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
[과몰입공금]
유하르는 상관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어느 부분에서 심기를 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테를로가 때문인가.’
겨우 그럴싸한 이유 하나를 떠올려보았지만,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에게 테를로가 누엘은 너무 하찮아서 성가신 존재지 기분에 영향을 끼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심지어 약혼녀를 소개하는 테를로가에게 드물게 웃어 보이지 않았던가. 축하를 건네는 안드레아의 눈빛은 영락없이 진심이었다. 오죽하면 테를로가가 당황했을까.
‘그럼 대체 무엇 때문이지?’
아무리 컨디션이 저조한 날이라도 날씨 얘기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여유가 안드레아에게 있었다. 지금처럼 유하르가 입도 벙긋 못할 정도로 틈이 없지는 않았단 소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던 유하르의 눈이 번뜩 뜨였다.
‘손이 문제였구나.’
엄지와 검지, 중지를 느리게 맞비비는 모습에 유하르는 확신했다. 제 상관의 손이 활을 쏘기에 적당한 상태가 아니라고. 겨우 이유를 찾아 안심한 사이, 수사슴 한 마리가 그들 앞으로 나타났다.
“엇!”
무심코 내뱉은 유하르의 탄성에 사슴이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젠장!’
유하르가 허겁지겁 활을 꺼내든 사이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더니 정확히 사냥감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절박한 비명과 함께 펄쩍 뛰어오른 사슴이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유하르는 반사적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찾을 것도 없었다. 바로 옆, 새 화살을 걸고 있는 안드레아를 발견한 유하르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손 때문도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컨디션 난조라면 쉬어도 좋다.”
유하르가 축 처져 있자, 역으로 안드레아가 그를 걱정해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가 버럭 외친 유하르가 잠시 머뭇거렸다.
“저는 다만.”
“말해.”
“아닙니다.”
대화는 싱겁게 끝났다. 유하르가 연유를 묻는다고 대답할 상대도 아니거니와 감히 그럴 주제도 못되었다. 사냥터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어 잠시 긴장이 풀렸는지도 모르겠다. 유하르는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며 각오를 새로이 다졌다.
‘일단은 사냥에만 집중하는 거다.’
어차피 안드레아가 선두에 나선 이상 유하르가 스스로에게 던진 채찍질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진 않겠지만.
***
신사들이 사냥 대회에 참여할 동안 숙녀들은 티타임을 가졌다. 긴 사냥 시간에 맞춰 준비된 다양한 디저트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이 오갔다.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 중에 단연 으뜸을 차지하는 건 역시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였다.
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에 대해 떠들고 싶어 했고, 귀가 달린 사람이라면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 했다. 원한다면 누구라도 그의 침실에 들 수는 있지만, 아무도 가지지는 못한 남자. 최근에는 그 침실로 가는 통로조차 막혔으니, 자연히 그 이유를 두고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그 노예 때문인 것 같지 않나요? 분명,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고요!”
멍청한 년.
올리비아는 테를로가 누엘의 약혼녀를 보며 속으로 조소했다. 기껏 안드레아의 침실로 기어들어 가서 한 짓이라곤 윗구멍도 구멍이랍시고 대주고 온 것뿐이면서 잘도 떠드는구나.
안드레아에게 처녀를 바치고 그의 마음을 얻겠다며 큰소리를 뻥뻥 치던 테를로가 누엘의 약혼녀가 정액 범벅이 된 얼굴로 공작저를 나섰다는 건, 지금 이 티타임에 자리한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곧 그녀의 약혼자에게도 소문이 들어가겠지만, 아무도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 입 싼 하녀 하나 단속하지 못하는 영애를 동정할 이유는 없으니.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긴 했죠.”
금발에 초록 눈, 로즈가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올리비아의 소개로 몇 번 안드레아와 잠자리를 하던 로즈는 언젠가부터 올리비아를 견제하며 영악하게 그녀를 따돌렸다. 그러더니 오늘은 이렇게 그를 다 안다는 듯 콧대를 높이고 있다.
“음, 솔직히 걱정스러워요. 안드레아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천한 것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이 또한 완벽한 헛소리였다.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그녀가 나설 차례였다. 올리비아가 앙큼하게 눈을 내리뜨고 있는 로즈를 향해 다가선 순간,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두 와계셨군요. 반가워요.”
벨리오나 페를레티, 왕녀였다.
왕녀가 나타나자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왕녀야말로 칼리드나스 공작가의 진정한 안주인으로 예정된 인물 아니던가. 왕녀의 생일에 페를레티 국왕이 직접 나서서 약혼을 주관할 거란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하긴, 칼리드나스 가에 적합한 혼처로 페를레티 왕가 말고는 견줄만한 가문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에 왕녀의 오랜 짝사랑 또한 한몫했다. 오빠인 라이너스와 안드레아가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탓에 벨리오나는 오랫동안 그를 알아왔다. 막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안드레아를 마음에 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벨리오나는 안드레아의 수없이 많은 여성 편력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불평 한마디 없이 인내했다.
“현숙한 왕녀님.”
몇몇 노부인들은 그런 벨리오나를 칭송했다. 얌전하고 앞에 나서지 않는 왕녀를 귀족가의 영애들도 대부분 좋아했다. 나중에 안드레아의 정부가 되어도 상대가 왕녀라면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그들은 이토록 친밀할 수 있는 거다.
“아름다우셔요, 왕녀님.”
올리비아는 왕녀를 향해 몰려든 여자들의 가식을 비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벨리오나는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었다. 페를레티 왕가의 일원들은 모두 금발에 옅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벨리오나는 그 두 가지 특징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페를레티 같은 면모를 지니지 않았다.
차라리 라이너스 왕자가 왕녀로 태어났더라면 단박에 안드레아의 마음을 휘어잡았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을 두고 공공연히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벨리오나도 모를 리 없다.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미 스스로가 잘 알았다. 거울이 괜히 있겠는가. 차곡차곡 쌓인 열등감은 언제든 분풀이 상대를 향해 쏘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저기, 인사는커녕 무엄하게 왕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올리비아 같은.
“오랜만이군요, 올리비아. 잘 지냈나요?”
올리비아는 뺨이라도 후려칠 기세로 자신을 향해 곧장 다가오는 왕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번번이 자신에게 되로 주려다 말로 받으면서 매번 이렇게 도발하는 걸 보면, 왕녀는 외모뿐 아니라 머리도 별로인 듯했다.
“왕녀님, 오늘도 음, 아름다우시군요.”
일부러 중간에 망설이는 티를 내자, 벨리오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내 평정을 가장한 벨리오나가 손을 내밀어 올리비아의 키스를 받았다. 그러곤 그 옆에 앉아 부채를 넘겼다.
시녀 행세를 하라니. 주제를 알라는 건가. 대놓고 면박을 주던 저번 보단 수법이 발전했다. 지난 번 만남에서 벨리오나는 올리비아에게 창녀처럼 몸을 함부로 굴린다고 비난했고, 올리비아는 자신이 아니면 누가 그를 감당하겠느냐며 뻔뻔하게 되받아쳤다. 오히려 나중에 허약한 왕녀가 밤일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조롱했다.
당황한 벨리오나는 자신을 도울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그 자리에는 안드레아와 몸을 섞은 여자들이 넘쳐났으므로 왕녀의 간절한 구조 요청은 철저히 외면받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시원한 부채질을 받던 왕녀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참, 올리비아. 괜찮다면 의원을 보내줄까 해요.”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왕녀님, 저는 매우 건강하답니다.”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왜 그런 괜한 짓을 벌인 거죠?”
“괜한 짓이라니요?”
“올리비아가 공작에게 선물한 은발머리 여자 말이에요. 그 얘기를 듣고 난 이제 올리비아가 ‘허약해’진 줄로만 알았어요.”
벨리오나의 눈빛이 득의양양하게 빛났다. 주제가 이렇게 흘러가자, 삼삼오오 흩어져 있던 여자들이 둥글게 모여들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한 번에 여러 명의 입을 닥치게 할 수 있으니.
“우선 왕녀님, 그 여자는 제가 선물한 게 아니랍니다. 어느 날 가보니 그의 침실에 있었지요. 오, 이런, 죄송해요. 왕녀님은 칼리드나스의 침실은 구경도 못 해보셨을 텐데.”
쿡, 누군가 웃음 참는 소리가 들리자, 벨리오나가 장갑을 꾹 말아 쥐었다. 그 꼴을 본 올리비아는 더욱 잔인해졌다. 마른 장갑에서 물기가 나오도록 쥐어짜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왕녀님, 제가 ‘허약해’진 것과 그 여자가 무슨 상관이지요? 설마… 왕녀님은 안드레아가 그 여자와 함께 뒹굴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천한 노예와?”
“나는….”
비로소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음을 깨달은 벨리오나가 전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연히, 모두 눈을 피해버렸다. 올리비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진심으로 충격받은 척, 가슴을 두 손으로 힘주어 눌렀다.
“왕녀님, 장차 남편이 되실 분을 모욕하시다니요…. 칼리드나스 공작님께서는 아무리 험한 전쟁터에서도 수발을 받지 않으신답니다. 그 이유는.”
이쯤에서 올리비아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리라 믿어요.”
전쟁터에서는 근처의 민가에서 병사들의 자질구레한 시중을 들기 위해 여자들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들은 모두 평민이었고 안드레아는 그들이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모든 것을 혼자 했다. 그런 안드레아가 노예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아마 혐오일 거라고 올리비아는 확신했다.
올리비아의 뼈 있는 말에 지금껏 안드레아와 노예가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고 주장하던 여자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벨리오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참패였다. 스스로 나서서 약혼자를 욕보인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 같아 벨리오나의 기분은 무척 가라앉았다. 그래서 사냥을 나갔던 무리가 돌아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도 마냥 기뻐하기 힘들었다.
“이 사슴은 정말 멋지군요.”
스스럼없이 앞에 나선 올리비아가 감탄하는 소리에 벨리오나는 맥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우상, 안드레아가 무심한 눈빛으로 사냥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구겨진 미간과 굳게 다문 입매에서 느껴지는 강인함에 어쩔 수 없이 벨리오나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올리비아가 생긋 웃으며 보란 듯이 그녀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대회가 끝나면 가죽을 조금 얻고 싶은데 사람을 보내도 될까요? 괜찮다면 제가 직접 고르고 싶어요.”
직접 칼리드나스 공작저에 방문한 올리비아가 무얼 할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의미심장한 요청에 안드레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부풀었던 벨리오나의 심장이 나락으로 처박혔다.
***
아침부터 눈썹 주변이 욱신거렸다. 두통의 전조 증상이었다. 요 며칠, 정신을 잃고 쓰러진 카나리아 때문에 안드레아는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손가락 끝에 잔상처럼 남아 있는 느낌도 불쾌감에 한몫했다. 깃털 같은 살갗 아래 미약하게 그의 손을 밀어내던 동맥의 떨림이 생생했다.
손가락의 이질적인 감각이 시시때때로 안드레아의 신경을 건드렸다. 사냥감의 피를 봐도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 갈망이 그를 휘감았다. 이만 머리를 비우고 육욕이 주는 쾌감에 몰두하고 싶었다.
이런 까닭으로 공작저에 들어오자마자 안드레아는 숨 돌릴 틈 없이 올리비아를 몰아붙였다.
“안드레아, 아응! 너무!”
오늘따라 왜 이리 급하냐는 물음은 타액에 섞여 입가로 흘러내렸다. 뽑을 것처럼 혀를 빨아 당기는 안드레아의 탐욕이 올리비아를 한껏 고양시켰다.
역시 이 남자는 내 것이다.
벨리오나 페를레티의 넋 나간 표정이 얼마나 볼만하던지. 모두의 앞에서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여인이 저, 올리비아 트랑이라고 공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드레스도 제대로 벗기지 않고 치마만 걷어 올려 그대로 돌진하는 무례함도 조금이라도 빨리 결합하고 싶은 조급함으로 좋게 해석되었다.
“하앙!”
스스로 접힌 무릎 뒤를 잡아 벌린 올리비아의 허리가 크게 튀었다. 시원하게 내지른 교성 끝에 작은 한숨이 묻었다. 한숨은 새장의 창살 사이에서 들려왔다. 소리의 출처를 확인한 올리비아는 한눈에 노예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파악했다.
불쌍한 것.
저런 걸 두고 안드레아가 노예 때문에 여자를 안느니 마느니, 황당한 소문이 퍼졌었다니. 올리비아는 다시 한번 티타임의 여자들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시선을 돌리니, 조금 전의 한숨 때문인지 안드레아도 새장 안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끌어오기 위해 올리비아가 요란하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아, 안드레아. 하응, 좋아, 아아… 핫!”
너무 자극했던 탓일까. 별안간 안드레아가 몸을 세게 부딪쳐왔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여전히 두 눈은 새장에 고정한 채였다.
“앙, 앗! 으응, 읏! 안드, 레아!”
차마 살살 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못했다. 요구는 용납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걸 잘 아는 올리비아는 부러 아양을 떨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판단 착오였을까. 교태 섞인 비음이 연달아 울리자 못마땅하게 표정을 구긴 안드레아가 치마로 그녀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불안을 지우기 위해 올리비아는 웃으려 애썼다. 시야를 가린 치맛단을 걷어내며 올려다본 안드레아는 여전히 새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웅크린 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노예 계집을.
“날 봐줘요.”
올리비아가 손을 뻗어 막 안드레아의 뺨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을 때, 침대에서 번쩍 몸이 들렸다. 성큼성큼 옮기는 걸음에 이리저리 밟힌 드레스가 형편없이 찢어졌다. 새장에 거칠게 밀쳐진 올리비아가 새된 비명을 터트렸다.
“안드레아! 아윽!”
고막을 긁는 비명에 고집스럽게 시선을 내리고 있던 라티시아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드레스가 찢어지는 바람에 덜렁 드러난 올리비아의 한쪽 가슴이 창살 너비만큼 뭉개졌다. 창살 안쪽으로 불거진 허연 살덩이에 라티시아의 낯이 파랗게 질렸다.
올리비아의 뒤에 자리한 안드레아가 그녀의 한쪽 다리를 높게 들어 옆으로 벌리고, 그대로 박아 올렸다. 그 앞에 꿇어앉은 라티시아의 눈에 벌어진 비부 사이로 들락거리는 살 기둥이 훤히 보였다.
“윽, 아흑, 이런, 안드레아….”
무심코 안드레아를 뒤돌아본 올리비아는 그의 시선이 눈앞의 은발머리에게 못 박혀 있음을 발견하고 당혹감에 휩싸였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아닌 이 천한 노예 계집을 탐하고 있었다. 이로써 올리비아는 확신했다. 안드레아가 노예 계집에게 생각 이상의 마음을 품고 있다고.
게다가 안드레아는 그녀를 상대로 좀처럼 사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노예 계집을 대신하고 있다는 굴욕감이 올리비아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어지간히 그에게 적응된 올리비아도 이번만큼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섣불리 행동해 그의 눈에 벗어나는 짓은 하기 싫었다. 여기서 물러나는 건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었다. 티타임의 여자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문 올리비아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만족시키기로 했다.
“안드레아.”
헐어버리기 직전까지 부어버린 음부에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올리비아는 꾹 참았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으로 붉게 물든 안드레아의 눈매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신 올리비아는 나긋하게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불뚝거리는 성기를 입으로 받아 목구멍 깊숙이 빨아들였다.
천천히 앞뒤로 오가다 점차 빨라지는 고갯짓에 안드레아가 팔을 뻗었다. 손조차도 귀족적인 그였다. 모양 좋게 길쭉한 손가락이 따스하게 이마를 짚어주기를 바라며 올리비아가 사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안드레아가 내민 손은 그녀를 스쳐 창살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그리고 멍하니 벌어진 라티시아의 입술을 눌렀다. 입가를 찌르며 곧게 세운 손가락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너무나 뚜렷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걸 요구하는지, 라티시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기에게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얌전히 손가락을 입에 문 라티시아는 곁눈질로 올리비아를 훔쳐보며 그대로 따라했다. 올리비아가 성기를 쭉 빨아 삼키면 자신도 손가락을 삼키고, 올리비아가 고개를 뒤로 물리면 자신도 상체를 젖혔다.
어디까지나 모방이기에 서툴 수밖에 없는 행위에, 안드레아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정했다. 벌어진 올라비아의 아가리에 대고 내키는 대로 박아대다가 절정의 순간에 몸을 빼내고, 기둥의 끝을 정확히 새장 안의 노예에게 조준했다.
“큿….”
사정감이 몰아침과 동시에 뿌연 정액이 가뜩이나 창백한 라티시아의 뺨과 입가를 희게 물들였다. 제비꽃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에도 불투명한 점액이 느리게 번지고 있었다.
꽤 마음에 드는 광경에 안드레아가 설핏 웃었다. 간만에 느껴보는 만족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