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9화 (9/17)

# 09

[과몰입공금]

고기와 술이 차려질 동안 테오도르는 바닥난 인내심을 최대한 긁어모아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그러다 상을 다 차린 하인이 방을 떠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기 무섭게 테오도르는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그 씨발년!”

라티시아는 지하에 감금돼 있을 때부터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것 같은 년이었다. 사과 몇 알에 자기를 동등하게 대접해준 사람은 처음이라며 같잖게 글썽거리질 않나, 그림 몇 장에 세상을 준거나 다름없다며 낯 간지러운 소릴 지껄이질 않나.

고 반반한 낯짝이 아니었다면, 혼이 쏙 빠지도록 좆질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결코 들이지 않았을 수고였다. 테오도르가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이게 만든 건 옆에 감금되어 있던 바울, 그 노인네의 역할이 컸다. 손이라도 잡아볼라치면 금방이라도 뒈질 것처럼 기침을 해대며 라티시아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르질 않나, 눈이 어두우니 그에게 대신 책을 읽어 달라질 않나.

오늘내일하는 늙은이의 경계를 풀기 위해 그의 딴엔 무던히도 애를 썼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죽었을 때는 얼마나 기쁘던지.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은 하나였다. 바로 부친, 로카디였다. 로카디는 처녀를 잃으면 노예의 몸값이 똥값이 된다는 고리타분한 소리나 하면서 열쇠를 숨겨두었다.

‘어차피 저를 위한 거라면서요? 그럼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셔야죠.’

‘바보 같은 녀석! 넌 아무것도 몰라! 저건 대어를 낚을 미끼라고!’

누가 뚫어도 뚫을 구멍이었다. 닳는 것도 아닌데 미리 길을 내놓으면 감사해해야지. 뻔뻔스럽게 웃으며 이제나저제나 로카디에게서 열쇠를 빼올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며칠을 못가 로카디가 계집을 홀랑 빼돌렸다. 어디로 보냈나 했더니 공작가일 줄이야. 로카디가 평소 장담하던 대로 대어를 상대하긴 했다. 대어가 미끼만 홀랑 따먹어서 문제지.

“분수도 모르는 년!”

라티시아가 칼리드나스 공작의 성기를 쭉쭉 빨며 음탕하게 침을 줄줄 흘려댈 때는 거의 눈이 돌아갈 뻔했다. 그렇게나 음탕한 년이 제 앞에서는 순수한 척 눈물이나 글썽댔으니, 새삼 약이 오를 수밖에.

“후우….”

방 안을 서성이다가 기억의 한 장면을 머릿속에 고정시킨 테오도르는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제 것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다른 쪽 손으로는 라티시아가 선물한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포도향이 엷게 배어 있었다.

“라티, 이 쌍년아, 제대로 좀 빨라고, 옳지, 그렇게… 혀끝으로… 하아….”

열락에 이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라색 눈을 야하게 치뜨는 상상만으로도 쉽게 달아올랐으니.

“이 씨발년이 진짜, 누굴 죽이려고, 응?… 아, 아! 하아… 크읏!”

머지않아 정액이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은 손을 대강 손수건으로 훔쳐낸 테오도르는 겉옷을 챙겼다. 자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창녀를 사서 욕구를 마저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창밖의 그림자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수음을 보고 듣고 있던 남자가 조용히 뒤를 밟는 건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

라티시아는 긴 은빛 머리카락을 이불 삼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안드레아는 가운의 앞섶을 여미며 서재로 향했다. 미리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유하르가 허리를 숙여 맞이했다. 읽을만한 책을 살펴보고 있었던 듯 서너 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원한다면 가져가서 읽어도 좋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반응은?”

유하르가 멋쩍은 듯 귀 뒤를 긁었다. 난감한 보고를 앞두었을 때 종종 보이는 행동이었다. 얘기가 길어질 걸 짐작한 안드레아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았다.

“테오도르 뷔테르가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유하르가 다시 한번 귀 뒤를 긁었다.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적당히 꾸밀 줄 아는 말재주가 없었다. 하긴, 안드레아 칼리드나스 같은 상관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꾸며대랴 마는. 유하르는 별수 없이 솔직해졌다. 원래도 담백한 성격이니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라티, 이 쌍년아. 제대로 좀 빨라고! …라고 했습니다.”

테오도르의 상스러운 언행을 재연하는 건 몹시 어려웠다. 안드레아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그를 보아온 유하르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송구스럽습니다.”

“계속해.”

공작저를 나선 테오도르는 곧장 창녀를 샀다. 방음이 되지 않는 흙벽을 뚫고 간간이 ‘라티’라는 이름이 들려왔다. 수완이 좋은 창녀는 곧잘 스스로를 라티라고 부르며 테오도르에게 장단을 맞췄다.

유하르가 듣기에 썩 유쾌하지 않았던 정사 후에, 테오도르 뷔테르는 선술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평소 어울리던 치들을 만난 테오도르는 공작가에 입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을 샀다.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하던가?”

“아니오.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시작하게 되면 다시 그곳으로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 상관이 테오도르에게 무슨 그림을 맡길지, 유하르는 궁금하기도 하고 궁금하지 않기도 했다. 막연히 카나리아라 불리는 노예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를 불러 고작 화가 나부랭이의 뒷조사를 시킬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신기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그의 상관에게 여자란 그저 수면제 대용인 줄 알았는데.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적절한 설명을 찾기 어려웠다.

“수고했다.”

이만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져 유하르는 밖으로 나왔다. 언제 봐도 정원의 아름드리나무는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욱 인상적인 장면이 유하르의 관심을 끌었다. 서로 마주 서 있는 라티시아와 테오도르였다.

유하르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침실 창에 공작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꽤 먼 거리였지만 무슨 표정인지 알 것 같아 오싹해졌다. 하필 라티시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해서 더욱 그랬다.

가까이 다가가 무언가 말하려던 유하르는 그냥 걸음을 빨리해 둘을 지나쳐버렸다. 굳이 나서서 화를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재앙은 피하는 게 상책이니. 둘 사이를 지날 때 들렸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안쓰럽다고 생각하며.

“테오….”

테오도르를 발견하고 무작정 뛰쳐나왔지만 라티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작 이름을 몇 번 부르는 게 전부였다. 테오도르가 숨 쉴 때마다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쓰디쓴 냄새는 비단 도수 높은 술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리라.

테오도르의 속내를 짐작한 라티시아는 죄책감에 빠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테오도르의 곁을 떠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앞에 이렇게 서서 미안해하는 것 말고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것조차 이기적인 걸까. 라티시아는 한순간 공작의 제안을 거절하길 바랐던 자신을 떠올렸다. 문득 테오도르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라티.”

지난밤의 창녀는 돈값을 할 줄 알았다. 창녀를 상대로 라티시아에게 향했던 화를 어느 정도 쏟아낸 테오도르는 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평소에 가졌던 생각처럼, 어차피 누군가 뚫을 구멍을 공작이 먼저 뚫은 것뿐이다. 물론 수고를 덜어준 데에 감사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굳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짓은 안 하겠다는 다짐이 들었을 뿐.

“힘들었지. 많이 아팠지.”

그가 생각해도 훌륭한 위로에 라티시아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툭, 툭, 커다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맺혔다 떨어졌다. 사람의 눈에 이렇게 많은 눈물이 고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쓸데없는 감상이었다.

“괜찮아, 라티. 전부 다 괜찮아.”

테오도르는 라티시아를 힘주어 안았다. 여린 체구가 품에 쏙 들어왔다.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라티시아를 다독거리다가 슬며시 손을 옮겨 턱을 쥐었다. 그러고 보니 키스 한번 한 적이 없다. 말캉한 과육 같은 입술 맛이 늘 궁금했는데.

“라티.”

제게 꼭 붙어 있으려는 라티시아와 사이를 띄우고 허리를 숙인 테오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피가 날 때까지 잘근잘근 씹어볼 심산으로.

라티시아는 그저 돌처럼 굳어서 숨만 몰아쉬었다. 달콤한 포도향에 테오도르의 혀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안, 테오. 미안.”

막 혀끝이 입술에 닿으려 했을 때 라티시아가 고개를 돌려버린 탓이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테오도르에게 라티시아가 우물우물 해명했다.

“여, 여긴 너무 밝은 데다가 밖이어서… 누가 보면 어떻게 해.”

내숭은. 그럼 대낮처럼 훤한 방에서 제가 보는데도 공작의 좆을 빨아댄 건 대체 누군데.

테오도르는 속엣 것을 있는 대로 퍼붓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늦도록 돌아다닌 탓에 피곤하기도 했다.

“네 말이 맞아.”

테오도르는 순순히 물러났다.

“조금 쉬어야겠어.”

“응, 피곤해 보여. 그러는 게 좋겠다.”

라티시아도 얼른 비켜섰다. 둥근 두 눈에 가득 차오른 신뢰가 부드럽게 일렁였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싫다는 건 하지 않는다. 분명 충격받았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상처를 먼저 살필 줄 안다. 테오도르의 배려에 라티시아는 그간 겪었던 일들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푹 쉬어, 테오.”

짧게 손을 흔들고 뒤돌아가는 테오드르의 지친 등을, 라티시아는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키스, 하고 싶었다. 기꺼이 테오도르의 숨을 받아 마시고, 입을 맞춘 채 따스하게 비비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지난 밤 공작이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런 상태로 테오도르와 키스하고 사랑을 속삭이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럼 정말,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될 것만 같아서,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엇보다 테오도르에게 못할 짓이었다.

오늘따라 해가 쨍한 건 고마운 핑계거리가 되어주었다. 문득 하늘을 바라본 라티시아가 강렬한 햇빛에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밝은 빛의 한가운데에 놓인 느낌이 오히려 막막하게 다가왔다.

‘언제쯤….’

공작이 자신을 놓아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한 번 더, 테오도르 앞에서 못 보일 꼴을 보여야 한다는 것.

그날이 빨리 올지, 느리게 올지, 그렇다면 어느 쪽이 좋을지. 판단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던 라티시아는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아름드리나무 아래 가만히 웅크려 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자, 아랫배가 눌려 압박이 가해졌다. 지난밤 정사의 흔적이 다리 사이로 뭉클하게 흘러나와 속옷을 흥건히 적셨다.

***

되는대로 누워 쉬고 싶었는데, 테오도르에게 휴식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공작이 그의 방에 친히 방문해 있었다.

“내가 보낸 술로는 부족했나?”

책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그러이 웃고 있었다. 엉겁결에 따라서 미소 지으려던 테오도르는 부드럽게 휘어진 입술과는 달리 전혀 웃고 있지 않은 푸른 눈을 발견하고 입매를 어색하게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냥, 답답해서….”

꼭 어린애 투정 같은 말투에 테오도르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정중하게 이유를 붙였다.

“아쉽게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자책도 되었고요.”

나름 괜찮은 이유를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공작은 말없이 테오도르를 똑바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위압감이 엄청난 남자였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테오도르의 오금이 저렸다.

맹수 앞에서 꼬리를 말아 감춘 개새끼처럼 테오도르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애꿎은 발가락을 비비 꼬았다. 라티시아가 무슨 용기로 저 옆에서 버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던 공작이 테오도르의 이유에 공감하듯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그리는 건 처음이라고 했지.”

“네.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라.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예…?”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 묻어나는 혼잣말에 테오도르는 몹시 당황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궁지로 몰린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대화를 되짚어봤지만, 어디서 심기가 틀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저….”

우물쭈물하는 테오도르를 보며 공작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번엔 푸른 눈도 즐거운 빛을 담고 있었다.

“농담인데, 과하게 반응하는군.”

맥이 탁 풀렸다. 과음한 탓인지 다리에도 힘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를 상대하는 잠깐의 시간에 남아 있는 기운을 모두 소진한 것 같았다. 애초에 왜 그의 방까지 찾아왔는지조차 불명확했다. 테오도르는 실례인 줄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실 말씀은….”

“혹시나 바깥에 그림에 대해 발설하지 말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테오도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친구들을 만나서 술김에 무언가 떠들기는 한 것 같은데, 다행히 그림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 화폭에 점도 찍지 않은 상태이니. 하지만 친구 중 하나가 그림의 내용에 대해 물었다면 술김과 홧김에 떠들어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참, 좋았다고 하니 하는 말인데.”

“네, 말씀하십시오.”

잠시 뜸을 들인 안드레아가 눈을 똑바로 맞춰왔다. 채 피하지 못한 시선에 그대로 붙들린 테오도르는 밧줄에 묶인 것처럼 경직됐다.

“방에 틀어박혀서 수음 따위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감히….”

순간 오줌을 쌀 뻔했으나 테오도르는 특유의 진실 되어 보이는 얼굴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감히.”

그의 마지막 말을 따라 중얼거리는 공작의 음성이 유난히 음산하게 들렸다. 섬뜩해진 테오도르가 강력하게 부인했다. 밝은 갈색 눈동자는 진실로 억울함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제가 그랬다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강한 어조에 공작의 눈썹이 슬쩍 솟았다. 테오도르의 긴장이 극에 달한 순간, 표정을 부드럽게 푼 공작이 너그럽게 그를 다독였다.

“간혹 그런 무도한 자가 있다고 들어서. 주인의 고기를 탐내는 개는 죽여야지. 안 그런가?”

“당연합니다.”

테오도르의 답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듯 공작은 쉬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후우우우….

공작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후에야 테오도르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대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좀 전의 대화를 되살려 차근차근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살폈다. 특별히 의심할만한 내용은 없었다.

공작은 혹여나 자신의 사생활이 외부로 새어나갈까 봐 직접 그의 입막음을 하러 온 게 분명했다. 수음에 대해 물은 것도, 종종 누드화 등을 그리다가 모델과 자는 화가도 많으니 충분히 짚고 넘어갈만했다. 그럼에도 대화 내내 무언가 의미심장한 의도가 있을 거라 느껴졌던 건 순전히 공작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 때문이다.

“뭐야.”

테오도르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분석하니 별것 아닌 것을,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오줌까지 지릴 뻔하다니.

‘그나저나.’

공작도 생긴 것과 다르게 소심한 구석이 있는 사내다. 고작 평판이 신경 쓰여 누추한 화가의 방이나 몸소 찾고 말이다.

긴장이 풀리자 테오도르 특유의 방만한 성격이 발휘되어 모든 게 우습게 느껴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를 꼬아 발끝을 까딱거리다가 라티시아를 떠올렸다. 괘씸하게 그에게서는 고개를 돌리던 발칙한 계집년을. 공작이 다녀간 탓인지 다시금 라티시아가 공작의 사타구니를 핥아 올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간밤, 그렇게 해댔는데도 좆이 고개를 치켰다. 바지춤에 손을 대고 나머지 손으로는 탁자를 더듬던 테오도르는 라티시아의 체향이 밴 손수건이 없어진 걸 발견했다.

‘어디 갔지?’

탁자와 침대 주변을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손수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음 후에 바지춤에 찔러 넣었었나? 그렇다면 아무래도 술집이나 창녀와 뒹굴던 침대에 흘린 것 같다.

그런데 손수건을 챙겨서 나갔던가?

다시 원점이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달리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님 제 방에 누가 다녀갔나? 그가 아는 한 다녀간 사람은 공작뿐이었다.

‘설마.’

공작을 떠올린 테오도르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공작이 왜 손수건을 훔쳐갔겠는가? 라티시아가 준 손수건이라는 것도 모를 텐데. 라티시아가 선물한 걸 알고 있더라도 그걸 가져갈 리 만무했다. 테오도르가 보기에 라티시아는 공작에게 살아 있는 구멍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손수건은 그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갔다가 잃어버린 게 맞다.

“에잇.”

자기 전에 물이나 한번 빼볼까 했는데 흥이 식어버린 테오도르는 두 팔로 뒤통수를 괴고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멈춘 콧노래 대신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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