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6화 (6/17)

# 06

[과몰입공금]

라티시아는 얌전히 공작의 뒤를 따랐다. 눈가가 조금 충혈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잠을 청하려나 싶었다. 그러나 침실에 도착한 공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침실에 딸린 문들 중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씻어라.”

얼결에 욕실에 들어온 라티시아는 그제야 테오도르가 느꼈던 위압감에 공감했다. 층층이 쌓인 구름처럼 뿌연 수증기 때문에 더욱 위축되는지도 몰랐다. 지금껏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은 겨우 새장 정도여서 이곳이 무척 어색했다. 항상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냄새가 나나?’

라티시아는 옷소매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여기에 온 뒤로 한 번도 씻지 못했지만, 라티시아의 기준에서는 짧은 기간이었다. 암시장에 있을 때는 씻는 일이 드물었다. 간혹 비 오는 날 노예들을 밖에 세워두는 노예상도 있기는 했지만, 인색한 로카디는 그런 자비를 베푸는 일이 없었다. 몸에서 코가 썩을 정도의 악취가 나면 고약한 표정을 지으며 겨우 한두 바가지의 찬물을 끼얹어주었다.

한데, 공작의 혐오 가득한 표정은 악취 정도가 아니라 그녀가 오물에 푹 절여졌다 나온 걸 본 사람 같았다. 어제 잔 아름드리나무 밑에 비료라도 섞어두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테오도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이유야 어쨌든 라티시아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몸에 물을 붓고 박박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호화로운 대리석 욕조가 중앙에 놓여 있었지만 그녀를 위한 게 아님은 잘 알았다.

목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더러운 것이 묻었는지 꼼꼼히 확인한 라티시아는 문가에 곱게 개어놨던 자신의 옷이 없어져 당황했다. 망설임 끝에 걸려 있는 욕의 중 한 벌을 입고 살그머니 욕실을 나섰다.

공작은 침대에 기대앉아 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라티시아는 그 앞에 서서 공손히 손을 모았다.

“주인님, 정말 감사드려요.”

최대한 예의 바르게 굴기 위해 애쓰며 말을 고르는 라티시아를, 공작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라티시아는 꿋꿋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테오도르 뷔테르를 불러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더 노력할게요. 앞으로도 힘껏 노래할게요. 주인님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다 목이 터져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덧붙이려던 때였다. 여전히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물었다.

“네 쓸모를 누가 정하지?”

“…….”

고저 없는 음성이 라티시아의 살갗을 사늘하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쓸모를 정하는 건 당연히 안드레아 칼리드나스 공작의 몫이었다. 노예가 스스로의 쓸모를 정하다니, 주제 넘는 짓을 저질렀다.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라티시아는 얼어붙은 입술을 어떻게든 움직여보려 애썼다.

“제 노래 때문에 테오를 부르신 줄로만 알고….”

“테오도르 뷔테르.”

“네, 네…. 테오도르, 뷔테르.”

자연스럽게, 라티시아는 공작의 앞에서는 애칭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드레아는 문서의 마지막 줄까지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발치에 서 있는 라티시아를 쳐다보았다.

목욕의 영향 때문인지 마냥 창백한 줄만 알았던 피부가 발그레한 복숭아 빛을 띠고 있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커다란 자신의 욕의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자연스레 그에 맞는 쓸모가 떠올랐다.

안드레아는 눈짓으로 라티시아를 머리맡으로 오도록 했다. 그는 기대앉아 있고 라티시아는 서 있는데도 워낙 체격 차이가 있다 보니, 라티시아가 우러러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주인님, 저어….”

또 쓸모 따위를 말하려는 건가. 안드레아는 조소했다. 테오도르 뷔테르를 부른 건 로카디의 서신 때문이었다. 칼리드나스 공작의 불면이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다는 요지의 편지는 그러니 어서 테오도르 뷔테르를 불러달라는 청을 교묘하게 담고 있었다. 테오도르 뷔테르가 그의 저택에 있는 건 그런 이유였다.

약속은 약속이었으므로.

이런 연유를 까마득히 모르는 라티시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입술의 색이 짙어지며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도 물기 어린 입술의 색과 비슷했다. 마치 부끄러운 상상에 빠진 것처럼.

“혹시, 혹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이미 눈치챘다. 그래도 라티시아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한편으론 그런 자신을 또렷이 자각했다. 별스러울 건 없었다.

찰나의 흥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무조건, 그래야만 했다.

“제게 목욕하라고 하신 게, 그러니까….”

라티시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일시에 쏟아져 내렸다. 천하고 더러운 화가의 코에서 묻어났을 개기름 따위는 씻겨나가고 깨끗한 포도향이 달달하게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저랑 그걸… 하고 싶으신가요?”

여전히 시선은 바닥에 못 박아둔 채 라티시아가 웅얼거렸다. 수없이 목격한 정사 장면이 자꾸 떠올라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긴장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이때, 가당찮다는 조롱조의 물음이 돌아왔다.

“네가 내 침대에 오를 주제나 된다고 생각하나?”

감히.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다. 멸시가 뚝뚝 묻어나는 냉대에 적잖이 안심한 라티시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얼른 답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순순히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안도와 함께 흘긋 시선을 들어 올렸다가 공작의 손등에 두드러진 퍼런 핏줄을 발견한 라티시아는 다시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이번엔 또 무엇이 그의 비위를 건드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잘못했나 보다, 생각했다. 영문을 모르니 불안은 배가 됐다.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던 심장이 툭 떨어진 건 그다음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는데 라티시아의 사고가 정지했다. 기대 있던 상체를 세운 공작이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리고 부풀어 있는 중심부를 눈짓했다.

“네 쓸모를 증명해봐.”

라티시아는 석상처럼 굳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죽은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만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불행히도 안드레아의 인내는 그리 길지 않았다.

“네 잘난 노래면 다 된다고 생각했나?”

나가보라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여기서 나가라는 건, 테오도르도 같이 쫓겨난다는 걸 의미했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라티시아는 바로 자세를 낮췄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세우는 라티시아의 모습에 안드레아는 얼마간 더 기다려주었다. 좀처럼 하의에 손을 대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친히 앞섶을 풀어주기도 했다.

곧게 선 공작의 성기는 지나치게 굵고 길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크기와 무게가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손가락이 닿자 움직이는 게 꼭 살아 있는 것 같아 겁이 났다. 조심스럽게 밑부분을 잡은 라티시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 이렇게 하면 되나요?”

“뭐든.”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 오물거리던 입술이 체념한 듯 벌어졌다. 성기의 끄트머리에 닿기 직전 얕게 터져 나온 한숨이 귀두를 따스하게 간질였다. 이어 축축하고 습한 입술의 점막이 살 기둥의 끝을 둥글게 감싸자, 저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은은히 훑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티시아의 작은 분홍색 입술은 과일의 꼭지처럼 수줍게 들러붙어선 움직일 줄 몰랐다. 일부러 감질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얌전히 옴직거리는 입술이 전에 없이 안드레아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빨아.”

감아쥔 은빛 머리카락이 실크처럼 매끄럽게 손목에 감겼다. 앞뒤로 흔들자 움직이기 시작한 작은 머리통과 함께 부드러운 은빛이 물결쳤다. 그를 머금고 있는 입 안쪽은 좁고 뜨거웠다. 반의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눈가가 붉어져선 끙끙 앓고 있는 라티시아를 보며 안드레아가 혀를 찼다.

“움직여.”

냉담한 지시에 라티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송곳니가 표피를 잘게 긁었다. 그로 인해 낮은 신음이 귓가에 떨어지자 라티시아는 덜컥 겁이 났다. 상처라도 냈을까, 허겁지겁 긁은 부위를 혀로 더듬었다. 송곳니가 지나간 길을 조심스레 핥고 쓸어보던 라티시아의 입 안으로 물고 있던 살덩이의 나머지가 별안간 짓쳐들었다.

“커흡… 컥!”

갑작스런 충격에 라티시아가 발버둥 쳤지만,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습하지 못한 타액이 입가로 줄줄 흘렀다. 좀처럼 숨을 고르지 못하고 버둥대는 라티시아의 머리를 앞뒤로 잡아 흔드는 손길에는 자비가 없었다. 공작이 사타구니에 처박으면 처박는 대로,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던 라티시아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들었다.

“후으….”

불만족한 신음이 그녀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성질을 누르고 있는 것 같은 소리에 라티시아는 겨우 자신이 무슨 행위 중이었는지 자각했다. 턱에 힘을 풀고 침을 삼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공작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흔들면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그것도 요령이라고 움직임이 수월해지자 손길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우응, 응, 읍!”

턱, 턱, 목 안 깊숙이 기둥의 끝이 부딪힐 때마다 코끝에 까슬까슬한 음모가 비벼졌다. 그게 너무 외설적이어서 라티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입 안에 담고 있는 이물의 생김새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끝이 살짝 들린 기둥과 둘레에 울퉁불퉁 자리 잡은 핏줄이.

‘주인님의 것이….’

제 입을 들락거리고 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게나 찌르며. 구강 가득 들어찬 타인의 은밀한 일부가 라티시아는 새삼 경악스러워져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 이런 느낌은. 들고 날 때마다 입천장을 가르듯 문지르는 게. 입술에 거칠게 비벼질 때마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한층 뜨겁게 달궈졌다. 이미 충분히 큰 데도 조금씩 부푸는 게 입에 담기조차 버거웠다.

춥, 추릅….

제 입술에서 나는 마찰음이 생소하다. 무심코 침을 삼키자, 입천장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에 꾹 눌린 귀두에서 선액이 흘러나와 침과 함께 넘어갔다. 무어라 정의내릴 수 없는 이상한 맛에 라티시아는 상체를 떨었다.

“하음, 음, 아읍….”

버거운 순간순간을 라티시아는 그저 버텼다. 그녀는 노예였고 순종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므로. 다만 자꾸만 자세가 무너졌다. 행여 심기를 거스를까, 가슴을 가린 앞섶이 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라티시아는 벌어진 공작의 허벅지 사이에 열심히 얼굴을 파묻었다.

안드레아의 눈에는 다소 평평하던 젖꼭지가 점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볼록 솟아오를수록 약이 오른 것처럼 빨갛게 물드는 모양이 꽤 볼만했다. 꼬집어 비틀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노예 계집은 제 몸에 이런 변화가 생긴 것도 모르는 눈치여서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구태여 비천한 몸뚱어리에 손을 대고 싶진 않았다. 대신 틀어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놓고 뒷덜미를 확 잡아챘다. 뿌리 끝까지 꽉꽉 밀어 넣자 성기가 목구멍의 모양을 따라 아래로 휘어지는 느낌이 났다.

“흡, 읏! 흐읏!”

라티시아는 그야말로 발작했다. 굵다란 살덩이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은 탓에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바르작거리는 라티시아의 눈꼬리에 작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키자 침범한 이물에 연구개가 꾹 눌리는 느낌이 났다. 꿀꺽, 꿀꺽, 삼킬 때마다 마개처럼 꽂혀 있는 기둥의 끝을 조르듯 조이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이윽고 뜨끈하고 미지근한 것이 입 안 깊숙이 뿌려졌다. 점도 높은 덩어리가 활짝 열린 목구멍 뒤로 느릿느릿 넘어갔다. 그녀가 사정액을 완전히 삼키고 나서야 입 안을 빈틈없이 메웠던 살덩이가 빠져나갔다. 꾸역꾸역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도 뽑히는 동안, 라티시아는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툭, 입술 끝에 굵은 머리가 걸리는 느낌과 함께 채 갈무리하지 못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입 주변부터 귀, 턱 아래 목덜미까지 온통 얼얼했다.

안드레아는 넋을 놓고 앉아 눈만 깜박이는 라티시아 앞에서 여유롭게 매무새를 다듬었다. 간단한 몇 가지의 동작으로 원래대로 돌아간 그가 주문했다.

“노래.”

“…….”

“안 들리나?”

“네? 네에….”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고인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쉼 없이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다행히 공작은 눈을 감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꿇어앉아 있던 탓에 감각이 없는 무릎을 세워 일어선 라티시아는 이번엔 저리는 다리 때문에 비틀거렸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목을 쥐어짜냈다.

산들바람 이마를 간질이네. 초록 풀에 내려앉은 별빛, 밤의 요정이어라.

노래 부르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배에 힘을 줄 때마다 비릿한 정액 냄새가 희미하게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마치 공작이 뿌린 씨가 위장의 밑바닥으로 흘러들어 가 움트기 시작한 것처럼.

두 곡을 연이어 불렀을 때 라티시아는 잠들어 있는 공작을 발견했다. 더 이상 할 일은 없었다. 공작이 증명을 요구하는 쓸모를 다하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까.

불현듯 테오도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맞지 않은 데다가 벌어진 욕의도 문제지만, 입 안을 들락거리던 공작의 성기에 마찰되어 부풀다 못해 부르튼 입술도 신경 쓰였다. 지금 테오도르를 만나면 그녀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은밀한 흔적을 들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라티시아는 테오도르를 찾아 돌아다니는 대신 공작의 침대 근처에 웅크려 앉았다. 새장이 있던 자리였다. 갇혀 있을 땐 줄곧 자신을 둘러싼 창살에서 벗어나길 바랐는데, 막상 새장에서 풀려나니 한 몸 누일 곳이 요원했다. 라티시아는 새장을 아쉬워하는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었다.

차라리 새장이 있었으면 하다니.

혼란스러운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라티시아는 공작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파묻고 끊임없이 그를 받아들이던 조금 전의 일을 상기했다.

빨고, 핥고, 삼켰다.

이 단순한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공작은 라티시아를 숨 쉬는 구멍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던 행위에 서글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천만다행이었다. 앞으로도 겪어야 할 일이라면 계속해서 자신을 살아 있는 구멍 이상으로 여기지 않기를, 라티시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테오도르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짐승도 교미는 한다. 벌레도 교미를 하고.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나.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막연히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을 땐 괜찮을 자신이 없었지만, 막상 지나고나니 별것 아니라는 것을.

게다가 앞으로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진 않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최근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바뀌는 여자들이 드나들지 않았다. 귀족들의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라티시아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상대가 없으니 제게 풀었다는 것만은 알겠다.

여자가 생기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노래만 부르게 되겠지.

라티시아의 가슴이 다시금 희망으로 부풀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 당장 테오도르를 찾아 나서려 했지만 창밖이 어두워진 걸 보고 그냥 주저앉았다. 대신 날이 밝으면 바로 테오도르를 만나야지.

그러나 날이 밝아도 라티시아는 테오도르를 만나지 못했다. 눈을 뜨자마자 공작은 라티시아를 찾아 지난밤처럼 자신의 다리 사이에 그녀의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한결 느긋하게 라티시아를 다뤘다. 구체적으로 방향이나 부위를 지시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그녀의 혀에 대고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끝을 가볍게 문질러 털면서 공작이 상쾌하게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라티시아.”

라티시아는 비로소 이 일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

벌써 열흘이 넘어가는데 칼리드나스 공작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지만 영영 이대로라면 곤란하다. 라티시아를 시켜 은근히 근황을 떠보려 해도 라티시아는 공작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 테오도르는 초조함을 감추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알이 굵은 자두의 꼭지를 떼어 건넸다.

“먹어 봐. 아주 달아.”

물끄러미 자두를 쳐다보던 라티시아의 귀가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난 됐어. 테오.”

테오도르가 주는 거라면 무엇이든 고맙게 받고 싶었지만, 눈앞의 자두만큼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무르익었으면서도 적당히 단단한 자두는 그녀의 입 안을 꾹꾹 찌르던 뭉툭하고 둥근 귀두를 떠올리게 했다.

“정말 맛있는데. 후회할걸, 라티.”

다시 제게 돌아온 자두를 선뜻 베어 문 테오도르가 입 안의 것을 씹어 삼키지 않고 고개를 라이시아에게로 기울였다. 완벽한 한때였다.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 다사로운 햇살이 은혜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속에 오롯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젊은 남녀는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러나 입술이 겹쳐지기 직전 고개를 홱 돌려버린 라티시아 때문에 그럴듯했던 그림은 균형을 잃고 어긋났다. 테오도르는 이맛살을 구기며 넘기지 못한 자두를 씹었다. 자두는 생긴 것과 달리 신맛이 지나치게 강했다.

“미안, 테오.”

“나야말로 미안.”

“어?”

“자두가 엄청 시다. 이런 걸 권했으니 벌 받아 마땅해.”

테오도르는 일그러진 자신의 낯을 모두 자두 탓으로 돌렸지만, 라티시아는 테오도르의 민망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뺨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의 팽팽한 긴장감,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끝내 얼굴을 피했을 때 실망감에 흔들리는 눈빛. 이 모든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라티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아서 겁이 났다.

테오도르를 거부한 게 아니었다. 그저 두려웠다. 테오도르가 제 목구멍 깊숙이 수도 없이 뿌려진 칼리드나스 공작의 정액 냄새를 맡을까 봐.

공작이 여자와 뒹굴든 말든 마무리는 언제나 라티시아의 몫이었다. 라티시아가 타액과 정액, 혹은 애액이 범벅된 기둥을 남김없이 핥고 나면, 공작은 성기의 끄트머리에 남은 사정액을 그녀의 혀에 느른하게 비볐다. 잠들기 전 의식적으로 하는 배뇨처럼 일상적이고 거리낌 없는 배설이었다.

“설마, 네게도 침대에 오르기를 강요하는 건 아니지, 라티?”

“그렇지 않아! 그런, 그런….”

라티시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테오도르가 벌써 눈치챈 건 아닐까. 한편으론 다른 의미로 가슴이 무거웠다. 이미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는데, 이렇게 불안한 건 역시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일 테니까.

라티시아의 조마조마한 속을 모르는 테오도르는 이해한다는 듯 양 눈썹을 늘어뜨렸다. 테오도르의 방은 주방과 가까웠다. 하녀들은 때때로 빵 부스러기를 먹으며 잡담을 나눴고, 테오도르는 어렵지 않게 그들의 호감을 샀다.

강바닥에 더러운 진흙이 고이듯 저택의 가장 아래층에 존재하는 이곳에도 더러운 소문들이 흘러들었다. 하녀들은 오니 속의 징거미처럼 끊임없이 물어뜯을 거리를 찾아왔고, 테오도르는 그들이 나눠주는 것들을 받아먹으며 경청하는 척 귀만 열어두면 되었다.

요즈음 자주 들리는 이름은 에레네 아르보스였다. 칼리드나스 공작의 비공식적 정부나 다름없는 올리비아가 데려온 백작가의 영애라고 했다. 셋이서 같이 뒹굴다니. 난잡한 침실의 상황을 멋대로 상상하며 테오도르는 미래의 자신도 그러하리라는 근사한 꿈을 꾸었다. 가까운 미래에, 유명한 화가로서.

은발머리 노예, 라티시아도 이따금 언급됐다. 공작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낱낱이 보고 있다가 마지막에 노래를 불러 공작을 재운다는 얘기였다. 구경꾼까지 갖춰놓고 관계를 즐기다니, 칼리드나스 공작은 금욕적이고 깔끔한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더러운 인간이 분명했다.

‘미친 새끼.’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테오도르는 일견 안심했다. 그 고고한 살육의 신 칼리드나스 공작도 결국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초상화를 맡겼으면 좋겠는데.

후우우.

의도적으로 크게 내쉰 한숨에 라티시아의 가슴이 다른 의미로 내려앉았다.

“왜 그래, 테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별 건 아니야.”

별 건 아니지만, 걱정이 있다는 것 아닌가. 라티시아는 테오도르에게 더욱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테오, 뭐든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돕고 싶어. 그러니 말해줘, 응?”

“라티, 내가 어떻게 너에게 그런 짐을 지우겠어? 어차피 나 혼자 해결할 일이야.”

“테오, 그러지 말고. 혹시….”

잠시 고민하던 라티시아가 이윽고 결심을 굳히고 물었다.

“주인님께 부탁드려야 하는 일이야? 그렇다면 내가 한번 해볼게.”

눈치도 빠르지, 라티시아. 이 깜찍한 계집.

테오도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수심에 쌓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말만은 담담하게 했다.

“때가 되면 부른다 했으니 그리하시겠지.”

라티시아는 노예 시장에 갇혀 있을 때 테오도르가 그려주었던 그림들을 떠올렸다. 그림을 보여줄 때마다 테오도르는 별것 아니라며 쑥스러워했지만, 라티시아는 그의 그림을 사랑했다. 테오도르가 그림을 사랑하니까. 그것만으로도 그의 그림을 사랑할 이유는 충분했다. 테오도르가 사랑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슬픔은, 고스란히 라티시아의 슬픔이 되었다.

“테오.”

비록 안드레아 칼리드나스 앞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부자연스러운 그녀지만, 테오도르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없던 용기가 솟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다시는 노래 부르지 않겠다던 결심도 결국 꺾어버리고 테오도르를 위해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너무 걱정하지 마. 테오의 그림은 정말 좋으니까, 언젠가 주인님도 알아주실 거야.”

그 언젠가를 빨리 앞당기는 건 제 몫이겠지. 라티시아는 다시금 마음을 다지며 테오도르의 어깨에 기댔다. 작은 강아지를 어루만지듯 가만가만 쓰다듬는 테오도르의 손길에 절로 눈이 감겼다.

“테오, 기억해?”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는 따스한 볕이 꼭 테오도르 같다고 생각하며 라티시아가 중얼거렸다.

“언젠가 밖에 나가서 함께 비를 맞자고 했던 거. 또 나란히 누워 햇빛을 받으며 낮잠을 즐기자고 한 거.”

“기억나지.”

“하나는 이뤘네. 나란히 햇빛 받는 거.”

테오도르의 약속은 어둠 속에서 시시때때로 빛이 되어 라티시아를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 이제 라티시아가 기꺼이 빛을 끌어들여야 할 차례였다. 테오도르에게 닿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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