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
[과몰입공금]
테오도르 뷔테르의 첫인상은 대개 호감을 남겼다. 따스한 느낌의 다갈색 곱슬머리, 머리카락 색과 같은 눈동자가 자아내는 부드러운 분위기에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곤 했다. 테오도르는 그런 자신의 매력을 잘 알았다. 눈매를 둥글게 휘어 미소 지으면 꽤 다정하게 보인다는 것도. 그런 이유로 지금 테오도르는 최선을 다해 웃고 있었다.
“라티.”
반달처럼 곱게 접힌 테오도르의 눈에 라티시아의 입술도 천천히 호를 그렸다.
“테오….”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라티시아는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이윽고 환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라티시아가 곧장 테오도르에게 달려갔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두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라티!”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른 라티시아를 테오도르는 가볍게 받쳐 안았다. 싱그러운 청포도 냄새가 기분 좋게 코 속으로 밀려들었다. 정수리에 가볍게 입술을 맞춘 테오도르가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라티, 무사했구나. 걱정했는데.”
로카디는 칼리드나스 공작이 약속을 어겼다며 분해했지만 테오도르는 라티시아를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정확하게 일치했다. 칼리드나스 공작저의 정원에 서 있는 자신이 그 증거였다. 걱정했다는 몇 마디 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라티시아의 눈을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테오, 테오도르 뷔테르! 정말 테오 맞아?”
“응. 라티. 나 맞아.”
“정말이네. 정말 테오야.”
“음. 그래서 라티, 칼리드나스 공작님은 어떤 분이셔?”
“어…?”
그동안 잘 지냈는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아픈 곳은 없었는지, 테오도르의 안부를 물으려던 라티시아는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공작에 관한 건 궁금하지도 않았고 별반 할 얘기도 없었다.
라티시아의 입에 손가락을 넣고 희롱하다 사정한 공작은 헛웃음을 짓다가 어느 순간 안면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놀란 라티시아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짚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새장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은 건 공작이었고, 그녀가 손가락을 빠는 동안 감시하듯 지켜본 것도 공작이었다.
표정만 봐선 당장 그녀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그날 밤 라티시아는 비로소 새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귀족들의 변덕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예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도 다음 날 그 머리를 베어버리는 족속이라는 것을.
그래서 라티시아는 불안했다. 오늘 새장에서 풀어주고 내일은 목줄을 채우는 게 아닌가 하는.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테오를 만나는 꿈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테오, 너무 기뻐. 진심으로, 정말 기뻐.”
“여전하구나, 라티.”
해달라는 공작 이야기는 하지 않고 마냥 들떠 어쩔 줄 모르는 라티시아를 보며 테오도르는 자연스럽게 꾸민 미소 뒤에 한숨을 감췄다. 어려서부터 갇혀 지내 세상 밖을 모르는 라티시아는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건 라티시아의 매력이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라티시아의 순수함을 무척 좋아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순수한 무지를.
“천천히 얘기해줘. 그 전에 공작님을 뵈어야 할 것 같아.”
“그럼 내가 안내할게. 참, 테오, 땀이 많이 났어, 여기.”
손수건을 건넨 라티시아가 춤을 추듯 경쾌한 걸음걸이로 앞서 걸었다. 새장에서 풀려난 후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구경이었다. 라티시아는 밤이 늦도록 발이 닳도록 이곳저곳을 누볐다.
공작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무성하게 자란 나무로 채워진 정원은 그녀의 마음을 통째로 앗아갔다. 그중 가장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누워 별빛을 이불 삼아 누워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땐 찬란한 햇빛이 정면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아프도록 부셨지만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아침을 맞는구나. 손가락을 부채처럼 펼쳤다 접었다 하며 신기해하다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테오를 발견했다.
“공작님께서 잘해주는 모양이구나. 라티, 드디어 네가 원하던 자유를 찾은 것 같아 기뻐.”
익숙하게 길을 안내하는 라티시아에게 테오도르가 안심했다는 듯 부드럽게 운을 띄웠다.
“그게….”
라티시아가 수줍게 중얼거렸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불과 전날 밤에 풀려났다는 것을 모른다. 모르니 차근히 알려주어야지.
“연습했어.”
“연습?”
“응. 언젠가 테오가 그랬잖아. 거기… 지하에서 나가는 상상을 해보라고. 그러면 언젠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라티시아는 매일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는 상상을 했다. 그곳에 처박히기 전까지 걸었던 길을 역으로 새기며 밖을 꿈꿨다.
“그것처럼 연습했어. 테오, 네가 오면, 이렇게 안내를 해주어야지 하고.”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침실에서 나와 정원으로 나오기까지의 길을 찬찬히 눈에 담아두었던 라티시아는 잠들기 전까지 다시 그 복도를 되돌아가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테오의 손을 잡고서 공작저의 내부를 안내하는 상상을.
‘테오 말이 맞았어.’
마음에 간절히 그리면 언젠간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건. 그러니 더욱 열심히 바라야지. 그러나 공작이 있는 곳으로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공작의 눈처럼 짙푸른 안개가 명치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어디 불편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고 앙가슴을 누르는 라티시아를, 테오도르가 돌아봤다. 온기 있는 다갈색 눈이 순하게 깜박이는 걸 보자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좀 갑갑해서.”
“천장이 높아서 그런가. 나도 좀 기가 죽네. 위압감이 느껴져.”
라티시아는 탁 트여 높은 천장이 좋았지만 잠자코 있음으로써 테오도르의 말에 동의했다. 머릿속으로는 불안의 근원에 대해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입 속을 헤집던 손가락이 떠올랐다. 손가락을 빠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이라면?
그때도 괜찮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라티.”
수없이 목격했던 정사를 떠올리며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던 라티시아는 테오도르의 다정한 속삭임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도 테오도르가 있어서 안심이었다. 테오도르는 언제나 그녀의 빛이고 희망이었다. 지하의 또 지하에 갇혀 있을 때 매일같이 바깥 풍경을 그려와 보여준 테오도르는 세상 그 자체였다.
바울 할아버지는 노예상의 아들을 믿어선 안 된다고 주의 줬지만, 라티시아를 가둘 때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반대한 것 역시 테오도르였다.
은인.
테오도르에 대한 라티시아의 감정은 사랑보다 숭고한 무언가였다. 모두들 라티시아를 카나리아라고 칭했지만, 라티시아는 오직 테오도르에게만 새처럼 굴었다. 어미를 따르는 아기 새.
“참, 아버지께 들었어. 라티 네가 나를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정말 고마워.”
테오도르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얘기를 꾸며냈다. 로카디는 뇌물로 바친 노예 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노예를 공짜로 가졌음에도 반응 없는 칼리드나스 공작만 원망할 뿐. 그러므로 테오도르에게 라티시아에 대해 떠드는 일은 없었다. 로카디에 관한 부분은 거짓이었지만, 라티시아가 노력했다는 건 뿌듯해하는 표정을 보아 사실이었다.
‘좋아, 라티시아. 더 노력해.’
분발하라는 의미로 테오도르는 라티시아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얼굴을 굳혀 진지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정말 고마워, 라티. 네가 아니라면 내가 언제 높으신 분의 초상을 그리겠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별것도 아니었어. 테오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걸.”
언제까지나 하얗기만 할 것 같은 라티시아의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테오도르는 라티시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수줍어하면서도 기쁨에 들떠 작게 종알거리는 입술을 씹고 싶었다.
언제나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었음에도 테오도르는 그러지 못했다. 아껴준다거나 소중히 여긴다거나 하는, 라티시아가 착각하는 류의 이유는 아니었다. 노예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철저한 로카디의 감시가 있었고, 지금은 뒈져버린 망할 바울 영감의 방해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곳엔 감시인도 방해꾼도 없었다. 해방감 때문인지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화가로서 명성도 얻고, 예쁜 계집들의 다리도 마음껏 벌리고. 일단은 라티시아의 속살을 먼저 맛봐야지.
라티시아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범하면서 테오도르는 싱긋이 웃었다.
“라티.”
“응. 테오.”
애칭만 불러도 사과처럼 빨개지는 계집이다. 벗겨놓으면 하얀 속살도 이리 붉어질까? 자못 궁금해하며 안내된 응접실에서 공작을 기다렸다. 금방 만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점점 지체되고 있었다.
‘좋은 시간이라도 보내고 있나?’
공작이 여자와 뒹굴 땐 왕자도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다. 칼리드나스 공작의 그 대단하신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테오도르도 주워들은 게 많았다. 공작에게 밑이 뚫려본 영애보다 뚫리지 않은 영애를 찾는 게 더 빠를 거라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공작의 침실을 거쳐 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테오도르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공작은 천한 것을 혐오한다.
자신의 결론을 확인하고 싶어 테오도르는 짐짓 미간을 구기고 목소리를 낮췄다.
“라티, 설마 공작이… 네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테오도르답지 않게 사나운 데다가, 공작을 언급할 땐 이까지 가는 모습에 라티시아는 황급히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역시. 테오도르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런데 만약,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싫어?”
“응. 싫어.”
단호한 대답에 라티시아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테오도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달콤한 말들을 속삭였다.
“당연하잖아, 라티? 네가 힘들 테니까. 또 네가 원한 일이 아닐 테니까.”
라티시아의 낯에 차차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라티시아.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힘들어하지 말아.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여기.”
심장 부근을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테오도르가 살짝 표정을 풀었다. 험악하게 찡그렸던 얼굴에 어느새 애달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중요한 건 여기 있으니까.”
알맹이.
테오도르가 작게 중얼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 다리 사이를 희롱하던 깃펜을 떠올렸던 라티시아도 곧 테오도르를 따라 천진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테오. 진짜야.”
그렇겠지.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해보였다.
아무리 눈 돌아가게 아름다워도 라티시아 넌 근본 없는 노예니까. 칼리드나스 공작은 네 몸뚱어리가 닿는 걸 끔찍하게 싫어할 테니까. 하지만 난 달라. 너한테 박으면 끔찍하게 좋을 것 같거든.
처음인 계집들은 초장부터 끙끙 앓기 마련이니 아직 무지한 라티시아도 분명 그럴 것이다. 목소리가 예쁘니 신음도 예쁘겠지.
테오도르는 무해한 얼굴로 라티시아를 안심시켰다.
“알아, 믿어.”
만에 하나 공작이 라티시아를 탐하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선구자는 자신이었다. 이미 제가 짓밟은 처녀지를 뒤늦게 밟을 공작을 생각하자 테오도르는 쾌감을 느꼈다. 까마득히 지위가 높은 공작과 구멍 동서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려나. 질 낮은 농담을 떠올린 테오도르의 입술 끝이 의미심장하게 비틀어졌다.
영문 모르는 라티시아는 테오도르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마냥 기쁘기만 했다. 테오도르의 흥분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렇게 들뜬 테오도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보탬이 되었다니, 그저 행복했다.
그러니 더 노력해야지.
그러나 막상 하려고 드니 자기가 무슨 노력을 해서 공작이 테오도르를 부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라티시아는 그동안 해왔던 걸 하기로 했다. 그린 듯이 상상하기.
‘아….’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라티시아의 시도는 막혀버렸다. 유능한 화가라고 테오도르를 자랑스레 소개하는 자신을 그리려 했는데, 공작의 짙푸른 눈동자를 떠올린 순간 상상인데도 숨이 턱 막혔다. 차갑고 무정한 눈동자가 라티시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꼼짝도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때마침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방금 그녀가 상상한 그대로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늘진 눈을 하고서.
테오도르 뷔테르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가 공작이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감지한 위압감 때문이었다. 늑대를 맞닥뜨린 작은 개처럼, 테오도르는 한없이 위축됐다. 그가 기를 펴기에는 칼리드나스 공작이 지나치게 우월했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는 신께서 유난히 공들여 빚은 작품이었다. 완벽한 얼굴부터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몸까지.
시작부터 낭패감을 느끼며 테오도르는 얼굴을 붉혔다. 인사말조차 선뜻 나오지 않았다. 칼리드나스 공작이 오만한 눈짓으로 의자를 가리켰지만 선뜻 앉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간신히 정신을 차려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혔다.
“테오도르 뷔테르입니다. 공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개를 숙여 시야에 공작이 비치지 않게 되자 테오도르는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그의 선량한 외모는 여러모로 이득만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초면에도 신뢰를 심어주는 제 인상을 믿어봐야지.
테오도르는 다시 허리를 꼿꼿이 펴 공작과 마주했다. 그러다 깊은 물처럼 어두운 눈과 마주한 순간, 잠시나마 솟았던 용기는 바로 사그라졌다.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칼리드나스 공작의 기분은 저조했다. 테오도르의 순한 얼굴도 쓸모를 잃었다. 공작의 무심한 시선은 벌레를 보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테오도르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안드레아는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테오도르에게서 그만 눈을 거두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건 질색이었다. 몇 시간이고 자세를 유지하는 것부터가. 더군다나 테오도르 뷔테르 같은 녀석에게.
“필요하면 내가 부르겠다. 그때까지 머무를 곳을 주지.”
“감사합니다, 공작님.”
안드레아는 짧은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의미한 시간 낭비에 희미하게 짜증이 일었다. 테오도르, 테오도르, 노래를 부르기에 얼마나 대단한 놈인가 했더니 예상보다 훨씬 하찮았다.
별 볼일 없는 인간 옆에서 별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라티시아를 보자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지난 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결과였다.
새장에서 꺼내놓자 노예 계집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가 잠들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조용히, 그러나 성급히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안드레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멋대로 그의 곁을 벗어난 노예가 칼리드나스 가의 문을 나서는 순간 활로 쏘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럼 계집의 포도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불쑥불쑥 치솟는 욕구를 다스리는 성가신 짓도 끝이겠지.
짐작대로 머지않아 라티시아가 정원을 가로질렀다. 은발머리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나풀거렸다. 정말 카나리아라도 된 것처럼 날듯이 가볍게 뛰는 라티시아의 등에 활을 겨누었다. 목을 꿰뚫을까 하다가 머리통의 정중앙을 노렸다. 별 이유는 없었다. 사과처럼 동그래서 과녁처럼 느껴졌다는 정도의 사소한 이유였다.
이제 노예는 완전히 중앙로에 들어섰다. 곧장 출구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안드레아는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은발을 바탕으로 붉은 피가 꽃처럼 번지면 꽤 후련해질 것도 같았다. 처음 노예 시장에서 라티시아를 보고 그렸던 전쟁터의 설원 같은 모양을 보게 되면 더 좋고.
피를 보면 잠은 잘 오겠지.
화살이 막 시위를 떠나기 직전, 그대로 도망갈 줄만 알았던 라티시아가 우뚝 멈췄다. 그러곤 방향을 틀어 정원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나무 아래 작은 몸을 누였다. 안드레아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대로 날이 밝았다.
‘그냥 쏴버릴 걸 그랬나.’
테오도르 뷔테르를 만나 무어라 종알거리는 라티시아의 모습을 보며 안드레아는 지난밤의 결정을 후회했다. 테오도르가 은빛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었을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죽여버리는 게 나았다고.
“라티.”
테오도르의 다정한 부름에 응접실을 나서던 안드레아의 걸음이 멈칫했다. 억누르고 있던 후회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정수리가 차게 식어가는 걸 느끼며 안드레아가 천천히 뒤돌았다. 테오도르 뷔테르에게 못 박혀 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무심결에 따라왔다. 안드레아는 가벼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침실로.”
짤막한 명령에 둥그렇게 확장되었던 라티시아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