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
[과몰입공금]
테오도르는 일주일이 넘도록 라티시아를 만나지 못했다. 주방의 하녀들에게 넌지시 떠보려 했지만, 라티시아의 얘기가 나올라치면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금기처럼.
때문에 공작의 부름이 있었을 때 테오도르는 은근히 라티시아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과연, 예상대로 라티시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오.”
“라티! 걱정했잖아. 무슨 일 있었어?”
테오도르는 어색한 미소를 짓는 라티시아를 이리저리 살폈다. 원래도 마른 몸이었지만 살이 내리긴 했다. 그래도 혈색은 전보다 좋아 보였다.
‘다행이기는 한데….’
라티시아의 발그레한 복숭아 빛 뺨에 테오도르는 어쩐지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유를 명확히 집어낼 수 없는 불쾌함이 기름때같이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그게 무언지 파고들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라티시아에게 재차 물었다.
“어디 다녀오기라도 한 거야? 갑자기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아니. 있잖아, 테오. 좋은 소식이 있어.”
고개를 살며시 저은 라티시아가 화제를 돌렸다. 회피한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 빠르게 제 할 말만 했다.
“주인님께서 초상화를 맡기기로 결정하셨대.”
“정말? 진짜?”
“응. 오늘, 그래서 테오를 부르신 거야.”
라티시아의 시도는 바로 효과를 보였다. 테오도르는 라티시아를 추궁하려던 것을 잊고 잠시 얼이 빠져 있었다. 숨 쉬는 법도 잊고 멍하니 라티시아를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몇 번이나 되물었다.
“정말? 진짜야? 확실해?”
“정말이야, 테오.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세상에! 드디어!”
뛸 듯이 기뻐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라티시아의 슬픔이 얼마간 희석됐다. 옅어졌다 한들 슬픔은 여전히 슬픔으로 남아 있었지만….
아직도 욱신거리는 다리 사이를 의식하며 라티시아는 자위했다. 그래도 테오도르가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영 고통스럽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고.
‘그런데 왜….’
초상화를 의논하는 자리에 굳이 자기를 부른 걸까. 단순히 테오도르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정말, 라티시아는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궁금증은 불안을 자아냈다.
테오도르와 함께 있으면서도 라티시아의 온 신경은 문에 쏠려 있었다. 평소와 달리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테오도르의 약이 바짝 오른 지도 모르고.
“그건 그렇고, 라티, 어째서….”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테오도르가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려 했을 때, 문고리가 무겁게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공작이 들어왔다. 테오도르가 인사를 하건 말건 의자로 걸어가 편안히 몸을 기댄 공작이 하인에게 눈짓했다.
구석으로 걸어간 하인이 흰 천을 걷어내자 미리 준비해두었던 듯 이젤과 캔버스, 각종 도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구는 저걸 쓰도록. 확인해보아라.”
이 자리에서 바로? 어쩐지, 밀실로 안내하더라니. 응접실로 부르지 않은 이유가 있었구나.
테오도르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감히 만져보지도 못했던 값비싼 붓과 물감 등을 보자 흥분은 배가 되었다. 공작이 준비한 것들은 전부 로카디의 넘치는 부정으로도 선뜻 값을 치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줄곧 꿈꿔왔던 찬란한 인생.
화가로서의 탄탄가도, 그로 인해 생겨날 부와 명예. 테오도르는 갑자기 눈앞이 훤해지는 걸 느꼈다. 행여나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릴까, 테오도르는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말과 행동에 신경을 썼다.
“생각해두신 자세가 있으신지요?”
앉은 자세와 선 자세에 따라서 필요한 소품이 달랐다. 테오도르는 주변을 살피며 공작이 염두에 둔 자세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요즘 유행하는 기댄 자세라면 긴 의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긴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반신? 아니면 전신?’
전신으로 선 자세라면 캔버스를 세로로 세워야 했지만, 큼직한 캔버스는 처음부터 가로로 놓여 있었다.
‘와상인가?’
누운 자세로 초상화를 남기는 건 드물긴 하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여기까지 추론을 마치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모르고 있었지 싶을 정도로 널찍한 침대였다. 테오도르의 시선을 따라 뒤를 흘긋 확인한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림을 맡기는 건 맞지만, 정확히 말하면 초상화는 아니다.”
“네….”
뒤가 흐릿한 음성에 안드레아가 피식 웃었다.
“실망했나?”
“아닙니다. 어떤 그림이든, 공작님께서 맡겨만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솔직히 실망했다. 하지만 다른 그림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주문에 맞춰 그렸다는 것이 중요하지, 무얼 그리느냐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음에 들면 추후에 초상화를 맡길 수도 있고. 이어 다른 귀족들까지 차례차례. 그렇게 가지를 뻗어 나가는 거다.
“벗은 몸도 그려봤나?”
점점 부피를 부풀려가던 테오도르의 행복한 상상은 공작의 질문에 바람 빠진 공처럼 우그러들었다. 누드라면 남에게 보일 일은 전무했다. 더군다나 공작 자신의 누드라면. 그건 곧 테오도르의 그림이 그대로 공작저 어딘가에 처박혀 빛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장차 유명세를 치를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그려는… 봤습니다.”
마른세수를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테오도르는 애매하게 답했다. 부디 공작이 마음을 바꾸길 바라며. 나체를 그려봤다는 말에 라티시아의 눈길이 제게 머물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반응하는 것조차 짜증스러웠다. 상응할만한 대가 없는 노동은 질색이다. 그러다 공작의 놀림 섞인 말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째 믿음직스럽지 못한데.”
“아닙니다. 맡겨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최고의 그림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장면을 잡아서 그리도록. 여러 장을 그려도 좋다.”
여러 장이라는 말에 테오도르는 목탄을 몇 개 더 챙겨두었다. 별다른 지시 사항 없이, 공작은 침대로 다가가며 상의를 벗었다. 조각 같은 남성의 완벽한 상반신에 테오도르는 잠시 이곳이 어디인지 망각했다. 정신없이 공작의 몸을 뜯어보던 테오도르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크게 오르내린 건, 공작이 라티시아를 가볍게 나무랐을 때였다.
“뭐 하는 거지?”
앞섶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있는 라티시아는 눈에 띄게 덜덜 떨고 있었다. 안드레아 입장에선 심히 못마땅한 광경이었다. 그의 앞에선 고작 깃펜 하나를 얻으려고 아무렇지 않게 훌렁 벗어던지더니, 지금은 테오도르의 면전이라고 매듭 하나도 풀지 못하고 벌벌대는 꼴이.
“라티시아.”
안드레아가 부드럽고도 잔인하게 채근했다. 이래서는 테오도르가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다정한 협박에 라티시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래봤자 겨우 가장 위의 매듭을 하나 풀었을 뿐이다.
“주인님… 제발….”
고개를 젓던 라티시아는 캔버스를 앞에 둔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곤 석상처럼 굳었다. 안드레아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발가벗을 수 있지만, 테오도르에겐 아니었다. 그건, 짐승이나 하는 짓이었으니까. 테오도르는 자신을 진실 되게,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줬으니까.
좀처럼 그녀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안드레아는 라티시아가 마저 벗기를 기다리는 대신 허리춤을 느슨하게 풀었다.
“줄곧 해오던 일을 하는 것뿐이다.”
어깨를 눌러 라티시아를 꿇어앉힌 안드레아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튕겨져 나온 성기가 라티시아의 입가에 툭 떨어졌다. 얼어붙은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안드레아가 종용했다.
“좀 더 벌려야지?”
“아니요, 주인님, 제발….”
간절한 애원은 안드레아를 더욱 냉정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아님, 바로 박히고 싶나?”
서늘한 속삭임에 라티시아의 입술이 무력하게 벌어졌다. 테오도르 앞에서 다리를 활짝 벌려 안드레아를 받아들이는 걸 보여야한다니. 끔찍한 장면을 떠올린 라티시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
끔찍한 것과 덜 끔찍한 것 중에 고르라면 당연 후자였다. 그녀에게는 그 이상의 선택지도, 더 이상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안드레아가 그녀를 눕히기 위해 어깨를 밀려 했기에, 라티시아는 황급히 양손으로 굵은 뿌리를 감싸 쥐었다.
“할게요, 할게요, 주인님.”
적극적인 자세에 어깨를 쥔 안드레아의 손이 떨어졌다. 그러곤 강아지를 쓰다듬듯 은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굵은 기둥을 이마에 기대둔 채로, 고개를 단단한 사타구니 깊숙이 들이민 라티시아가 고환의 좌우를 번갈아 입에 머금었다. 춥, 추릅, 혀와 턱을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여 정성스레 애무하자 외설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툭.
목탄 부러지는 소리에 라티시아는 아예 눈을 꾹 감아버렸다.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여유가 있어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공작이 만족하기만을 바라며, 당면한 일에 열중했다. 이로 긁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적당한 자극이 가도록 쪽쪽 빨고, 혀를 이용해 주름을 펴듯이 문질렀다.
음.
다행히 괜찮은 반응이 돌아왔다. 공작의 신음에 라티시아는 더욱 열심히 매달렸다. 뿌리부터 선단까지 촘촘히 입 맞추고 길게 핥아 올리는 라티시아를 보며 안드레아가 픽 웃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지난 며칠간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친히 가르친 결과였다. 이제는 그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채를 지그시 감아쥐었다. 무언가 실수했나 싶어 순간적으로 움찔, 움츠린 라티시아에게서 불안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기분 좋은 진동이었다. 손에 쥔 머리카락을 짧게 흔들며 안드레아가 지시했다.
“계속해.”
선단을 사탕처럼 물고 있던 라티시아가 목구멍 끝까지 기둥을 쭉 빨아들였다. 후우. 안드레아는 일부러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보란 듯 머리채를 잡은 것도, 그답지 않게 신음을 내는 것도, 모두 테오도르를 겨냥한 것이었다. 애꿎은 목탄만 벌써 몇 개째 부러트리고 있는 쓸모없는 놈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닌 게 아니라, 테오도르는 손의 힘을 전혀 조절하지 못했다. 공작이 성교 시에 관찰자를 필요로 한다는 건 일찍이 들어 알았지만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으므로. 더군다나 상대는 라티시아다. 그를 사랑해 마지않는 라티시아.
‘빌어먹을…!’
순순히 공작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라티시아가 공작의 성기를 받아먹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흉악한 거근을 삼키면서도 헛구역질 한번 없는 것만 보더라도 그랬다.
‘미친….’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었다. 라티시아가 입술을 오물거릴 때마다 탱탱하게 올라붙는 공작의 불알을 보고 있자니 걷잡을 수 없이 분했다. 손만 잡아도 얼굴을 붉히던 라티시아가, 들꽃 한 송이에도 눈시울이 젖던 라티시아가, 지금은 전혀 다른 이유로 젖은 눈을 하고서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고 있다.
이윽고 라티시아의 머리를 잡은 공작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뒤통수를 감싸 고정한 공작이 허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에 대고 콱, 세게 밀어 넣은 후 짧게 엉덩이를 털었다.
라티시아의 입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꿀꺽, 제법 큰 덩어리를 삼키는 소리가 났다. 성스러운 수액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다소곳이 내민 혀에 대고 공작이 나머지를 털어냈다. 뺨과 콧등, 입가에 튄 유백색 덩어리에 테오도르는 치솟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았다.
“건질 게 없었나 보지?”
속으로 욕설을 퍼붓던 테오도르가 정신을 차린 건 공작의 질문이 있고 나서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제야 텅 빈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조각난 목탄이 발치에 어지러웠지만, 한 장도 그리지 못했다. 망할 펠라티오에 시선을 뺏겨서 무얼 하는지도 몰랐으니, 공작이 이대로 기회를 거둔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뭐가.”
“처음, 처음이라서.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처음이랴….”
“처음.”
테오도르가 뱉은 단어들 중 하나를 되풀이한 공작이 턱을 쓸었다. 사소한 동작이었건만 테오도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대로 잘려 나갈 수는 없다는 절박한 바람만이 테오도르를 옥죄었다.
“익숙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공작은 더 이상 테오도르를 보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아래를 머금었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라티시아를 슬쩍 돌아본 공작이 물었다.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데 괜찮은가?”
마치 모든 건 라티시아에게 달렸다는 듯이 관대하게. 라티시아의 머리가 멍해졌다.
‘한 번 더. 한 번 더…?’
복잡한 질문도 아니었다. 선택지도 둘뿐이었다. 네 또는 아니오. 그러나 어느 것도 섣불리 택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 앞에서 또다시 공작의 아래를 입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니. 이미 충분히 수치스러웠는데 그 짓을 반복하라고? 다음엔 더한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공작의 침대에서 처음에는 입을 벌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끝내 가랑이를 벌렸듯이.
‘못해. 테오, 난 못하겠어.’
이 순간 라티시아는 궁지에 몰린 한 마리 쥐와 같았다. 테오도르의 기회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테오도르가 아니라고, 번복하기를 바랐다. 단지 그렇게 희망했을 뿐인데도 작은 빛이 번지며 라티시아를 감싸는 것 같았다.
‘그래. 테오도르가 그럴 리 없어.’
라티시아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테오도르가 그런 장면을 또 보고 싶어 할 리 없으니까. 너무 당연해서, 라티시아의 부정은 짧은 시간 내에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렇지, 테오?’
천천히, 라티시아의 고개가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원하는 바가 너무 간절해서 모를 수 없는 눈빛이었다. 테오도르 역시 라티시아의 마음을 단번에 간파했다. 얼마간 눈을 마주치다가 먼저 고개를 돌린 건 테오도르였다.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린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두 번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는데, 라티시아.”
너무도 간단히 외면당한 라티시아에게 공작의 말은 조롱처럼 들렸다. 정수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잠시 멍하니 있던 라티시아는 차차 정신을 차렸다. 체념한 듯, 이윽고 라티시아의 고개가 작게 흔들렸다.
“네.”
보랏빛 눈에 서글픔이 고여 있었다. 원망은 보이지 않았다. 테오도르를 향한 원망 같은 건, 상상으로도 할 수 없었다. 라티시아는 테오도르를 이해했다. 테오도르의 열망을, 오래도록 키워온 꿈을.
때문에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공작의 앞이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다면, 미소를 지어서라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끝까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고, 공작은 종을 울려 하인을 불렀다.
“테오도르 뷔테르에게 술과 고기를 내어주어라.”
하인이 물러가자 공작이 테오도르에게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수고했다. 이만 물러가도록.”
공손히, 그야말로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인사를 올린 테오도르가 물러가자, 공작이 주문했다.
“노래해.”
아직 테오도르의 온기가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연구개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비린내도 가시지 않았다. 입 안쪽의 점막을 혀로 쓸던 라티시아가 문득 진저리 쳤다.
“…싫어요. 노래 부르지 않을 거예요.”
“뭐가 문제지? 약속대로 화가에게 기회도 주었지 않나. 그것도 두 번이나.”
라티시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부 의사 표시였다. 비록 얼마 못 가 무너졌지만.
“똑똑히 알아둬라.”
라티시아의 턱을 붙잡아 올려 똑바로 시선을 맞춘 공작이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너를 부른 건 나지만, 다음번 이 자리에 너를 불러 달라한 건 테오도르 뷔테르다.”
테오도르 뷔테르. 한시도 놓은 적 없던 이름이 라티시아의 가슴을 후벼 팠다.
“원한다면 다음번은 없는 일로 하지.”
안드레아는 미련 없이 일어섰다. 대강은 예상했다. 그의 노예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또한 알았다.
“할게요, 노래. 할게요!”
금세 이렇게 무너질 것을.
“죄송해요, 주인님.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노래를….”
어디고 젖어 있을 때가 예쁜 계집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유일하게 맛이 다른 눈물은 특히 좋았다. 사타구니 안쪽이 걷잡을 수 없이 뻐근해질 만큼.
“노래는 다음에.”
라티시아를 침대로 밀어 넘어뜨린 안드레아가 작은 여체 위로 거침없이 올랐다. 두 볼을 적신 눈물을 달콤하게 핥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