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2. 뒤치기
잘 키운 불꽃초 열 산삼 안 부럽다는 말이 있다.
정제한 불꽃초로 작은 단환을 만들면 그게 바로 불로환이라는 약이 되기에 붙은 말이었다.
만드는 과정을 말로 얘기하면 한방의 비법처럼 보이지만, 실은 양약의 극치다.
이미 수차례 임상 시험을 통해 만들어진 약이란 거다.
이름도 괜히 불로환이 아니었다.
먹으면 전신에 기력이 솟는 그런 약이니.
“여기서 불꽃초 정제를 할 순 없지만, 뿌리만 먹어도 좋을 겁니다.”
채집팀 중 누군가는 불꽃초 뿌리를 잘라 건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껴 왔던 비약 따위를 꺼냈다.
부작용이 없는 비약은 비싸다.
채집팀은 기본적으로 몸을 쓰는 노동직이다.
그런 이들이 쓰는 비약이니.
당연히 몸에 데미지가 현저히 적은 비약이었다. 즉, 비싼 약.
“부작용 없는 약은 비쌀 텐데요.”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쌉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문제는 내가 부자란 것이다.
“돌아가면 갚죠.”
주머니를 털긴 하겠지만, 갚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모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거나 먹진 않았다.
어릴 때부터 좋은 건 입에 달고 살았다. 뭐가 내 몸에 맞고 안 맞는지는 한눈에 알아봤다.
불꽃초 뿌리는 결계 능력을 보유한 동기한테 먹이고.
얘는 코드명이 또 뭐였더라.
“난 박스야.”
아, 그래. 맞다.
이 친구의 능력은 네모난 형태의 유리된 공간을 만드는 것.
“단련하지 않았으면 하나도 살릴 수 없었을 거다.”
까만 머리칼의 작은 키의 여자애다. 그녀가 내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덕분이라고 생각해.”
“고맙다. 와 준 거, 나도 생각한다. 단련 덕분.”
러시아 팀장도 옆에서 끼어들었다.
다 너희 잘되라고 한 일이긴 한데.
“그럼 돌아가서 연속 대련 열 번?”
10회 대련, 동기들에게 죽음의 코스로 이름 높은 짓이다.
별건 아니다.
나랑 열 번 싸우는 건데.
불멸자 놈들은 어디 한 군데 박살 나기 전까지 안 내보내고.
변신족은 크게 다치진 않지만, 두들겨 패는 데 중점을 두며.
초능 특수종은 제 능력을 한계를 뿜어내다 못해 피 토할 때까지 몰아붙이는 짓이다.
나한테도 도움이 되고, 동기에게도 도움 되는 양질의 훈련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좀.”
“바쁘다. 사람 돌본다.”
러시아 팀장이 도망가고 결계 초능의 친구가 한 발 뒤로 뺀다.
이 새끼들이, 능력 덕을 봤으면 더 훈련할 생각을 해야지.
“일단 좀 쉬자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정찰 나갔던 동기다. 불멸자 친구가 상황을 정리했다. 이후 결계를 펼치고 쉬었고.
결계를 만든 친구는 능력 유지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고, 불멸자 친구는 적의 동태를 살피느라 바삐 움직였다.
“아무래도 기지 쪽이 불리해.”
“추방자 무리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크리쳐 무리를 이끈다.”
“기지는 방어에 전념했다.”
“지원을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나도 아는 게 있었다.
내가 도착한 직후에는 기지가 적에게 점령당해 있었다는 것.
그럼 당장 지원은 힘들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하고 지원 병력을 이끌고 와야 하는데.
어설픈 특수종이 와 봤자 추방자 무리의 한 끼 식사가 될 듯하고.
“기지를 지켜야 한다.”
불멸자 친구는 냉정했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고.
난 내 몸 상태를 점검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 근육 상태가 돌아오질 않았는데.
완벽하게 돌아오려면 치료 캡슐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이다.
근섬유의 조직 일부가 찢어졌을 것이고.
신경을 짓누르는 걸 보니, 염증도 곳곳에 생겼을 것이다.
초능 특수종의 몸뚱이는 일반인과 별 다를 바 없는데, 변신족의 흉내를 냈으니.
멀쩡하길 바라면 양아치다.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봐야 했다.
“2시간만.”
일단 몸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볼 때 길어야 3시간이야. 기지가 버티는 거.”
안 되면 아군도 철수하겠지.
불멸자의 감각은 때론 예지와도 같은 예측을 하니.
지금 이 친구가 그런 상태로 보였다. 불멸자 동기의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다들 능력 활용도가 처음 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성장했다. 이런 상황에도 꺾이지 않을 만큼.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했던가.
그래, 지금 필요한 게 그거다.
* * *
기지를 습격한 건 추방자 무리 중 이터였다.
그중 핵심이 된 이들은 이터의 핵심 전력인 네 개의 기둥 중 셋이었다.
다만, 본래 이터의 기둥 중 둘만 남았다.
하나가 어이없게 잡혔고.
나머지 셋 중 하나도 행방불명이었다.
“외부 쪽 처리하고 온다는 놈이 안 와.”
“흔적은 알아봤나?”
기둥 중 둘이 묻는다. 하나는 머리카락이 새빨간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칙칙한 인상의 삐쩍 마른 남자였다.
“당했습니다.”
정찰을 위해 보낸 부하 중 하나가 답했다. 자리를 비운 동료의 제자였다.
“당해?”
외부 정찰을 나간 작자가 누구인가.
크리쳐 사육사라 불리는 놈이다.
오렌지 등급 이상을 통제할 순 없지만, 레드 등급까지는 그를 어찌할 수 없다. 그만한 능력자다.
크리쳐가 머무는 땅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놈인데?
“가면 무리 새끼들이구나!”
빨간 머리칼의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변신족, 쉽게 흥분했다.
“그것까지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기지 내부에 가면 새끼들 안 보였잖아. 그럼 저 밖에 어디서 살아남았다는 건가?”
마른 남자도 짜증이 치솟았다.
그럴 만했다. 그들이 여길 습격의 시초로 삼은 이유는 전부 가면 무리 새끼들 때문이니까.
이제부터 보이는 족족 잡아먹어 버릴 놈들.
이터의 취지는 간단했다.
그들은 상대를 먹으면 그들의 힘을 취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이터의 왕이 주는 권능으로 실현됐다.
실제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는 거다. 이게 신비요, 권능이 아니면 무엇인가.
추방자 무리 사이에서 신앙이 생기는 이유다.
변신족 여자가 발을 굴렀다.
쿵!
바닥이 푹 꺼지면 발자국 모양이 생긴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괴력만 치자면 이터 중에서도 최고다.
“붉은 상아님.”
별명을 들은 여자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정찰을 나섰다고 돌아온 이터의 일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마저 입을 열었다.
일단 변신족의 흥분을 가라앉혀야 할 거 아닌가.
흥분하면 동족도 잡아먹는 년이다.
“일단 기지를 확보하면 입구가 봉쇄되는 셈이니.”
“……어차피 이곳으로 돌아올 거다?”
“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함도 있지만, 확신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정답이었다.
“기지부터 접수하자.”
“개 같은 가면 새끼들 다 죽여 버린다.”
여자가 변신족이라면 음침한 남자의 능력은 이터의 그 누구보다 어울리는 초능 특수종이다.
그는 에너지 뱀파이어.
맨피부에 닿는 순간, 상대의 생체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괴물이었다.
“앞에 밀어 넣어, 오늘 저 안에 있는 새끼들 다 씹어먹는다.”
이터의 모든 일원은 당연히 승리를 직감했다.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으니까.
기지를 점령하고 나면 뒤에 남은 가면 무리 새끼도 죽을 것이다. 그들은 크리쳐가 머무는 땅에서 살아남을 재주가 없을 테니까.
* * *
기지 내부, 하운드는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불리한데?’
그것도 엄청 불리하다.
작정하고 치고 나가면 싸울 만은 하겠는데.
그럼 기지 내부에 있는 인원은 전부 죽을 것이다.
추방자 무리 몇이 난리를 피운다고 생각했는데.
‘이터의 주요 간부 셋이 다 왔잖아.’
붉은 상아, 에너지 뱀파이어, 크리쳐 사육사.
기둥 중 하나는 일전에 노 페이스 팀이 잡았다.
미래를 걷는 예언가다.
‘안 좋은데.’
하물며 기지 내부에는 비전투원도 꽤 있었다.
그중 일부는 이미 정신이 나갔다. 눈앞에서 친구가 동료가 산 채로 잡아먹히는 걸 봤으니.
“돌려보내.”
그들은 일단 게이트를 통해 돌려보낸 뒤다.
노 페이스 팀 팀장이란 친구 덕분에 승기를 잡아 기지를 복구했는데.
이후 추방자 군대가 몰려온 것이다.
어림잡아도 수백이다.
작정하고 치고 들어온 거다.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만 있다면 본대에서 지원이 올 것이다.
다만, 추방자 무리가 그걸 기다려 줄까?
최소 반나절은 필요한데.
정식 헌터 팀이 아니더라도 컨퀘스트 미션을 뛰는 팀이라도 오려면 필요한 시간이다.
기지 내부에 있는 인원은 헌터 정예 팀 50명이다.
이것도 무리해서 데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남겠습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거기에 본래 기지를 지키던 전투원 몇.
‘안 좋아, 안 좋아.’
하운드는 변신족이지만, 그저 본능에 취해 날뛰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자리까지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상황을 직관할 줄 알았다.
추방자 무리는 치고 빠지면 된다.
기지를 점령하면 좋고 그게 아니라면 데리고 있는 크리쳐만 몽땅 밀어붙여도 될 것이다.
다행인 점은 저런 대량의 크리쳐를 움직이려면 사육사 본인이 있어야 한다는 건데.
‘그놈은 안 보이고.’
대신 놈의 부하인지, 제자인지 하는 놈들이 간신히 크리쳐를 컨트롤하는 게 보였다.
추방자 무리를 두고 헌터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하운드는 이제 그게 진실임을 알았다.
‘능력 계승.’
추방자 무리 중 특이 능력을 계승하게 하는 이가 있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저 많은 숫자의 크리쳐 사육사의 짝퉁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안 좋아. 안 좋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하에게 목숨 걸고 기지 입구를 사수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하 전부를 살릴 때까지 자신은 남아 있을 수 있다.
‘복수는 끝나고.’
참으로 오랫동안 살았다.
이후 모든 추방자 무리를 죽여 없애는 걸 꿈으로 삼았으나.
‘여기서 끝나도 괜찮은 인생이지.’
그녀는 결심했고 멈추기로 했다.
“전원 퇴각 준비.”
시간이 없었다. 기지를 포기하고 빠지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럼 다시 라바 레인의 땅을 되찾긴 어렵겠지.
입구 안쪽에서 기관포 따위만 깔아 놔도 되찾기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둘 순 없으니.
지원이 올 때까지 여기에 남을 작정이었다.
최대한 괴롭히고 죽이고 또 죽여서.
다시 인류가 이 땅을 찾도록.
추방자 무리를 두고 돌아가는 것, 하운드는 그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대장 혼자 두고는 안 갑니다.”
“무슨 소립니까.”
“헛소리하지 마십쇼.”
“저랑 결혼하기로 한 거 잊으신 겁니까?”
부하 몇 놈이 말한다.
“지랄은, 누가 결혼을 해? 불알을 다 뜯어 줄까?”
“거, 농담에 끔찍한 소리 좀 덧붙이지 마시고요.”
이 새끼들.
돌아갈 생각이 없다. 전부 죽음을 각오했다. 그래, 이런 애들이었지.
헌터는 목숨을 걸고 추방자와 싸운다.
다들 사정이 있는 이들이다.
이제는 조금은 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직은 변하지 않았기에.
지금을, 오늘을 살아가야 할 뿐이다.
“가자.”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틴다. 그게 그들의 할 일이었다.
“크리쳐 옵니다.”
적이 돌진한다. 용암 멧돼지, 거인, 토끼, 뱀 따위가 바닥을 가르며 뛴다. 참혹한 광경이다.
추방자 수백 명과 크리쳐 수백 마리.
압도적인 전력이니.
쏴아아아.
때마침 용암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비가 사방을 감싸고, 수증기가 되어 안개처럼 퍼져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나가자.”
하운드의 말에 모두의 발이 떨어지고.
“저 뒤쪽, 뭔가 움직입니다.”
불멸자 중 하나가 스코프에 눈을 대고 있다가 그녀의 발을 멈춰 세웠다.
저격수 겸 적지 정탐 중인 부하다.
“뭐가 움직여?”
“네, 일단의 무리 같은데, 가면, 아, 노 페이스 팀 같습니다.”
‘안 죽었어?’
살았다고 해도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 건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막 들이치려는 크리쳐 무리의 뒤편에서, 습격이 시작됐다.
* * *
딱 두 시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됐고.
이후 난 타이밍을 쟀다.
아무리 봐도 추방자 무리가 유리하다. 아군의 숫자를 알기에, 저 숫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건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동시에 드는 생각, 아까의 전투를 통해 배운 것을 되새겼다.
근접전은 안 되겠어.
애초에 변신족을 상대로 대련할 때도 수없이 느꼈던 거다.
에너지 총량이 내가 압도적으로 높은 데도, 장옥에게 밀린 적이 몇 번 있다.
근접은 변신족의 영역이다.
그곳에서 적과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결론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고민은 짧고 실행은 빨랐다.
“저격 라이플 들고 있는 팀원 몇이야?”
“둘.”
용암 비의 땅은 애초에 들이치는 적의 핵을 쏴 죽이는 일이다. 그걸 원거리에서 하는 건 어렵다.
난 전투의 형태를 단거리, 중거리, 원거리라는 세 가지로 나눴다.
단거리, 근접전이 안 되면.
중거리로 가자는 거다.
월광도 그래야 힘을 쓴다. 저격수도 그 정도면 할 만할 거다.
“라바 크리쳐 뚫을 탄은?”
“있다.”
일반탄이 안 되니 특수탄을 쓴다. 빙결탄이다. 맞으면 몸 일부를 얼어붙게 만드는.
먹고 쉬었다. 그사이 코드명 박스인 동기는 널브러졌다.
“죽을 것 같다.”
한계까지 제 능력으로 사람을 보호한 거다.
난 그 친구의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
“수고했다. 박스.”
여자애는 얼굴을 붉혔다.
“함부로 머리에 손대지 마, 오해한다.”
그런 오해 이제는 익숙하긴 하지만.
“반해도 돼. 오늘은 그래도 돼.”
이상하게도 오늘은 미랑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롯이 이들을 구하고 돌아갈 생각만 들 뿐.
미안, 미랑아.
근데 오늘은 얘들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결혼이고 미랑이고 이들이 죽는다면 내 마음 일부가 죽을 것 같기에.
난 한계까지 몸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눈깔!”
당연히 코드명이다. 불멸자 동기의 것이었다.
“지금, 지금 추방자 무리가 공격을 시작했다. 적과 아군의 조우 3분 전.”
그가 크리쳐의 움직임을 살피고 말했고.
난 결계 밖으로 나와 적의 뒤를 향해 내달렸다.
“작전명 뒤치기다!”
상대가 가장 방심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앞을 보고 내달릴 때 아닌가.
뒤치기는 과거부터 최고의 전술 중 하나였으니.
그 와중에 난 뇌안을 발동.
그냥 뒤만 치는 거로는 안 되기에.
‘남은 에너지는 간당간당하고.’
이러다 쓰러질지도 모른다.
효율적인 싸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내 바람을 듣기라도 하는 걸까.
뇌안으로 보는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레벨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
절로 감탄이 나왔다.
뇌안이 적을 꿰뚫는 눈이 되었으니.
난 크리쳐의 주변에 떠도는 이들이 가진 에너지의 공통점이 보였다.
그들은 전부 노란색이었다.
뇌안이 색을 구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