼 긴장을 풀 것이다.

‘기다려라. 테오도르.’

로카디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올리비아에게 답장했다.

‘원컨대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이 불쌍한 아비를 도와주십시오….’

구구절절 비통함에 대해 늘어놓은 편지는 마지막으로 라티시아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는 구구절절한 간청으로 끝맺었다.

처음 로카디의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올리비아는 이 일에 별로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몇 가지 정보의 대가치고는 괜찮은 노예를 얻은 게 마음에 들었을 뿐. 하지만 로카디가 마지막에 언급한 인간 카나리아, 라티시아의 이름을 보았을 때에는 마치 자기 일인 양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예 방법이 없진 않지.’

로카디에게 왕녀의 생일 연회에는 안드레아가 자리를 비우니 아무래도 빈틈이 있을 거라고 조언을 적어 내려가던 올리비아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곧 눈엣가시가 사라진다.

그럼 어렵지 않게 본인의 자리를 되찾을 거라고 올리비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끔은 별난 것에 끌리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도 별수 없는 남자로구나 싶다. 그게 더욱 매력적이어서 문제지만.

***

올리비아가 문전박대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내심 올리비아가 고까웠던 벨리오나에게는 무척 기꺼운 소식이어서, 종종 시녀들에게 올리비아의 근황을 들려주길 청했다. 시녀들은 왕녀를 위해 기꺼이 앵무새를 자처했다.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면, 벨리오나는 마치 소문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시늉을 했다.

처음엔 그저 안드레아의 변심이 즐거웠다. 그러나 은발 노예의 존재의 언급이 잦아지자 더 이상 웃을 수만은 없었다. 벨리오나는 자신의 생일 축하 연회를 적절히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안드레아는 둘이서만 장미 정원을 거닐고 싶다는 왕녀의 청에 흔쾌히 응했다. 속이야 어떻든 다른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벨리오나는 크게 만족했다. 서슴없이 대화 주제로 노예를 끄집어낸 건 그래서였다.

“칼리드나스 경. 아버지께서 제 배우자로 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명쾌한 답이었다. 힘이 느껴지는 중저음에 벨리오나는 착각하고 말았다. 그도 혼인을 원하고 있다고. 전에 없던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그러니 어떤 말이든 해도 되겠지. 벨리오나는 은밀한 속내를 빠짐없이 내비쳐 보였다.

“저는 아내로서 본분을 다할 생각이에요. 최대한 배우자를 존중하고 이해하면서요.”

“그렇습니까.”

“네, 물론이요. 그런 의미에서 경의 사생활도 존중하고 싶어요. 물론 부부생활이 더 우선이어야 하겠지만.”

부부생활, 부분에서 벨리오나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붉혔다. 목소리도 조금은 떨렸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안드레아도 배우자가 되길 바란다는 착각이 벨리오나에게 용기를 실어준 까닭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다른 여자들과 관계하면서 완벽하게 질 내 사정을 피해왔던 건 자신을 염두에 둬서가 아닐까? 호의적인 지금의 분위기가 벨리오나의 이지를 흐렸다.

“저는 이해심이 아주 깊답니다.”

이만하면 암시하는 바를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벨리오나는 옆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조각 같은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벨리오나의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근사한 외모에 홀려 잠시 할 말을 잊었을 정도였다.

덕분에 안드레아는 방해 없이 라티시아 생각에 빠질 수 있었다. 유난히 향이 짙은 왕실의 장미를 짓이겨 라티시아의 몸에 바르는 상상. 장미꽃 향기와 라티시아의 체향이 섞이면 어떨지 궁금했다.

그가 요구하는 건 이를 앙다물면서도 다 받아들이니 장미즙을 바르면 분명 장미처럼 빨개져선 얌전히 있겠지. 예상되는 빤한 반응이 재밌어서 안드레아는 조금 웃었다. 안드레아의 즐거운 상상을 방해한 건 어쩐 이유에선지 숨이 가빠 보이는 벨리오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뻣뻣한 소가죽 같은 벨리오나를 내려 보다가 무심코 이맛살을 구겼다. 온통 붉은 꽃 속에 잠겨 있는 라티시아의 하얀 나신을 그리고 있던 그에게 벨리오나는 백 년은 족히 묵어 빛바랜 초상화 속 여인 같았다. 완고하고 고지식한.

왕녀가 무슨 얘길 했더라?

사생활. 존중.

대강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안드레아는 결혼한다 해도 사생활을 공유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왕녀는 국왕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장기 말이었다. 칼리드나스 가에서 장기 말의 역할은 그의 후계자가 될 아이를 낳는 것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해서는 안 되었다. 때문에 왕녀의 입에서 이어진 말들은 그의 입장에서 꽤 주제 넘는 참견이었다.

“하지만, 노예는 안 돼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명문가의 여식들이라면 모를까. 원한다면 제 시녀들 중 몇을 고르셔도 좋아요.”

“너그러우시군요.”

남편의 잠자리 시중을 위해 자기 시녀들을 바치겠다니. 왕녀이자 아내로서의 자존심은 깡그리 잊은 듯한 발언에 안드레아가 비꼬았지만, 벨리오나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노예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에요. 소나 말, 닭 같은 거요. 짐승을 침대로 끌어들이는 건 공작가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들을 안드레아는 무심히 넘겼다. 와중에 엉뚱하게도 사슴이 떠올랐다. 여리디여린 흰 사슴의 눈은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이었다. 굳이 짐승에 비유하자면 라티시아는 사슴에 가까웠다. 가느다란 발목하며 순한 눈매하며.

카나리아라는 걸맞은 별명이 있지만 안드레아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흰 사슴과 카나리아, 어느 쪽이든 소나 말, 닭은 확실히 아니었다.

“오늘 따로 만나자고 한 건 이 얘기를 드리기 위해서였어요, 칼리드나스 경.”

지루한 독대도 슬슬 끝이 보였다. 저 멀리서 유하르가 뛰어오는 모습을 보며 안드레아가 나란히 걷던 벨리오나의 앞을 막아섰다.

갑자기 동경하는 상대와 마주 서자 설렘에 부푼 벨리오나의 가슴이 요동쳤다. 짙은 장미향,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빛, 멀리서 들리는 음악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했다. 정말이지, 고백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안드레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벨리오나의 장밋빛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그런데, 왕국에 노예가 있습니까?”

낯 두꺼운 질문이었다. 지금껏 그녀의 당부를 단번에 부정하는 태도에 벨리오나는 갑자기 눈앞에 선 장신의 남자가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주변 상황도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았다. 어둑한 밤하늘은 음침했으며 연회 음악은 진혼곡 같았다. 더하여 짙은 장미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시다시피 노예는 금지니까요.”

벨리오나는 미소 띤 낯으로 친절히 국왕의 방침을 상기시켜주는 안드레아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과 시선이 닿자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차가운 눈동자에 온기가 담기는 일은 없으리라. 절대로 자신을 사랑할 일 없는 눈이었다.

“저…, 그래도….”

금지되었어도 알음알음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은밀한 거래의 대가로 요정같이 예쁘다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의 반응만 봐도 안드레아가 그녀를 무시할 거란 예측은 너무나 쉬웠다. 그럼에도 눈앞의 남자를 놓치기 싫어서 벨리오나는 그를 설득하고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노예라는 건 말이죠, 제도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러니까, 규정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분명히요.”

벨리오나가 더듬거리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단어들을 나열할 동안, 안드레아의 얼굴에 희미한 짜증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겁이 덜컥 났다. 왕녀가 갖춰야 할 위엄이 바닥에 꽂혔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벨리오나는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짜증이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서서히, 조심스럽게. 벨리오나는 안드레아의 시선이 움직인 자취를 따라 눈을 움직였다. 그리고 안도했다. 안드레아는 자신과의 대화에 기분이 상한 게 아니었다. 시선의 끝에는 유하르가 있었다. 유하르의 굳은 얼굴과 서성이는 걸음에서 초조함을 읽은 벨리오나가 우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바쁜 일이 있는 줄 모르고 너무 시간을 빼앗았군요. 할 말은 다 전했으니 가보셔도 좋아요.”

이제 안드레아가 인사치레 할 차례였다. 배려에 감사하다든가,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든가. 그러나 안드레아는 가벼운 묵례만으로 일언반구 없이 그녀 곁을 벗어났다. 모멸감을 느낀 벨리오나는 서둘러 믿을만한 시녀를 찾았다.

칼리드나스 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오라는 은밀한 분부에 시녀는 냉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감시인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것만큼은 유하르가 장담할 수 있었다. 다만 노래하는 카나리아가 한 번에 여러 명을 재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점치지 못한 것만은 분명 잘못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테오도르와 라티시아는 이미 공작저를 멀리 벗어난 뒤였다. 황급히 뒤쫓았지만, 로카디만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추격을 예상한 로카디는 자신을 내어주고 아들을 도망시키는 수를 썼다.

“테오도르 뷔테르의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멀리 도망가진 못했습니다.”

부친 로카디까지 희생했지만, 물정 모르는 두 남녀가 도망쳐봐야 안드레아의 손바닥 안이었다. 두 사람이 숨어든 곳은 골짜기의 작은 마을로, 때마다 공작저로 치즈와 절인 고기를 상납하는 곳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감시인을 붙여둔 유하르는 보고를 위해 지체 없이 안드레아에게 돌아왔다.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잡아오겠습니다.”

유하르는 묵묵히 생각에 잠긴 안드레아의 안색을 살폈다. 올리비아와 로카디가 모종의 거래를 주고받은 걸 일찍이 파악한 안드레아는 진작부터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놓친 걸 분노하겠지, 예상했는데 상관의 기분은 뜻밖에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내가 잘못 봤나?’

스스로를 의심하며 다시금 의중을 읽어보려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유하르는 의외의 지시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그대로 두어라.”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즉각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라티시아 없이 잠든 날이 하루도 없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유로 그냥 두라는 것인지. 항간에 떠도는 얘기처럼 라티시아의 노래에 중독되었던 건 아닌지.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유하르는 깔끔하게 물러났다. 저 따위가 감히 칼리드나스 공작에게 속뜻을 물을 주제가 아니었다.

유하르의 궁금증을 안드레아도 모르는 바 아니나, 굳이 친절하게 설명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라티시아가 도망갔다.

괘씸하긴 했으나 공작저의 수많은 사용인을 순식간에 재운 실력만은 가상했다. 그건 곧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그동안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남아 있던 건 테오도르 뷔테르 때문이겠지.’

안드레아는 라티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테오도르의 실체를 밝히지 않았던 바울이라는 영감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러곤 한때나마 그 늙은이의 저의를 이해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굳이 테오도르 뷔테르가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쓰레기는 따스해봤자 악취나 풍길 뿐.

“저… 만약….”

이미 테오도르의 상태를 알고 있는 유하르가 머뭇거렸다. 라티시아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멀쩡한 사람을 카나리아라고 부르기도 낯간지럽고, 이름을 입에 담기도 뭐했다. 고민하던 유하르는 주어를 생략하고 묻기로 했다. 그래도 충분히 뜻이 통할 테니까.

“…상하게 하면, 그러니까 폭행 같은 상황이 생기면 저지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거세된 테오도르가 라티시아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어차피 한정적이니 안드레아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 테오도르의 밑바닥을 겪으며 라티시아가 처절히 구르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완전히 망가져버리길. 오갈 곳 없어진 새를 주워오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다.

유하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되어도요?”

안드레아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놈이 그럴 위인이나 되나. 기껏해야 화풀이 정도일 테지. 그래도 유하르의 신중함은 높이 샀다. 그래서 대강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땐 시체를 거둬오도록.”

유하르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그 바람에 대답마저 늦었다.

“…네.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다만, 솔직히 나서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결국 유하르는 찜찜한 기분을 안고 어정쩡한 태도로 안드레아 곁을 벗어났다. 안드레아는 권련을 피워 물며 천천히 거닐었다. 뿌옇게 흩어지는 긴 연기를 바라보며 막연히 생각했다. 당분간은 밤이 길 것 같다고.

***

라티시아와 도주한 테오도르의 행동은 안드레아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라티시아에게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어댔다. 라티시아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욕들을 묵묵히 들어 넘겼다. 악에 받친 테오도르가 그저 안쓰러웠다.

로카디에게 대강의 사정을 전해들은 라티시아는 어쩔 수 없이 ‘안식에 이르라’를 불러야 했다. 너무 깊게 재운 나머지 영영 깨어나지 못해, 바울 할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곡이었다. 다시는 부르지 않으려 했건만,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티시아는 잠든 테오도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삼켰다.

‘테오….’

그렇게 찾아 헤맸던 테오도르의 모습은 처참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악취가 풍겼다. 황급히 부축하자 테오도르가 지팡이를 놓친 맹인처럼 손을 휘휘 내저었다. 줄곧 눈을 감고 있었던 건 흘러내린 피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라티시아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기분을 맛봤다.

한편으로는 온전히 둘만 있을 수 있어서 기뻤다. 테오도르가 이렇게나 힘든 상황인데 기쁘다니. 자신은 혹시 미친 게 아닐까, 의심하면서.

“테오도르. 이제 내가 지켜줄게.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하게.”

겨우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피신해 라티시아는 테오도르를 구석구석 닦아주며 열심히 안심시켰다. 마음이 통했을까. 테오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공작저를 떠난 후로 처음 보는 테오도르의 웃음에 라티시아의 가슴이 조금은 부풀었다. 희망을, 본 것 같았다. 비록 바로 진창에 처박혔지만.

“미친년.”

“…….”

제가 무얼 들은 걸까? 듣고도 믿을 수 없어 라티시아는 귀를 의심하며 테오도르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테오도르가 재차 지껄였다.

“정말이지 이거 완전 미친년 아니야? 지켜주긴 네까짓 게 뭘 지켜준다는 거야? 이미 다 잃었는데.”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시들어 있는 바지 앞섶을 가리켰다.

“너도 아까 씻겨주면서 봤잖아? 내가 어떤지. 그러고도 잘도 지껄여대?”

라티시아도 그의 남성이 훼손되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주머니처럼 생긴 고환이 잘려나간 부위를, 라티시아는 최대한 조심히 닦아냈었다. 오로지 테오도르가 고통스럽지 않도록 몸을 닦는 데만 집중하려 애썼다.

“테오.”

라티시아는 어떻게든 테오도르를 위로하고 싶었다. 언젠가 정원에서 그가 그녀를 위로해주었던 것처럼.

“전에 그랬었잖아. 마음이 중요하다고. 난….”

테오도르가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가 늘 말해왔던 것처럼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 서로 아껴주고 위하는 마음, 그것만 있어도 된다고. 하지만 테오도르는 라티시아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미치광이처럼 머리를 흔들며 웃어댔다.

“와하하하, 하하! 라티, 오오, 라티!”

저러다 숨이 넘어가는 것 아닌가 싶게 웃어대던 테오도르가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치곤 라티시아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멍만 남은 눈이었지만, 마치 그녀가 보이는 것처럼 눈썹을 크게 치켜올린 테오도르가 싸늘하게 뱉었다.

“죽어. 죽어버려, 라티. 죽어버리라고!”

라티시아는 귀를 막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노래했다. 마치 테오도르의 저주를 막으려는 것처럼. 라티시아의 입에서 노랫가락이 나오자 테오도르가 또다시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 빌어먹을! 듣기 싫다 이거야? 어? 라티, 이 망할 계집년아!”

테오도르의 발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욕설을 뱉어내던 테오도르는 그녀의 노래에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테오도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도 라티시아는 꽤 길게 노래를 끌었다. 혹시라도 테오도르가 다시 깨어날까 봐 두려웠다.

맹세코, 테오도르 자체가 무섭거나 싫어져서는 아니었다. 누구나 테오도르와 같은 처지에 놓이면 같은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쁜 건 테오도르가 아니다. 나쁜 건 그녀의 주인, 안드레아 칼리드나스 공작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끔찍한 짓을….’

차오르는 원망을 이기지 못해 라티시아는 이를 앙다물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동안 좁은 실내를 서성였다. 복수, 복수해야 한다. 테오도르를 이렇게 만든 공작에게 반드시 복수할 테다.

하지만 당장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무력감에 빠진 데다가 누군가를 증오하는 건 여러모로 소모가 극심한 일이라 라티시아는 금세 지쳐버렸다.

‘내일, 내일은….’

테오도르도 조금은 진정하지 않을까? 일단은 테오도르의 안정이 중요했다. 그녀가 열심히 돌보면 테오도르도 차차 나아질 것이다. 복수는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겠지. 라티시아는 상황을 마냥 비관적으로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테오도르와 함께인 만큼 반드시 희망이 솟는 순간이 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라티시아의 바람과 달리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당장 입에 풀칠할 음식부터가 문제였다. 테오도르의 상처가 빨리 회복되어가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기운이 팔팔해진 테오도르는 그만큼 라티시아에게 못되게 굴었다.

“테오, 부족하겠지만 먹어둬.”

라티시아는 제가 굶어도 테오도르만큼은 굶기지 않으려 애썼다. 오늘도 운 좋게 적선 받은 빵과 우유를 모두 테오도르에게 내밀었다. 손을 끌어다 조각 낸 빵 조각과 우유 컵의 손잡이를 쥐어주자 테오도르가 비웃었다.

“또 빵이야? 너나 처먹어.”

“미안….”

노예인 라티시아는 굶는 게 익숙했지만, 부유한 노예상의 아들이었던 테오도르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구운 지 오래되어 조금은 딱딱한 빵을 보며, 라티시아는 군침을 삼켰다. 정말, 정말 뜬금없이 공작과 함께 했던 식사가 떠올랐다. 동그랗게 부푼 빵을 보며 마냥 신기해했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바라보던 공작이.

“그래도 먹어야 해, 테오.”

라티시아는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지우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테오도르에게 빵을 건네주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지 테오도르도 이번에는 군말 없이 받아들었다. 라티시아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테오도르가 빈말로라도 그녀에게 권하는 법 없이 빵의 마지막 조각을 씹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불쑥, 그녀 앞에 놓여 있던 접시를 치우던 공작의 손이 떠올랐다. 이내 고기가 담긴 포크를 내밀었던 손이. 그녀가 자신의 배에 조금도 들어갈 자리가 없을 때까지 먹을 동안, 공작은 그녀가 먹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포도주를 마셨더랬다. 지금 그녀가 테오도르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또….’

왜 자꾸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각나는 건지. 괴로운 기분에 싸여 라티시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마저도 테오도르의 신경을 건드릴까 봐 숨죽여가며 했다. 테오도르는 별것 아닌 일에도 짜증을 부리곤 했다.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테오도르가 그녀를 살아 있는 재앙처럼 여기는 것도, 때때로 발작하듯 그녀에게 죽으라고 고함치는 것도. 다 괜찮았다. 다만, 테오도르의 인상이 점점 변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눈앞의 테오도르가 그녀가 알던 그 테오도르가 맞을까.

거죽만 닮은 다른 누군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테오도르의 인상은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곧잘 싱글거리던 상냥한 낯은 자취조차 찾을 수 없었다. 수시로 꽃과 별을 노래하던 입술은 갖은 욕설을 뱉느라 흉하게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라티시아는 가끔 헷갈렸다. 자기가 원래 알던 테오도르가 정말 존재하긴 했던 건지.

‘무슨 생각이람.’

그럴 때마다 라티시아는 자책했다. 하루아침에 신체를 난도질당했는데 어떻게 싱글거리고 고운 말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라티시아의 이해심이 폭을 넓혀갈수록, 테오도르의 인내는 바닥을 드러내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여느 때와 똑같이 빵과 우유를 얻어온 날이었다.

“라티. 이런 것들은 어디서 얻어온 거야?”

“어…?”

예전의 테오도르처럼 다정한 물음에 잠시 멍했던 라티시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골목 입구에 앉아 있으면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이따금 먹을 것을 줘.”

“그게 뭐야. 한마디로 구걸한 거네?”

“으응….”

부끄럽지만 적선 받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에게 돈이 있는 것도 아니요, 쓸만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몸이 약한 데다가 무턱대고 일자리를 달라고 할 숫기도 없었다. 라티시아는 그저 얌전히 엎드려 손을 내밀고만 있었다. 그것마저도 무한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러니까 매일 이따위지.”

테오도르는 빵을 집어던짐으로써 라티시아의 고생을 단숨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라티시아도 구걸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잘 알고 있기에 잠자코 있었다.

“라티, 돈을 벌어야지 않겠어?”

“응. 벌고 싶어.”

하지만 진짜로 방법을 몰랐다. 그녀의 눈에 띄는 외모를 가리기에도 급급했다. 은발에 보라색 눈은 흔치 않기에 발각되기 쉬웠다. 혹시나 소문이 퍼져 공작이 둘을 찾으러 올까 봐 라티시아는 전전긍긍했다. 그녀와 달리 테오도르는 그 점에 대해서는 별걱정이 없는 듯했다.

“그럼 뭐라도 팔아봐.”

“팔라니, 뭐를?”

그녀가 지닌 것 중에서 값진 것이라곤 걸치고 있는 옷 한 벌뿐이었다. 사정은 테오도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카디가 중간에 잡혀가는 바람에 둘은 거의 맨몸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오,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어.”

“잘 생각해봐, 라티.”

테오도르가 은근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팔 게 없는지.”

“진짜… 모르겠어.”

“흠…….”

뭐가 웃긴지, 테오도르가 턱을 쓸며 키득거렸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불순해서, 그녀는 감히 담을 수 없는 그런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것 같다고. 아니나 다를까.

“보지.”

“…….”

“잘하잖아. 다리 벌리고 엉덩이 흔들어대는 거.”

“모, 못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고 라티시아가 도리질 쳤다. 테오도르가 매춘을 강요하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연신 부정하는 라티시아에게 테오도르는 퍽 너그러운 태도를 취했다.

“못해? 하긴…. 아무한테나 굴리던 몸은 아니니까.”

“테오….”

“그럼 나한테도 똑같이 해줘.”

“똑같이…? 무엇을….”

짐작하는 바가 있었으나 아니길 바랐다. 테오도르는 무척 상심한 상태니까. 몸이 시들면 마음도 시들게 마련이니까. 하물며 테오도르는 눈을 잃었다. 화가인 테오도르에게 눈을 잃은 건 전부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라티시아가 아무리 노력해도 테오도르의 상실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테오도르가 바라는 건 다 들어줄 마음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그럴 마음이었는데, 그런데….

“공작하고 했던 것 전부 다.”

“……!”

라티시아는 어느새 뒷걸음질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테오도르는 팔을 움직여 제 중심부를 툭툭 쳤다. 그럴 때마다 팔에 달린 손이 무력하게 덜렁거렸다.

“그 새끼 좆은 잘만 빨아줬잖아? 자, 어서.”

“테오….”

뒤는 벽이었다. 라티시아를 궁지로 몰아넣은 테오도르가 더욱 야멸차게 지껄였다.

“뭐든 한다며. 내 손과 발이 되어주겠다며. 그럼 바지를 내리고 좆을 꺼내.”

“이러지 마, 테오.”

라티시아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테오도르의 성기를 애무하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를 좋아한다며. 사랑한다며. 나랑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싶다며!”

“좋아해, 테오. 사랑해. 죽을 때까지 함께… 정말이야.”

진심이었다. 그러나 성애는 별개였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무얼 하며 밤을 보내는지 라티시아도 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하지만 어째서….

테오도르와는 할 수 없는 걸까.

내키지 않는 걸 떠나서 거부감이 드는 걸까.

‘망가진 거야.’

공작의 노리개로 지내는 동안 어딘가 무너진 것이 틀림없다. 공작의 밑에서 헉헉 신음할 때마다, 아랫도리가 정액으로 범벅이 될 때마다, 넣어달라고 조르며 암캐처럼 엉덩이를 흔들어댈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미안해, 테오. 정말 미안해.”

“하!”

라티시아의 사과는 테오도르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못 빨겠어? 왜? 귀하신 공작님 게 아니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테오, 난….”

“창녀.”

“…….”

“암캐.”

“…….”

“좆물받이 갈보년 주제에 뭘 가리는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걸 알면 돌이킬 수 있을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테오도르가 음산하게 요구했다.

“이도 저도 싫다면 네 눈을 나한테 줘.”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하지만 라티시아는 테오도르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걸 알아도.

“테오, 좀 더, 좀 더 먹을만한 걸 구해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라티시아는 도망치듯 테오도르의 곁을 벗어났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둑한 길 위에 선 라티시아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자리를 지켰다. 오래도록. 그래봤자 마지막에 그녀의 발끝이 향할 곳은 결국 지옥 같은 오두막이겠지만.

절정을 향해 달리던 테오도르의 폭언이 폭행으로 이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폭언은 잠자코 듣고 폭행은 순순히 당해준다.

라티시아는 급격히 피폐해졌다.

거세당한 테오도르는 비정상적으로 식탐과 폭력이 늘었다. 끊임없이 라티시아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고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바로 손을 올렸다. 테오도르에게 머리채를 잡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영혼도 함께 흔들려 두개골에 이리저리 부딪히는 것만 같았다. 얼얼하고, 멍했다.

이따금 의식이 흐릿해질 때마다, 라티시아의 뇌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 그녀의 주인.

어째서, 하필 왜 그가 떠오르는 걸까? 테오도르에게 줄 음식을 구하기 위해 구걸하느라 내내 엎드려 있으면서 생각해봤지만 알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은 걸까? 글쎄.

너무 아파서, 생의 의지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라티시아는 그저 잠이 들고 나면 다시 눈 뜨지 않기만을 바랐다.

‘제발….’

하지만 아침이 되면 태양이 뜨듯이 어김없이 그녀의 눈도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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