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472화 (472/488)

외전 63. 대비했다.

“현재 이계에 생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각 단체에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커다란 위협이 온다 해도 그동안 해 왔던 것처럼 인류는 이겨 낼 것입니다.”

홀로그램 안에서 기자가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에 아버지의 존재가 비치는 건 내 착각일까.

아닌가? 괜히 NS 건물 앞에서 저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으려나.

대부분 사람은 크리쳐의 찬탈이든, 크리쳐의 찬송가든, 상황을 걱정하진 않았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인베이더가 튀어나오던 시절과는 다르다.

지금은 크리쳐의 시대.

크리쳐는 이계에만 존재하고.

특수종이 아니라면 크리쳐와 마주할 일은 없다.

완벽하게 나뉜 세상이라 하겠다.

이게 바로 아버지의 초장기 프로젝트라고도 들었다.

‘왜 인베이더 따위에게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이다.

이걸 통해 미친 과학자 무리가 특수종을 핍박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식 역시 없애기도 했고.

특수종은 도움이 되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일반인과 사이에서 벌어지는 특수종 범죄도 현저히 줄었다.

그건 테러 단체를 전부 화끈하게 부숴서 이뤄진 일 같고.

자잘한 범죄야, 치안이 강화되면서 자연히 줄어들게 됐다.

지금 세상에서는 올드 포스, 엑스큐라시, 협회, 연맹 그 외 중소 규모의 민간 군사 기업도 도시 치안에 협력하기 위해 병력 일부를 도시 순찰에 쓰니까.

“난리 났나 보네.”

“그러게.”

“이놈 새끼들! 나 때는 말이여, 저런 괴물이 막 응? 지하철에서도 튀어나오고 그랬어!”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있자니, 옆에서 떠드는 소리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 둘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할아버지가 호통으로 받아쳤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거듭 말하지만, 일반인이 위협을 느끼게 되면 뭐, 망한 거다.

지구의 위협을 거세하는 게 특수종 세상의 목적이라니까.

패스트푸드점 한가운데로 누군가 홀로그램 뉴스를 송출하는 바람에 떠오른 생각들이었다.

“야, 끄고 나가자.”

“싸우지 마, 싸워 봤자야.”

그 소란의 주범으로 보이는 이들이 밖으로 나서고.

혼자 남은 노인은 몇 번 씩씩대다가 리브 샌드를 씹었다.

난 미랑과 마주 앉아 햄버거 포장지를 벗겨 냈다.

하나를 벗겨 미랑의 손에 쥐여 준 뒤, 치킨 너겟 하나를 입에 넣었다.

우적.

평소 먹던 양질의 음식은 아니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첫 끼로 패스트푸드가 맞아?”

미랑이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중요하지.

미랑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오,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아주 큰 미소를 보였다.

“장인어른은 여전하시고?”

“눈에 안 띄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기남이 아저씨는 아직 그대로인 것 같다.

왜 우리 사이를 막는 것인가.

“그래도 엄마는 괜찮아.”

“응?”

본래라면 고모였던 사람.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아직도 딸이라고 생각하신다고 들었다.

아버지도 동생이라고 하진 않지만, 동생처럼 대하시고.하지만 피도 섞이지 않았잖아.

그게 우리 사이를 갈라 놓는 장벽이 될 순 없다.

“엄마는 상관하지 않아.”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으로는 부드러운 미랑의 말이다.

그래, 딸의 행복만 바란다는 거지.

그렇다면 고모, 아니 어머님, 여기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후 따위보다 훌륭한 선택지가.

미래의 NS 기업을 물려받진 못할 수 있어도 막대한 재산 일부를 물려받을 게 확실한 재벌 2세가.

“다 먹었지?”

우리는 버릇처럼 음식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실상 맛은 그저 그랬다.

“가자.”

그다음은 데이트였다. 멀티 플렉스 건물 안을 돌아다니며 이 옷, 저 옷을 입어 보고.

그러다 오락 시설이 가득한 곳에 가서 다트 따위를 던지기도 했다.

물론 미랑은 불멸자이기에, 실수하는 법이 없었고.

나도 염동력을 활용해 놓치는 법이 없었기에.

“특수종이죠? 상품은 못 드려요.”

주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네네.”

상품 타려고 한 건 아니다.

추억 쌓기 중이지.

걷고, 옷도 사고, 손도 슬쩍 잡았다.

미랑이 거부하진 않았다.

즐거운 데이트였다. 그 와중에 오간 대화를 꼽자면.

“언제부터야?”

“뭐가?”

“초능 활용.”

능력의 정도를 물은 질문과.

“앞으로 특수종 세상에서 뭘 할 생각이야?”

미래에 관한 물음.

“노 페이스 팀은 언제까지 이렇게 둘 거야?”

팀의 발전 방향에 관한 논의.

“넌,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내 목표에 관한 의문.

술술 답하며 생각했다. 데이트치고는 지나치게 진지한 질문이 오가는 것 같다고.

여전히 미랑의 머릿속에 내가 아니라 일만 있는 건가.

그래서 이후랑 어울린 건가.

잡생각 끝에, 목표를 말했다.

“너랑 결혼하는 거.”

“너 아니고 누나.”

“결혼해서도 누나라고 부를 생각은 없는데.”

그제야 미랑이 입을 다문 채, 날 빤히 바라봤다.

“넌 정말 이상해.”

아, 그 말에 심장이 찌르르 울린다. 곧게 날 바라보는 두 눈, 할 말만 골라 하는 입술, 투명할 정도로 맑은 피부.

하지만 외모만 보고 미랑에게 빠진 건 아니기에.

그녀의 말은 본래 차가우나, 그 안에 따뜻함이 깃들었기에.

이상하다는 말이 나쁜 의미로 들리지 않았다.

한때 방황하던 날 감싸 줬던 미랑은 여전하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 결혼할까?”

대뜸 나온 말이다. 계획에도 없던 프러포즈.

“봐서.”

미랑이 답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퍽 만족스러웠다.

‘봐서’라잖아. 봐서.

실패는 아니다.

데이트를 끝내고 학교에 돌아가는 길이였다. 짧은 외출이었다.

최근에 일 말고 밖으로 나온 게 참 오랜만이었다.

봄이 시작되어 길거리에 벚꽃이 흩날렸다.

반은 가짜 벚꽃, 그러니까 누군가 홀로그램 영사기로 만든 거지만.

아무렴 어떤가.

보는 것만으로 즐거울 따름인데.

“예쁘다.”

내가 말하고 미랑은 말없이 위를 올려다보더니, 답했다.

“험한 싸움이 될 것 같아.”

여전히 서로 다른 주제로 얘기를 하긴 했으나.

그래도 나한테는 즐거운 데이트였다.

* * *

2학년으로 진급 후, 변한 게 몇 개 있었다.

“이제 인원을 더 늘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수준 맞추겠다고 우리 수준을 낮출 수도 없고.”

노 페이스 팀의 외부 일을 기주 아저씨가 맡아서 한다면.

내부 단속은 로니의 몫이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이렇게 됐는데 로니도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응.”

“1학년은 받지 않는다. 우리 팀 노출도 하지 않는다. 이걸 원칙으로 삼는 거다.”

“응.”

“마음에 드는 여자 있다고 홀라당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거야.”

“난 일편단심이다.”

“그게 좀 아쉽긴 하지.”

“응?”

“아니야.”

로니와 말을 나누고 평소와 같이 대련과 단련을 하고.

수업을 받는 일상이다.

달라질 게 뭐가 있겠나.

수업 레벨? 아는 게 늘어나긴 했지만, 몸으로 배우는 건 이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2학년 필수 과목 중에 신체 단련 정도를 확인하는 게 있었는데.

“뭡니까?”

“너 변신족이었습니까?”

“아니, 초능 몸뚱이가 뭐 이렇게 단단해?”

“평소에 운동이 취미라고요?”

“전원 다?”

담당 교수는 황당해하기 바빴다. 그럴 만도 하지 않나.

그동안 우리는 서로의 발전을 위해 독설을 아끼지 않았는걸.

아, 크게 변한 점이 있긴 했다.

“내가 어지간한 교수보다 나을 거야. 연맹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거든.”

추수미 선배가 마법 과외 선생을 자처했다는 것.

주문 대처 수업은 1학년 때부터 필수 과목인데, 외울 것도 많았고 할 일도 많았다.

그렇게 가르치니, 배우는 이들도 거기에 맞춘 건데.

추수미 선배는 그걸 핵심부터 꼬집어 비틀었다.

“주문 종류별로 다 외우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스펠 크리에이터가 새로운 주문을 만드는 와중에? 주문을 대처하려면 각자 대응법을 익혀야 할 거야.”

선배의 수업은 효율적이었다.

안 그래도 좀 한다고 하는 친구들은 이제까지 그렇게 하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정작 주문 대처 수업에 들어가서는 다들 딴청 피우기 바빴다.

성적이 걱정되긴 했지만, 어쩌겠나.

실전이 중요한걸.

시간이 흘러, 봄이 완연해졌을 때까지도.

기주 아저씨는 우리의 이계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와 노 페이스 팀은 여전했다.

유신이 해 준 음식을 탐닉했고.

특히 도라엘 선배가 무척 좋아했다.

모든 시간을 단련에 힘썼다.

나 또한 그랬다.

이전에 배운 것, 몸에 익힌 것, 새로이 깨달은 것.

모든 걸 갈아 넣어 대련했다.

이후와 붙어 지내는 시간이 늘곤 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후와 함께할 때 능력 효율이 몇 배는 늘었으니까.

“질려요. 저 선배는 뭡니까?”

어지간하면 신소리를 안 하는 장옥이다. 제 신체 에너지를 집중해서 쓸 줄 알기에 그는 놀라운 순발력과 운동 능력을 보이곤 했다.

괴력을 쓰지만, 운동 능력까지 활용하는 천재라 하겠다.

그럼, 이후는? 그런 장옥이 혀를 내두르는 존재였다.

“괴력, 강체, 운동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안 쉬어요. 저 사람.”

그렇다. 이후는 과할 정도로 훈련에 매진했다. 대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는 모습과 직접 겪을 때 사람은 다를 수 있다. 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다른 건 의외긴 했다.

이 정도는 해야 차세대 최고란 소리를 듣는 건가.

그렇다고 해서 내 훈련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었다.

나 또한 이런저런 실험을 통해 내 몸의 한계를 다시금 깨닫고 활용하는 중이니.

“와, 선배!”

“진짜 예쁘잖아!”

교내에서 후배를 만나는 일도 잦아졌다.

가끔 4대 미녀가 다 모여서 움직이는 일이 있곤 했는데.

그럴 때면 모두의 시선이 모이곤 했다.

“가운데 남자는 누구냐? 하, 불공평한 세상, 내 얼굴은 왜.”

이런 말이 들릴 때도 있었다.

홀로그램 DM이 오기도 했다.

처음 봤는데 반했다는 둥, 그런 종류의 DM, 친해지고 싶다는 말 등.

난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는데.

의외로 로니를 비롯한 4대 미녀는 익숙한 듯했다.

“거절해 줘. 그리고 차단해.”

이게 로니.

“무시하면 그만.”

미랑이야 뭐.

차단조차 안 하고 SNS 자체를 안 보겠지.

“만나고 싶으면 오라고 하지. 마음에 들면 자빠뜨리기도 하고 세상 자유롭게 좀 살자.”

도라엘 선배가 밝히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저주를 걸어 버리겠다고 하면 다시 안 보내.”

추수미 선배는 현명한 방법을 사용했다.

나? 난 대부분 무시하긴 했는데.

제 알몸을 홀로그램으로 투사해서 보내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여자만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친구 외에 메시지를 전부 차단해야 했다.

1학년 사이에 미친 애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나 작전 나간다.”

슬슬 몸이 근질거렸는데, 도라엘 선배가 따로 밖에 나선다고 말했고.

그걸 추수미 선배가 따라갔다.

그러자.

“나도 간다.”

러시아 변신족 친구 나사로크가 나섰다.

그동안 도라엘 선배한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친구이기도 했다.

대련으로도, 그녀의 침대에서도.

둘은 공식적인 연인, 비슷한 위치가 됐다.

부러웠다.

나도 미랑이와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미랑이 반응이 보통은 무척 차갑게 보여 다들 날 걱정하긴 했다.

이게 되겠냐, 이거다.

꺾을 수 없는 꽃, 겨울 마녀.

괜히 그런 별명이 붙은 게 아니므로.

어쨌든 도라엘 선배와 추수미 선배, 나사로크, 거기에 선배 하나와 동기 하나가 더 붙어서 이계로 진입했다.

슬슬 기주 아저씨도 풀어져, 여러모로 타이밍이 맞은 어느 날이다.

몸이나 풀겠다고 나선 길.

그러니까 큰 위험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크리쳐의 찬탈이라 불리는 대형 사고가 터졌고 아직 진행 중이지만.

이제는 다시금 익숙해지는 과정 중이었으니까.

크리쳐 등급을 조정해야 한다는 말도 심심찮게 나온다고 하는데.

일개 특수종인 내가 뭘 어쩌겠나.

난 진심으로 내 능력과 별개로 거시적인 시각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기다렸다.

내가 뭔가 하거나 필요한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전쟁이다.”

추수미 선배를 리더로 보낸 다섯이 떠난 뒤 이틀.

기주 아저씨의 전화가 왔다.

전쟁이란 말.

난 눈을 깜빡였다. 대뜸? 이게 무슨 말인지?

“유니크 급을 필두로 검은 황무지에 크리쳐 부대가 모였다. 역으로 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다.”

크리쳐의 시대가 열린 지 이미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세상.

이제 일반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세상.

이계의 괴물과 특수종의 싸움.

“특수 합동 본부가 발족했고, 노 페이스 팀도 합류하기로 했다. 미안하다. 못 막았다.”

위험한 곳은 피하고 최대한 실적만 올리기로 하고 만든 팀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하진 못 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일단 기주 아저씨를 다독인 난 생각했다.

전쟁이라.

이건 예견된 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로니도 미랑이도 앞으로 싸움 형태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대비해야 한다고 수없이 말했으니.

그래서 대비했다.

“전원 집결.”

노 페이스 팀을 한 덩어리의 군대로 만들어 뒀으니.

내 말에 대련장에 동기가 모인다.

이제는 밝힐 때였다.

팀의 정체도, 내 정체도.

싸울 때가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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