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
[과몰입공금]
올리비아는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안드레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경계를,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적지 않은 기간 그녀와 관계한 건 그 이유가 컸다. 그러나 지난 번 일 이후로 올리비아는 종종 선을 넘었다. 그가 사정감을 느끼는 순간을 포착해 일부러 다리를 감고 풀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와 벌이는 짓도 탐탁지 않았다. 이번에 올리비아가 소개한 헬레나, 아니 에레나였던가. 어쨌거나 그 비슷한 이름의 여자는 백발에 가까운 백금발이었다. 은발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에게 올리비아가 거만하게 지시했다.
노래해요. 공작께선 노래를 좋아하신 답니다. 안드레아, 그렇죠?
그의 침실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안드레아 자신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내칠 이유는 충분했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흥얼거리던 여자의 노래는 그가 박아댈 때마다 끊어지고 뭉개졌다. 그럴 때마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그와 노예 계집에게 번갈아 머무르곤 했다.
빤한 의도가 빚어낸 식상한 짓거리였다. 무엇보다 라티시아를 뜯어보는 독기 오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딱거리는 여자를 그대로 두고 침상에서 내려온 안드레아는 당장 물러갈 것을 명했다. 올리비아가 분한 얼굴로 라티시아를 손가락질했다.
저것 때문인가요? 저따위 노예 계집 때문에…!
가당찮은 소리였다. 라티시아를 무시하고 있던 그에게 노예의 존재를 자꾸만 상기시킨 건 오히려 그녀였다. 대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안드레아는 종을 집어 들었다. 하인들 앞에서 귀족의 체면을 상하고 싶지 않았던 올리비아는 서둘러 물러났다.
안드레아. 내가 성급했어요. 미안해요. 이해해줄 거죠?
올리비아의 바람과 달리 안드레아에게는 그녀를 이해시킬 마음도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애초에 서로 주고받을 게 명확한 관계 아니었나. 이해하고 이해받는, 그런 성가신 관계는 혼인으로 맺어진 여자 정도라야 겨우 고려해볼까, 말까였다.
때문에 올리비아가 찾아왔다는 전갈에 안드레아는 일고의 여지도 없이 그녀를 내쳤다.
“아무도 들이지 마라.”
아쉬움은 없었다. 정원사가 삐죽이 돋아난 가지를 쳐내듯, 선을 넘은 싹 역시 잘라버리는 게 옳았다.
올리비아를 되돌려 보내라는 말에 하인은 잠자코 허리를 숙였다. 함께 오신 분도 마찬가지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되었기에, 굳이 되물어 하인이 실수하는 일은 없었다.
침실에서 대기 중이었던 라티시아는 공작이 언급한 ‘아무도’에 자신은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노예상들은 노예를 셀 때 한 명, 두 명이라고 세지 않는다. 하나, 둘, 숫자만 센다. 한 마리, 두 마리 하지 않는 게 어디냐며 바울 할아버지는 자조적으로 웃곤 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라티시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상기했다. 주인님께 잘 말씀드려보겠다고, 테오도르에게 장담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지금에 와서는 자신이 없어졌다. 바닥의 어느 한 점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공작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는 게 전부였다.
‘언제 얘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언제가 되었건 공작이 완전히 홀로만의 세계에 고립된 지금은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라티시아의 짐작과 달리 안드레아는 이따금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제게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진한 보랏빛을 보자 궁금증이 일었다. 물에 젖은 제비꽃 같은 저 눈을 뽑아 쥐어짜면 보라색 꽃즙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겨우 이 정도다. 은발머리 노예 계집이 그에게 주는 감상은. 그러니 올리비아의 망상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헛웃음이 다 나왔다.
갑작스러운 헛웃음에 라티시아가 흠칫 떨며 움츠렸다. 작은 떨림에 달콤한 체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그러고 보면 선을 넘는 건 올리비아만이 아니었다. 그의 정원에서 공공연하게 그의 노예를 탐하는 그림쟁이도 있잖은가.
테오도르와 만나고 돌아오면 유난히 애달픈 눈을 하고 있는 라티시아를 안다. 그의 앞에서는 박제된 새처럼 굳어 있다가도 테오도르 앞에서는 즐거운 새처럼 재잘거린다는 것도.
“떠들어봐. 아무거나.”
딱히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궁금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적막이 싫증났다. 예상 못한 주문에 잠깐 얼어 있던 라티시아가 이내 뜻을 깨닫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말을 하기 전 습관인 것 같았다.
“제 이름이요, 라티시아요, 바울 할아버지가 글을 가르쳐주셨거든요. ‘라이티티아’라는 고대어에서 따왔어요. 기쁨이라는 뜻이래요. 제가 지었어요. 그럼 기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길지 않은 자기소개에서 안드레아는 몇 가지를 유추해냈다. 이름을 지어줄 부모가 없었다는 것. 따라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쩌면 갓난아기일 때부터 노예 시장에 팔려왔을 거라는 것, 기쁠 일이 없었다는 것.
“노래 가사도 바울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전에는 그냥 으으음, 이렇게 불렀거든요.”
허밍으로 얼마간 흥얼거리던 라티시아의 입에서 한동안 바울이라는 늙은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지하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늙은 남자 노예는 아마도 누군가가 사가기엔 고깃덩어리만큼의 가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다음에도 지하에 함께 있다 떠나간 노예들이 나열되었다. 안드레아는 어렵지 않게 라티시아가 일부러 한 인물만 제외하고 떠들고 있음을 눈치챘다.
테오도르 뷔테르.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갉작대는 기분이 더러웠다. 이미 사정을 다 아는 마당에 부러 숨기는 이유가 뭐지? 묻기 전에 라티시아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름이 효과가 있었나 봐요. 이름을 짓고 나서요, 거짓말처럼 테오를 만났거든요.”
다시 이름 얘기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인물은 뒤에 나온다 했던가. 그렇다면 눈앞의 노예가 살아온 삶은 생각보다 단출하고 보잘것없었다. 경험이라곤 철창에 갇혀 오고 가는 노예를 만난 것뿐인데 그마저도 손에 꼽게 적었으니.
“테오가 없었더라면, 저도 바울 할아버지에게서 얻은 약으로….”
“테오도르.”
“예?”
“테오도르 뷔테르.”
“아…. 네, 테오도르 뷔테르요. 죄송해요, 주인님.”
라티시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며 허리를 꾸벅거렸다. 아무 관계없는 사람 앞에서 애칭을 부르는 건 결례였다. 알면서도 익숙함이 자꾸 실수를 저지르게 만들었다.
“테오도르가 처음 그려준 그림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태어나서 그런 색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주 강렬한 빨강이었어요.”
안드레아의 시선이 라티시아의 은빛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평생 보이는 것이라곤 어둠에 잠긴 무채색의 사물과 자신의 은색 머리카락이었을 테니 붉은색에 감명받았을 만도 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파랑색도 있었는데 테오도르는 그게 깊은 바다라고 했어요.”
라티시아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와 똑바로 마주쳤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할 때와 달리 보라색 눈은 꿈꾸는 것처럼 젖어 있었다. 몽롱한 시선으로 라티시아가 중얼거렸다.
“꼭 주인님의 눈처럼 짙은 파랑이요.”
“…….”
“아, 죄송합니다.”
무심결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라티시아가 황급히 시선을 본래 두었던 자리로 떨어뜨렸다. 라티시아의 자책과 달리 안드레아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잡아 올려 다시 눈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비정상적인 충동이었다.
막상 테오도르에 대해 들으니 잡쳐버린 기분도, 노예에게 신변잡기를 늘어놓으라고 기회를 준 것도, 은밀히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뱀처럼 고개를 쳐든 욕망도. 모두 그답지 않다.
안드레아는 생소한 감정의 편린들을 무표정한 낯가죽 밑에 능숙하게 숨겼다. 때문에 라티시아는 제 주인의 변화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지금은 테오도르에 대한 얘기를 꺼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저…, 주인님. 여쭐 게 있는데….”
긴장으로 질식할 것 같아 잠시 숨을 고른 라티시아가 토해내듯 쏟아냈다.
“테오도르를 언제 부르실 건가요? 초상화 그릴 기회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더….”
라티시아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건 안다. 따지는 것 같은 제 태도도. 하지만 제가 더 잃을 게 있었나? 테오도르에게 도움이 된다면 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이니.
“쓸모를 증명해야 하나요?”
라티시아의 당돌한 질문은 안드레아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매처럼 안드레아의 사고도 비딱하게 흘러갔다.
이 계집은 한결같다.
평소엔 비 맞은 개처럼 발발 떨면서 테오도르 뷔테르에 한해서는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용감하게 짖어대는 하룻강아지같이 군다는 점에서.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가르침을 주어야 마땅하지 않나. 끝내 주인을 물기 전에.
“초상화는 곧 맡기도록 하지.”
의의로 선선한 대답에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이고 있던 라티시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환희로 활짝 피어난 제비꽃을 짓이길 차례였다.
“그 전에.”
“…….”
벌써 시들기 시작한 보랏빛에 조금 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꺾이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 좀 더 버텨야지.
“로카디 뷔테르가 내건 조건을 마저 확인해야겠다.”
“조건이요?”
로카디가 저를 두고 무슨 조건을 걸었을까. 노래를 부르면, 공작을 불면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그럼 테오도르에게 평생에 다시없을 좋은 기회가 생긴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딱 그렇게만 알고 있는데.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등줄기를 타고 뱀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는 불길한 기운에 라티시아가 몸을 떨었다.
커다란 물음표가 떠 있는 라티시아의 하얀 얼굴에 대고 안드레아가 친절하게 답을 일러주었다.
“노래를 잘 부르고,”
“…….”
“숫처녀고.”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시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완전히 창백하게 질린 낯에 걸린 두 눈도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작은 바람도 이기지 못하는 여린 제비꽃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알겠고.”
“…….”
“동정인가?”
이런 종류의 확인이 어떤 귀결을 맺는지 라티시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라고 하면 테오도르에게 불이익이 갈 테고, 사실대로 답하면….
그다음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그녀가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도 공작은 내키는 대로 행동할 테니까. 그에겐 그럴 권리가 있고, 노예인 그녀에겐 거부할 권리가 없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안드레아의 두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어차피 나올 답은 뻔했다. 설마 로카디 뷔테르가 자신을 속이진 않았을 테니. 노예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애썼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안드레아는 라티시아를 궁지로 몰았다.
“로카디가 거짓말을 했나 보군.”
냉정한 어조에 라티시아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에요.”
“무엇이.”
냉기 도는 짙푸른 눈동자에 언뜻 즐거움이 스쳤으나, 경황이 없는 라티시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끝을 비비며 간신히 대꾸했을 뿐.
“처음…, 처음이 맞아요.”
“그럼.”
안드레아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증명해.”
순식간에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증명하라니, 어떻게? 노래는 부르면 되고 그림은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처음인 건 어떻게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쪽으로는 무지한 편인 라티시아에게는 그저 깜깜했다.
“증명을… 어떻게요?”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나?”
“…….”
그저 막막했다. 그래도 마냥 길이 없는 건 아니어서, 망연한 상태 그대로 굳어 있던 라티시아는 용케 한 여자 노예를 떠올려냈다.
어느 남작에게 팔려갔다가 돌려보내진 여자 노예는 이미 만신창이였는데도 로카디에게 거의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을 당했다. 라티시아는 서럽게 울던 여자가 들려준 얘기를 똑똑히 기억했다. 첫 관계 시에 피가 나오지 않자 즉시 남작이 노발대발하며 매질을 시작했다는.
‘난 정말 처음이었어!’
그래서 라티시아는 처음에는 피가 나온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증명할 방법이라곤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나도 안 나오면 어쩌지?’
그녀도 그 여자 노예 같지 않으리란 법은 없잖은가.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되든 안 되든 해보는 수밖에. 공작은 경험이 많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억지로 트집을 잡으면 별수 없지만….
트집을 잡는다 해도 라티시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여자 노예가 그랬던 것처럼 주인이 매질을 하면 잠자코 맞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동안 지나치게 운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고, 라티시아는 새삼 생각하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사락, 사락.
리본의 매듭이 풀리면서 끈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뱀처럼 정적을 헤쳤다. 공작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며 잔에 술을 채웠다. 후각을 자극하는 알싸한 냄새에 라티시아는 생전 맛본 적도 없는 맑은 호박색 액체가 간절해졌다. 멀쩡한 정신으론 도무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라티시아의 몸은 착실히 움직였다. 결국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벗고 나니 다음이 막막했다.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둔덕을 만지는 게 전부였다. 전에는 한 번도 그곳에 손을 대본 적이 없었다.
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문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어설프게 옴직대는 그녀의 손가락을 안드레아가 턱짓으로 가리켰다.
“뭐 하는 거지?”
딱히 다그친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이 급해진 라티시아는 갈라진 틈을 벌리고 손가락을 끼웠다. 그러나 더욱 헷갈리기만 하고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녀는 심각할 정도로 자신의 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무작정 더듬거리기만 하는 그녀에게 공작이 조소를 보냈다.
“증명 대신 자위라니. 재미있네.”
“그런 게 아니라….”
라티시아는 조금 억울해졌다. 발가벗고 다리 사이에 손을 넣고 있는 자세도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울고 싶은 기분을 꾹 억누르며 해명했다.
“처음에 거기를 누르면 피가 나온댔어요.”
그러곤 황급히 덧붙였다.
“사람에 따라 아닌 경우도 있지만.”
안드레아는 오므린 허벅지 사이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을 보았다. 위치상으로 짐작건대 겨우 음순이 갈라지는 시작점에나 닿았을까. 질 입구에도 가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래서, 네 손가락으로?”
대답 대신 라티시아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백날 쑤셔봐야 핏방울 비슷한 것도 비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제대로 구멍을 찾을지도 의문이지만.
안드레아는 잠시 갈등했다. 이대로 더 두고 보는 것도 분명 즐거울 것 같다. 그게 원래의 목적이기도 했고. 하지만 흉흉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분신 덕분에 목적은 본질을 잃었다.
비천한 몸뚱어리에 손대지 않겠다던 생각은 이만 집어치우기로 했다. 그럴 거였음 처음부터 노예의 입에 손가락을 물려주지 말았어야했다. 아니, 그 전에 쓰러져 죽어갈 때 맥 같은 건 짚지 않았어야 했다. 그냥 그대로 숨을 거두도록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해소되지 않는 욕망은 고스란히 그의 몫으로 남았다.
어차피 순간이다. 색다른 여흥에 빠지는 건. 한 번 맛보고 나면 그만, 차라리 처음부터 먹어치울걸. 그럼 금세 싫증을 느끼고 빨리 내쳤을 텐데. 일련의 성가신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고.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그가 직접 확인하겠다는 말에 라티시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한층 선명해진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까닭 모를 쾌감이 번졌다.
“주인님이 직접….”
중얼거리던 라티시아는 사타구니에 얌전히 끼워만 두었던 손을 빼냈다. 그러나 차마 다리를 벌려 대주진 못했다. 대신에 그녀는 안드레아의 손을 잡았다. 그것만도 대단한 용기를 낸 거였다. 음부로 손을 끌어 갖다 대려는 의도를 읽은 안드레아가 코웃음 쳤다.
“더 좋은 게 있는데, 왜.”
안드레아는 라티시아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성기의 기둥을 잡고 위아래로 쓸었다. 이미 팽팽하게 발기된 상태지만 그의 손짓에 따라 더욱 길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라티시아의 눈앞이 그만 아득해졌다.
공작은 기어코 자신과 그 행위를 하려는 거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그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라티시아는 담담하려 애썼다. 이미 몇 번 공작의 물건을 입에 담아봤었으니까. 입에서 아래로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니 별거 아니다. 그래, 아니야. 아니어야 해.
“아…!”
채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는데 공작이 라티시아를 번쩍 들어 허벅지 위에 앉혔다. 굵은 끄트머리가 무자비하게 입구를 찔러대, 라티시아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앗, 아! 악! 아악!”
겨우 귀두만 들어왔을 뿐인데, 라티시아는 굵은 작살에 꿰뚫린 작은 물고기처럼 파득파득 몸부림쳤다.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하고 벌벌 떠는 몸을 붙잡고 다시 한번 허리를 위로 추어올리자,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아파, 아파! 아파요, 주인님, 아파….”
침대에서 우는 계집은 질색이었다. 안드레아를 상대했던 여자들 중에 동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경우는 없었다. 처음이라면 미약을 먹든 기구를 사용하든, 어떻게든 그를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아래를 풀어서 왔다.
이런 이유로 지금의 상황이 안드레아에게는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만둘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겨우 끄트머리만 들이밀었는데도, 쫀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환상적이었다. 안드레아는 한 손에 들어오는 가느다란 허리를 힘주어 잡아 내렸다.
“아아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라티시아가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정말이지,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아래를 지지는 것만 같았다. 라티시아는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저었다.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아서, 무심결에 안드레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라티시아가 눈물 젖은 뺨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살살, 살살 해주세요, 주인님….”
안드레아는 끄트머리만 겨우 박힌 기둥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빈틈없이 맞닿은 음문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핏줄기가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억지로 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는 무리였다. 안드레아는 짜증을 누르며 몸을 물리고 가슴을 덥석 쥐었다.
“어….”
라티시아는 그저 멍하니 올려볼 따름이었다. 누군가 가슴을 쥐고 주무르는 느낌이 낯설었다. 너무나도 낯설어서 화끈거리는 가랑이 사이의 감각은 잠시 잊어버릴 정도였다. 가슴에 가해진 악력이 점차 강해져, 라티시아가 허리를 틀었다.
“아파, 아파요….”
안드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손을 놀렸다. 노예상이 살성에 대해 얘기할 때는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한없이 매끄러운 살결이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마냥 부드럽기만 한 줄 알았는데, 탄력적으로 튕겨내는 앙큼한 맛이 있는 가슴이었다.
“아앙!”
안드레아가 반항하듯이 빨갛게 솟아오른 유두를 깨물자 앙알대는 것 같은 신음이 들려왔다. 제가 흘려놓고도 믿기지 않아 라티시아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이로 끝을 긁었다.
“하응…!”
다시 한번 이질적인 소리가 목구멍을 울렸다. 라티시아는 무방비한 상태로 가슴을 빨리며 연신 신음을 흘렸다.
“주인, 님, 읏! 앙!”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내저었던 손은, 차마 안드레아의 몸에 닿지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라티시아의 솔직한 반응이 안드레아의 마음에 들었다. 안드레아는 알면서도 짓궂게 물었다.
“전엔 아무도 여길 빨아준 적이 없나? 이렇게 좋아하는데 아쉽게 됐군.”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 말고는 라티시아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물러지는 건 가슴인데, 이상하리만치 다리 사이가 간질거렸다. 자세를 틀 때마다 노출된 음부가 유독 서늘했다.
구멍에서 배어 나온 물기로 인해 그럴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때문에 안드레아가 음순에 물린 손가락이 쭉 미끄러졌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거긴!”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아래가 질척였다. 안드레아의 손가락이 입구를 꾹 누르자 고여 있던 음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싶어 시험 삼아 검지를 들이밀었으나, 안쪽은 아직이었다.
조금 더 손가락을 들이밀어 속을 가늠하던 안드레아는 라티시아의 손가락으로 처녀혈을 보는 건 어림도 없을 거라는 처음의 생각을 정정했다. 이렇게 좁은 구멍이라면 그녀의 작은 손가락도 드나들기 버거울 터였다. 이런 걸 무작정 들이밀었으니, 그토록 힘겨워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아, 흐읏….”
다리 사이에 느껴진 이물감에 무지막지했던 삽입을 떠올리곤 잠시 긴장했던 라티시아는 제 안을 탐색하는 게 손가락임을 알고 안심했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참을만했다. 손가락은 한동안 그녀의 안을 휘저었다. 부드럽게 문지르기도 하고 어느 한 부분을 꾸욱 힘주어 누르기도 했다. 간질거리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이 서서히 퍼졌다.
“으응….”
달콤한 신음을 흘리는 입술을, 안드레아가 가볍게 물었다. 도톰하고 말캉한 입술을 잘게 씹자 또다시 애교 섞인 신음이 흘렀다. 이제, 질 안쪽의 깊은 샘에서도 따스한 물이 솟기 시작했다. 긁어내듯 손을 놀리자 찰박찰박, 다소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워, 안드레아가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막 입술을 맞추기 직전, 라티시아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두 손으로 입을 막기까지 했다. 황당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무슨 짓이지?”
“키스를 하면 숨이 오가서… 숨에는 영혼이…, 영혼이 있어서! 그것만은….”
더듬거리며 종알거리는 헛소리를 정리하면 노예니까 몸을 내주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영혼까지 나누는 건 안 된다는 요지였다. 이번에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또다시 헛웃음이 나왔다. 은근히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 노예였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더러움이 있었다. 안드레아는 그보다 더 기분 나쁜 무언가를 생각하려 애썼다. 그게 떠오르자마자 즉각 물었다.
“누가 그런 헛소릴 지껄였지?”
“그냥, 제 생각이에요.”
어느 정도는 불쾌함이 가시는 답변이었다. 젊은 그림쟁이 새끼나 늙어빠진 노인네의 이름이 나왔다면 이 발칙한 새의 모가지를 비틀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화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안드레아는 나빠진 기분을 환기시키는 방법을 잘 알았다.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무슨! 아, 응!”
그녀를 자빠트린 공작이 머리를 아래로 가져가자 라티시아는 기겁했다. 손가락과도, 성기와도 다른 살덩이가 안쪽으로 파고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기절할 뻔했다. 이상했다. 축축하고 말캉한 혀가 구렁이처럼 그녀의 안에서 꿈틀대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이상했다.
“하응, 아! 주인, 주인님!”
안드레아는 라티시아가 애써 모은 무릎을 손쉽게 잡아 벌렸다. 꼼짝도 못하도록 누르고 혀로 쑤셔댔다. 질구에 코를 박고 핥아대다니. 이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여자의 구멍이란 그저 박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하지만 아까부터 은은히 스미는 달콤한 냄새의 정체가 못 견디게 궁금했다. 정확히는 그 맛이.
‘이 계집은 진짜….’
라티시아의 애액에서 정말 포도 맛이 나자 안드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드레아의 입술에 닿아 있던 그녀의 작은 조갯살이 푸르르 떨렸다. 정말이지 부끄러워 죽고 싶은 기분이 된 라티시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공작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고갯짓에 따라 흔들릴 때마다 무서울 정도로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그, 그만….”
라티시아의 애원에도 안드레아는 그만하기는커녕 더욱 혀를 세워 내벽의 위쪽을 찌르고 빠르게 떨었다. 달달달, 진동하는 음부에 라티시아가 자지러졌다.
“아아, 앙! 아아, 이상해요, 이상해!”
어쩌다 그가 미천한 노예 따위의 밑구멍이나 빨게 됐는지. 언제나 받는 쪽은 그였는데. 그게, 묘하게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배가 부른 착각이 들 정도로 애액을 빨아 먹은 안드레아가 비아냥거렸다.
“이렇게 줄줄 흘리면서 내 건 왜 못 받아먹지?”
“…….”
라티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주인은 자기 물건의 크기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라티시아는 굵은 기둥에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이제, 이제 된 거죠? 피, 났으니까….”
목숨이라도 건진 것처럼 안도하는 라티시아의 위로 안드레아가 장신의 몸을 겹쳐왔다. 뭉툭한 선단이 조금 전까지 혀가 쑤셨던 자리에 정확히 닿자 라티시아가 벗어나려 애쓰며 항변했다.
“증명, 했는데… 왜….”
“내가 내 노예를 갖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지?”
신랄한 조소와 함께 푸욱, 기둥이 박혀들었다. 충분히 젖었다 한들 길은 지나치게 좁고 구멍을 드나들 기둥은 남달리 흉흉한 거근이었다. 애초에 무리한 결합이었으나 안드레아는 무자비하게 허리를 들이밀었다.
“아, 안 돼! 안…! 으읏!”
라티시아가 비명을 질렀지만, 안드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뿌리 끝까지 아래를 묻었다. 후, 만족스런 신음이 그의 목 안쪽에서 울렸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느낌이 좋았다.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등줄기를 훑는 짜릿한 쾌감에 아득해져선, 성기 끝에 닿은 자궁 입구를 꾹꾹 밀어 올렸다.
“흐, 하흐으….”
달군 숯덩이가 아랫배를 가득 채운 것 같은 생경한 느낌에 라티시아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리 크게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아랫배가 온통 지끈거렸다.
“못해요, 못해, 이런 거….”
“잘하고 있잖아?”
안드레아가 놀리듯 라티시아의 볼을 톡톡 치면서 허리를 뭉근하게 돌렸다. 빠듯하게 맞물려 굳어 있던 내부가 조금씩 유연성을 되찾았다. 이쪽으론 영 순진한 주인과 달리 라티시아의 아래는 금세 그의 물건에 적응하고 야무지게 달라붙었다. 간 보듯 슬쩍슬쩍 조이기까지 하는 게 요망하다.
무지한 얼굴과는 상반된 아래의 반응에 안드레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여러모로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계집이었다. 어쩌면 이 노예에게 질리는 데는 그의 생각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예감하며 천천히 엉덩이를 뒤로 뺐다. 딸려 나와선 쪽쪽 입을 맞추는 빨간 내벽이 귀여워서 일부러 귀두를 물려두었다.
“하으으….”
안을 돌덩이처럼 묵직하게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라티시아는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이로써 끝이길 바랐다. 아니, 끝인 줄 알았다. 그동안 공작의 정사를 수없이 목격했으면서, 어리석은 희망으로 잠시 망각했다.
때문에 다시금 흉기와도 같은 성기가 퍽 박혀들었을 때 안심하고 무방비하게 있던 라티시아의 허리가 크게 튀어 높게 들린 건 당연했다. 반쯤 들린 엉덩이를 좌우로 벌리며 안드레아가 피식 웃었다.
“반겨주니 고맙군.”
뻔히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그는 일부러 반대로 말하며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렇게 작고 여린 몸을 갖고 있으면서 밑동까지 꾸역꾸역 받아 삼키는 게 대견하달까. 어쨌든 싫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맛볼걸. 따지고 보면 손가락이 닿나 성기가 닿나 마찬가지 아닌가.
비약적인 합리화로 안드레아는 비천한 노예와 몸을 섞는 자신의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럴 정도로 노예의 속살 맛이 좋았다. 뜨끈뜨끈하고 달콤한 내부가 녹진하게 달라붙어선 능란하게 조여 대는 게 일품이었다. 처음인데도 이럴진대 조금 더 이끌어주면 얼마나 변할지 기대가 될 정도였다.
“이거, 아무래도 잘못 물린 것 같은데.”
낭패감에 젖어 자조적으로 비틀린 웃음을 지으면서도 안드레아는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말랑하고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쥐었다 펴자 반항하듯이 툭 튕기는 게 손맛도 좋았다. 내키는 대로 아래를 쑤셔대던 안드레아가 문득 짓궂게 허리를 얕게 치댔다. 뭉툭한 끄트머리는 정확히 한 곳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아, 앙! 아앙!”
내벽의 위쪽, 우묵하게 꺼지는 부분을 계속해서 꾹꾹 찌르자 허리를 뒤틀던 라티시아가 하얗게 질렸다. 그를 벗어나 위쪽으로 도망가려는 라티시아를, 안드레아가 꽉 붙들었다. 눈꼬리가 발갛게 물든 라티시아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분명 고통스러운데 드문드문 확 치고 올라오는 이질적인 감각이 있었다.
“안, 안 돼! 으읏, 응!”
이럴 수는 없었다. 라티시아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잉, 지잉, 하며 아랫배가 저릿저릿 울리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데, 여기에 더해 무언가 마려운 느낌이 들어 라티시아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화, 화장실에, 으븝, 가야… 하응!”
“왜, 싸고 싶나?”
공작이 이런 노골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줄 몰라서, 라티시아는 잠시 아연했다. 이런 와중에도 자극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느 순간 라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완전히 젖힌 채 경련했다.
“하…! 아, 안, 하으읏!”
퓻. 퓨븃.
“아, 아아! 아아아!”
소변처럼 쏘아진 맑고 점성 없는 액체가 안드레아의 아랫배를 따스하게 적셨다. 제가 쏟아낸 것이 점차 아래로 흐르며 번져가는 모양이 라티시아의 눈에도 또렷이 보였다.
“죄, 죄송해요.”
그것이 소변인 줄만 알고 사과하는 라티시아에게 안드레아가 능청스럽게 굴었다.
“남의 몸을 더럽혔으면 책임을 져야지.”
“…….”
제 몸인데,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만도 부끄러운데, 안드레아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찍어 혀로 가져갔을 때는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래는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게 꿰뚫린 상태였다.
“맛있네.”
처음인데도 가지가지 한다 싶어 안드레아가 웃었다. 이토록 민감한 몸이라니.
“네 걸 먹어본 적 있나?”
당연히 그래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 안드레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길게 빼내고 조금 전 라티시아가 영역 표시처럼 흔적을 남겨놓은 하초를 가리켰다.
“핥아라.”
여전히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그저 아랫배가 가벼워진 것에 감사하며 라티시아가 상체를 숙이며 혀를 내밀었다. 달콤한 포도향이 혀끝에 옅게 머물렀다 사라졌다. 강아지처럼 할짝대는 라티시아의 혀 놀림은 안드레아를 감질나게 만들었다. 굳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그, 그만…!”
안드레아가 순식간에 그녀를 눕히고 다시 위로 오르자 라티시아는 필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비단 생경한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와 다시 하나로 이어지는 게 무서웠다. 단순히 입으로 받아내던 걸 아래로 받는 거라고 생각하다니, 완전히 오산이었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가 불러일으키는 온갖 감각들이 낯설고 두려웠다. 그 감각들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서, 본능적으로 조금 더 느끼기를 원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라티시아는 어떻게든 안드레아를 막으려 애썼다.
“싫, 싫어. 하지 마, 하지… 아, 안 돼!”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발버둥 쳐도 바위 같은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꽉 오므린 무릎을 손쉽게 벌리고, 보란 듯 끄트머리를 느릿느릿 들이민 후, 그대로 끝까지 때려 박았다. 푸욱, 푸욱, 사정 봐주지 않고 꽂아대는 통에 라티시아는 위아래로 흔들렸다.
안드레아는 학, 학, 가쁜 숨을 내뱉는 앙증맞은 혀를 쭉쭉 빨아들였다. 그의 작은 새의 영혼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자궁 입구까지 퍽퍽 때려 박다가 빠르게 허리를 털어대자 라티시아가 으응, 신음했다. 그마저도 그의 입술로 곧장 먹혀들어 갔지만.
“아주, 잘 삼키는데, 응?”
유두를 잘근잘근 씹으며 규칙적으로 안드레아가 허리를 치대자, 라티시아가 끙끙 앓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부터 그의 것을 조이는 느낌이 색달랐다. 삼키기만 할 뿐 조금도 풀어주지 않고 콱콱 물어오는 게 욕심 사납게 느껴질 정도였다.
“으, 안 돼, 이건, 아, 아!”
제 몸의 변화를 감지한 라티시아가 중얼거렸다. 어쩐 일인지 척추를 축으로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떨림은 이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라티시아의 가슴을 한가득 베어 물고 혀끝으로 정점을 희롱하던 안드레아에게도 라티시아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라티시아의 양다리를 일자로 모아 어깨에 걸친 안드레아가 그대로 내달렸다.
“앙, 아앗! 응, 흐읏, 앙, 앙, 앙, 앙!”
불거진 핏줄과 함께 단단한 기둥이 예민한 내벽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콱, 콱, 찍어대는 자극이 너무 심해서, 라티시아는 한없이 흐느꼈다. 머리가 절절 끓었다. 뇌수가 녹아내리고 발끝이 곱아들었다. 하복부 전체가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강하게 수축했다, 고 인지한 찰나 안드레아가 세차게 하체를 박아 넣었다.
“흐아아앙!”
그녀의 애액과는 점성부터 다른 뜨끈한 무언가가 안쪽 깊숙이 고이는 걸 느끼며, 라티시아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
“이럼 곤란한데.”
그는 이제 시작인데. 안드레아는 축 늘어진 라티시아를 보며 혀를 찼다. 그의 것을 끊어 먹을 듯 쥐어짜던 아래는 아직도 우물우물 살덩이를 씹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본디 사정하지 않고 허리를 물리는 습관이 있었으나, 지금만큼은 오랫동안 몸에 배어온 습관을 거슬러 더욱 허리를 밀어 넣었다. 계집의 예쁜 틈 사이로 흰색 크림이 배어 나오는 모양을 보면 꽤 즐거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통통하게 부푼 빨간 속살 사이로 백탁액이 먹음직스럽게 비어져 나왔다. 한차례 아랫도리에 고인 열기를 쏟아냈지만, 그의 일물은 조금도 기세가 죽지 않았다. 엉망이 된 아래를 구경하자, 도리어 흥분으로 전신의 피가 하복부를 향해 쏠렸다.
안드레아는 축 늘어진 라티시아의 몸을 고쳐 안았다. 골반을 제게 맞춰 들고 쏟아놓은 정액을 윤활제 삼아 움직임을 이어갔다. 기절한 탓에 앙앙대는 신음 소리와 물어 당기고 조이는 맛이 없어 아쉽지만 워낙 좁아터진 구멍이니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하, 후으….”
순백의 눈처럼 깨끗한 피부에 제가 남긴 흔적이 그새 울긋불긋 물든 게 기꺼웠다. 그 꼴을 감상하며 허리 짓하는 안드레아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돌았다.
안드레아의 움직임은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 달콤한 살을 집착적으로 물고 빨며 날이 새도록 포식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종내는 아래를 깊숙이 묻은 채 가슴을 탐했다.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질리지 않는 가슴이었다.
라티시아가 깨어난 것도, 가슴에서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악력 때문이었다. 배꼽 아래가 온통 무지근한 느낌에, 라티시아는 아랫배를 더듬더듬 짚었다. 얇은 뱃가죽 밑으로 평소에는 없던 것이 불룩하게 만져졌다. 그것의 뿌리를 찾아 무심코 내린 라티시아의 손끝에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것이 닿았다.
“어… 아!”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라티시아가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뗐다. 공작의 것이 여전히 그녀의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허겁지겁 앞으로 기어 그것을 빼내려 했지만 워낙 빠듯하게 맞물려 있어 불가능했다. 발기가 풀리지 않기도 했지만, 그녀의 체액에 표피가 불어난 탓도 있었다.
“붙었, 붙었나 봐요… 빼주, 빼주세요.”
이대로 한 몸처럼 붙어 다녀야 하면 어쩌지. 덜컥 겁을 집어 먹은 라티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드레아는 침착하게 방법을 일러주었다.
“네가 노력하면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제 했던 것처럼 아래를 적시면.”
“그, 그런….”
“도와줄까?”
“아, 아니요!”
간밤의 행위를 기억하는 라티시아는 황급히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단지 몸을 섞는 게 아니었다, 그건. 호흡, 눈빛, 체온, 열기,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고스란히 나누어가지는, 그리함으로써 제 스스로가 자신이 아닌 게 되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라티시아는 다시는 그런 걸 겪고 싶지 않았다.
“아….”
정신을 잃었던 동안 안드레아가 줄기차게 제 몸을 취한 걸 모르는 라티시아는 헐어버린 젖꼭지가 쓰라려 신음했다. 안드레아는 팔을 괴고 그녀가 제 젖꼭지를 스스로 조물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잠시 손 뗀 사이 말랑하게 풀어져 있던 젖꼭지가 점차 꼿꼿해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밤새도록 시달린 몸은 여간한 자극으로는 동할 줄 몰랐다. 머뭇거리던 라티시아는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공작이 혀끝으로 찔렀을 때 유난히 찌르르 울렸던 점을 찾아 살살 굴렸다. 그러자 조금은 물기가 어리는 것도 같았다. 라티시아가 깔짝거리며 엉덩이를 움직이자, 안드레아는 도와주기는커녕, 몸을 뽑지 않고 허리를 더욱 추켜올렸다.
“하, 아읏!”
빨갛게 부풀다 못해 헐어버린 입구가 화들짝 놀라며 침입자를 맞이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녀를 기절할 정도로 몰아갔던 쾌감의 징조였다. 그게 어떤 건지 알아서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쾌감과 함께 몰아쳤던 환희와 서글픔을 버무려놓은 듯한 이상한 감정을, 라티시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님, 아, 아파요….”
“빼달라 하지 않았나.”
안드레아는 건조하게 대꾸하며 허리를 놀렸다. 라티시아가 깨어나니 아래도 정신을 차린 듯 그의 것을 열심히 받아 삼켰다. 여러 번 사정했음에도 아찔할 정도의 사정감이 몰아쳤다.
“앙, 아앙!”
일찍부터 오르가즘을 맞은 라티시아의 허벅지 안쪽이 가늘게 경련함과 동시에 그도 파정했다. 이쯤 되니 본래 빼려던 게 정액인지 성기인지 알 수 없다는,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만족스러운 아침이었다. 쌕쌕거리며 쾌락의 여운에 취해 있는 라티시아를 보며 안드레아는 엉뚱하게도 정액 말고도 그녀에게 뭔가를 잔뜩 먹여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고작 한 번의 오르가즘만으로도 나가떨어지는 라티시아의 형편없는 체력이 못마땅한 탓이었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공작과 겸상하게 된 라티시아는 그저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먹어라. 부족하면 또 채워줄 테니.”
정작 본인은 포도주만 마시고 있으면서, 안드레아는 라티시아에게 차려진 것들을 눈짓해 보였다. 아무 의욕이 없을 정도로 지쳐 있는 라티시아였지만, 막상 고소한 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동했다. 그녀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것을 가리켰다.
“이게 뭐예요?”
라티시아의 손끝이 가리키는 걸 흘긋 확인한 공작이 별걸 다 묻는 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빵.”
딱딱하고 검은 빵만 빵인 줄 알고 살아왔던 라티시아는 크게 당황했다. 이렇게 둥글고 몽실몽실한 게 빵이라고? 게다가 냄새조차 보들보들했다.
라티시아는 한동안 노릇하고 따끈한 빵을 신기한 눈초리로 구경했다. 눈치를 보다가 슬쩍 눌러보기까지 했다. 보드랍고 폭신한 빵은 이내 눌린 만큼 부풀어 올랐다. 믿을 수 없어 하는 라티의 눈빛을, 안드레아는 포도주를 마시며 느긋하게 즐겼다.
“빵이 딱딱하지 않고 속도 하얘요….”
빵 하나를 집어 들곤 한참 망설이다 양손으로 잡고 제법 과감하게 쪼갠 라티시아가 중얼거렸다. 빵 조가리만 먹지 말고 다른 것도 먹어보라 권하자 통통한 버섯을 포크로 쿡 찍어 입에 넣었다. 버섯의 풍미에 눈이 동그래진 라티시아가 연속해서 버섯을 찍어 먹었다.
잘 먹는 건 좋은데….
안드레아는 문득 초조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왜 고기엔 손도 안 대지? 어린 송아지 고기로만 만들라고 특별히 명령했는데. 자고로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다. 오늘 밤도 라티시아가 먼저 잠들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여 안드레아는 어김없이 버섯으로 향하는 라티시아의 포크를 빼앗아 큼직한 고깃덩이를 꾹 찍어 건넸다. 버섯 요리가 든 접시는 저만치 치워버리고.
“너무… 커요.”
눈을 깜박이며 고기를 쳐다보던 라티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나 저제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안드레아가 한숨을 쉬며 고기를 조각냈다.
“이래서야….”
“…….”
“누가 노예인지 모르겠군.”
어쩌다 식탁 가득 음식을 차려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 식탁에 앉아 먹는 것도 모자라 먹여주기까지 하다니. 안드레아는 애써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유를 붙였다. 식사를 마치면 다시 그녀에게 파고들 예정이었으니까.
“제가,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지적에 얼굴이 붉어진 라티시아가 포크를 잡으려 했으나 민첩한 안드레아를 당해낼 리 만무했다. 괜히 중심을 못 잡아 그의 품에 와락 안긴 꼴만 됐다.
“넌 너무 말랐어. 노예라면 모름지기 주인을 잘 섬겨야 하지 않나? 그러려면 잘 먹어둬야지.”
지난 밤 안드레아를 ‘섬기다’ 기절해버린 라티시아는 잠자코 고기를 씹었다. 잘게 갈린 고기를 삼키고 나면 다음 조각이, 또 씹고 삼키기를 반복하고 나면 바로 다음 조각이,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때문에 라티시아는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은… 안 드세요? 배고프실 텐데.”
슬슬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라티시아가 그만 먹겠단 소릴 돌려 말했다. 숨 돌릴 틈이라도 주었으면 좋겠건만, 안드레아는 마치 고기 먹이는 기계처럼 굴었다. 자신은 고기 먹는 기계고.
“전혀.”
라티시아의 얕은꾀를 간파한 안드레아가 두툼한 스테이크를 새로이 끌어와 잘게 썰며 대꾸했다.
“어젯밤에 꿀물로 배를 잔뜩 채웠거든.”
안드레아가 말하는 꿀물이 무엇인지는 너무 명확했다. 제 다리 사이에 처박혀 야한 소리를 내던 머리통을 떠올린 라티는 얼른 고기를 먹어 스스로 입을 봉했다. 한편으론 어색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랐다.
식사를 다 하면, 테오도르를 만나러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꾸역꾸역 접시들을 비워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다부진 계획은 바로 틀어졌다. 라티시아가 식사를 마치자 안드레아는 침상에 오르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그녀를 탐했다. 침대로 걸어가는 동안 아랫배에서 뭉클한 덩어리가 툭, 툭, 떨어졌다. 얼마나 그녀의 안에 싸놓은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주인님, 제발….”
저항해봤자 힘으로는 끄떡도 없자, 라티시아는 최대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궁여지책 끝에 노래를 불러 재워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깜찍한 시도는 입 안을 틀어막은 재갈로 인해 무산됐다.
이번 한 번이면, 한 번만 더 하면, 그래, 어쩌면 한 번만 더 참으면….
쾌감에 절여져서 교성을 질러대면서도 라티시아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횟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노예는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던 말은 옳았다. 때가 되면 공작은 그녀에게 먹이를 주고, 잠을 재웠다. 남은 시간에는 그녀를 취했다.
짐승처럼 굴려지는 와중에도 라티시아는 공작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오직 하나, 테오도르만은 놓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채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주제에 모두 증명했으니 테오도르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안드레아는 냉소했다.
“이런 꼴이 돼서도 잘도.”
라티시아는 힘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저었다.
“테오도르가 그랬어요. 정말 중요한 건, 사랑하는 마음이라고요. 이런 거로는, 사랑이 변하지 않아요.”
사랑은 정결하고 고귀한 것이었다. 단순히 몸만 몇 번 섞었다고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꾸중에도 그녀를 찾아와 대가 없이 깨끗한 물과 음식을 제공하고, 다정한 위로를 아끼지 않았던 테오도르.
테오도르의 눈빛에 담긴 따스함이야말로 어떤 보석보다 가치가 있다고 라티시아는 굳게 믿었다. 그런 테오도르를 어찌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라티시아가 확신에 차서 얘기하는 동안, 안드레아는 늑골 사이에 작은 가시가 박혀 내키는 대로 할퀴는 느낌을 받았다. 타격은 미미하지만 성가시다. 그런 가시는 뽑아버려야지. 감히 노예 주제에 사랑이니 마음이니, 그런 걸 입에 올리는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단념.’
그래, 단념시켜야 했다.
“좋다. 그림을 그릴 기회를 주지.”
매우 효율적인 방법을 떠올린 안드레아가 흔쾌히 허락했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
“정말… 정말요? 감사합니다, 주인님. 정말 감사드려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을 되묻던 라티시아의 볼이 순식간에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안드레아의 심사가 잔인하게 뒤틀리는 건 채 깨닫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