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10화 (10/17)

# 10

[과몰입공금]

라티시아는 씁쓸하게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둥글게 모아진 하얀 가슴 위에 공작이 남긴 잇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비단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아랫배와 허벅지 안쪽도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누군가 붉은 물감으로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두서없는 흔적이 낙인처럼 남았다.

‘이 꼴을….’

엉망인 이 모습을 테오도르 앞에 고스란히 내보여야 할 시간이었다. 테오도르는 화구를 정리하면서 이쪽은 보고 있지 않았다. 공작은 이미 나신으로 얇은 가운만을 걸치고 있었다. 두 남자 모두 긴장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건 그녀뿐이다.

라티시아는 자신도 침착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다. 그냥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장면을 제공할 뿐이라고. 순순히 응하면 곧 끝날 거라고. 그러니 옷을 벗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라티시아는 어깨에 걸친 천을 끌어 내리다가 그대로 멈추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는 단순히 알몸을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테오도르의 앞에서 공작에게 범해지는 것도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쾌락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공작은 매번 그녀가 느낄 때까지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이래선 안 된다고 버티다가도 라티시아는 한 번도 빠짐없이 공작의 의도대로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이제 테오도르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쾌락에 잠식당할 자신이, 라티시아는 무척 원망스러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공작을 도발한 건 이 때문이었다.

“노예 같은 건 개와 다를 바 없는 짐승이라면서요.”

앙큼하게 대드는 꼴이 앙증맞은 토끼가 사자에게 달려드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안드레아가 라티시아에게 반문했다.

“그래서?”

“개하고 이런 짓을 하는 사람도 있나요?”

제 딴엔 어떻게든 상처를 남기고 싶었던 모양인데, 당연히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다만 하필 지금이어서, 그 테오도르의 앞이어서, 안드레아의 성미를 건드렸다.

“그럼 내가 개새낀가 보지.”

안드레아는 피식, 웃었지만 라티시아는 그의 파란 두 눈동자 속에 분노가 차갑게 일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라티시아를 네발로 기는 것처럼 엎드리게 만들곤 조롱했다.

“개처럼 짖어라.”

“…….”

“어서.”

라티시아는 고집스럽게 버텼다. 테오도르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암캐처럼 공작에게 뒤를 대주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버티던 것도 잠시, 마찰음이 울림과 동시에 이를 앙다물고 있던 라티시아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졌다. 믿을 수 없어서 라티시아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찰싹!

공작이 다시 한번 라티시아의 희고 통통한 엉덩이를 후려쳤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자국은 테오도르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짖어.”

곧 울음 섞인 짖음이 흘러나왔다. 새끼 강아지가 낑낑대는 것 같은 애처로운 소리였다. 라티시아가 짖기 시작하자 비로소 만족한 안드레아가 동그란 엉덩이를 좌우로 벌렸다. 중심부를 양 엄지로 꾹 누르자 음순이 벌어지며 지난 밤 그가 싸놓은 정액이 덩어리째 비어져 나왔다.

“암캐가 따로 없군.”

“하흑!”

예고 없는 삽입에 라티시아가 흐느꼈다. 좁아져 있던 질벽이 다시금 빠듯하게 벌어지며 안쪽에 담고 있던 정액을 토해냈다. 막다른 곳에 닿은 느낌이 나자 안드레아가 질구에 대고 허리를 둥글게 비비며 내벽을 짓이겼다. 그러자 꾸덕꾸덕한 크림처럼 흘러나온 덩어리들이 안드레아의 성기 굵기만큼 동그랗게 띠를 이루었다. 꽤 많은 양 때문에 띠 또한 두껍게 쌓였다.

안드레아는 일부러 그것들을 훑어내어 테오도르가 잘 볼 수 있도록 라티시아의 가슴에 펴 발랐다. 그리고 그것을 윤활제 삼아 가뜩이나 부드러운 살덩어리를 주물렀다. 질컥질컥, 안드레아의 손가락 사이로 말랑한 가슴이 미끄러질 때마다 아래에서 나는 소리와 같은 소리가 났다.

“아, 앙! 하응, 응!”

쾌감의 전조에 라티시아가 몸서리쳤다. 얕게 치대면서 입구 쪽을 긁어줄 때마다 못 견디게 애가 탔다. 이러다 그가 갑자기 쑤욱 밀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아!”

라티시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굵다란 성기가 한 번에 가장 깊은 곳까지 퍽, 박혀들었다. 후,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던 공작이 골반을 틀어쥐고 빠르게 아래를 치댔다.

“으응, 핫! 으으응!”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소리에 안드레아의 입가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렇게 수치스러워하더니, 먹여주면 먹여주는 대로 아래를 콱콱 물어오는 게 여간 민감한 게 아니었다. 허벅지를 타고 내릴 정도로 줄줄 흐르는 애액이 그 증거였다. 친히 상체를 굽힌 안드레아가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녀석 앞에서 박히니 더 흥분되는 모양이지?”

“아니, 아니에요, 그럴 리….”

그녀의 부정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안드레아가 상체를 안아 세웠다. 테오도르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세가 됐다.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공작이 다른 팔로는 한쪽 다리를 들어 활짝 벌렸다. 우윳빛 정액으로 축축하게 엉겨 붙은 은색 음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기둥이 드나들 때마다 딸려 나왔다 사라지는 붉은 속살도, 위아래로 탄력 있게 튕겨지는 동그란 가슴도.

“읏, 아읏! 흐응, 읏!”

무엇보다 잔뜩 상기된 채 온통 젖어 있을 그녀의 얼굴이, 테오도르의 눈에 낱낱이 들어박힐 터였다.

“안 돼, 싫어…. 아응! 흐으…, 보지 마, 테오….”

라티시아의 애원에 안드레아가 잡고 있던 한쪽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다리 대신 라티시아의 턱을 쥐어 들어 올렸다. 테오도르와 똑바로 마주 볼 수 있도록. 그 상태로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아래로 내린 안드레아가 음핵을 잡아 꼬집듯 비벼댔다.

“앙! 주인님, 아앙!”

묵직하게 안을 채운 압박감과는 다른 짜릿한 느낌이 라티시아의 하복부를 가볍게 연타했다.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벌써 눈앞이 하얗게 깜박거렸다. 저도 모르게 움찔움찔 엉덩이를 움직이자, 낯설지 않은 반응에 안드레아가 비벼대던 살점을 꾹 눌러 짓이겼다. 동시에 라티시아의 상체가 크게 요동치며 벌름거리던 음순 사이로 말갛고 투명한 액이 왈칵왈칵 쏟아져 안드레아의 허벅지를 흥건히 적셨다.

“하윽! 아, 아앙, 아아아앗!”

“이런. 혼자서만 가버리다니.”

안드레아가 혀를 차며 묻었던 살덩이를 길게 뽑아냈다. 안이 텅 비어버린 라티시아가 초점이 흐릿해진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물을 머금은 보라색 눈동자에 갈망이 깃들어 있었다. 이성이 쾌락에 잠식되어버린 라티시아가 무의식적으로 엉덩이를 그의 성기 끝에 갖다 댔다.

“이건 무슨 뜻이지?”

대답 대신 눈물이 고였다. 안을 가득 메웠던 기둥이 빠져나간 자리가 너무나도 허전했다. 게다가 자지러지게 간질거렸다. 수만 개의 아지랑이가 일시에 피어오르면 이런 느낌일까. 영원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감각에 라티시아는 몸을 떨었다.

질 안쪽은 아쉬움에 아우성치고 있었다. 쥐어 잡을 것이 없자 불수의적으로 수축하던 내벽이 바르르 떨렸다. 이건 이것대로 고통스러웠다. 어떻게든 안을 채우고 싶었다. 끝까지 가서 완전히 진을 빼놔야만 겨우 잠재울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아서, 라티시아는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님, 제발….”

“원하는 게 있나?”

여전히 성난 분신이 불근거리는 게 뻔히 보이는데, 안드레아는 태연했다. 너무 태연해서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발… 주인님….”

무어라 우물거리려던 라티시아가 입술을 물었다. 박아달라고 조르는 모습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다시 쑤셔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커서 괴로웠다. 간절한 바람에 사로잡혀, 라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직 만족을 못 했나?”

안드레아가 손가락을 넣어 휘저으며 그녀를 놀려댔다.

“흐응…!”

좋았다. 고작 손가락 한 개인데도 비참할 정도로 좋았다. 어떻게든 욕심을 채워보려 허리를 움직이자, 두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안쪽을 무성의하게 쑤셨다. 안에 박힌 손가락과, 음부를 덮은 손바닥에서 연신 야한 마찰음이 울렸다. 이따금 라티시아가 신음할 정도로 동굴의 천장을 긁어주기도 했으나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그의 것을 다시 맛보고 싶다는 욕구만을 부추겼을 뿐.

“주인님, 넣어… 넣어주세요.”

욕망에 완전히 굴복한 라티시아가 사정했다.

“네? 주인님….”

푸욱.

보답하듯 안드레아가 안으로 단박에 짓쳐들었다. 거센 힘에 떠밀린 라티시아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엉덩이만을 치켜든 채 격렬한 움직임을 감내했다.

벼르고 있던 내벽이 안드레아의 성기를 콱콱 물어댔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악착같이 쥐고 주무르는 느낌이 꽤 마음에 들었다. 교성을 질러대며 순종적으로 흔들리는 라티시아는 더더욱.

“아, 아응, 아! 아흐으!”

사정감이 점점 고조됐지만, 안드레아는 그럴수록 여유롭게 움직였다. 부러 느리게 허리를 물렸다가 단박에 때려 박자 그 여운으로 라티시아의 허벅지가 잘게 경련했다.

쾌감에 가누지 못하고 늘어진 등허리가 예뻤다. 유난히 도드라진 날개 뼈가 정말 날갯짓하는 새의 날개 같았다. 문득 아쉬웠다. 진짜 새라면 날개를 꺾어버릴 텐데. 다신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날갯죽지를 움켜잡고 비트는 상상을 잠시 하다가 불현듯 어이가 없어졌다.

이미 완전히 발기된 줄 알았던 기둥이 흉흉하게 부풀어 그렇지 않아도 좁은 라티시아의 아래에 빈틈없이 맞물려 있었다. 날개 뼈를 보고 욕정하다니, 확실히 지금의 그는 정상이 아니다. 흉포한 기둥에 꿰뚫린 채 옴짝달싹 못하는 라티시아의 엉덩이를 잡아 고정한 후, 느긋하게 허리를 놀리며 생각했다.

애초에 노예를 들인 것부터가 미친 짓거리였다고.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착실하게 그에게 맞춰 엉덩이를 흔드는 계집이 있는데.

“아, 응! 주인님….”

라티시아의 신음이 점점 가늘고 높아졌다. 할딱거리는 라티시아에 비해 여유롭던 안드레아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도 마냥 느긋하지는 못했다.

퍽퍽퍽퍽!

살과 살이 강도 높게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여린 속살이 단단한 기둥에 붉게 흐무러지는 모양에 안드레아의 뒷덜미가 바짝 조였다. 짓밟힌 꽃잎. 이미 짓이겼음에도 새로이 능욕하고 싶은 비틀린 욕망이 치솟았다. 그의 것으로 점철되도록.

“하아앙!”

더욱 격렬해진 허리 짓에 내부가 꽉 조인다 싶더니 라티시아가 어깨를 파득파득 떨었다. 떠는 것이 비단 어깨만은 아니었다. 쾌감의 극치에 달한 징후에 안드레아가 뿌리 끝까지 제 것을 박아 넣자 자궁 입구가 들리는 느낌이 났다.

“후….”

잘게 허리를 털며 고환이 텅 비도록 마지막 한 방울까지 뜨끈한 정액을 쏟아낸 안드레아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토해냈다. 욕심 없는 라티시아와 다르게 탐욕스러운 내부는 아직도 더 뱉어낼 것이 없나, 사납게 그의 것을 쥐어짜고 있었다.

만족에 인색한 구멍을 달래주기 위해 천천히 앞뒤로 왕복하던 안드레아가 마침내 몸을 완전히 물렸다. 툭, 묵직하게 안을 메우던 것이 빠져나가자 그대로 스러진 라티시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가쁜 호흡에 가슴이 들렸다 가라앉을 때마다 뿌연 정액이 다리 사이로 조금씩 흘러나왔다.

이 과정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별로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안드레아가 테오도르를 불렀다.

“가까이.”

분위기 때문에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침대로 다가서던 테오도르는 검을 꺼내드는 공작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하나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 어느새 공작의 검 끝이 하복부를 찌르고 있었다. 푸른 검날에 테오도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이익.

그다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공작의 검이 테오도르의 바지를 갈랐다. 행여 안드레아가 테오도르를 해칠까 봐 놀라서 바라보고 있던 라티시아의 눈에 뚜렷이 발기한 성기가 들어왔다. 움찔움찔 선액을 뱉어내고 있는 요도 구멍도.

황급히 시선을 내렸지만, 그 장면은 라티시아의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됐다.

테오도르가 발정했다.

공작에게 유린당하는 그녀를 보면서.

안드레아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켰다.

“욕심나나?”

“아닙,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날카로운 검 끝이 귀두를 살짝 베었다. 투명한 쿠퍼액에 핏방울이 섞여들었다. 쓰리고 아팠지만, 테오도르는 신음 한 번 내지 못했다. 잘못했다간 그대로 성기가 잘려 나갈 것만 같다. 선뜩한 느낌에 테오도르가 주절주절 변명했다.

“이건 그냥 자연히…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떻게 제가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저….”

테오도르는 이전에는 부른 적 없던 호칭으로 라티시아를 가리켰다.

“저 노예는, 공작님의 소유고 저는 그저 화가일 뿐입니다.”

노예, 공작의 소유.

테오도르의 한마디, 한마디가 라티시아를 아프게 찔렀다. 안드레아가 바라던 말이기도 했다.

“틀림없나?”

“한순간도 탐한 적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라티시아는 공작의 노예일 뿐이라는 말을 덧붙여 반복했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공작의 얼굴에 언뜻 즐거운 빛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궁지에 몰린 테오도르는 그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만약 거짓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달게 벌 받겠습니다.”

“좋다.”

이 대화를 끝으로 안드레아는 별다른 추궁 없이 테오도르의 스케치를 감상했다. 아랫도리가 휑한 다소 우스운 꼬락서니로 테오도르는 열심히 그림에 대해 설명했다.

마지막 그림의 설명을 끝냈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테오도르의 분신도 작게 수그러들어 있었다. 보잘것없이 쪼그라든 꼴을 보며 안드레아가 충고했다.

“간수 잘 하고.”

“네. 유의하겠습니다.”

그림인지 음경인지, 유의해야 할 대상이 불분명했으나 테오도르는 그저 허리를 굽실거렸다. 이만 가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물러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뒤늦게 모욕당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이, 이 씨발! 망할 자식!”

한동안 씨근덕거리며 이쪽 구석에서 저쪽 구석을 오가며 서성이던 테오도르는 겉옷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술 생각이 나자 자연스레 친구들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매일 그곳에서 살다시피 상주하는 녀석들이니 찾아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 전에 물이나 한 번 빼고.’

전에 샀던 창녀를 다시 살 생각이었다. 땀도 빼고 좆물도 빼고 나면 한결 나아지겠지. 한시 바삐 더러운 기분을 털고 싶은 마음에 테오도르는 걸음을 빨리했다.

테오도르의 예상대로 그의 패거리들은 언제나 그렇듯 왁자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들 중 하나가 테오도르를 발견하고 팔을 흔들었다.

“어이, 테오! 기다리고 있었다고! 뭐 하느라 늦었어?”

“아래를 빼줘야 위에서 영감이 생기는 법이거든.”

“하하하! 대가리에 좆물만 들어찬 새끼! 자, 마셔!”

테오도르는 사양 않고 그들이 내미는 술잔을 쭉 들이켰다. 배 속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니 상대적으로 머리에 올랐던 열도 식는 듯했다. 테오도르는 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이봐, 테오. 칼리드나스의 대우는 어때? 죽여주나? 응? 높으신 분이니 당연히 차원이 다르겠지?”

부러움과 질시가 담긴 동료들의 눈빛에 테오도르는 한껏 으쓱해졌다. 칼리드나스의 검이 바지를 베어낸 기억은 잠시 묻어두고 지금만큼은 귀까지 솟은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으스댔다.

“당연하지. 곧 궁정화가로 발돋움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내가 뭘 그리는지 알면 다들 놀라 자빠질걸?”

“초상화를 그리는 게 아니었나?”

‘병신 새끼들! 난 그것보다 더한 걸 그린다고!’

떠들고 싶어 목이 근질거렸지만, 두 번 말하지 않겠다며 이곳에서의 일을 발설하지 말라던 안드레아의 싸늘한 엄포가 생각나 입만 달싹이다 애꿎은 럼만 축내고 말았다. 다행히 화제가 빠르게 넘어갔다.

“그 계집도 만났어?”

“그 계집?”

마음대로 떠들 거리가 생겨 옳다구나 싶었지만 테오도르는 모른 척 뻗댔다.

“카나리아 말이야.”

“당연히 봤지.”

부러 관심 없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머리통들이 바짝 다가왔다.

“어때? 이번엔 성공할 것 같아?”

테오도르가 반반한 노예를 꼬시는 데 정통하다는 건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몸값을 높이기 위해 라티시아처럼 갇혀만 있는 노예들은 그러한 소문을 접할 일이 없었다.

선한 인상과 그에 맞게 꾸민 언행에, 의지할 곳 없는 노예들은 쉽게 몸과 마음을 열었다. 테오도르가 임신시킨 노예들은 임신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헐값에 팔아넘겨야 했으므로 로카디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로카디의 히든카드였던 라티시아가 지하에 갇힌 데에는 이런 이유도 컸다.

“아마도 곧? 그년이 내 밑에서 헐떡댈 날도 멀지 않았지.”

“이야, 테오도르 뷔테르. 그렇담 진짜 출세했네!”

카나리아의 보지를 그림으로 남겨달라는 둥, 이왕 뚫는 거 후장도 같이 뚫어보라는 둥, 온갖 음담패설이 오간 뒤에 누군가 제안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내기를 하자고!”

“내기? 무슨 내기?”

“우리 장래 궁정화가께서 한 달 이내에 카나리아를 따먹을지 아닐지. 증거로는 그년 젖꼭지에 물감을 묻혀 종이에 찍어오는 거야, 어때?”

“좋지.”

테오도르가 호기롭게 대꾸하자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했다.

“에이, 그게 카나리아 젖꼭지인지, 앵무새의 젖꼭지일지 우리가 알 게 뭐람.”

“내가 그런 걸 속일 것 같아?”

테오도르가 발끈했다.

“그년한테선 달콤한 과일 냄새가 난다고. 종이에 밴 냄새가 증거가 되겠지.”

생각만 해도 꼴린다며 테오도르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빅터가 사타구니를 추접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러곤 과장스럽게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고년, 꽤 반반했지.”

“하하, 빅터, 저 미친놈!”

“어쨌든 내기는 성립이야. 자! 돈을 걸자고!”

모두가 테이블에 금화를 내어놓자 허리를 흔들던 빅터가 주머니에 그것들을 쓸어 담았다.

“그럼 한 달 뒤에 보자고.”

“한 달도 안 걸릴걸.”

테오도르가 호언장담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다른 눈이 있는 줄도 모르고. 테오도르 무리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무리 중 하나를 표적 삼아 뒤를 밟았다. 빅터였다.

거나하게 취한 빅터는 누가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비틀거리며 어두운 골목을 더듬어나갔다. 금화로 불룩한 주머니를 차고서도 부주의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 강도에게 금화를 강탈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북적이는 술집에서 대놓고 허리나 흔들어대던 꼴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어… 취하네.”

중얼거린 빅터는 좁은 골목으로 빠져 바지를 뒤집어 깠다. 오줌 줄기가 변변찮게 바닥을 적셨다. 워낙 취해 누가 뒤에 서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꾸벅거리던 빅터는 용케도 벽에 비치는 그림자가 둘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누, 누구…!”

채 말을 맺지 못하고 빅터의 얼굴이 벽에 처박혔다. 이어 오줌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담벼락에 튀었다. 비릿하고 검붉은, 핏줄기였다. 성기를 자르고 바로 목에 꽂힌 단도 때문에 억,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빅터의 부릅뜬 눈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내기는 이로써 무효.”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주워든 남자가 중얼거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 무섭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요요히 빛났다.

***

한껏 웅크린 채 잠들어 있던 라티시아는 으스스한 한기 때문에 눈을 떴다. 동이 터오려는지 창밖이 푸르렀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라티시아는 자신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는 안드레아를 발견했다. 푸른 눈동자는 창밖의 새벽빛을 꼭 닮아 있었다.

“더 자둬라. 아직 시간이 이르다.”

라티시아의 눈에 원망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안드레아의 배려도 라티시아에겐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왜요? 체력을 비축해둬서, 더 할 게 남았나요?”

마냥 순한 강아지처럼 굴다가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구는 모양도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다. 다른 여자가 그에게 이따위로 굴었다면 서슴없이 목을 베었을 텐데. 귀엽게 느껴지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 싶다.

“잘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대화나 할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라티시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드레아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안드레아가 꺼낸 주제에 어쩔 수 없이 귀가 솔깃해졌다.

“자유로워지면 어떻게 살아갈 거지?”

“그냥, 자유롭게…. 즐겁게 노래하면서 살 거예요.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다니고요.”

“한마디로 대책이 없군.”

발끈하려던 라티시아는 현실적으로 공작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안드레아는 한 번도 새장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자신의 연약한 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풀어준다 한들 먹이나 제대로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물론 라티시아가 사냥에 능한 독수리라도 놓아줄 마음은 조금은 없었다.

“완전히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한심스러워하는 안드레아의 표정에 라티시아가 항변했다. 그래봤자 한층 가소로워하는 반응만 돌아왔을 뿐이지만.

“네 그 잘난 ‘테오’ 말인가?”

“테오도르는 정말 훌륭한 화가니까요.”

“자기 여자가 당하는 꼴을 보면서 좆이나 세우던 훌륭한 새끼 말이지.”

라티시아는 제가 모욕당한 것처럼 분해했다. 강아지같이 순한 인상이 앙칼진 고양이처럼 변한 걸 보면서 안드레아는 느긋하게 반격을 기다렸다.

“그건 다 주인님 때문이에요. 주인님은 엄청나게 높으신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안드레아는 태어나서 처음 빛을 본 사람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분히 의도적인 과장이었다.

“내 공작이라는 지위 때문에 흥분했다니, 라이너스 왕자라도 알현하면 그 자리에서 줄줄 싸겠는데?”

공작의 놀라는 표정에 한순간 같이 놀랐던 라티시아는 그제야 공작이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라….”

우물거리던 라티시아는 더 이상의 반박을 포기했다. 공작하고 말로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말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그녀는 공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평생, 죽을 때까지.

라티시아가 침울해지자 안드레아는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라티시아는 잠을 깨운 으스스한 느낌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쇠를 긁어낸 것 같은 피 냄새였다.

“피…….”

“테오도르의 것은 아니니까 안심해.”

구태여 ‘아직’이란 말은 덧붙이지 않은 건 ‘엄청나게 높으신 분’의 자비였다. 안드레아는 테오도르를 살려둘 마음이 없었다. 라티시아의 나신을 구석구석 훑으며 욕정 하던 테오도르의 음탕한 눈을 떠올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기엔 지나치게 탁한 눈빛이었다. 그 자리에서 눈알을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의 인내는 역할을 다 했다.

인내심이 바닥났음에도 당장 죽여 없애고 싶은 걸 참는 이유는 오직 라티시아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라티시아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테오도르가 찾아올 때마다 갖은 훼방을 놓았으면서도 끝끝내 테오도르의 실체를 밝히지 않았던 바울이라는 노인네의 속을 알 것도 같았다.

이젠 하다하다 늙은 노예한테 공감이라니.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싶어 쯧, 혀를 찼다. 적막 속에 혀 차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라티시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피 냄새가 가셨는데도 여전히 겁먹은 눈초리였다.

원망, 두려움, 증오, 서글픔….

라티시아가 제게 가진 감정들은 결이 비슷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래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이 밤에 유독 거슬렸다. 따지고 보면 조금 전 그가 씻어낸 피는 순전히 그녀로 인한 것이었다. 쓰레기 하나 해치웠다 해서 문제될 건 없지만, 전시를 제외하고 그가 손수 피를 묻힌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후회는 없다. 그렇다 해도 뒷걸음질까지 치는 라티시아의 반응은 달갑지 않다. 침대 모서리까지 밀려나서 궁지에 몰린 것처럼 벌벌 떠는 꼴은 더욱이.

안드레아는 잘 준비를 마치고 길게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있는 라티시아에게 노래하라고 명령할 참이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 직전에 마음이 바뀌었다. 안드레아는 팔로 턱을 괴고 상반신을 모로 세웠다.

“…….”

정면으로 시선이 맞닿자 라티시아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단단한 얼음을 뚫고 피어난 꽃처럼 향기 짙은 보라색 눈만 깜박였다.

“웃어봐.”

불현듯 보고 싶었다. 보잘것없는 화가 새끼한테는 곧잘 웃어주면서 그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예쁜 모습이. 그의 주문에도 라티시아는 여전히 얼어 있었다. 꼭 미친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안드레아는 개의치 않고 팔을 뻗었다. 라티시아가 움찔, 떨었으나 끝내 입술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대고 꾹 눌렀다. 그러곤 옆으로 슬쩍 당겼다. 한쪽만 들린 반쪽짜리 미소가 그려졌다. 입 모양만 보면 비웃는 것 같았지만 안드레아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귀엽네.”

몇 번 더 말랑한 볼을 늘이며 장난치다가 다시 드러누운 안드레아가 노래를 청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굳어 있는 라티시아를 안드레아가 잡아챘다.

“노래가 싫으면 몸으로 재워주든가.”

“그건…!”

피하려고 했으나 라티시아가 날랜 안드레아를 이길 리 만무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품에 갇혀버렸다. 테오도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그를 받아내는 건 무리였다. 라티시아는 필사적으로 눈앞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냈다. 그래봤자 상대는 거대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티시아의 기운만 빠졌을 뿐.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노래해.”

라티시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를 옥죄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놓아주진 않았다. 몇 번 더 바르작거리던 라티시아는 그만 벗어나길 포기하고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라티시아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을 때마다 가벼운 숨결이 안드레아의 가슴을 간질였다. 안드레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라티시아의 자장가는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한 뒤에도 한참을 이어졌다.

‘언제….’

마침내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한 라티시아가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그녀를 감싸 안은 팔은 조금도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크게 움직였다간 잠을 깨울 것 같았다. 다시 노래 부르는 괜한 수고를 들이고 싶지 않아 라티시아는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멈췄다.

마지막까지 하늘을 지키는 새벽별처럼 푸르른 어둠 속에 라티시아의 보라색 눈동자만이 초롱초롱했다. 이대로 뜬눈으로 아침을 맞을 계획이었다. 공작의 품에서 잠들긴 싫었다. 그러나 밝은 햇살에 밤이 완전히 눈을 감았을 때는, 무거운 졸음을 버티고 있던 라티시아의 눈꺼풀도 감긴 지 한참 지난 뒤였다.

오히려 아침을 맞이한 건 안드레아였다. 자신의 어깨에 닿은 동그란 이마를 바라보는 안드레아의 눈빛은 창가에 머무르는 볕처럼 따스했다. 흐트러진 라티시아의 머리카락을 무심코 쓸어 넘겨주려던 안드레아의 손이 문득 허공에 멈추었다.

“테오….”

이를 악문 안드레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떻게 삭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라티시아가 방법을 알려주듯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테오….”

안드레아는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벌레만도 못한 녀석의 작업을 확인해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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