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464화 (464/488)

외전 55. 가면 속의 남자

“이, 어? 이 새끼, 무슨 짓을.”

놈이 말한다. 그러더니 팔을 부들부들 떨며 내 손을 떨쳐 낸다. 순순히 손을 놔주니, 놈이 뒤로 휘적휘적 물러났다. 술에 취한 주정뱅이 같은 걸음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반대쪽에서 코끼리가 외치며 연신 주먹을 날렸다.

꽈과과과광!

바로 앞에서 폭탄이 연이어 터지는 것 같았다. 만들어 둔 방어막이 연신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아찔한 느낌을 줬다.

부스터로 한 번 몸을 달궜기에 두 번째 부스터는 몸에 더 부담됐다.

그 사이 에너지 드레인을 구사하던 놈이 허리를 숙이고 우웩 하고 구역질을 했다.

재밌을 텐데, 아닌가.

놈은 내 기력을 빨려고 했고, 난 놈의 안에 뇌전력을 집어넣었다.

단순히 말하면 그런 내용이지만, 흔히 할 수 없는 재주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초능력은 어떻게 발동하는가?

그냥? 아니지.

인류의 탐구 정신은 이조차 일부 밝혀냈다.

초능은 회로다.

몸 안에 일종의 회로도 같은 게 새겨지는 것이 초능 발현의 전모다.

초능 발동 구조는 회로에 전류가 흐르듯 사이오닉 에너지를 주입하는 형태다.

물론 익숙해지려면 같은 짓을 수없이 반복해야겠지만.

그렇게 능력을 반복해 단련하면 제 손을 움직이는 것이나 걷는 것보다도 초능 발동을 더 자연스럽게 해낸다.

능력을 쓰는 게 더없이 익숙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3초 내외로 완벽하게 모습을 바꾸는 세이프 쉬프터, 형태 변환자가 있고.

1초 내외로 불을 뿜어내는 발화 능력자도 있다.

그들이 전부 이 같은 경우다.

아니, 모든 초능이 같다.

그들의 몸에는 회로가 있고 그걸 통해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익숙해진 통로 사이에 이물질 또는 장애물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이건 사기야.”

실험체 구스타프는 그렇게 말했었다. 탈력감에 눈물을 찔끔 보이기도 했다.

“그냥 일반인이 된 기분이었다.”

상대가 오롯이 초능력만 가진 특수종이라면.

난 그들의 천적이 될 수 있다.

제한 시간은 고작 5분 내외.

다른 초능 회로에 장난질을 치는 데는 제약이 있는 법이니.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솟아라.”

기력이 딸려, 말과 함께 이미지를 투영.

내 말에 월광이 퉁 하고 땅에서 뽑혀 날았다.

월광은 적을 향해 날아가는 대신 내 손 위에 안착했다.

꽈과과과광!

한쪽에서 코끼리가 사납게 방어막을 후리고, 내 손 위를 빙글 도는 월광을 본 에너지 기생충이 가까스로 다시 방어막을 만든다.

기생충의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르고 눈알에 핏발이 섰다.

놈의 눈이 월광에 꽂혔다. 딱 봐도 월광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에, 난 슬쩍 허리춤에서 한 뼘 길이 짜리 막대 모양의 칼을 꺼냈다.

지-잉.

그리고 칼날의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광학 병기는 인류가 만든 최고의 무기다.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나.

“가져가! 가져가! 안 가져갈 거면 날 밟고 가라!”

남기주 아저씨에게 새삼 감사해야 할까.

광학 병기도 챙기고 아저씨도 즈려밟고 나서게 만든 그 대범함과 배려에 찬사를.

“이런 시발.”

꽈과과광!

변신족과 에너지 방어막이 만들어 내는 폭음 사이로 기생충이 좌절감에 빠져 힘 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일진대.

쉽게도 꺾이네.

지잉.

광선검을 휘두른다.

드드드드드.

빛으로 된 칼날이라 해서 뭐든 다 잘라 낼 순 없었다.

상대의 방어막은 다면체였다. 그것들이 멋대로 회전하며 광선검을 비껴 냈다.

훌륭한 기술이다. 이건 배울 만한걸.

염력을 엮어서 만든 은하수 결계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나.

막혔다고 해서 멈출 이유가 없기에, 난 광선검의 두 번째 스위치를 올렸다.

지이이이잉. 드드드드드드드득!

전과는 다른 소음이 터진다.

“시이벌.”

기생충의 입에서 좌절을 넘어 절망 어린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톱날 광선검.

최신 기어다. 한 자루에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고, 충전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발생한다.

기어는 제값을 했다.

위이이잉!

실제로 광선검이 톱날처럼 회전하는 건 아니었다.

이 기어의 핵심은 공명, 초진동 광선검이었다. 진동하는 광선검이 베지 못할 것은 없다.

쭈-웅.

결국, 내 손에 들린 광선검이 적을 두 동강 냈다.

상체와 하체가 갈라지고.

그 타이밍에 가까스로 버티던 방어막도 터졌다.

뻐-엉!

코끼리가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두 주먹으로 결계를 부쉈다.

물론 맨주먹은 아니었다.

코끼리도 양손에 투갑을 차고 있었고.

투갑 위로 한 겹의 투명한 막이 보였다.

사이오닉 기어 같은데 한눈에 어떤 형태인지 알아보는 건 불가했다.

내 뇌안은 살아 있는 것에만 반응하니까.

코끼리가 방어막을 깬 순간, 위장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역류했다.

“웩.”

난 피를 토하면서도 시선은 코끼리를 바라봤다.

“내가 이리도 허무하게.”

뒤에서 레고처럼 상체와 하체가 나뉜 놈이 말하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코끼리의 주먹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피하긴 글렀다.

양손을 교차해서 수인을 맺고 눈을 부릅떴다.

지-잉.

그 순간, 내 머릿속에만 소음이 터졌고.

동시에 눈앞에 육각형의 방패가 펼쳐졌다.

꽈-앙!

헥사곤 필드는 나오자마자 깨졌지만, 덕분에 다시 솟구친 한 방은 또 어찌어찌 막았다.

“이이이, 새끼가! 또 방어막을 숨겨 놨어!”

코끼리의 흥분이 전해진다. 나 같아도 화가 날 듯했다.

동료는 죽었지. 힘겹게 방어막을 깼더니, 다시 방어막이 열리지.

근데 코끼리 아줌마, 왜 계속 내 그릇을 그렇게 얕게 보는 건지 모르겠네.

자꾸 방심하는 게 보인다.

어느새 스위치를 끈 광선검의 사출구를 상대에게 두고 세 번째 버튼을 올렸다.

쭝! 쭝! 쭝!

내가 쥔 광선검은 현존하는 광학 병기 중 가장 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광선검이 응축된 에너지를 탄환처럼 쐈다.

광학 병기는 어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들어가는 재료 때문에 대량 생산이 거의 불가능해서 그렇지.

최강의 무기란 칭호를 괜히 가진 게 아니다.

요즘에는 아빠 별명을 따라서 ‘세최병’이라고도 하던데.

세계 최강 병기라고.

코끼리는 날아오는 광선 탄환을 손등으로 튕겨 냈다.

이건 정말 대단한 묘기였다.

퉁, 퉁, 퉁, 퉁.

무슨 무협지의 고수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다.

투갑과 괴력, 무서운 운동 능력의 합치로 이뤄 낸 일이다.

손뼉을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너 이 새끼.”

눈이 벌게진 코끼리가 콧김을 뿜어냈다. 칼처럼 쓰는 코에서 김이 나오는 게 퍽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래, 뭐 나도 광학 병기로 널 죽일 생각은 아니었으니.

엄지와 검지로 월광을 쥐고 사이오닉 에너지를 밀어 넣자, 월광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찌지지직.

그리고 여기서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아까 주먹을 막으며 생긴 충격으로 홀로그램 송출 장치 일부에서 쥐 울음소리 따위가 들리기 시작한 거다.

홀로그램 마스크가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둘 다 마스크 따위에 신경 쓰진 않았다.

“빌어먹을 마스크 새끼.”

“아토피는 면역력이 문제라고 하더라. 공기 좋은 데서 살아, 이계에서 놀지 말고.”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는다.

월광을 보여 주고 난 정말 아껴 둔 한 수를 꺼내려고 했다.

정말 몇 초만 더 대치했어도 그랬을 텐데.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발밑에서 들린 목소리다. 아니, 시작은 발밑이었는데 말이 끝난 건 코끼리의 앞이었다.

까만 물체가 휙 하고 지나간 것 같더니, 어느새 코끼리의 다리쯤에 붙었다.

물체가 멈추니 무엇인지 보였다.

머리가 길쭉한 늑대개다.

보통의 변신체가 인간형을 유지하는데, 나타난 개체는 좀 달랐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 가까웠으니.

다리를 물다가 뒤로 훌쩍 뛰어 코끼리의 코를 피해 내 옆에 내려섰다.

옆에서 눈을 보니, 참 맑다.

“혼자서 너무 잘 싸워서 구경 좀 했다.”

“악취미시네.”

“쟤들이 누군 줄은 알고 싸웠냐?”

눈을 보니 하운드라는 걸 알겠다. 얼굴이 변했지만, 은근히 인간일 때의 느낌도 많이 남았고.

코끝의 모양이라거나, 말투, 눈매의 형태 따위가 비슷했다.

“아토피 코끼리와 영양실조 에너지 기생충?”

“……더럽게 잘 어울리긴 하네. 이터다. 들어 봤지?”

고개를 끄덕이니.

“이터의 기둥 중 둘이다.”

뭐야,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개새끼들이었다, 이건가.

추방자 얘기를 들었을 때 전부 다 이해가 안 가는 새끼들이긴 했지만.

그중 이터는 가장 최악이었다.

식인, 식괴.

먹을 게 없는 세상도 아니고 왜 저러고 사나 싶었다.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자꾸 먹겠다고 그러더니.

“고생했다. 저건 내가 맡도록 하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 뒤는 두 변신체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다.

코끼리가 불리함을 느꼈는지, 중간에 뒤로 빠지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하운드는 사냥개.

사냥감을 놓치지 않은 지독함이 낳은 괴물이었으니.

그녀는 집요했다. 상대가 뒤로 물러날라치면 무섭게 달려들고.

그게 아니라면 시간을 투자해 상대 체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내 눈에 싸움 전부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일단 하운드가 속도에서 유리하다는 건 알겠다.

“미꾸라지 같은 년!”

하운드는 대꾸도 안 하고 코끼리의 코와 주먹 따위를 피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우월한 건 아닌 듯했다.

일격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어쨌든 난 구경꾼.

하운드가 뒤로 물러나라 해서 슬그머니 서너 걸음 빠진 채였다.

이터의 기둥인지 뭔지 하는 코끼리는 더는 날 신경 쓰지 않았고.

이후 싸움은 한순간 끝났다.

코끼리의 코가 바닥에 박히고 그걸 하운드가 물어서 뜯어내려 했고.

코끼리는 그걸 막겠다고 제 손으로 제 코를 잡아당겼다.

이제까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던 둘이 묘한 자세로 멈춰 섰다.

힘을 겨루는 대치 상태였다.

그 직후.

훙, 꽈-릉.

둘의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쳤다. 정확히는 은빛 섬광을 두른 벼락이 코끼리의 머리에 꽂혔다.

“꺽.”

머리통이 쪼개지고도 살아남으면 불멸자지, 변신족이 아니다.

벼락이 코끼리의 머리를 후리며 관통.

벼락이 지나간 자리로 지그재그의 붉은 선이 그어진다. 이후, 정수리부터 핏물이 스멀스멀 흐르고 쩌적 하고 머리통이 쪼개졌다.

“너.”

하운드가 입가에 피를 묻힌 채로 날 바라봤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말했다.

“정당한 시합이었으면 제가 미안하고요.”

시합은 개뿔.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기습은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니.

코끼리가 나한테 신경을 거두자마자 난 월광을 쥐고 뇌전 에너지를 집어넣은 다음 띄웠다.

그거로 끝이었다.

서로에게 집중한 상태다.

일격이면 충분했다.

애초에 집중할 시간과 타이밍만 잡을 수 있다면 월광 하나로 끝낼 수 있었다.

이거 인정하긴 싫은데, 남기주 아저씨의 말이 맞긴 하다.

“넌 혼자 싸우는 타입이 아니다.”

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그래도 혼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확인은 해 봐야 할 거 아닌가.

그걸 이번에 증명하기도 했고.

또한, 깨닫기도 했다.

내가 가진 이 능력은 근접전으로 상대를 농락할 때 쓰는 능력이 아니라는 걸.

이 자리에 구스타프와 로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전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고.

상대가 30레벨의 괴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까 난 지금 내 무기와 내 싸움 형태를 깨달은 거고.

“고맙다고 해야겠지.”

하운드가 인간 형태로 변하며 말했다. 늘어났던 슈트가 다시 인간의 몸에 맞게 줄어들었고.

난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주변에 다른 위험 있습니까?”

“내가 알기론 없다. 이 둘이 제일 위험했지. 한 놈이 안 보이긴 하지만, 그놈 개인은 사실상 그리 위험하다고 볼 수도 없고.”

한 놈은 누굴 말하는 건지.

“크리쳐 사육사가 안 보인다.”

눈치가 빠른지 하운드가 내 눈을 보고 이어 말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크리쳐 사이에 숨어 있던 음흉한 추방자 하나.

그것도 내가 죽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쨌든 주변에 위험이 없단 얘기고.

“그럼 저 좀 들고 움직여 주시죠.”

“뭐?”

이제 한계였다.

부스터를 해제했고, 그 순간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내달렸다. 굳이 정신력으로 버틸 필요가 없다는 걸 되새기자 머리가 하얘지는 걸 느끼며 기절했다.

한순간 세상이 검게 변했다.

* * *

하운드는 황당했다. 그 난리를 치던 놈이 갑자기 풀썩 기절하다니.

그녀는 반사적으로 다가와선 그를 한 손으로 안아 들었다.

파직.

그와 함께 노 페이스 팀의 리더가 쓴 홀로그램 가면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까.

하운드는 얼굴을 봤고.

비상 통신기를 작동했다.

“야, 홀로그램 가면 하나 있으면 가져와라.”

부하 중 하나에게 시켰고.

금세 달려온 변신족 부하에게 멀리서 가면을 던지라고 한 뒤, 온신의 얼굴에 새로 가면을 씌워 줬다.

‘빚졌다.’

이 새끼 아니었으면 자기도 국립묘지에 시체도 없이 묘비를 세울 뻔했다.

그러니 이 얼굴도 숨겨 주는 게 맞겠지.

‘잘생겼네.’

괜히 입이나 한번 맞춰 보고 싶을 정도로 미남이었다.

하운드는 상대의 얼굴도 알았다.

가면 속의 남자는 유온신, 세최특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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