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9. 불현듯 찾아왔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알음알음 정하는 게 있다.
불문율과 같은 거 말이다.
사관학교는 가끔 올해의 생도, 선두 생도라는 이름을 붙여 한 명의 생도를 뽑는다. 물론 내부적인 이야기다.
외부에 발표하는 순위 따위가 아니다.
매해 뽑는 건 아니었다. 당연했다.
올해의 생도란 무엇인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모든 생도의 머리 위에 서는 위치여야 하고.
인성에 큰 문제가 없어야 했다.
무엇보다 같은 학년의 생도 모두가 그 하나만을 바라보게 만들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동기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쳐야 했다.
사실상 인성보다 영향력을 가장 크게 보긴 했다.
두 해 전에는 이후가.
작년에는 정미랑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후 때는 그의 재능을 보고 낙오한 생도가 그 해 어느 때보다 많았고.
정미랑 때는 치열하게 훈련하는 걸 본 생도의 훈련 강도가 높아졌다.
몇 해 전에는 노는 걸 퍽 좋아하는 생도 하나가 올해의 생도가 된 적도 있었다.
‘그때는 놀자판이었지.’
덕분에 그해 생도 수준이 대폭락 흉년이 됐다. 하지만 반대로 소수의 뛰어난 특수종이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니 꼭 나쁘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놀되 그냥 놀기만 한 게 아니었으니.
하물며 그때 두각을 드러낸 생도 하나가 현재 특수종 세대를 이끄는 사람 중 하나가 되지 않았나.
그 유명한 여섯의 괴물 중 하나가 되었으니.
세최특 이후, 현재 특수종 세계에는 새로운 세대가 이끈다고 해도 무방했다.
선두에 선 여섯을 두고 사람들은 독보적 육인, 언라이벌 식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만큼 탁월한 능력과 재능의 소유자란 말이었다.
현시대를 이끄는 특수종이라 해도 좋았다.
세최특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쪽은 아예 규격 외의 존재니.
그럼 이들을 쫓는 후발 주자는 없을까?
그럴 리가.
항상 있다. 있어 왔다. 그러니 지금도 있다.
열한 명의 특수종이 그 뒤를 따르며 후발 주자로 달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언라이벌 식스와 후발 주자인 열한 명의 특수종 중 반수 이상이 올해의 생도 출신이었다.
끼익.
의자를 등에 기대자, 기분 좋은 소음이 들렸다. 중봉은 그대로 무게를 뒤쪽에 싣고 누웠다.
부드럽게 의자가 젖혀지며 그의 몸을 받쳤다.
의자에 반쯤 누운 채로 중봉은 생각했다.
‘올해는 어떠려나?’
세최특의 아들은 과연 세최특의 아들이었다.
초능을 발현했고.
각성한 지 1년 만에 모든 특수종의 재능을 압도했다.
재능이 넘쳐흐르는 초능 특수종.
그게 온신의 현 위치였다.
그것만 가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 음흉한 부부가 재능이 없다고 가만 놔둘 리가 없지.’
유광익도 강혜민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아들을 사관학교에 보낼 때는 믿는 바가 있을 터였다.
어쨌든 온신의 배경과 별개로 그는 현재 모든 생도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었다. 영향력 측면에서 보자면 역대 최고였다.
앞으로 온신은 어떻게 될까.
중봉은 그 생각과 함께 흐뭇하게 웃었다. 참으로 흐뭇했다. 기껍고 기특했다.
‘어떻게 광익이 놈한테서 이런 아들이.’
재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얘는 인성이 됐다. 온신은 어릴 때부터 중봉을 잘 따랐다.
“삼촌은 아빠랑 다르게 잘 생겼네요.”
“이거 드세요. 몰래 먹어요!”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
어릴 때의 온신이 떠올랐다. 그 통통한 볼살과 똘망똘망한 눈.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 * *
쭈우욱!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변신족을 봐 왔다고 자부한다.
그것도 재능이 탁월한 변신족을.왜 아니겠나.
내가 있는 곳은 특수종 사관학교.
전 세계에 내놓으라 하는 최고의 재능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 나도 처음 보는 변신 형태였다.
열여덟 순수 영혼을 지닌 변신족 동기는 목이 길었다.
긴 목을 중심으로 몸을 우뚝 세웠다.
변신족의 가장 탁월한 전투 형태인 반인반수형인데.
음, 목이 너무 긴데?
저거 안 불편한가?
얼추 봐도 60cm는 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얇고 낭창거리는 느낌은 아니다. 두껍다. 통나무를 목에 심어 둔 것 같았다.
눈앞의 변신족의 변신체는 기린이었다.
“변신하기 싫었어요. 전 왜 기린일까요?”
상대가 말한다. 몹시 우울한 말투였다.
“그게 문제가 돼?”
“사자나 호랑이, 늑대, 하다못해 개가 되고 싶었어요. 기린은, 기린은 너무 이상해요.”
변신 형태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아버지가 호랑이라고 해서 자식이 꼭 호랑이가 되진 않는다.
이쪽 세계에는 호부견자(虎父犬子)가 가능하다.
호랑이 자식 밑에 개새끼, 아니, 강아지가 나오는 게 가능했다.
그러니 기린 변신족이 있을 순 있다.
“너 이름이 뭐냐?”
내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묻자, 기린은 그 긴 목을 꿀렁이더니 답했다.
어째 크고 맑은 눈에 습기가 어린 것처럼 보였다.
“구장옥이요.”
“이름이 장옥이야?”
누가 아들내미 이름을 이렇게 다이내믹하게 지었단 말인가.
전혀 요새 이름 같지가 않다.
“할아버지가 지어 주셨어요.”
“그래, 장옥아. 기린이 문제가 되냐?”
“안 멋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특수종은 실력으로 이야기해야지?”
반쯤은 위로로 한 말에 장옥이 눈을 반짝였다.
“실력이요?”
“그래, 실력.”
내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장옥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기린의 긴 목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서 여기에 왔어요. 좋아요. 한 수 부탁드립니다.”
특수종, 그것도 재능이 출중한 이들이 모인 사관학교.
그중에도 탁월한 이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 눈앞의 존재가 그랬다.
뇌안이 번뜩이며 변신족의 레벨을 측정했다.
뇌전이 퍼지는 정도를 레벨로 치환한다. 이제까지 만난 생도는 대부분 에너지가 방사형으로 퍼졌는데.
이 친구는 뭐랄까.
똘똘 뭉쳤다. 몸을 중심으로 단단히 뭉친 형태다.
작지만 알찬 차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차돌의 색은 아주아주 진했다.
새파란 돌멩이, 사파이어 같다.
“……으음?”
로니가 고개를 갸웃한다. 불멸자의 직감이 발동한 걸까.
그렇다면 정확한 육감이라 하겠다.
펑!
땅을 박찬 기린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간 일반인의 동체 시력으로 따라올 수 없는 속도.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인지 바깥의 속도로 달려들었다.
엄청 빨랐다. 실로 번개 같은 속도다.
난 상대가 보이지 않는 순간, 곧바로 신속을 발동 몸을 내뺐다.
오른발로 땅을 밀며 옆으로 쭉 몸을 날렸다.
이 새끼, 변신하니까 무섭네.
측정 레벨은 60.
현재 내 염동력 레벨이 60이 넘는다.
하지만 염동력과 변신족의 육체 능력을 동일 선상으로 볼 수는 없다.
변신족의 육체 능력을 저렇게 응축해서 쓰는 종류의 타입도 처음이었다.
뭐랄까 장옥이는 가진 힘을 오롯이 안으로 응축하고 응축해서 순간적으로만 발동하는 타입이었다.
펑! 펑! 펑!
장옥이 연신 땅을 차니, 대련장 바닥이 파였다. 무식할 정도로 힘이 좋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넋 놓고 있을 순 없다. 나도 계속 몸을 움직였다.
멈추면 골로 간다. 한순간만 놓쳐도 그대로 응급 캡슐행이었다.
신속을 풀로 발동하고 염동력 방패를 사방으로 밀어낸다. 염동력에 걸리는 걸 느끼며 위치를 파악, 다시 피했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난다고 생각했을까?
장옥이 멈췄다. 멈춘 채로 호흡을 길게 후하고 내뿜더니, 그 긴 목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쭉 뻗었다.
무슨?
이 새끼 그냥 뛰는 게 아니라, 그 무식한 목을 앞뒤로 흔들어 탄력을 배가한다.
퉁.이번에는 땅을 차는 소리가 작았다. 그리고 아예 모습이 사라졌다.
아까는 잔상이라도 남았는데. 그래도 괜찮다.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사라지는 건 아니다.
목적지는 명확하다.
꽝!
폭음이 터졌다. 몸이 공중에 뜨고 등에 충격이 느껴지기까지 정말 찰나였다.
“끄으, 아프다. 자식아.”
“이걸 견뎌요?”
난 대련장 벽에 처박혔고 장옥은 주먹을 내민 자세로 멈춰 있었다.
“……너 죽은 줄 알았다.”
대련을 지켜보던 구스타프가 중얼거렸다.
“죽기는.”
쩡.
뇌안을 뜨고 있는 덕분에 내 눈앞에 만들어진 염력 중첩 방패가 깨지는 게 보였다.
나름 비장의 한 수였는데, 주먹 한 방에 깨졌다.
염동력 방패를 열두 겹을 겹쳐 둔 건데.
난 염동력 방패를 순간적으로 발동해 주먹을 막았다.
그게 퍽 인상적이었는지, 장옥이 웃었다. 기린 낯짝이 웃는데, 본래는 안 그런 게 분명한데도 되게 야비해 보였다. 생긴 게 밉상이다.
“다음, 가요.”
장옥이 말한다. 다음은 무슨.
나는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내달리려던 장옥의 오른쪽 발이 위로 솟았다.
“앗!”
염력으로 만든 밧줄이다. 위로 발이 끌어 올려지자, 놀란 장옥이 힘을 줬다.
꿍 하고 발로 바닥을 찍는다.
난 그 타이밍에 염동력을 최대한으로 뿜어내 묵직한 충격파를 만들었다.
꽝!
장옥은 양팔을 십자로 교차해 염동 충격파를 막았다.
흔히 말하길 변신족은 초능의 상극이라 한다. 그럴 만했다.
어지간한 건 몸으로 때워 버리면 출력 자체로는 변신족의 괴력을 잡아 낼 수 없는 거다.
그것도 상대가 변신족 기예 ‘괴력’을 지녔다면 더더욱 힘들다.
더럽게 힘드네.
난 염동력을 뿜어내 장옥의 정강이를 묶고 손목을 잡아채고, 나중에는 위에서 밑으로 묵직한 천장도 내려앉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환 공격에 장옥은 발을 뗄 틈을 찾지 못했다.
하나하나가 치명상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발을 묶긴 충분하다.
그 상태에서 뾰족한 염동력을 연성한다.
동시에 수십 개의 염동력을 구현하느라 뇌가 지끈거렸다.
뇌안, 신속, 염동까지 동시 발동한 덕분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괜히 그동안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게 아니었다.
제자리에 묶인 장옥은 성질이 나는지, 괴성을 질렀다.
“꾸어어어어!”
거, 기합 한번 거세게 넣는구나.
땀이 흐르며 장옥의 긴 속눈썹에 맺혔다가 사방으로 튀었다.
난 그걸 보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염동력으로 감옥을 만들면 변신족을 잡아 둘 수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묶고 조이고 때리면 이리 묶어 둘 수 있었다.
유온신식 염동 감옥이다.
“잘 버티네.”
수십 가지의 염동을 계속 구현해야 하는 단점이 있어, 누가 따라 하긴 힘들겠지만.
나만 잘 쓰면 되는 거니, 문제는 없다.
“꾸엉.”
장옥은 반쯤 이성을 잃고 덤비려고 했고.
난 그 앞에서 일순간 신속을 발동.
걷는 속도의 수십 배는 빨리 움직이며 무형의 송곳을 찔렀다.
신속 덕분에 속도만은 변신족을 따라잡을 수 있으니.
푹 하고 송곳이 변신족의 허벅지 한쪽을 찔렀다. 푹하고 움푹 파인 상처가 남는다.
“후, 체크 메이트.”
새끼 사람 되게 고생시켜.
피를 질질 흘리던 장옥은 패배를 시인했다.
“제가 졌어요.”
염동력을 다 풀어내자, 코피가 흘렀다.
상성도 그렇고 싸우는 방식도 그렇고 얘가 구스타프보다 낫다. 장옥은 흔치 않은 재능의 소유자였다.
“여기.”
로니가 손수건을 줘서 코피를 닦고는 난 내가 가진 염동력의 한계를 떠올렸다.
고작 생도 하나 막자고 거의 전력을 쏟아 내야 하는 능력이라면 너무 활용도가 떨어지지 않나.
물론 상대가 크리쳐나, 마법사라면 상황은 달랐겠지만.
변신족을 상대로 이리 밀려서야.
이후를 이긴다는 건 꿈도 못 꿀 일 아닌가.
팀을 이끌고 이계에 넘어가다 이후를 만나면 단숨에 제압한 다음에 미랑이한테 할 말도 정해 둔 판이다.
“내가 네 남자다. 이 약해 빠진 이후가 아니라.”
크, 죽이네.
상상만 해도 너무 좋잖아.
그런데 능력이 안 되어서 그러는 건 말이 안 되는데.
한계를 느낀 직후, 생각했다.
염동력은 무형, 보이지 않는 힘이기에 의미가 있다.
하지만 변신족을 상대로는 무형에 의미를 두기 어렵다.
어지간한 건 몸으로 때워 버리면 답이 없으니.
장옥도 지금에야 이렇게 당했지만,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염동력 감옥 따위에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자잘한 공격 따위 몸으로 버티고 돌진했으면 되는 거였다.
그럼 인지의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염동력자의 인지 밖, 더는 초능으로 묶어 둘 수 없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하지는 않겠지만.
무형이 아니라 위력에 집중할 방법도 있지 않을까?
장옥은 사파이어다.
뇌안으로 본 구스타프는 형태가 좀 달랐다.
방전형, 사방으로 번개가 뻗는다. 로니는 어떤가?
로니는 작은 새 같은 느낌이다. 그녀는 날갯짓하듯 능력을 활용한다.
이후는 어땠지?
방전하면서도 색이 너무도 진했다.
아주 커다란 돌덩이다.
그럼 난?
고민을 거듭하던 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위력, 오롯이 위력에만 집중한다면.
손에 염동력을 모은다. 뇌안으로 모인 염동력의 밀도를 확인한다.
이미 수차례 해 본 짓이었다.
위력을 높이기 위한 작업.
그런데 꼭 무형에 집착해야 할까?
반대로 위력에 집착하면 어떨까?
언제나 그러하듯이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왔다.