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465화 (465/488)

외전 56. 제가 팼어요!

“내가 섣불렀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터의 왕이 말했다.

분노가 깃든 말투다. 그럴 만했다.

제가 키운 전력의 팔 할 이상이 날아갔으니.

기둥이라 불리던 넷이 죽거나 잡혔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리하여서 모인 이들이다.

추방자 무리는 총 네 개의 대형 집단이 되었고, 이터도 그중 하나였다.

비약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겠다는 로이더의 간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 밑이 퀭하고 몸이 바짝 말라 해골을 연상케 하는 남자였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하물며 걸어 다니는 예언가조차 그걸 몰라서 당한 판에.”

이터의 흉악함은 추방자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먹고 괴물을 먹는다.

그런 이들을 이제껏 연명하게 해 준 힘 중 하나가 걸어 다니는 예언가다.

미래는 가변하기에 모든 걸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제가 속한 집단의 위험만은 감지할 줄 아는 위험 감지기.

그녀조차 잡혀갔다.

왜? 상대의 무력을 비롯한 행동 패턴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이들, 추방자 무리에게 꽤 큰 충격을 준 일이었다.

헌터 중의 헌터라든지.

언라이벌 식스라 불리는 차세대 최강을 논하는 특수종도 아니고.

신생팀에게 이터의 주력이 탈탈 털렸으니까.

이들이 모인 곳은 백야의 땅.

이계 중에서도 살기 좋고 안락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해가 지지 않아, 밝은 밤을 맞이하는 이계다.

나오는 크리쳐의 레벨이 높지만, 크리쳐가 문제였다면 추방자로 살 수도 없었으리라.

머리 위에 교차하며 떠오른 두 번째 태양이다. 그 빛이 추방자 면면의 얼굴을 비췄다.

그중 마이스터의 간부가 의견을 내놨다.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게 낫겠는데, 이번 일로 헌터 새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찾아다니고 있으니. 그러다 백도어라도 걸리면 상황이 더 나빠져.”

마이스터의 추방자는 백발이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나이를 추측하게 만드는 외모였다.

실제로 그는 1세대 추방자 중 하나였다.

그가 말하고 한쪽을 바라봤다.

“그쪽은 어찌 생각하는지? 교주?”

추방자 무리라고 해서 다 같은 건 아니었다.

교주가 속한 곳은 넷 중 가장 우월하며 은연중 리더의 포지션에 있는 무리이자 집단이다.

‘블라인드 페이쓰.’

광신의 집단.

기실 그들이 있기에 추방자가 버티고 있음에야.

“맞는 말이네요.”

밝은 빛 따윈 원치 않는다는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가죽 망토 따위로 전신을 가린 작자다.

목소리만으로는 남녀가 구별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특수종 일부는 탁월한 예민함을 갖춘 순혈급 불멸자임에도 그렇다.

그만큼 신비에 휩싸인 인물이다.

다들 간부를 보내는 곳에 홀로 고고히 나타난 교주다.

교주가 말했다.

“발을 빼고 힘을 기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사이에는, 그래요. 실험을 계속하죠.”

그녀의 말은 합당했다.

이터의 리더는 사지가 떨어져 나간 것과 다름없기에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나설 수도 없었다.

병력을 너무 잃었다.

그러니 그저 원한만 품을 뿐.

이들이 한 방 먹었다는 건 여실했다.

추방자가 이 땅에 존재한 이래로 가장 큰 피해였다.

방심의 결과인가, 아니면 상대가 가진 전력이 비대칭인가.

세최특이 온 것도 아닌데, 이리 당한 것에 낭패를 금할 길이 없을 뿐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다.

교주란 작자만 빼고.까만 가죽 망토 안, 교주의 내심은 달랐다.

그녀는 걱정이 없었다. 어차피 이들 또한 전부 타인.

그녀에게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신도만 존재할 뿐.

그러하기에 호기심만 생겼을 뿐이다.

그녀는 노 페이스 팀, 이번에 홀로 이터의 전력을 다 깨부순 그 작자가 보고 싶었다.

‘궁금해.’

순수한 호기심이다. 호기심에서 비롯해 마음이 움직이자, 그녀의 심안에 미래가 보였다.

넓은 황야의 한복판. 머리 위에 세 번째 태양이 뜨는 곳.

백야의 땅이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이자, 블라인드 페이쓰의 땅이다. 그곳에서 자신을 마주한 가면을 보았다.

그건 변하지 않을 미래다.

미래는 가변하나, 그녀의 미래는 달랐다.

그만큼 교주의 능력은 탁월했다.

인과의 법칙을 비틀 정도로.

‘만나는구나.’

그 이후의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만난다는 것.

교주는 그게 몹시 기대됐다.

* * *

언라이벌 식스.

그중에서도 사냥꾼이라 불리는 이가 있다.

불멸과 변신의 혼혈로.

세최특의 아류작이라는 평이 있기도 하나, 그 능력만큼은 탁월해 최강의 여섯 중 하나로 꼽히는 특수종이다.

그는 팀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헌터 종류의 의뢰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그가 가진 무력이 그만큼 탁월했다.

사실상 언라이벌 식스는 헌터 일을 병행하는 게 기본이기도 했다.

프론티어, 전면에 선 특수종 팀이다. 당연하게도 크리쳐 만큼이나 추방자를 맞이할 일도 많았다.

그런 사냥꾼이 지금 놀라서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하운드가?’

하운드는 자신의 팀원 중 하나였다. 자신이 단련시킨 헌터 중의 헌터라 하겠다.

그녀야 원하는 게 명확했기에 팀에 남진 않았지만.

‘하운드가 구경만 해? 목숨을 빚져?’

소문은 빨랐다. 빛과 같았다. 퍼진 소문, 노 페이스 팀의 리더가 홀로 이터의 기둥 둘을 죽였다.

사실은 셋이지만, 소문은 둘에 국한됐다.

‘이건 뭔가.’

안 그래도 주목받기 시작했던 신생팀이다.

그래, 어디까지는 신생팀이었다.

이대로 두고 보면 언젠가 치고 올라올 팀.

백 개의 팀 중 하나가 확실시되는 팀.

자신이 보기에도 이 팀은 잠재력이 뛰어났다.

그러니 최소 십 위 권 안에는 안착하리라 생각했다.

십 위 안쪽?

그때부터는 리더의 무력까지도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노 페이스 팀장이란 놈이 그 범주를 벗어난 능력자라는 걸 증명해 버렸다.

이터를 개박살 냄으로써.

“시발, 졸라 재밌네.”

세최특과 같은 혼혈이지만, 그는 그와 같은 길을 걷진 않았다.

본능을 컨트롤하는 대신 놔 버렸기에.

그는 거칠었고.

예민함을 가라앉히는 대신 그냥 놔뒀기에 언제나 예민했다.

그를 살게 하는 건 마약과 싸움뿐.

언라이벌 식스 중에서도 가장 거칠다는 평가의 그다.

추방자와 가장 비슷한 기질이란 평가도 있음에야.

“그 새끼 낯짝 한번 보고 싶잖아.”

언라이벌 식스가 관심을 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실상 이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노 페이스 팀이란 이름을 다 알게 됐다는 거다.

* * *

남기주는 온신이 쓰러진 걸 보고 놀랐고.

가면이 바뀐 걸 보고는 아찔했다.

아찔한 이후에는 곤란했다.

“당신한테 따지진 않겠어. 난 이 일을 시작한 본인에게 묻고 싶거든.”

이계에서 나온 하운드의 말이었다. 그녀의 품에 온신이 안겨 있었다. 바뀐 가면을 쓰고.

“그러니까 내 연락 안 받으면 그날로 기자 회견이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남기주는 공손했다.

약점이 잡힌 셈이었다. 황당하다. 당황스럽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었다.

어째 무슨 일이 항상 꼬이기만 하는 것 같긴 해도.

그 꼬인 일의 끝이 어째 아슬아슬하게 풀리는 것 같으니.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모른다.

제안은 자신이 했으나, 이후 팀을 여기까지 이끈 건 이 어린 친구의 역량이었다.

“안 죽고 돌아와서 고맙다.”

남기주는 기절한 온신을 향해 말했다.

세최특에게 보복당할 게 걱정돼서 한 말이 아니다.

이리 부대껴 지내다 보니 새삼 깨닫게 되는 것.

온신이란 아이의 힘이다.

이 아이는 주변 사람을 아낀다. 책임감도 있다. 제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는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딜 줄 안다.

그 모든 걸 떠나.

‘정이 가.’

괜히 그런다. 외모는 딱 질색인데도.너무 잘생겨서 재수 없는데, 그런데 묘한 정이 생겨 버렸기에.

“허.”

남기주는 허탈한 웃음을 토했다. 이후의 일이 어찌 돌아가든 살아 돌아온 온신이 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 * *

“치료 캡슐에서 최소 일주일이다.”

의사의 말이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쓴 덕에 복귀도 못 할뻔했으나.

남기주 아저씨와 러시아 친구 나사로크의 협조 덕분에 학교에는 돌아왔다.

이후에는 다친 핑계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거야 쉬웠다.

“제가 팼어요!”

장옥이 손을 들고 후련하게 말을 했다.

“이 형이 좀 무리하더라고요!”

대련 중 사고다.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이리 다친 적은 처음이었지.

“솔직히 말하는 건 어떠냐?”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의사가 물었다.

설마 눈치챘나?

사실은 내가 밖에 몰래 나갔고 노 페이스 팀의 팀장이라는 걸?

이 의사는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냉정하고 무뚝뚝한 말투는 더더욱 그를 날이 잘 선 메스와 같게 보이게 했다.

오늘따라 의사의 눈빛이 더 매서웠다.

“구장옥 혼자 한 게 아니지?”

“…….”

“몇 명을 상대한 거냐? 제 몸을 돌볼 줄 모르고 수십 명을 상대로 동시에 한 대련이겠지? 그래서 무리한 거겠지?”

이 양반 외모와 다르게 헛발질이 심한데.

“네, 정확하네요.”

어쩌겠나. 난 인정했고, 의사는 내심 제 말이 맞다는 것에 흐뭇한 표정을 보였다.

이 사람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이후 치료 캡슐에 들어갔고.

일주일 동안 잠만 잤다. 숙면 치료 캡슐이다.

영양분은 캡슐을 통해 코로 들어오고.

초능과 마법의 합작품, 캡슐에는 젤라틴이 가득하다.

“전신 근육이 미세 단위로 찢어지고 쪼개졌어. 잘도 몸을 이렇게 굴리는군.”

의사의 말이 맞았다.

두 번의 부스터는 내 몸을 잘게도 쪼개 놨으니.

전신 뼈에 실금이 간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어쨌든 일주일은 금세 지나갔다.

나야 뭐, 눈 감았다가 뜨니 일주일이 지나간 셈이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캡슐에서 나오자마자 다 의사는 으레 하는 말을 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보죠.”

“농담이 아니다. 넌 불멸도 변신도 아니야. 일개 인간의 몸은 내구력의 한계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육체 보완의 비약이라도 먹든지.”

“음, 생각해 보죠.”

비약이라, 그것도 생각해 봤지.

사실 초능을 못 깨우치면 비약도 먹을 생각이었다.

문제라면 내가 비약을 못 먹는 체질이란 거지.아니, 아버지는 혼혈에, 어머니는 스펠 유저에.

좋은 거 다 가져가 놓고 내 체질은 왜 이 모양인지.

한때는 원망까진 아니어도, 이건 좀 너무한 건 아닌가 싶긴 했지만.

그런 불만을 보일 시기가 훌쩍 지나 버렸다.

새삼 깨닫는바.

내 초능 컨트롤 능력은 사기에 가까우니.

이번에도 훈련한 모든 것이 유용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절로 혼잣말이 나온다.

“날이 적당해서, 상대 대가리 깨기 딱 좋은 날이었다.”

말이 끝난 시점은 본래의 내 보금자리.

유신의 방과 이어진 곳이다.

“좋다! 애송이들! 다 덤벼!”

방음 처리된 문이 열리자마자 들린 외침이다.

호쾌한 외침과 더불어.

꽝! 떡! 쩍!

경쾌한 소음이 함께했다.

이후, 내 눈에 대련장 한가운데서 날뛰는 사자가 보였다.

“크허허헝!”

포효하는 변신족이다. 그녀의 양손에 들린 내 동기가 수수깡처럼 날아갔다.

붕붕!

날아간 둘을 다시 다른 동기 둘이 받아 내고.

그 가운데에는 한껏 허리를 젖혀 웃는 변신족이 있었다.

“크하하하하! 내가 이겼다. 꼬맹이들!”

스쳐보면, 그러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보면 그저 미친 여자라 생각하겠지만.

자세히 보면 아는 얼굴이었다.

사관학교 내 사계 미녀 중 하나.

여름 햇살의 도라엘 선배다.

“내가 바로 도라엘이다!”

신이 난 그녀가 외치고.

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필요가 있기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내 왼편으로 로니가 다가왔다.

“왜? 햇살 선배 보니까 막, 너무 반가워?”

얘는 첫 대사가 왜 이래.

“놀러 왔다면서 갑자기 두들겨 패기 시작했어요. 왜 저래요? 저 선배? 이제 멀쩡해졌어요?”

장옥이도 다가와 말한다. 눈탱이가 밤탱이였다. 로니와 장옥이 번갈아 내 전신을 훑었다.

괜찮나 보는 듯했다.

“난 괜찮고.”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도라엘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 좀 놀고 있었다. 근데 너도 사람이구나. 대련하다가 얻어터져서 의무실에 실려 가기도 하고, 우리 귀염둥이 1학년 리더, 잘 있었나?”

도라엘은 걸음조차 호쾌했다.

이전과 헤어스타일이 달라졌다. 머리칼을 조금 길러 뒤로 묶었는데, 밝은 갈색 머리칼이다.

염색이라도 한 건가.

“야, 길게 말할 거 없고 나도 받아 줘라.”

“뭘?”

“노 페이스 팀.”

이 선배는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걸까.

난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얘기를 나눌 시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