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8. 일단 먹고
“진짜 잡아 왔네?”
언라이벌 식스가 양지를 밝히는 최강의 특수종이라면.
딱히 이름을 밝히지 않고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바로 십 인의 헌터다.
그중 하나가 황당함을 담아 말했다.
올드 포스 소속, 이전에는 스파이 임무를 주로 맡은 여자다.
사우전드 페이스의 뒤를 이을 거라는 말이 많았지만, 정작 그녀 본인은 헌터 일이 더 적성에 맞았다.
어릴 때 테러리스트 무리에게 부모를 잃은 경험도 있으니, 드라마도 충분했고.
그렇다고 그녀가 복수에 미쳐 날뛰는 살인귀가 된 건 아니었다.
이미 복수가 끝나기도 했고.
벌써 3년이나 지난 일이다. 부모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추방자 무리를 쫓아 물어뜯어 죽인 게.
그때 일로 붙은 별명이 하운드, 먹이를 놓치지 않는 사냥개다.
제 붉은 머리 곱슬머리를 손으로 돌돌 감으며 하운드가 감옥에 갇힌 이터의 예지자를 바라봤다.
“누가 잡았다고?”
“노 페이스 팀입니다.”
부관의 말에 하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보통내기가 아니네.’
일전까지는 좀 치는 신입이 모인 팀.
딱 그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터의 예지자를 잡아 버렸으니, 이름이 널리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 본인부터 당장 가면 뒤의 얼굴이 궁금했으니.
그녀만의 일이 아니었다.
“협회의 그 남기주였나? 그 양반 회사 소속이라며? 아예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건 안 되나? 예지자를 잡을 정도면 천성이 이쪽 같은데.”
일전에는 마이스터의 연구 기지도 하나 부쉈다고 들었다.
“되게 열심히 싸우잖아?”
전부 우연이지만, 그녀로서는 알 리가 없다.
그저 집요한 복수자라고 생각했을 뿐.
그녀 자신이 이미 해 본 일 아닌가.
‘물불 안 가리고 추방자를 쫓나 본데.’
아니다. 그냥 가는 길에 자꾸 발에 걸릴 뿐이다.
“접촉해 봤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남기주 이 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주인이 되었는지, 절대로 아무 정보도 넘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쭈? 강단 좋네. 정부의 눈 밖에 나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니?”
“그게.”
“왜?”
“NS가 뒤를 봐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전에 협회와 트러블이 있었을 때, 그쪽에서 코드명 팬더를 보냈습니다.”
“이동훈을?”
그거 보통이 아닌데? 그렇다고 그냥 놔둬? 그건 좀 아깝다.
저리 복수에 미쳐 날뛰다가 망가질까 아쉽기도 하고.
가면 안에 있는 낯이 궁금하기도 했다.
“세최특이랑 미팅 한번 잡아 보자.”
“네.”
이쪽 한번 떠보고 그게 안 되면 다른 볼일도 있으니.
하운드의 눈이 창밖으로 향했다.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내리기 시작했다.
곧 크리스마스다.
여기저기서 캐럴 따위가 한껏 울려 퍼지지만, 그녀에게 어울리는 노래는 아니었다.
그녀는 복수자였고 그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살았기에 남은 게 없었다.
친구도, 가족도, 사람도.
그녀에게 남은 건 일뿐.
“일이나 하자.”
그러기에 노 페이스 팀의 복수자가 안타까웠다. 자신처럼 살길 바라지 않았다.
복수가 인생의 전부가 되어선 안 됐다.
‘그래도 해 보면 속은 시원하지.’
참으면 병이 되니, 복수는 하되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것.
그게 정답이리라.
물론 전부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 * *
“엣취!”
“감기야?”
“아니다.”
재채기 한 번에 감기는 무슨.
옆에서 로니가 손수건을 꺼냈다.
“넌 손수건도 들고 다니냐?”
“왕족의 품위 중 하나지.”
얘가 공주였다는 걸 자꾸 까먹는다.
나와 로니, 구스타프는 유신의 방이자, 내 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수업이 겹쳐 같이 듣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불멸자 재생의 이해’라는 수업이었다.
어딜 뜯어서 부수면 재생이 어려운지.
그걸 방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내용이었다.
근데 누가 내 욕을 하는지, 아니면 내 얘기를 신나게 떠들고 있는지, 재채기가 나오고 귀도 간지러웠다.
로니에게 손수건을 받고 코를 닦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빨아서 돌려줘야겠다. 코 묻은 손수건을 그냥 돌려줄 순 없으니.
“누가 내 욕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거 미신이다.”
구스타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쪽 팔에 석고를 바르고 목에 끈을 걸어 고정한 채였다.
“급속 치료 안 했냐?”
“급속 치료 자주 하면 늙어.”
미신은 그게 미신이지.
재생력을 늘리면 신체 노화가 빨리 이뤄진다는 말이 도는데, 그거 입증된 거 하나도 없다.
물론 급속 재생보다 천천히 치유하는 게 더 안전하고 뼈가 잘 붙기는 하니.
급한 일 없으면 급속 재생 시술은 안 받는 게 좋긴 했다.
“아마추어 자식, 크리쳐를 상대하다가 팔이 부러져?”
나는 구스타프를 나무랐다. 그럴 만했다. 평소 훈련을 게을리해서 그런 것 아닌가.
이럴 때는 자극을 줘야 하는 법이다.
“레드 급이 튀어나왔다.”
“노랑이든 빨강이든, 오렌지든 말이야. 약해 빠져서. 상대가 강해서 졌다? 그래서 다쳤다? 다 핑계 아닙니까? 핑계. 본인이 약한 걸 남 탓으로 돌리는 게 맞습니까?”
군 조교에 빙의해서 입을 터니.
“군 복무 경험도 없으면서, 말투가 참.”
누군가 앞에서 말을 걸었다. 로니는 이미 기척을 느꼈는지 가볍게 손 인사를 건넸다.
손 인사를 받은 상대가 주춤하더니 슬쩍 목을 까딱해서 인사하고 날 본다.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의 특수종 쟝이다. 불멸자로서 예민함은 떨어지지만, 군인 출신으로 육체 활용도가 높은 친구다.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재원이다.
특히나 리더 자리에 퍽 잘 어울리기도 하고.
5인 구성 팀까지야 어느 정도 특수종 능력에 따라 팀을 굴릴 줄만 알면 리더 자리를 줘도 되지만, 그보다 숫자가 늘면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했다.
그런 면에서 쟝은 내가 아끼는 인재였다. 얘는 리더의 자질이 있으니까.
“이번에 같이 갔었나?”
“구스타프가 아니었다면 여럿 죽었을 거다. 레드를 혼자 10분 넘게 붙들었어.”
“죽인 건 다른 팀이라며?”
끄덕.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힘들게 대련도 해 주고, 먹이고, 입혀 놨더니 다른 팀한테 밀려?
그 와중에 팔이 부러져?
“이런 빈약한 놈!”
“염병.”
구스타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난 잔소리를 멈출 생각이 없다.
“적당히 해라. 너 소식 들었냐?”
그런 날 쟝이 말리며 물었다. 무슨 소식?
눈으로 되묻자.
“헌터라고 알아?”
추방자 무리는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특수종 세계에 깊게 몸을 담은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안다.
일반인만 모를 뿐이지.
그런 추방자 무리를 쫓는 게 헌터라는 이들이었다.
특수종 중에서도 다른 특수종을 조지는 데 특화된 이들.
“알긴 아는데.”
“그중 몇 명이 팀원을 뽑으러 온대.”
본래라면 헌터가 1학년을 눈여겨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다르지 않나.
벌써 2학년은 너끈히 상대하고.
3학년과 4학년 중 실전 임무에 나서는 이들과도 엇비슷한 수준이 되었으니.
더구나 그중에서는 벌써 3, 4학년을 뛰어넘은 인재도 몇 나왔다.
1학년을 이끄는 나와.
구스타프, 로니, 장옥이 등이다.
“사람 뺏길지도 몰라.”
쟝은 역시나 보는 눈과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내 정체를 짐작한 뒤 확신하는 몇 안 되는 동기이기도 했다.
그가 한 말.
헌터가 모여서 우리 생도를 빼 간다는 말이다.
그건 안 되지.
“구스야, 레드는 좀 너무했지? 고생했다. 운이 나빴네.”
구박을 멈췄다.
“난 헌터가 되고 말 테다.”
구스타프가 말하고 제 귀를 막고 뛰어갔다.
허, 저 친구 벌써 삐졌구나.
“바보.”
옆에서 로니가 웃으며 말했다.
“넌 안 갈 거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말하자, 로니가 ‘봐서’라고 답했다.
아니, 그런 애매한 대답은 좀 아니지 않나?
“넌 참 모를 놈이다.”
쟝이 그런 날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훌쩍 걸어갔다.
혹시나 해서 난 인사 대신 말했다.
“쟝, 안 갈 거지?”
“……봐서.”
아니, 쟝 너마저?
어쨌든 방으로 들어가니, 유신이 저주받은 것 같은 까만 액체를 끓이고 있었다.
방에 짜고 단내가 진동했다.
“뭐냐?”
“간장 달걀밥 먹을래?“
"뭐?”
“간장 만들고 있다. 김유신 표 만능 간장.”
그 일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난다. 머리 위로 흰 두건을 쓰고 있는데 눈빛이 매서웠다.
땀이 그리 나오자, 옆에 있던 여자 동기가 하얀 면포로 이마를 콕콕 눌러서 땀을 닦아 줬다.
“고마워.”
“제 기쁨입니다. 유신 상.”
유신의 여자 친구였다. 국적은 일본, 변신족이다.
고양이로 변신하는데, 근력은 변신족치고는 떨어지지만, 순발력이 탁월했다.
같은 변신족 중에서도 몸이 상대적으로 가볍고 허벅지 근육이 발달해, 제대로 뛰기 시작하면 그 모습이 빛줄기만 남기며 사라진다고 하여 붙은 별명이 광묘다.
로니가 상대할 때는 불멸자 특유의 감각으로 행동을 예측해 잡았고.
내가 대련했을 때는 전신을 염동 방패로 감싼 뒤, 날 때릴 때 그쪽으로 염동력의 벽을 만들어 밀어 버렸다.
구스타프는 제 특기인 천장 내려 앉히기를 썼고.
뇌안으로 보면 레벨은 고작 4.
하지만, 위협적이다.
장옥이보다 더 극단적으로 제 능력을 순발력에 전부 갈아 넣은 타입이었다.
사관 학교 생도 중 가장 키우기 좋은 특수종이란 생각도 든다.
배우는 게 빠르고 익히면 곧잘 쓰니까.
“유신은 항상 열심이에요. 전 그게 걱정입니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
“걱정하는 건 제가 좋습니다.”
한국말이 어설픈데 뜻은 전해진다.
그래서 눈꼴이 시리다.
우리 미랑이는 결혼해도 저렇게는 안 될 것 같은데.
“부러워?”
옆에서 로니가 물었다.
“아니.”
얘는 자꾸 불멸자의 예민함을 내 속을 읽는 데 쓰는 것 같아.
“이 간장, 먹어 보면 다를 거다.”
유신의 눈은 여전히 빛났다. 여자 친구와 둘이서 주변 염장을 지진 것과 별개로 맛은 기대가 됐다.
곧 기름을 둘러 달걀을 튀기듯이 프라이를 만들고.
방금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그릇에 담았다.
하얀 김이 솔솔 올라오는 밥이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 밥알이 전부 삐죽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위로 달걀을 얹고.
참기름을 주욱 하고 한 바퀴 두르더니, 제가 만든 뜨끈한 간장을 국자로 퍼서 옮겨 위에 튕기듯 부었다.
모든 특수종이 대식가는 아니지만, 확실히 불멸자와 변신족은 많이 먹는다.
그에 반해 나는 일반인치고는 많이 먹는 편에 속하고.
과도한 활동량 때문도 있지만 사이오닉 에너지를 과하게 쓴 뒤에는 더 먹는 편이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군침이 싹 돌아서 양껏 들어갈 듯했다.
“줘.”
“기다려.”
대련하던 이들도 몇 모여서 다들 침 흘리는 강아지처럼 기다렸다.
유신은 넓적한 그릇에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순서대로 나눠 줬다.
난 당연히 일 번으로 받았다. 젓가락으로 몇 번 휘저어서 비비니 달걀노른자가 툭 터지면서 간장과 섞였다.
그 안에서 고소한 참기름 향이 코를 쑤시다 못해 뇌를 절였다.
“밥 안에 버터 들었다. 잘 비벼.”
기름에 버터까지 느끼할 것 같지만, 이 모든 걸 간장의 맛이 깔끔하게 잡아챈다.
비벼서 입에 넣고 씹는 순간이다.
고슬고슬한 밥알이 입 안에서 터지며 탱탱함을 자랑하다가 부서지고.
그 안에서 두 배로 퍼진 고소함이 자극적인 간장과 만나 환상의 하모니를 이룬다.
죽여 준다. 죽여 주는 맛이었다.
“유신, 넌 나의 우상이야.”극
도로 감동받은 불멸자 하나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말했다.
불멸자 중에는 특별히 예민한 미각을 가진 이들이 있고.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은 마약 그 이상이었으니.
“아, 갈 것 같아.”
실제로 저런 말을 지껄이며 처먹는 놈도 있는 판이었다.
내가 먹어도 이리 감동적인데, 불멸자들은 어떻겠나.
“한국 음식은 전부 맛있다!”
러시아 변신족 친구도 만족을 표한다.
나도 한껏 퍼서 두 번째 숟갈을 입에 넣는데, 레베카가 손목시계에서 나와 속삭였다.
“온신.”
“응?”
“지금 당장 나가 봐야겠는데, 온신을 찾아온 사람이 있어요.”
지금? 당장?
나 이제 두 숟갈 먹었는데?
유신 이 잔인한 친구는 밥에 어울린다고 낙지 젓갈까지 꺼냈다.
이건 또 언제 공수했데.
여기서 직접 만든 건 아닐 텐데.
“혹시 내 부모님이야? 아니면 총장님?”
“둘 다 아니에요.”
누구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내 뜻을 전했다.
“이십 분만 기다리시라고 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했다.
밥 먹을 시간이니, 일단 먹어야 할 거 아닌가.
“그대로 전해요?”
“응.”
아, 몰라. 일단 먹고 볼 셈이었다.
그만한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